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5. (15/21)

Chapter 15.

출근을 하고 나서 나는 어지러운 상념에 사로잡혀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김강민이 1구역에서 가지고 온 이야기가 나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도지윤이 행복하기를 바랐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제껏 그 문장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렸을 때는 언제나 도지윤 옆에 내가 있었다. 하지만 굳이 네가 내 옆에 있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면.

너를 자유롭게 빛나게 하는 것이 나의 임무일 수도 있다. 나의 에스퍼를 자유롭게 해주는, 그 어느 가이드도 하지 못했던 업무.

하지만 나는 또한, 다른 가이드처럼 나의 에스퍼를 속박하고 싶었다. 내 가이딩 아래에 묶어, 나만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자유와 속박, 대립되는 두 단어 사이에서 아무리 주사위를 굴려보아도 어디로 가야 할지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었고, 나는 도지윤을 향한 선택을 하고자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다음의 선택은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너에게 내가 필요 없는 자유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 알려주면, 너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까. 그래도 여전히 나에게 애정을 갈구할까. 아니면 너의 자유를 기뻐하며 내 옆에서 사라질까.

네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키보드의 스페이스 바를 의미 없이 틱틱 누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가이딩 패드가 띠링 울리며 나를 불렀다. 패드를 살펴보니 역시나 가이딩 실장이었다. 4구역에 내려온 이후부터 인생의 복잡한 순간, 중요한 순간, 갈림길에 서 있는 순간마다 가이드 실장에게서 호출이 왔었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았고, 그저 가이드 실장과 더럽게도 안 맞는다고 생각을 했다.

“부르셨습니까.”

가이드 실장의 방에 들어서면서, 나는 멈칫했지만 곧바로 실장에게 인사를 했다. 가이드 실장의 방에는 김강민과 실장이 앉아 있었다.

그 어떤 괴수보다 강력한 최종 보스 1, 2의 재림이었다.

“이 대리. 어서 와요. 자리에 앉아요.”

좆같았지만 나는 김강민의 옆자리에 앉았고, 다행히도 김강민과 나 사이에는 소파의 팔걸이가 우리 사이를 구별 지어 주었다.

“이쪽은 알죠? 1구역에서 온 김강민 에스퍼예요.”

“예. 알고 있습니다.”

내 복장 뒤집어엎으려고 부른 건가?

“둘의 매칭률이 이렇게 높다니, 참 놀라운 일이네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실장은 별 의미 없다는 듯이 의례적으로 말했으나,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생긋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 그런 시답잖은 얘기하려고 부른 건 아니고.”

실장이 웃으며 김강민 에스퍼와 눈을 마주했다.

“1구역에서 진행하는 비밀 실험을 4구역에서 진행하게 됐어요.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 실험이라 성공 직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김강민을 흘끗 쳐다보자, 자신감에 찬 은은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재수 없었다.

“실험 내용은 매칭률이 낮은 에스퍼-가이드 관계에서, 매칭률을 높여주는 거예요.”

실장이 눈과 턱으로 김강민을 향해 끄떡거리자, 김강민이 이어서 말을 한다.

“1구역에서 데이터값으로는, 최대 30퍼센트까지 매칭률이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실험에 참가했던 에스퍼들의 부작용도 거의 없었고요.”

“…어떤 방식으로 되는 실험입니까? 혹시 가이드나 에스퍼의 신체에 무리를 주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도지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물어보았다.

“특수하게 제작된 실험 장치입니다. 에스퍼의 가이딩 수용 감각을 끌어올리고, 가이드의 가이딩 효율도 덩달아 증대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김강민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말을 시작했다.

“실험 장치 안에서 평소처럼 가이딩을 하면 됩니다. 30퍼센트 미만대의 매칭률은 상향 조정되어 50퍼센트 전후의 값으로 보정되었습니다. 드문 케이스이지만 70퍼센트 미만의 매칭률에서도 70퍼센트 이상의 값으로 보정된 경우도 있었고요.”

“70퍼센트 이상 값의 매칭률이 보이게 되면 각인은 어떻게 됩니까?”

“아직 거기까지 진행된 실험은 없지만, 이 실험 결과가 정부의 인가를 받게 되면 그다음 단계는 보정 매칭률로 각인이 가능한가가 되겠죠.”

“…매칭률이 의미 없는 시대가 오겠네요.”

어제 김강민이 말을 했던 문장을, 그대로 다시 내 입으로 읊으려니 말할 수 없이 기분이 더러웠다. 김강민은 그런 나를 보며 눈을 휘며 웃었다.

“에스퍼에게도 가이드에게도 좋은 일이죠.”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가이드 실장이 마무리를 지었다.

“이 대리. 우린 이 실험에 도지윤 에스퍼를 참가시켜야 해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도지윤 에스퍼의 ‘임시 전담 가이드’가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그냥, 도지윤 에스퍼와 연애 중이죠.”

나는 실장의 ‘연애 중’이라는 단어를 정정해주고 싶었지만, 옆에 김강민이 있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도지윤 에스퍼에게 말을 해주세요. 이 실험에 참가해 달라고요.”

“…그리고 그 실험 참가 가이드도, 윤 주임이고요?”

“이 대리.”

나는 실장을 바라보며 힘없이 웃었다. 일개 대리가 쥐어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실장님. 죄송합니다.”

“실험에 참가하는 가이드는 아직 선정이 안 됐어요. 이 실험에서 극적인 결과값을 얻기에 윤 주임과 도지윤 에스퍼의 매칭률은 너무 높거든요.”

예상하건대, 윤 주임과 도지윤 사이에서 눈에 보이는 가이딩 실적이 나오지 않자 가이드 실장은 방법을 바꾸기로 결정했나 보다.

“이 대리. 이건 내가 가이드 실장을 떠나서, 가이드 대 가이드로 부탁하는 거예요. 이 실험만 성공하면 에스퍼들의 가이드에 대한 집착도 감소될 것이고, 에스퍼 본인도 가이딩에 대한 불안감을 컨트롤할 수 있어요.”

실장은 자연스럽게 인간적인 감정에 호소를 하고 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가이드 실장이 이 방법으로 공을 세워 진급 길을 닦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소수의 가이드한테서만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탈피해, 이제 가이드이기만 하면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는 안도감은 상상을 초월할 거예요.”

