Chapter 13.
정원에선 여전히 매캐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매운 냄새는 0.5초만 들이마셔도 내 몸에 온갖 안 좋은 유독가스를 들이붓는 느낌을 주었다. 덕분에 회사 사람들은 시설팀에 아주 많은 민원을 제기했고, 죄 없는 시설팀은 정원 복구하랴 민원 전화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4구역 센터의 수많은 부서 중 가장 바쁘고 힘든 팀은 시설팀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풍력계 에스퍼들이 조를 짜서 정원의 공기가 본관 쪽으로 넘어오지 않게 애를 쓰고 있지만, 가만히 있다가도 간간이 코를 찌르는 탄 냄새에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꾸물하더니 기어이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정원에서 넘어오던 불쾌한 냄새가 빗방울과 같이 가라앉았다. 톡톡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했지만, 안 그래도 낮았던 대기 온도가 2도는 더 내려간 것 같았다. 겨울비였다.
에너지 효율, 전기료 절감을 외쳐대며 센터는 실내 온도를 23도로 맞춰놓았다. 다들 미친 거 아니냐고 수군거렸고, 개인 난방 기구를 챙기려고 했지만 센터에서는 화재 발생을 사유로 개인 난방 기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좆같은 회사였다.
여전히 도지윤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근무시간 내내 보이지 않았고, 간간히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윤 주임과 어떻다더라 하는 내용의 이야기만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속에서 턱하고 위액인지 질투인지가 솟아올랐지만, 나는 성인이었고 참아야 했다.
점심을 먹은 후 내년도 업무 보고 자료를 작성하기 위해 책상에 않았지만,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애초에 가이드가 가이딩만 하면 됐지,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내년도에 가이딩 잘할 겁니다.’라는 요지의 글을 장장 3페이지에 걸쳐 쓸 일인가 싶다.
그래도 나는 힘없는 직장인이라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고, 시키면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한숨과 함께 작년도에 1팀에서 뭐라 개소리를 써놨을까, 김 주임에게 받은 파일을 클릭해서 열었다. 수두룩 빽빽하지만 결국 수식어투성인 문서를 바라보자, 벌써부터 다크서클이 내려오는 기분이다.
문서에 [작성자: 이재하 대리]라고 쓰자마자, 가이딩 패드에 알람이 울렸다. 집중력을 깨부수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패드를 바라본 뒤, 나는 이제 온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가이드 실장이었다.
‘이번엔 왜 또 부르고 지랄이야.’ 하는 속마음과는 반대로,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으며 가이드 실장실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가 가이드 실장을 바라보는데, 당황스럽게도 방 안에는 한 명이 더 앉아있었다. 윤 주임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일단 인사를 하고 윤 주임을 바라보자, 윤 주임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울상을 지어 보였다. 차가워진 겨울바람만큼이나 차가운 불안감이 내 속을 쓱 훑고 지나갔다.
“이 대리. 어서 와요. 거기 앉아요.”
실장은 보고 있던 서류를 소리 나게 덮은 후, 나에게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윤 주임의 옆자리에 앉자, 책상에서 일어난 실장이 곧바로 우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윤 주임과 나의 공통점이라고는 둘 다 ‘도지윤의 임시 가이드’라는 것뿐이다. 물론 난 ‘전 도지윤의 임시 가이드’였고 윤 주임은 ‘현 도지윤의 임시 가이드’란 것이 다른 점이었다.
“이 대리. 요즘 바쁘죠?”
“아닙니다.”
“연말은 이래저래 할 일이 많죠. 다 알고 있어요.”
제발 알면 쓸데없는 일 좀 안 시켰으면 좋겠다.
“옆에 윤민지 주임은 알고 있죠? 2팀에 이번에 새로 온.”
“네. 알고 있습니다.”
괜히 불안하게, 실장이 밑밥을 깔고 시작했다.
“알다시피 윤 주임이 이 대리 뒤를 이어서 도지윤 에스퍼 ‘임시 전담 가이드’를 맡고 있어요. A급 가이드인 데다 매칭률도 60퍼센트를 넘어 센터, 아니 중앙에서까지 거는 기대가 큽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아는 내용을 왜 저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의중을 파악할 수 없다.
“윤 주임이 아직 신입 가이드라, 많은 면에서 미숙해요. 특히 가이딩 업무가 많이 미숙해서, 그나마 선임급인 이 대리가 도와줬으면 좋겠네요.”
무슨 개소리야. 가이드가 가이딩에 미숙하면 센터에 있으면 안 되고, 훈련 기관으로 돌아가야지. 뇌를 휘젓는 의문 사항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어, 나는 무표정하게 실장을 바라보았다.
“윤 주임이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인데, 가이딩 실적을 보니 전혀 없더라고요. 허 참. 도지윤 이 새끼도 꼬박꼬박 가이딩 지원실에 간다고 해서 믿었는데.”