실장의 정치적인 의도를 해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머릿속에서 저울질이 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습관이라 애써 한쪽 구석으로 밀어 놓고 다시 도지윤에게 집중했다. 실장의 말은 도지윤도 나에게서 벗어나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지윤 본인의 가이딩 거부를 일으키지 않는 낮은 등급의 다른 가이드들 수 명에게서 가이딩을 받을 수도 있겠지.

“왜 도지윤 에스퍼입니까. 실장님. 그렇게 좋은 실험이면 다른 일반 에스퍼들을 대상으로 한 결과값을 얻으면 되지 않습니까.”

“S급 에스퍼잖아요. 그 힘과 상징성을 잘 알지 않나요?”

한쪽 구석에 밀어두었던 ‘회사 생활 언어 해독기’가, 지금 실장은 다 성공한 실험에 도지윤을 끼얹어 극적인 효과를 얻고 싶어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실장과 나의 첨예한 대립이 공기를 얼려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의 눈싸움에서 계급으로 보나 짬으로 보나 밀리는 것은 나였기에, 나는 버티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아야 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장은 내 거절에도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 대리. B급 가이드가 S급 에스퍼와 하는 연애는 힘들 거예요. 부족에 대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감내해야겠죠.”

“…….”

“이 실험이 성공하면, 상용화가 된다면 에스퍼들은 가이딩과 연애를 별개로 고려해도 될 거예요.”

실장의 달콤한 말이, 귓속의 솜털을 새살거리며 간지럽힌다.

“도지윤 에스퍼도 가이딩과 연애를 별개로, 공사를 완전히 구별해도 되는 그런 날이 오겠죠.”

회사에서 상대방에게 조언을 해줄 때는, 언제나 자신의 가장 큰 이익을 숨기고 가능성이 희박한 미래의 희망을 언뜻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인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그 희망의 달콤함이 독임을 알고 있음에도 본능적으로 따르게 된다는 것도 경험으로 배워왔다.

실장은 얼굴에 금 하나 가는 것 없이, 완벽한 직장인의 자세로 본인의 가장 큰 이점을 숨기고 나에게 얄팍한 희망을 보여주며 어서 물라고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실장님.”

회사에 믿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10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한 나는 내 동기 몇 명을 제외하고는 믿지 않는다. 예외로 김강민에게는 손바닥만큼 마음을 열었지만, 결과는 처참했고 더 이상 회사 사람을 믿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실장이 보여주는 달콤함이 너무 향기로웠다. 도지윤을 자유롭게 해주는, 도지윤의 공사를 구별 지을 수 있는 방법. 실제로 실험이 성공하게 되면 별별 이유를 들어 S급 에스퍼 옆에 다른 가이드를 붙여주려고 하겠지만, 혹시나 하는 작은 희망.

“말씀 끝났으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실장실을 나서면서 나는 기필코, 조만간에 굵은소금을 사서 실장 방문에다가 뿌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재하야.”

시발시발거리며 복도를 거닐던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무시하고 내 갈 길 가도 됐었지만, 바닥을 치는 기분이 지나가는 그 누구라도 붙잡고 시비를 걸고 싶었기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야. 기분 좆같으니까 그냥 갈 길 가자.”

“얘기 좀 해.”

“그 얘기는 어제부터 계속하자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를 얼마만큼이나 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아.”

나는 입을 열어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부으려 했다. 그러나 복도의 한가운데에서, 6개월 전까지 내가 사랑했던 한 남자가 오후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멀거니 서 있는 모습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과거의 한때 김강민에게서 풍겼던 섬유 유연제 같은 부드러운 향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가며 치솟아 올랐던 분노 게이지가 점점 가라앉아 내려갔다.

내 에스퍼가 될 것이라 믿었던, 미래의 꿈을 공유했던 사람.

햇살을 타고 흐르는 웃음소리 가득한 과거의 조각들에, 똘똘 뭉쳐진 응어리가 턱 하고 풀어지고 말았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만나자마자 했었어야 할 인사를 건넸다.

“아빠 됐다며. 축하한다.”

“…고마워….”

“그래. 진심으로 축하해.”

나는 김강민과 재회한 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비웃음이 아닌 미소를 보여주고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면서 언뜻 내 눈에 스친 김강민의 검은 에스퍼복이, 단정한 자세가 그와 비슷한 사람이 생각나게 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내 갈 길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들어 걸어 나갔다.

“재하야!”

뒤에서 김강민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옥상에 올라와 구석에 비치되어 있는 벤치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차가운 냉기가 옷과 피부를 뚫고 내 정신세계까지 마구마구 침입해 왔지만,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라 나는 버텨내야 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어내자, 어지럽게 꼬인 모든 문제들이 하얀 입김을 따라 내 주변으로 펼쳐졌다. 자세하게 보고 싶었지만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에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직장 상사에게 최대한 찍히지 않으면서, 직장 상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동시에 연인 관계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원하는 일을. 에이 시발. 뭐라고 하는 거야.

머릿속으로 차근히 정리를 하고 싶어도 이미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하고 있는 문젯거리들이 나를 비웃으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넌 절대 정리 못해!’ 하고 깔깔대며 웃어대는 저놈들을 목 졸라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일개 연약한 대리였다.

“하아.”

한숨이나 쉬며 다시 머리를 굴리려 마음을 다잡는데,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번호를 살펴보니 모르는 번호였지만 업무 관련인가 싶어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이재하입니다.”

[아! 대리님! 저 가이드 2팀 윤민지 주임입니다!]

“아. 윤 주임. 무….”

다급한 윤 주임의 목소리에,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나의 물음이 시작하기도 전에 윤 주임이 외쳤다.

[지금 주차장으로 와주시면 안 돼요?]

“네? …왜요?”

[도지윤 에스퍼가.]

울먹이며 잠시 말을 멈춘 윤 주임은, 다시 재빠르게 말을 뱉었다.

[미쳤어요!]

“…네?”

[도지윤 에스퍼는 원래 미치긴 했는데. 그래도 미친개라. 아니. 미친개가 미친 짓을 하는 건 맞는데.]

혼자서 중얼중얼, 점점 혼돈의 도가니 속에 잠식되는 것 같은 윤 주임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재빠르게 일어나 옥상을 벗어났다.

“어느 주차장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그… 중앙 주차장이요. 센터장님이랑 실장님들 차가 주차되어 있는 자리요.]

“지금 가겠습니다.”