실장은 도지윤을 욕하면서도 마치 ‘너 때문이야’라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무슨 죄라고. 여전히 나는 실장을 이해할 수 없어 멀뚱거리며 앉아있어야 했다.
“어쨌든 이 대리가 윤 주임의 가이딩 업무 좀 도와줘요. 특히 도지윤 에스퍼의 가이딩 업무요.”
나는 저 문장을 듣고서야, 실장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실장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호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싫습니다.”
“…네?”
“전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도 아니라서, 도지윤 에스퍼만 신경 쓸 수 없습니다. 거기다가 윤 주임은 가이드 2팀인데 업무를 도와달라 할 거면 김 대리한테 말씀하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팀이 문제라면 윤 주임을 1팀으로 발령 내도록 하죠.”
권력 있어서 참 부럽다.
“그래도 싫습니다. 가이드가 가이딩 업무 못하면 실무에 투입할 게 아니라, 훈련 기관으로 다시 돌려보내야죠.”
내가 단호히 말을 하자, 실장이 날 달래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이 대리. 이 대리가 바쁘고 일전의 일로 언짢아하는 것 알아요. 하지만 에스퍼에게 가이딩이란 게 어떤 의미인지 알잖아요. 이 대리도 도지윤 에스퍼가 ‘가이딩’을 못 받아 걱정되지 않나요?”
“그 걱정은 제가 해야 되는 게 아니라,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인 윤 주임이 해야 할 고민이죠.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실장은 말이 통하지 않자, 대번에 표정을 바꾸었다.
“이 대리. 말귀를 못 알아먹네요. 이게 부탁인 것 같나요?”
“실장님. 제 말을 잘 못 알아들으시네요. 뭐라 하셔도 저랑은 상관없다는 겁니다.”
실장은 잠시 검지를 들어,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려다 조용히 다시 내렸다.
“이 대리. 명령이에요. 윤 주임이 도지윤 에스퍼의 가이딩을 하게 하세요.”
“싫습니다.”
“명령을 거부하시는 건가요?”
“실장님. 무슨 1980년대도 아니고 ‘명령’이라뇨. 애초에 ‘임시 전담 가이드’가 전담 에스퍼 가이딩도 못하는데, 그게 무슨 ‘임시 전담 가이드’라고 이름 붙을 수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임시 전담 가이드’를 도와주라고 또 다른 가이드를 한 명 더 붙이라니요.”
내 말에 실장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저는 그럼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의 지도 가이드’ 정도로 발령 내실 겁니까?”
이러면 안 된다고 뇌 한구석에서 속삭이지만, 고삐 풀린 주둥아리가 제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1구역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참으며 다시 돌아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내 요람이 흐릿해져 간다.
“이 대리. 말이 지나치군요.”
“지나치신 건 실장님입니다. 지금 ‘명령’이라고 직급으로 찍어 누르려고 하신 건 실장님 아니십니까.”
“허. 직급으로 찍어 누르다니!”
“실장님.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실장은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저 업무를, 제 업무 분장에 뭐라고 기입하실 겁니까?”
“…….”
“업무 분장에 넣을 수 없는 업무는 맡기지 마십시오.”
실장에게 할 말 다 해서 시원함과, 그럼에도 회사 내의 내 평판이 엉망이 될 거라는 우울함. 양가적인 감정이 함께 들었다.
“이 대리.”
“네. 말씀하십시오.”
“도지윤 에스퍼는 S급 에스퍼이고.”
“회사의 귀중한 자산이죠. 그 귀중한 자산 ‘도지윤 에스퍼 임시 전담 가이드’님께서 잘 케어하실 겁니다.”
내 말이 끝나자 백 년 묵은 능구렁이를 속에 담은 듯한 실장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혹은 잘 케어 못하면 누가 다칠지는 모르겠네요.”
그리고 나는 최대한 활짝 웃었다.
“그게 ‘임시 전담 가이드’에서 벗어난 저는 아니니까, 뭐 상관은 없죠.”
“원하는 게 뭐예요. 이 대리.”
내가 뚫릴 것 같지 않자, 실장은 이내 방향을 바꾼 듯했다.
“원하는 것 없습니다.”
“인사이동 하고 싶어요?”
“실장님. 잊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1구역에서 내려왔습니다. 다시 1구역으로 돌아갈 마음도 없고요.”
실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소파의 팔걸이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사람이 원하는 게 없을 리가 없죠. 뭘 원하나요. 말해봐요.”
“없습니다.”
“…이 대리. 전 이 대리가 마음에 들어요. 일도 잘하고, 눈치도 빠르고. 혹시 내 밑에서 일해볼 생각 없어요?”
“이미 실장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실장의 은유적인 회유에도 나는 넘어가지 않았다. 높은 곳까지 진급 욕심이 있었다면, 이미 진즉에 다른 줄을 잡았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4구역의 가이드 실장 줄은 썩은 동아줄이었다.
“아무 거라도 말해봐요. 이 대리.”