나는 주차장을 향해 뛰다시피 걸으며, 도지윤을 향한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도지윤이 미쳤다니. 무슨 말이지? 혹시 쓰러지기라도 했나? 발작? 어제까지는 멀쩡했는데. 어렸을 적 실험을 많이 했다더니, 지병이라도 있나?

별별 최악의 가정들을 상상하며 주차장으로 내려가 윤 주임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전화를 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그곳을 향해 시선을 모아 구경을 하고 있었다. 헉헉대며 뛰어가자 윤 주임이 눈에 눈물을 그렁대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리님!”

쾅!

도지윤이 어디에 있나 고개를 돌리며 찾아보았지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윤 주임의 ‘미쳤다.’라는 표현으로 나는 한눈에 도지윤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독일 3사의 브랜드 중 한 군데서 제작된 검은색 세단이, 가이드 실장 자리에 곱게 주차되어 있던 은색 세단의 뒤 범퍼를 박살이 나게 들이박았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차를 뒤로 쭉 빼더니, 제로백이란 게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듯 성능을 최대치로 높이며 가이드 실장 차를 다시 들이받았다.

쾅!

나는 황당함에 숨을 몰아쉬는 것도 잊고, 검은색 세단을 가리키며 윤 주임에게 물었다.

“도지윤?”

그러자 윤 주임은 고개를 여러 번 빠르게 끄덕였다.

“왜?”

차마 문장을 만들 정신조차 없어서 윤 주임에게 비명 같은 질문을 떠넘기자, 윤 주임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사이에 도지윤의 차는 다시 한번 실장의 차를 들이박았다. 실장의 차는 완전히 찌그러져 스토퍼를 넘어 건물에 앞 범퍼가 살짝 닿아 있었다.

그러나 도지윤은 멈추는 것 없이, 재차 실장의 차를 처박았다.

쾅!

실장의 차는 이제 도지윤의 차와 건물 사이에 끼여, 폐차 직전의 차처럼 변했다. 그 모습을 경악스레 바라보다, ‘차가 저렇게 됐는데 사람은?’ 하는 생각에 도지윤에게로 눈길이 갔다. 이미 도지윤의 차도 앞 범퍼가 거의 부서졌지만, 그 안의 상황은 짙은 선팅 때문에 확인이 되지 않았다. 희미하게 연기가 솟아오르는 엔진룸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도지윤을 향해 뛰어갔다. 운전석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한발 빠르게 도지윤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귀신이 등장한 것처럼 깜짝 놀라 그 모습을 바라보자 도지윤이 몸을 곧게 세우며 나를 보며 맹하게 웃는다. 그 뒤로 도지윤의 차에서 에어백이 팡파르를 울리듯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졌다.

“대리님. 오셨어요?”

나는 어이가 없어 입만 벌린 채, 가이드 실장의 차와 도지윤의 차와 도지윤 셋을 번갈아 가며 검지로 가리켰다.

그러자 도지윤이 맹하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어 나긋나긋하게 말을 했다.

“제가 운전이 미숙해서요.”

그 황당한 발언에 나는 그제야 ‘헉’ 하고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대리님. 괜찮아요?”

걱정이 되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어오는 도지윤에게,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일단 말을 뱉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제 걱정 해주시는 거예요? 다정해라.”

맹한 웃음에서 좀 더 눈을 접으며 웃는 도지윤은 손을 올리려다가, 다시 내렸다. 일전의 내가 회사 내에서는 스킨십 금지라고 했던 발언을 기억했던 것 같다.

“왜….”

황망히 도지윤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도지윤이 다시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제가 운전이 미숙해서, 운전 연습하고 있었어요. 마침 에스퍼 실장 자리가 비어서 주차 연습 좀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돼버렸네요.”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맹한 웃음과 함께 도지윤이 말했다.

“이 자리에서 운전 연습해서, 다른 자리에서 사고치지 말라고 에스퍼 실장이 ‘특별히’ 저에게 부탁했어요.”

그러면서 도지윤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가이드 실장이 그 근본도 없는 새끼 가이딩을 대리님한테 ‘특별히’ 부탁한 것처럼요.”

둘의 상관관계는 ‘특별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밖에 없었지만, 도지윤은 개의치 않다는 듯이 선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도지윤의 얼굴에서 눈을 떼, 아까보다 사람들이 몰려든 그리고 점점 몰려들고 있는 사건 현장을 둘러보았다.

“이건 범죄 아니니까. 괜찮죠?”

그리고 다시 도지윤의 말소리에 그를 쳐다보아야 했다. 도지윤은 여전히 맹한 미소로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을 했다.

“운전 미숙이잖아요.”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도지윤은 기대감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온 평정심을 모아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따 봅시다. 도지윤 에스퍼.”

위가 아려오는 느낌에 사무실에 올라가서 양배추즙이나 뜯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울기 직전인 윤 주임에게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안함을 표시한 뒤, 도지윤이 사고 친 현장을 재빠르게 벗어났다.

***

가이드 실장의 부탁과 도지윤의 사고가 합쳐지자 긍정적인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김강민에 대한 생각이 일절 나지 않았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식탁에 앉아 뺨을 차가운 표면에 댄 채 왜 도지윤은 저렇게 사고를 잘 칠까, 나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등등 고찰의 시간을 가지고 있자니 도지윤이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전의 어느 날처럼, 나는 문을 반만 열어 표정도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맹하니 웃으며 나를 바라보던 도지윤이 입을 열었다.

“형?”

그러나 내가 도지윤의 대답에도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를 처다만 보자, 다시 도지윤은 눈동자를 떨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도지윤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내가 밖으로 나갔다.

슬리퍼 사이로 드러난 내 발목과 발가락이, 차가운 겨울바람의 냉기에 잘릴 듯이 시려 조금 후회했지만 나는 애써 꿋꿋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도지윤 에스퍼.”

냉정하고 차갑게 말하자, 도지윤이 불안하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에게 다급하게 대답한다.

“지윤이라 불러줘요. 형. 다정하게.”

가련한 도지윤의 얼굴에, 얼음처럼 굳혔던 내 다짐이 흐물흐물 녹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나에 대한 한심함에서부터 시작된 깊은 한숨을 쉬며, 도지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윤아.”

“네. 형.”

“너 잘못한 거 없어?”

내가 얼굴 가득 피곤함을 담아 도지윤에게 물어보자, 도지윤은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나에게 대답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죠?”