실장이 계속해서 재촉하자, 나는 실장이 절대 줄 수 없을 것을 이야기했다.
“도지윤 에스퍼 ‘임시 전담 가이드’를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하?”
그러자 실장이 어이없다는 듯이 숨을 터뜨렸다.
“이 대리. 도지윤 에스퍼에게 단단히 정이 들었나 보네요. 처음에 못하겠다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실장님. 처음에 못하겠다고 말씀드릴 때는 맡으라고 난리더니, 이제 와서 쏙 빼가다뇨.”
우리는 서로를 향해 방글방글 웃고 있었지만, 오가는 말과 눈빛 속에 칼날이 왔다 갔다 했다. 윤 주임은 옆에서 숨도 못 쉬고 우리 사이에서 눈동자만 굴렸다. 실장이 픽 비웃음을 지었다.
“이 대리. 상처받는 건 결국 이 대리예요. 도지윤 그 새끼가 뭐라고 꾀어냈는지 몰라도, 버림받는 건 이 대리일 겁니다.”
“상처받아도 제가 받고, 버림받아도 제가 받으니 실장님께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실장님께서는 윤 주임과 함께 어떻게 도지윤 에스퍼가 윤 주임에게 가이딩을 받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시죠.”
오래간만에 주둥이 봉인 해제를 해서 그런가, 입이 잘 돌아가도 너무 잘 돌아갔다. 모르겠다. 1구역 포기하고 도지윤이랑 오손도손 4구역에서 같이 있어도 될 것 같다. 정 안 되면 현장만 떠돌아다녀도 되고.
“이 대리. 도지윤 에스퍼하고 연애하나요?”
“아니요.”
실장의 말에 내가 단호히 대답하자, 어쩐지 실장의 표정이 안심한 듯해 나는 말을 덧붙여야 했다.
“그냥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썸 타고 있다.’라고 하면 아시려나요?”
그러자 실장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이 대리. 도지윤은 S급 에스퍼예요. 그의 각인 대상은 회사에서도 지대한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아. 각인. 그러고 보니 그런 방법도 있었네요.”
나는 생각도 못 한 방법이 있음에 순수하게 감탄했지만, 실장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꿈도 꾸지 마세요.”
“실장님. 회사에서 일개 직원의 연애에 관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도지윤 에스퍼는 일개 직원이 아니에요.”
“일개 직원이 아니면 뭡니까. 회사에 목매여 있는 개도 아니고, 도지윤 에스퍼도 이직할 수도 있고 퇴사할 수도 있는 직원일 뿐입니다.”
“그건 이 대리 생각일 뿐이고요.”
“무슨 연애 상대, 각인 상대까지 회사에서 관여하려 하다니. 지나친 것 같네요. 동물 접붙이는 것도 아니고.”
“이 대리. 말이 심하군요!”
“죄송합니다. 회사가 너무 공과 사를 구별 못하는 것 같아서, 잠시 욱했네요. 실장님 말씀대로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별해야 하는데요.”
나는 일전에 실장이 나에게 ‘공과 사를 구별하라.’며 했던 말을 빈정대며 인용했다. 회사는 늘 직원들에게 ‘공과 사를 구별하라.’라고 말하지만, 그 잣대는 언제나 제멋대로이다. 나에게는 사적인 영역이 왜 도지윤에게는 공적인 영역이 되는 것일까.
“이 대리가, 이렇게 공과 사를 구별 잘하는 직원인 줄 몰랐네요.”
“다 실장님 밑에서 많이 배운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과장하여 실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 실장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져, 금방이라도 폭발할 화산 같았다.
“혹시나 도지윤 에스퍼가 폭주라도 하게 된다면.”
“그럼 4구역 가이딩 업무의 최종 책임자인 실장님께서 매우 곤란한 입장이 되겠네요.”
그리고 나는 윤 주임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임시 전담 가이드’인 윤 주임도 곤란해지고요.”
윤 주임. 미안합니다. 우리의 작전은 망했네요.
내 말에 실장은 아무 말도 없이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한참을 나를 노려보던 실장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일단, 둘 다 나가세요. 윤 주임은 나중에 다시 부르죠.”
실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이드 실장실에서 나왔다.
“대리님….”
문밖을 나서고 복도로 나와 좀 걷자, 윤 주임이 울먹이며 나를 부른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이젠 제법 굵어져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도 내리는 것 같다. 망했다.
“윤 주임.”
윤 주임이 신입이라는 점을 깜빡했다. 당연히 가이딩 패드의 결과는 적절히 조작할 줄 알았는데, 정직하게 기입하고 있었다니.
그래도 불안에 떨고 있는 신입을 안심시키고자, 난 작은 미소를 띠며 윤 주임을 바라보았다. 윤 주임의 눈동자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망했네요.”
한숨을 내쉬며 창문을 바라보자,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지쳐 보이는 내가 시선을 마주했다.