“야. 가이드 실장 차를 그렇게 박살내면 어떻게 해!”

“그건 운전 미숙인데….”

“너 운전 경력이 몇 년인데, 그런 실수를 해. 장난해?”

“가끔 그럴 때 있잖아요. 엑셀하고 브레이크가 헷갈릴 때.”

“가끔도 그런 일 없어. 엑셀하고 브레이크가 헷갈리면 운전대를 잡지 말아야지!”

“그럼 형이 내 옆에서 가르쳐 주면 되겠다.”

방금 전까지 불안에 떨던 모습은 거짓이라는 듯, 도지윤이 환하게 웃으며 기뻐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얘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머리가 아파져 손을 들어 고개를 깊게 묻었다. 그러자 도지윤이 냉큼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형. 몸이 너무 차가워요. 얼른 들어가요. 혼내도 집 안에서 혼내요. 감기 걸려요.”

나는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어 힘을 주어 나를 잡고 있는 도지윤의 손과 몸을 떼어내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도지윤을 보며 나는 최대한 쌀쌀맞은 목소리를 내었다.

“너, 도지윤. 이번 주 우리 집 출입 금지야.”

“네? 말도 안 돼!”

“넌 말이 돼서 그런 사고를 쳤냐?”

“범죄 아니잖아요! 그냥 운전 미숙으로 벌어진 단순 사고예요! 가이드 실장을 죽인 것도 아닌데!”

경악으로 가득 찬 도지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그제야 조금 속이 시원함을 느꼈다.

“그게 운전 미숙이라고 누가 믿어! 운전 경력이 몇 년은 될 놈이!”

도지윤은 금세 눈에 눈물을 올리며 곧 쏟아낼 듯이 굴었다.

“울어도 소용없어. 이건 안 봐줄 거야.”

하지만 내 냉정한 말에 도지윤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너무해요.”

“네가 더 너무해.”

도지윤은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입을 열어 다다다 쏟아내었다.

“그 좆같은 새끼 가이딩 시킨 게 실장이라서, 화는 나 죽겠는데 형이 범죄는 안 된다면서요! 그래서 화풀이만 조금 한 건데!”

“지윤아.”

도지윤의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을 보면서 나는 다정히 입을 열었다.

“사람이 상식이라는 게 있어야지, 그렇게 폭력적으로 행동하면 안 돼.”

“이능 안 썼잖아요!”

기나긴 훈계조의 말을 시작하려 했지만, 처음부터 싹둑 잘라먹고 소리 지르는 도지윤에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말하기로 결정했다.

“그래. 지윤아. 네가 화가 나서 그랬다는 거 이해했어. 그러니까 이번 주까지만 오지 말라는 거야. 안 그랬으면 이번 달 내내 못 오게 했어.”

“형….”

도지윤이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다급하게 나에게 말한다.

“그럼, 형이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만지고 싶으면? 키스하고 싶으면?”

“아 쫌! 이번 주까지 참아보라고! 내가 어디 해외를 가니? 어디 멀리 가? 거기다 오늘 수요일이라고!”

“일요일까지 형을 못 보는 건 가혹하잖아요….”

나는 두 손을 들어 내 가슴에 대고,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러지 않으면 도지윤을 향해 쌍욕을 퍼부을 것 같았다.

“그래 지윤아. 금요일까지 안 오는 걸로 하자. 알겠지?”

그렇게 하고 나서야 나는 웃고 다정하게 말하며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지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형.”

나는 이제 도지윤에게 그만 꺼지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고개를 숙여 시무룩한 도지윤이 다시 입을 열어와 조용히 기다려야 했다.

“저녁 먹었어요?”

“…아니.”

그러자 도지윤이 다시 고개를 들어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녁 먹으러 갈래요?”

“아니.”

“4구역에서 유명한 초밥집이에요.”

상큼하게 웃으며 초밥집의 이름을 말하는 도지윤의 얼굴을 어이없이 쳐다보는데, 순간 초밥집의 이름이 너무 익숙하게 들렸다. 예전에 4구역의 맛집 리스트를 봤을 때 포스팅이 엄청났던 초밥집이었다. 꼭 가겠다고 핸드폰으로 캡처까지 해놨던 집인데.

초밥을 떠오르니 갑자기 입안에 침에 고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방금 전에 ‘들어오지 마!’라고 외쳤던 자존심이 허락의 말을 내뱉으려고 하는 내 혀를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

“제가 살게요.”

나는 도지윤이 예쁘게 눈웃음치며 말하는 모습에, 반쯤 기운 마음을 다시 다잡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나의 망설임을 기민하게 눈치챈 도지윤이 더 환하게 웃더니 내 손을 붙잡았다.

“진짜 맛있는 집이에요.”

“…….”

“제가 오늘 잘못했으니까, 사죄의 의미로 꼭 사고 싶어요.”

“…기다려.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도지윤이 사죄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가이드 실장이었지만, 그 부분은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차 키를 챙겨 도지윤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

4구역의 유명 호텔에 위치해 있는 식당의 초밥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바로 한 시간 전까지 생생한 도지윤을 향한 어이없음과 속 터짐이 초밥의 생선 살처럼 입에서 사르르 녹아버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젓가락을 잡고 있던 손이,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술잔을 잡고 있었고, 또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호텔 룸에서 도지윤의 멱살을 잡고 키스를 하고 있었다.

“…도지윤. 너 나 초밥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지.”

이미 일은 다 치르고, 식욕과 성욕이 충족된 상태에서 마지막 수면욕을 채우기 위해 육체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옆에서 도지윤이 부추기듯이 엎드려 누워있는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며 얼른 잠에 들라고 등을 떠밀고 있었다.

“네?”

도지윤이 팔을 괴고 여전히 내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며, 나를 따뜻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혹시 내 술버릇도 아냐?”

“술버릇이요?”

“…아니야.”

나는 도지윤을 쳐다보던 고개를 다시 시트에 묻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싶다.

도지윤에게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게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호텔방에서 도지윤과 같이 침대에서 뒹굴다니. 집에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조금도 의미가 없는 지금 이 모습에, 나는 초밥의 유혹에 넘어간 내 머리를 한 대 치고 싶었다.

“형.”

“응?”

“내일은 대게 먹으러 갈래요?”

시발.

“너 일부러 이러냐?”

“네? 요즘 대게 철이잖아요. 형한테 미안해서 제가 사주고 싶어요.”