실장에게 개기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그 후폭풍들이 무서운 것이지.
일단 평판이 바닥을 칠 것이고, 평판이 바닥을 치면 1구역에서도 혹은 다른 구역에서도 날 받으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회사 내에서 한번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영원히 문제아 취급받으면서 이 센터 저 센터를 전전할 수도 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자면, 그럼에도 잘리지는 않을 것이니 그냥 일 안 하면서 제멋대로 회사 생활을 해도 될 것이다.
“대리님.”
이리저리 상념에 잡혀있는 날 일깨우는 윤 주임의 부름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윤 주임이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리님. 각인해요.”
“…윤 주임이랑 저랑요?”
내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윤 주임을 보자, 윤 주임이 고개를 필사적으로 젓는다.
“아니요! 대리님하고 도지윤 에스퍼요!”
“…윤 주임 너무한 거 아니에요?”
“대리님이 도지윤 에스퍼하고 각인하면 다 해결되는 문제잖아요!”
와. 윤 주임. 너무하네.
“제가 도지윤 에스퍼하고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는 건 맞는데, 그래도 각인은 다른 문제죠!”
“안 될 건 뭐예요.”
윤 주임은 아버지와 가이드 실장, 도지윤에게 벗어나는 방법은 그뿐이라는 듯 나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대리님만 희생하시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어요.”
이제 그녀의 눈에는 광기 비슷한 게 흐르고 있었다. 그보다 희생이라니….
“윤 주임. 각인이 저만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윤 주임이 재빠르게 말을 낚아챘다.
“제가 도지윤 에스퍼에게 말할게요! 대리님하고 각인하라고!”
그러나 나는 윤 주임이 내뱉는 말에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윤 주임이 뭔데 도지윤한테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거야?
내 표정이 안 좋아지자, 윤 주임이 약간 기가 죽어 조심스럽게 말을 한다.
“대리님. 지금 당장 각인하라는 얘기는 아니고, 도지윤 에스퍼도 분명 대리님하고 각인을 원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대리님만 결심하시면….”
윤 주임은 연신 내 눈치를 보면서도 각인하라고 등을 떠밀고 있었다. 헛웃음이 피식 나왔다.
“각인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고, 한번 해서 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언제나 내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는 근본적인 생각을 직접적으로 입에 담았다.
“혹시라도, 도지윤 에스퍼에게 저보다도 더 적합한 가이드가 나타난다면 어떡해요. 각인하면 내가 그 사람 인생을 온전히 저당 잡는 건데, 에스퍼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각인이라는 시스템은 에스퍼들에게 불리한 계약이다. 물론 가이드들도 각인을 통해서 에스퍼들의 집착에 거의 속박되다시피 하지만, 그건 가이드 인권이 향상되며 나아지고 있다. 하지만 ‘각인’이라는 시스템의 근본은 바뀌지 않아 에스퍼는 한 가이드에게만 메여있다.
구원이라 확신하고 각인을 맺었는데, 혹시 더 나은 가이드가 있었더라면. 더 높은 매칭률의 가이드가 있었던 거라면.
가이드야 하다못해 각인한 에스퍼 버리고 다른 일반인을 만나도 하등 관계없지만, 에스퍼는 각인한 가이드가 아니면 가이딩을 받을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 세상에 다시없을 불공정 거래다.
에스퍼들은 본인들은 제 가이드는 알아볼 수 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지만, 거짓말이라 생각한다. 에스퍼의 직감이 기계로 측정되는 수치의 정확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
40퍼센트 매칭률의 가이드와 사귀다가도, 60퍼센트 매칭률의 가이드가 나타나면 에스퍼의 신경은 온통 그곳으로 쏠린다. 그 퍼센티지를 인식하는 것은 향기, 소리, 형태 같은 인간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첫 접촉, 혹은 가이딩을 통해 어느 정도 예측은 가능하겠지만 에스퍼 본인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기계가 측정을 한 뒤에야 그들 사이의 매칭률이 신뢰성과 정확성을 갖고, 에스퍼들이 매칭률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나는 매칭률이 70퍼센트를 넘지 않은 에스퍼를 만날 때, 그들이 나보다 더 높은 매칭률의 혹은 70퍼센트 이상의 매칭률을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면 웃으며 보내주었다. 생명이 담보가 되는 가이딩으로 연결되는 에스퍼-가이드 사이엔 이러한 관계가 당연하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아직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지기엔 자신이 없어요.”
“도지윤 에스퍼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내가 복도의 바닥 어딘가쯤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윤 주임이 단호하게 말을 한다.
“그렇지만 대리님….”
바로 덧붙여서 윤 주임이 나를 조심스럽게 부르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윤 주임은 주저하듯 입을 몇 번 움직이더니 바로 말을 뱉었다.
“전 제 상황을 봤을 때 대리님이 각인하셨으면 좋겠지만, 그냥 각인하지 마세요. 대리님.”