“그 대게 가게도 호텔에 있는 데고?”

“…….”

도지윤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잠시 멈칫하더니, 곧바로 몸을 내려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집에만 안 가면 되는 거잖아요.”

침대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떼어내, 다시 도지윤을 바라보았다. 이젠 바로 내 옆에서 마주하는 도지윤의 곱게 접힌 만족스러운 눈동자가 침대 옆 스탠드의 주홍빛을 품고 있었다.

“아,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자고, 새벽에 데려다줄게요.”

“넌 차도 없는 놈이 뭘 그렇게 당당하게 얘기해.”

도지윤의 차는 그의 ‘운전 미숙’으로 이미 저세상 길을 떠나고 말았기에 이곳에 올 때도 내 차를 타고 왔었다. 내일 새벽에 도지윤을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숙소로 복귀하려면 몇 시에 일어나야 할지 머릿속으로 가늠해 보자 절로 인상이 팍 써졌다.

어쨌든 출근은 내일 아침의 이재하가 걱정해야 할 문제고, 현재의 나는 졸음이 뼛속까지 들이찬 상태라 눈이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이제 곧, 대리님 납치하면 하루 종일 이렇게 있을 수 있겠죠?”

“야… 그놈의 납치는.”

“납치가 싫으면 각인해 줘요.”

“각인은… 좀 기다려봐.”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사이로 나는 도지윤의 말에 웅얼웅얼 대답을 해주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요?”

아까까지 수마로 밀어 넣던 도지윤은, 이제 다시 나를 깨우겠다는 의지로 내 어깨를 살짝 따끔하게 깨물었다.

이미 흐릿해지는 시야를 간신히 들어 도지윤을 바라보니, 그가 맹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각인하려면?”

“…더 나은 가이드가 나타날 거야.”

눈이 거의 감겨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으로, 나는 말을 한 건지 도지윤에게 텔레파시를 보낸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이제는 더 이상 들 수도 없는 무거운 눈꺼풀을 닫고 의식이 완전히 수면으로 잠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까무룩 어둠 속으로 잠기기 직전, 완전한 수마의 세계로 인도하는 도지윤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살짝 내려앉았다가 다시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그럴 일 없어요.”

***

“야. 이재하.”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배정화.”

그곳엔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서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해? 하는 의문을 가득 담아 쳐다보자, 이상하게 내 기억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배정화가 날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너 멀쩡하냐?”

“어? 뭐가?”

“너 선배랑 싸웠다며.”

“…선배?”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며, ‘선배’가 누구지? 하고 곰곰이 고민하는데, 배정화가 손을 들어 검지로 한쪽을 가리킨다. 그곳엔 하얀 가이드복을 입은 익숙한 뒷모습의 사람이 복합기 앞에서 복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내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정보에 나는 표정을 바꿔 배정화에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어. 맞아. 나 선배랑 싸웠어.”

“이번엔 왜 또 싸웠는데? 아주 깨가 쏟아지게 사귀던 건 언제고.”

“…왜 싸웠더라. 아무튼 화가 엄청 났었는데.”

그러나 정보는 완전하지 않아 내가 선배와 왜 싸웠는지,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기억이 나는 건….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정화야.”

“어.”

“선배 얼굴을 보니까 화가 풀렸어.”

“이 미친놈이.”

그렇다.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것이었다.

“기억났어. 이 말 하려고 했구나. 선배랑 맨날 싸워서, 헤어지려고 하는데. 자꾸 선배 얼굴만 보면 마음이 풀어져. 어쩌지?”

다급히 내뱉는 내 말에, 배정화가 나를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얼굴만 보지 말고, 인성을 보라고!”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데, 어떻게 하라고.”

억울하다는 듯이 배정화를 보자, 배정화가 다시 검지를 들어 ‘선배’를 가리켰다.

“저 얼굴이 그렇게 좋냐?”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갑자기 ‘선배’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라는 벽에 부딪혔다. 내가 좋아했던 얼굴이 분명한데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복사를 다 끝낸 선배가 몸을 돌렸다. 조금 뛰는 심장을 느끼며,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돌아가는 ‘선배’의 몸을 기다렸다. 그리고 완전히 정면에서 마주한 얼굴은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유리처럼 반질반질한 검은색 눈동자, 살짝 도드라졌지만 부드럽게 이어지는 턱선, 무표정으로 있을 땐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위압적으로 보이지만, 웃을 때면 아래 애교살이 올라오고 눈꼬리가 아래로 휘면… 응?

내 앞에 드러난 ‘선배’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난 자연스럽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갑자기 내 생각을 뚝 끊어버리는 ‘부자연스러움’에 멈칫하다 다시 ‘선배’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도지윤이잖아?”

“뭐?”

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확신에 찬 어조로 중얼거리자, 옆의 정화가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내 말에 맞은편의 도지윤이 천천히 나와 시선을 마주 해오더니, 언제나 내게 보여주었던 맹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재하야.”

꽃처럼 붉은 입술을 열어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조금 울컥했다.

저 새끼가. 내가 나이 많다고 소리를 지른 게 그저께인데!

“야! 내가 ‘재하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연상의 위엄을 폴폴 풍기며 근엄하게 말하자, 배정화가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른다. 정화를 바라보니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선배한테 미쳤냐?”

“배정화. 너야말로 미쳤냐? 저게 무슨 선배야. 도지윤이지.”

“도지윤이 누군데?”

“도지윤이 도지윤이지. 4구역 S급 에스퍼! 내가 그때 너한테 썸 타고 있다고 얘기했잖아.”

“선배 놔두고 다른 애랑 썸 타고 있다고?”

쓰레기 바라보듯 나를 쳐다보는 정화의 시선에, 얘가 미쳤나 하는 생각으로 나는 좀 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뭐래. 선배랑 끝난 지가 언제인데. 선배는 내가 신입 때 사귀던 옆 팀 김 주임이잖아! 쟨 도지윤이고!”

“선배랑 끝났다고?”

“그래!”

“그럼 쟤는?”

배정화가 검지를 들어 다시 다른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바닥에서 솟아난 것처럼 한 사람이 뒤돌아 서 있었다. 내 시선이 그곳을 닿자마자 검은 에스퍼복을 입은 사람이 나를 돌아보았다.

“재하야.”

김강민이었다.

“쟨 왜 여기 있어.”