그 새끼한테 대리님이 너무 아까워요. 윤 주임이 속삭이듯 말을 해서,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대리님. 사무실로 돌아가요!”
우리는 해결책이 없었지만, 윤 주임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
[그래서, 실장한테 들킨 거예요?]
퇴근을 하고 숙소 소파에 겉옷만 벗고 누워, 도지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낮의 상황을 알려주니 도지윤이 비웃는 건지 웃겨서 웃는 건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네. 망했어요.”
[그럼 대리님 스킨십하는 것도, 따라다니는 것도 다시 해도 돼요?]
“그건 아직 안 돼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거예요. 아직 3주 다 안 지났으니까 그때까진 좀 참아봐요.”
[…퇴근 후에 대리님 보러 가도 돼요?]
“…일주일에 한 시간씩이라고만 했잖아요.”
[어차피 이미 망했잖아요.]
내가 말할 때 ‘망했다.’는 단순 사실의 나열이었지만, 도지윤의 입에서 울리는 ‘망했다.’는 나를 비웃기 위한 문장 같았다. 하지만 내 기분과 상관없이, 도지윤의 입에서 나오는 ‘망했다.’도 결론적으론 사실이었기에 인정해야 했다.
“맞아요. 망했죠….”
[대리님, 보고 싶어요.]
도지윤의 목소리는 시무룩했지만, 말하는 내용에 나는 작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퇴근 후에, 남들한테 안 들키게 찾아와요.”
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 쉬며 단서를 붙여 허락하자, 도지윤이 재빨리 목을 울리며 웃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대리님.]
그러나 도지윤이 곧바로 이어 말하는 내용에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허겁지겁 열었다.
[저 왔어요.]
“저 왔어요.”
핸드폰에서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어이가 없어 픽 웃으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도지윤을 집 안으로 들이며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 우리 집 앞에 있었어요?”
“네.”
“…알고 있었어요?”
합리적 의심이 들어 도지윤을 향해 게슴츠레 눈을 뜨자 도지윤은 대답하지 않고 맹하니 웃으며 나를 껴안는다.
“어이. 도지윤 에스퍼. 대답이요.”
도지윤은 대답 없이 고개를 내 목에 파묻어, 대답하기 싫다는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그래. 먼저 알았든, 늦게 알았든 무슨 상관이겠니.
나는 대형견 같은 도지윤을 매단 채 소파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털썩 앉았다. 도지윤이 내게 기대, 내 몸은 소파에 깊게 묻혔다.
“저녁은요?”
내 목에 고개를 파묻은 도지윤의 뺨을 잡아 고개를 들게 하자, 곱게 접힌 검은 눈이 나를 바라본다.
“아직 안 먹었죠.”
“집에 있는 거 없는데….”
“대리님 집엔 맨날 먹을 거 없잖아요. 또 사과?”
도지윤의 말에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눈알만 데굴 굴렸다.
“대리님. 저 요리 배워요.”
“네? 요리요?”
나는 도지윤의 의외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대리님 납치해서 뭐라도 먹이려면, 제가 요리를 배워야죠.”
상큼하게 말하는 도지윤의 얼굴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상큼하지 않았다.
“그 계획 폐기된 거 아니었어요?”
도지윤은 대답 대신 맹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내 목으로 고개를 묻었다.
“대리님. 2주 남았어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나는 한숨처럼 말을 하며 도지윤을 끌어안았다. 연애 한번 하기 더럽게 어렵다 정말.
진짜 도지윤하고 각인이라도 해야 하나.
잠시 도지윤을 흘낏 쳐다보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씁쓸한 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촤르륵 흘러갔다.
아니면 진짜 실장을 죽여야 하나.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꼬장꼬장한 가이드 실장을 생각을 하니, 절로 머리가 아파졌다. 바늘은 안 들어가지만 칼은 들어가지 않을까?
그러다 고개를 저어 쓸모없는 상념을 쫓아내었다. 도지윤과 붙어있다 보니 자꾸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인 생각만 하는 것 같다.
“대리님.”
“네?”
부질없는 상상 속에서 헤매던 나를 일깨우는 도지윤의 목소리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대리님이 2주 뒤에 가이드 실장 설득해서 제 ‘전담 가이드’ 해주신다면서요.”
“…네. 그랬죠.”
그게 약간 망한 거 같아서 지금 고민 중인 거고.
“그거 안 되면 저 진심으로 가이드 실장 죽일지도 몰라요.”
“네?”
도지윤은 평소와 똑같이 맹한 얼굴로, 느릿느릿한 말투로 심상치 않은 말을 내뱉었다. 여전히 내 몸에 들러붙어 있는 도지윤에게서는 시원한 향기가 풍겼고 내 뺨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은 다정했다.
“안 그래도 좆같은 새끼 죽이려고 했는데 대리님 봐서 참았던 거예요.”
“…아니, 범죄는!”