얼굴을 가득 찌푸리며 혐오감을 가득 담아 말을 뱉어내자, 정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다시 열었다.

“쟤도 끝났어?”

“당연하지! 나 쟤한테 차였잖아.”

김강민이 한 발자국 나에게 다가오자, 나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쟤랑 진짜 끝낸 거 맞아?”

“야, 그럼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놈이 나랑 이미 끝낸 거지. 안 끝낸 거겠냐?”

“왜?”

나는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배정화를 돌아보았다. 정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쟨 에스퍼고, 넌 가이드잖아. 결혼이야 했다 쳐도, 각인은 너랑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너 미쳤냐?”

“이혼하고 애만 들고 오라 해.”

“와. 배정화, 너 쓰레기 같은 말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쟤랑 각인해.”

다시 배정화가 검지로 도지윤을 가리켰다.

“야! 각인이 무슨 커피에 설탕 넣을지 말지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말할 건 아니지!”

“왜 안 돼?”

“…정화야. 각인은 쌍방의 신뢰에서 시작을 한단다. 내가 신입 때 배웠던 가이드 이론을 차근히 설명해줘야겠냐?”

“아. 그렇지.”

배정화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 어차피 저 둘 다 각인할 생각 없잖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오늘따라 이상한 배정화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배정화가 무표정하게 시선을 마주 해온다.

오늘 배정화는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대답은 해 줘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

눈을 번쩍 떴다. 한순간에 잠이 깨고 나서도, 나는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 않아 그 자세로 계속 눈을 깜빡이고만 있었다.

별 이상한 꿈이 다 있다. 도대체 신입시절 잠깐 만났던 ‘선배’는 왜 언급된 것이며, 김강민, 도지윤은 왜 나온 것일까. 오랜만에 술 마셔서 개꿈을 꾼 걸까.

“아, 일어났네요. 안 그래도 이제 슬슬 깨우려고 했는데.”

씻고 나온 건지 샤워가운을 입은 도지윤이 내 위에 엎드리더니 목덜미와 어깨에 가볍게 키스를 한다.

“…몇 시야?”

“6시요.”

도지윤은 본격적으로 내 위에 올라타더니 혀를 내밀어 목덜미를 핥았다. 나는 아침부터 들러붙는 그를 떼어내기 위해 손을 들어 도지윤의 고개를 밀어냈지만 곧 손을 잡혀 손목을 씹으라고 내어주어야 했다.

“안 돼. 출근해야 한다고.”

“딱 한 번만 하고 가면 안 돼요?”

“안 돼 안 돼.”

나를 깔고 앉은 도지윤을 힘을 주어 밀어내자, 그는 순순히 내 위에서 물러났다. 씻으러 들어가는 내 뒤에 대고 도지윤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물어왔다.

“아, ‘선배’가 누구예요? 잠꼬대하던데.”

“…….”

하지만 나는 모른 척 샤워실 문을 닫아야 했다. 저 질투 많은 놈이 내가 가이드하고도 사귀었다는 걸 알면, 난 이제 가이드들하고도 대화를 못하겠지.

결국, 씻고 나오자마자 달려드는 도지윤을 밀어내지 못해 나는 도지윤을 집으로 데려다주지 못했다. 도지윤은 택시를, 나는 내 차를 몰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 약속을 잡으려는 도지윤을 비웃으며 진짜 내일까지는 반성하라고 작은 딱밤을 놓았다. 제발. 제발. 사고 좀 치지 말라고 사정도 같이 하며.

급하게 숙소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아슬아슬하게 출근을 완료해, 커피와 함께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가이딩 업무와 함께 연말이라 밀려드는 보고서 작성 업무들을 힘겹게 쳐내며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내내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어서 뻑뻑해진 눈을 누르고, 참고하느라 뽑아놨던 다른 자료들을 파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에서는 페이퍼리스를 부르짖고 있지만 말뿐인 외침으로, 보안 때문에 이면지로조차 사용을 못 하게 하는 종이들은 수없이 갈려나가고 있었다. 나무야, 미안해.

기계적으로 A4를 집어 파쇄기에 집어넣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회사 생활의 경험으로 보아, 결재판이 책상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윤 주임!”

“네… 넵!”

파쇄기는 가이드 1~3팀이 모여 있는 사무실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덕분에 이 위치는 다른 팀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전방위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자리였다.

김 대리의 자리는 파티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앉아 있을 김 대리 옆에 서서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윤 주임은 매우 잘 보였다.

다시 한번 결재판이 책상을 퍽퍽 내리치는 소리가 들리고 김 대리가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보고서 이따위로 쓸 거야? 어? 너 지금 아버지가 가이드 실장이라고 개기냐?”

“아닙니다!”

“아니면 내가 우습냐? 이런 걸 보고서라고 들고 오면 도대체 나는 뭐라 해야 하는 거냐?”

입사한 지 한 달이 됐을, 혹은 한 달도 안 됐을 윤 주임은 벌써부터 가이드 2팀의 연말 보고서 작성자로 낙점이 되었나 보다. 보통 연말 보고서는 가장 중요한 보고서라, 팀의 최고참이 쓰는 것이 맞았지만 가이드 2팀에서 김 대리는 그 책무조차 밑의 직원에게 넘겨버렸다.

“죄송합니다. 김 대리님. 제가 신입이라….”

“신입이면 뭐. 회사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데 신입이고 나발이고 돈값은 해야 할 거 아니야.”

그 돈. 지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데 더럽게 생색낸다.

“아니면 너. 도지윤 ‘임시 전담 가이드’라고 뻐기냐? 어? 네 에스퍼가 S급이라고 지금 잘난 척하는 거냐고.”

“아닙니다!”

“보고서 이따위로 써와서 나한테 들이밀면, 이걸 내가 실장님한테 보고를 어떻게 하냐고!”

그럼 네가 써서 네가 보고하면 되지, 왜 일은 다른 놈한테 시키고 생색은 네가 내려고 하냐.

안 그러려고 노력했지만 김 대리가 하는 말의 개소리를 하나하나씩 속으로 받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팀의 일이라 차마 끼어들 수가 없어, 조용히 윤 주임의 울 것 같은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혹시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방향이라도 알려주시면….”

“야! 그런 걸 알려줄 거면 그냥 내가 작성하고 말지. 연말이라 이거 말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 해?”

아마 연말 업무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바쁜 일은 저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일 것이다.

다시 결재판으로 책상을 팡팡 치며 윤 주임에게 악다구니를 써대는 김 대리에게 속으로 욕이나 퍼부어 주었다. 회사에서 남의 일에 오지랖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윤 주임의 울 것 같은 얼굴이 자꾸 마음에 걸려 나는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김 대리.”

약간 목소리를 크게 내 소리를 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김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한다.

“네. 이 대리님.”

“거 가이드 2팀만 쓰는 사무실도 아니고 좀 조용히 합시다. 연말이라 신경 날카로운 건 이해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배려해야죠.”

“아. 죄송합니다. 너무 화가 나서….”

웅얼거리며 나에게 사과하는 김 대리에게, 손사래를 치며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갔다.

“윤 주임. 내일 아침까지 내 자리에 보고서 다시 써서 올려놔.”

시간은 거의 퇴근 전이었지만, 김 대리는 양심도 없이 저 말을 내뱉었다. 시간 외 수당이라도 지가 주던가.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반항을 모르는 신입은 그저 순종적으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정리를 좀 하자마자 바로 퇴근 시간이 되었고, 퇴근 스타터 주 주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말을 외친다.

“수고하셨습니다!”

주 주임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자, 그 뒤를 김 주임과 이 주임이 따라 나가고 마지막에 최 주임이 가방을 집어 들며 나에게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 대리님. 퇴근 안 하세요?”

“아, 오늘 야근 좀 하려고요. 연말 보고서, 느낌 왔을 때 다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작게 웃으며 대답하자, 최 주임이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이 대리님. 먼저 퇴근해서.”

“아닙니다. 제 일인데요, 뭘. 내일 봐요. 최 주임.”

“넵. 수고하셨습니다!”

모니터에 거의 다 써놓은 보고서를 띄워놓고, 마우스를 드르륵드르륵 움직였다.

윤 주임은 타 센터에 가이드 실장 아버지를 두고서도 빽을 써먹기는커녕 아버지의 압박에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해야만 했다. 팀에서는 김 대리가 지랄거려, 어제 얼굴을 보니 도지윤도 지랄거리는 것도 같고, 아마 가이드 실장도 지랄하고 있겠지.

‘귀족 가이드’라는 꼬리표를 달고도 귀족은커녕, 천민의 생활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회사에서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도 아니고, 오지랖을 부려서도 안 된다. 하지만 김강민과의 엿 같은 가이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어쨌든 윤 주임의 도움 덕분이었기에 나도 작은 보답을 해야겠다.

시계를 흘끗 쳐다보니 6시 30분이 지나고 있었고, 사무실에는 나와 윤 주임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윤 주임의 자리로 다가갔다.

“윤 주임.”

모니터에 보고서를 띄워놓고, 출력해놓은 자료들을 이리저리 들춰보고 있던 윤 주임은 내가 부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네, 넵!”

“…왜 이렇게 긴장해요. 야근할 거 같은데 저녁 식사 안 해요?”

“아….”

윤 주임이 입꼬리를 올려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대답했다.

“저녁 생각이 없어서요. 이거 빨리 쓰기도 해야 하고….”

우울하게 말끝을 흐리는 모습을 보니, 시발시발 하며 보고서를 썼던 내 신입 시절 기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래요. 차라리 저녁 안 먹고 빨리 쓰고 집에 가서 쉬는 게 낫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하자, 윤 주임은 그제야 더 자연스러운 미소로 내게 응대했다.

“아까, 김 대리한테 보여줬던 업무 보고 자료, 나한테도 좀 보여줘 봐요.”

윤 주임은 내 요구에 눈을 몇 번 껌뻑이더니 김 주임에게 보여줬던 결재판을 그대로 나에게 주었다. 결재판을 받아들고, 나는 윤 주임 옆자리 직원의 의자를 끌어당겨와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었다.

“원래, 업무 보고 자료는 다른 팀 보여주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죠?”

윤 주임의 얼굴을 흘낏 보자, 윤 주임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김 대리가 그런 것도 안 알려줬나 보다.

“…그래서 다른 팀에 보여달라고 요청했는데, 안 보여 주셨던 거군요.”

깨달음을 얻은 듯한 윤 주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내렸다. 윤 주임은 나에게도 보고서를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지만, 아직 안 썼다고 단칼에 거절했었다.

보고서에 집중하자 신입답게 열의가 가득하지만 아직 공직사회의 용어에 익숙하지 않아 저지른 실수들과, 보고서의 틀에 맞추지 못한 여러 양식들이 눈에 띄었다.

“윤 주임. 글자체랑 글씨 크기는 양식에 쓰인 대로 하면 되는데….”

나는 윤 주임의 자리에서 빨간색 볼펜을 하나 뽑아 들고, 보고서의 여기저기를 짚어주며 작성법과 주의 사항들을 조금씩 알려주었다.

“보고서 쓸 때, 일단 조사는 다 빼요. 그리고 작년도랑 재작년 보고서도 같이 보고 있는 거죠?”

“네, 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중하는 윤 주임에게 작게 웃으며 나는 설명을 더 했다.

“제가 2팀의 보고서 방향까지는 설정 못 해주지만, 몇 개 년도 보고서를 보다 보면 2팀이 추구하는 스타일이 있을 거예요. 거기서 크게 변형되는 것 없이 작성하면 될 겁니다. 김 대리가 생각하는 것도 거기서 거기일 거니까요.”

마무리를 지으며 시계를 흘끗 보자, 시간은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도 업무 보고 자료 마저 써야 해서, 늦으면 9시까지는 자리에 있을 것 같아요. 혹시 필요하면 부르세요.”

빨간 펜을 윤 주임에게 돌려주고, 빼 왔던 의자를 자리에 돌려놓자 윤 주임이 갑자기 나에게 입을 열었다.

“저… 대리님.”

“네?”

“…여자는 안 사귀세요?”

엉뚱한 윤 주임의 말에 나는 눈을 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네. 저 남자만 만나요.”

“아….”

안타까움이 섞인 윤 주임의 탄식을 뒤로하고,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가 업무보고 자료에 집중했다.

***

전날, 한 번 더 윤 주임의 보고서를 봐주고 나는 9시가 좀 넘는 시간에 퇴근할 수 있었다. 윤 주임은 그 이후까지 남아있어 정확히 몇 시에 퇴근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침에 내가 출근했을 때, 이미 윤 주임은 출근해 있었고 나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해왔다.