“그리고 실장급 죽이면 중앙에서도 가만 안 있을 거라서 대리님 납치할 거예요.”
“…야!”
좀 그런 범죄 계획은 혼자만 알고 있어라! 아니, 그전에 그런 계획을 세우지도 말고.
“뭐 일단 제 등급이 높으니까 다른 나라나… 아니면 어디 섬이나 사서 둘이 따로 살죠, 뭐.”
도지윤은 내 목에 다시 고개를 부비며 애교를 부려왔다. 그러나 내뱉는 말들은 전혀 애교와 상관없이 무시무시한 말들이어서 둘 사이의 간극이 얼음과 불 같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얼마 전 에스퍼 실장 면담 시, 에스퍼 실장이 먼 곳을 바라보며 세상의 온갖 시름에 잠긴 얼굴로 ‘도지윤이 개지랄을 떨 것 같아.’라고 했던 기억이 생각났다.
“…진심이었어요?”
“네?”
도지윤은 고개도 들지 않고 내 품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실장 죽이겠다는 것도, 저 납치하겠다는 것도요?”
도지윤은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두 눈을 접고, 입술 끝이 하늘을 향해 올리고, 마치 꽃이 피어나듯 천천히 환하게 웃었다.
“네.”
그걸 이제 알았냐는 말이 생략된 것 같은 웃음이었다. 도지윤은 내 예상보다 조금 더, 미쳐있는 것 같다.
“에스퍼 실장님은 알고 계십니까?”
도지윤이 손을 들어 내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네.”
도지윤은 내 셔츠를 다 풀고, 어제 정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내 상반신을 눈으로 쓸었다.
“설마, 허락하셨어요? 에스퍼 실장님이?”
도지윤이 고개를 내려 쇄골 근처에 남겨져 있던 붉은 흔적에 입을 맞췄다.
“허락 안 하죠.”
나는 도지윤의 고개를 붙잡아 내 얼굴을 마주 보게 했다.
“도지윤 에스퍼. 범죄는 안 됩니다.”
도지윤이 내 손을 잡아끌어, 그 끝마다 입을 맞추었다.
“제 인생에 이렇게까지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기대하는 것은 없어요. 대리님.”
“…….”
“다 대리님이니까, 대리님이 원하셔서 조용히 목줄에 메여 있는 거예요.”
기분 더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쁜 기분은 아니라 의외긴 하지만요. 도지윤의 소곤소곤 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집 안에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2주 드릴게요.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세요. 그래도 안 되면, 이젠 제 차례예요.”
도지윤이 맹하게 웃으며 다시 내 쇄골로 고개를 묻었다. 따끔거리는 얄팍한 고통을 느끼며, 나는 내가 미친놈을 좋아하고 있음을 이제야 확신했다.
많은 사람들이 얽힌 문제는 더 이상 내가 도지윤의 ‘임시 전담 가이드’가 되느냐 마느냐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가이드 실장을 죽이냐 살리냐의 문제로 변이되었다.
***
연속 이틀 도지윤에게 봉사한, 혹은 봉사당한 몸이 피곤하다고 부르짖는다.
그럼에도 출근을 하고 일을 해야 월급이 나온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아 행정 업무를 처리 중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의 사무실에 호기심이 일었다.
“최 주임. 무슨 일 있어요?”
마침 사무실에 들어오는 최 주임에게 묻자, 눈썹을 들어 올린 최 주임이 ‘그것도 모르세요?’라는 표정을 지었다.
“에스퍼들 대상으로 새로운 실험을 4구역에서 할 거라고 해서 그거 때문에 좀 어수선해요.”
“실험이야 매번 하는 건데 좀 요란스럽네요.”
“1구역에서 개발한 기술인데 프로토 타입을 여기서 실험해야겠다고 기술진이랑 에스퍼가 내려왔대요.”
1구역에서 개발한 것을 굳이 4구역까지 가지고 와서 실험하는 것이 잘 이해는 안 갔지만, 뭔가 사정이 있으려니 했다. 그것보다 오랜만에 듣는 ‘1구역’이라는 불길한 단어가 목구멍에서 걸려 체증을 일으킬 것 같았다.
“장비 들여오는 거, 아침에 못 보셨어요?”
아침에 피곤해 뒈질 것 같아,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고개를 저으며 최 주임을 바라보자 최 주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했다.
“1구역 실험이라 다들 호기심 만땅이에요. 혹시 대리님 아시는 에스퍼나 기술진 있으면 가서 물어봐 주세요.”
아무래도 1구역은 기술 개발에 특화된 곳이다 보니 비밀 실험이나 대규모, 대자본 실험을 많이 한다. 절대 그 근처로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나는 최 주임을 향해 작게 웃었다.
“아, 그런데.”
고개를 돌려 대화를 종결하려 했지만, 최 주임이 덧붙인 한마디에 다시 나는 그녀를 바라보아야 했다.
“1구역에서 온 에스퍼 중에 대리님 취향 있었어요.”
그리고 난 그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제 취향이요?”
“청순미인형이요. 예쁘게 생겼던데. 직원들 한 명씩 가서 구경하고 왔잖아요.”
맞죠? 웃으며 나에게 물어오는 최 주임은, 내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던 듯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녀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문장이 나의 숨통을 죄어 산소를 끊어버렸다. 생체기능이 꺼져버린 것처럼 순간 아득해졌다가, 다시 전원이 들어와 숨을 턱하고 내뱉었다. 끼긱거리는 뇌로 재빠르게 1구역의 ‘청순 미인형’ 에스퍼들의 리스트를 떠올렸다.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몇몇의 얼굴들 중, 마지막에 떠오른 것은 재앙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긍정의 생물이었고 구체화되기 시작한 두려움을 구석으로 몰아낸 채 나는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내가 4구역에 온 사이에 새로운 에스퍼들도 1구역으로 전입해 갔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에스퍼들 중 한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는 나는, 백만 년 만에 메신저를 켜 재빨리 배정화를 찾았다.
[정화]
[?]
정화는 일도 안 하는지 메신저를 보내자마자 바로 응답해왔다.
[김강민. 지금 어디야.]
[아 뭐야. 인트라넷 너가 검색해봐.]
잠시 뒤에 정화의 메신저가 다시 튀어 올랐다.
[출장 중이네. 갸는 왜?]
[어디로?]
[- -]
금방이라도 다시 답을 해올 것 같았던 정화는, 그러나 답이 없었다. 1초가 1시간 같은 기나긴 기다림을 나는 입술에 쥐어뜯으며 인내하고 있었다.
사무실의 형광등에 만들어진 내 그림자 속에서 불행이 눈을 번뜩이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시발놈아 나오지 말아라 하고, 발로 짓이겨보지만 생명력이 잡초와 같아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내 발밑을 맴돌았다.
[야.]
정화가 다시 메신저를 보냈을 때, 나는 한 시간이 지났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흘낏 시계를 보니 고작 10분이 지나있었다.
[ㅇ]
[…4구역 갔다는데?]
[시발]
[걔가 왜 거길…]
[정화야.]
[…ㅇ?]
[나는 왜 동물이나 곤충이 아닐까.]
[미쳤냐?]
[재앙이 다가오는 걸 느끼지 못하는 인간의 몸뚱어리가 밉다.]
[돌았냐고.]
[나 다시 메신저 끈다. 안녕.]
[야!! ㅁㄴㅇㅁㄹ]
메신저를 다시 끄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는 나를 맴도는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내 발밑의 불행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깨닫고야 말았다. 저건 불행이 아니었다. 재앙이었다.
재앙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안락한 극세사 이불 속에서 작은 강아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니.
아무런 움직임도 없어 까맣게 변해버린 모니터 위로, 창백하게 질린 내 얼굴이 보였다. 손을 들어 다시 입술을 잡아 뜯자 얇은 각질이 따끔한 고통을 남기며 뜯어져 나왔다. 그러다 주륵 하고 흐르는 느낌에 손으로 그 부분을 찍어 보자, 새빨간 피가 묻어 나온다.
1구역에서 던져진 돌멩이가, 나를 두드려 패 기어이 피를 보고 말았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앉아 있을 수 없어 나는 화장실로 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입술에서 뚝뚝 흐르는 피는 세면대 위로 떨어져 물과 섞여 희미해졌지만 지울 수 없는 표식처럼 다른 것들과는 구별되는 특유의 붉은빛을 뽐냈다. 휴지를 잡아 뜯어 입술을 내리누르며 거울 속의 창백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치솟는 심박수를 느끼며, 나는 되뇌었다. 나는 피해자였다. 1구역에서 도망치듯 이곳으로 밀려왔지만, 근본적으로 따져보자면 나의 잘못은 없다.
‘우리’의 만남에서 껄끄러움을 느끼고 피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김강민이었다. 그 새끼가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내가 있었을 4구역에는 출장조차도 오면 안 됐다. 하지만 지금 그놈이 나와 같은 건물 안에 있다는 말은 그 새끼가 내 생각보다 더 상종 못 할 개 쓰레기였다는 뜻이다.
내가 그 새끼에게 당당하고, 피해야 될 이유가 없다고 확신하자 내 심박수는 정상 상태로 가라앉았고 머리가 차분해졌다. 이성적인 내 머리가 차분히 감정을 컨트롤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흥분한 감성이 본능적인 거부감을 끄집어내었다.
일단 김강민을 안 만나는 게 중요하고, 김강민과 도지윤이 안 만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고.
통제하지 못한 감성과 이성 사이에 나는 최선의 방법들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화장실을 벗어났다. 혹시나 김강민을 다시 만나게 되면 일단 얼굴에 주먹부터 꽂아 넣을까 고민했지만, 에스퍼의 튼튼한 몸에 가이드의 말랑한 주먹이 박힌다고 타격이 갈까 싶다.
복도의 전면 유리 너머로 보이는 바깥세상은 어느새 비가 내릴 듯 꾸물꾸물해져 있었다. 마치 내 기분과도 같은 우울함이 하늘에 낮게 깔려 감정을 쏟아낼 듯 말 듯 꿈틀대고 있었다. 가슴에 쌓인 울화 같은 한숨을 길게 내뱉자니, 톡톡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복도의 전면 유리에 얇은 스크래치처럼 흔적을 남기는 빗방울이, 내 마음에 새겨진 수없이 많은 얇은 자상들 같았다. 이제는 살이 많이 차올라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진 않는다 하더라도 흉터처럼 남아 있는 상처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 어딘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남아있는 연차 개수를 헤아려 보았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는다.
“재하야.”
어지러이 널려있는 상념의 바다에서 허우적댈 때, 나를 끄집어내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왜냐하면 3년 동안 들어왔었지만 지금은 가끔 꿈에서나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심장에 쾅 소리를 내며 번개가 쳤다.
“재하야.”
무섭게 방망이질을 하는 심장을 따라, 피가 혈관을 타고 미칠 듯한 속도로 주행하기 시작했다. 관자놀이를 울리는 어지럼증과 함께 굳어지는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반질반질한 검은 구두였다. 그와 이어져 있는, 검은 에스퍼복으로 감싸인 쭉 뻗은 다리와 몸통을 지나 얼굴로 시선을 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도지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얗고 뽀얀 혈색 좋은 얼굴. 동글동글 큰 눈에 눈꼬리가 살짝 처져 있어 부드러운 인상의, 한때 내가 좋아했던 청순한 얼굴. 아니, 한때 내가 좋아했던 사람.
김강민이었다.
밖에는 어느새 제법 굵어진 비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어두워진 복도에 우리는 마주 보고 서 있었고, 이 비현실적인 상황이 나는 꿈이길 바랐다.
3년간 연인으로서의 거리는 입술 하나 떨어지지 않을 만큼 가까웠지만, 악몽 같았던 헤어짐은 우리를 1구역과 4구역의 거리만큼 벌려놓았다.
그러나 오늘, 고작 5미터 정도의 사이를 두고 우리는 마주 섰다.
“오랜만이네.”
굳어버린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자 김강민이 나를 보고 작게 웃음 짓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더 길어진 머리카락에 살도 좀 쪄 보였지만, 피부에서 번쩍번쩍 빛이 났다.
내 가슴 한구석에서 휘몰아치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견디며 버텨야 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뱉을 말을 고르려 했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내뱉을 단어가 없어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마주하며 표정 짓지도,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기에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재앙은 한 가지만 오는 법이 없어, 언제나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날아온다는 것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대리님.”
내가 옛 연인을 무시하기 위해 돌아선 곳엔, 도지윤과 윤 주임이 서 있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현재 완료 진행형인 문제와 현재 진행형의 문제가 한 복도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쨌든 기준은 현재라서, 나는 그냥 현재에서 미래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에스퍼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작 서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득한 시선으로 복도에 정렬되어 있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전 남친과, 현재 썸을 타고 있는 사람과, 그 썸 타는 사람과 잘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
정렬이 되어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 착각이었을 뿐, 이곳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질서가 공간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씨발.
“재하야.”
뒤에서 나를 부르는 김강민의 목소리에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마주 보고 있는 도지윤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한 것은 알 수 있었다.
“재하야. 얘기 좀 해.”
나에게 점점 다가오는 듯한 발소리에, 나는 몸을 돌려 김강민을 마주 바라보았다. 훌쩍 가까워지는 김강민을 향해 손을 들어 멈추라는 의사를 밝혔다.
“김강민 에스퍼.”
“재하야.”
겨우 목소리를 끌어올리는데 자꾸 목이 메어왔다.
“오랜만이야.”
김강민이 나를 보며 눈을 내리며 웃었다. 끝이 내려가 온순해 보이는 눈매가 김강민의 웃음으로 더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좆같게도 나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데, 김강민은 나를 보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보듯이 반갑게 웃었다.
“너하고 할 말 없어.”
다 봉합되었다고 생각했던 상처들 중 한 군데에서 갑작스레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실체 없는 통증 속에 이를 악물며,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와 톤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던졌던 모든 말들을 다 합쳐 가장 싸늘하고 가장 들끓는 소리였다.
당황스러워하는 김강민을 보며 몸을 돌렸다.
“윤 주임. 도지윤 에스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둘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자, 도지윤이 나를 불렀다.
“대리님.”
그 부름을 무시하고 지나쳐 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간신히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몸을 반 바퀴 돌려 도지윤에게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말을 했다.
“이따 봐요. 도지윤 에스퍼.”
그러나 여전히 도지윤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고, 나는 몸을 돌려 나를 괴롭히는 모든 문제들 속에서 도망쳤다.
4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