김 대리가 출근하자마자 보고서를 들이민 윤 주임은 사자의 우리에 진입하는 사슴과 같은 모습으로 온몸을 긴장에 떨고 있었다. 한참 보고서를 들여다보던 김 대리가, 결재판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래. 하면 되잖아! 다 내가 윤 주임을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떨떠름하지만 그래도 봐주겠다는 투의 김 대리는, 뒤이어 보고서의 여기저기를 짚어주며 수정을 하라고 윤 주임에게 지시를 했다. 이제 얼굴이 한결 살아난 윤 주임은 결재판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음을 보내왔다.

“대리님.”

“네?”

갑자기 김 주임이 나에게 말을 붙였다.

“…이제 윤 주임이랑 사귀어요?”

나는 잠시 김 주임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전 남자만 만납니다.”

그러자 김 주임이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짝사랑인가 보네요.”

“네?”

“짝사랑이 제일 재밌긴 하죠.”

혼자 중얼중얼 말하던 김 주임은 가이딩 패드를 챙기더니, 가이딩 업무 간다고 팀을 나가버렸다.

***

금요일 오후. 나는 지원팀의 이메일 한 통을 받고, 다시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김강민의 가이딩 요청이 지원팀을 통해 들어와 있었다. 그냥 못 본 척할까 싶었지만, 이메일을 이미 수신해버렸다. 도망칠까 고민도 했지만 시간은 코앞이었다.

그래서 나는 떨떠름한 기분과 표정으로 가이딩 지원실 303호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역시나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자, 소파에 앉은 김강민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나를 쳐다보았다.

“아. 재하야.”

나를 향해 반갑게 미소 짓는 김강민을 바라보니, 그냥 때려치우고 공사장 노가다나 뛸까 고민이 들었다. 이제껏 가이딩 업무가 기술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렇게 감정 노동을 요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 나도 좆같다.”

김강민의 맞은편에 앉으며 나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야. 너 나한테 왜 이러냐? 그냥 서로 모른 척 좀 하면 안 되냐? 좋게 좋게?”

나는 얼굴에 떠오르는 혐오감과 피곤함을 감출 생각도 없이 한껏 찌푸리며 김강민에게 말을 했다.

“재하야.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씨발. 그놈의 할 말 할 말. 나는 너한테 할 말, 들을 말 없다고. 이거 사귈 때도 내 말은 들어 처먹지도 않더니, 남일 때도 이러네.”

“너랑 사귈 때도 네 말 잘 들었어.”

“말대꾸 꼬박꼬박 하는 거 봐.”

김강민은 안 그래도 처진 눈꼬리를 아래로 더 처지게 웃으며, 두 손바닥을 보이고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재하야. 그게….”

나는 김강민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김강민은 바닥을 한 번 봤다가, 창밖을 한 번 봤다가, 나를 다시 보았다. 그 지랄 같은 시간을 견디며 나는 썩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안해.”

“너 이 씨발. 이제껏 그 말 하려고 사람 귀찮게 한 거냐?”

“아니야. 재하야. 이게 시작인 거지.”

“시작부터 좆같아서 짜증스러운데, 난 네 미안함 받아줄 생각 없다.”

김강민은 검지로 제 턱을 긁적였다.

“…재하야. 안 본 사이에, 입이 많이 걸어졌네.”

“네 덕분이지. 고맙다.”

김강민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게, 미안해. 내가 중간에 다른 여자 만난 건 변명할 여지없이 내가 나쁜 놈이지.”

“내가 너 자기 객관화 들어주려고 귀한 시간 낸 거 아니다.”

“그때, 나 많이 불안했어. 네가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안정되고 싶었어.”

나는 김강민의 개소리에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나쁜 놈인 건 맞아. 하지만 재하야. 네 동기들이 말한 걸 들었는데, 난 1구역에 네 소문에 대해 나쁘게 말한 적 없어. 너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입을 연 적 없어.”

김강민의 목소리가 쨍그랑거리는 가이딩 지원실에, 바닥에서부터 1구역 사람들의 속삭임이 찰랑거리며 차오르기 시작했다.

‘쟤가 에스퍼들에게 그렇게 흘리고 다닌다며?’

‘인생 펴려고 고위 에스퍼들한테만 잘해준다던데.’

‘애가 완전 사치스럽대.’

애써 표정을 유지하며, 나는 손톱을 주먹에 박아 넣었다. 치욕스러운 과거의 조각들이 내 발에 댕그렁댕그렁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있었다.

“재하야. 솔직히 말해서 1구역에는 널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널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잖아.”

내가 과거에 좋아했었던 김강민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목소리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나를 찌르고 있었다.

“어차피 끝난 인연이니까 내가 그렇게 소문을 냈다고 믿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어. 나 너 많이 좋아했어.”

담담하게 조곤조곤 말하는 김강민을 보며, 나는 이미 가라앉아 굳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의 일부가 다시 부글부글 끓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아니라고?”

“응. 나 아니야.”

김강민의 하얀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나는 눈을 꾹 감아버렸다. 1구역의 인연들이 머릿속에서 하나둘씩 떠올랐다가 사라지며 넘실대는 파도를 타고 있었다.

“물론 너도 스트레스 받을 만한 상황인 건 알겠지만, 소문이란 건 그냥 휩쓸고 지나가는 거 알잖아.”

‘누가 누구랑 사귄대.’ ‘누가 누구랑 헤어졌다나 봐.’ ‘누가 누구 때문에 누구랑 싸웠다는데?’

1구역에서 쏟아지는 각종 소문 속에서, 나는 다른 이들과 같이 웃고 즐기고 씹고 뜯고 맛보는 영원한 상위자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만찬 가운데로 내쳐져 손가락질을 감내해야 했을 때는, 영혼이 난도질된 기분이었다.

“나는 네가 그렇게까지 상처받을지 몰랐어. 미안해. 좀 더 적극적으로 너에 대해 해명해 줬어야 했는데.”

김강민의 말에 나는 입술 안쪽 볼을 질겅질겅 씹어야 했다. 이미 여러 번 씹어, 거의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입 안쪽 살은 쉽게도 비릿한 향을 입안 가득 채워 넣었다.

“…너 진짜 네 맘 편하자고,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나불대는구나.”

“안 믿어도 상관없어.”

“아니. 알고 있었어.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여기저기 있었고, 네 말대로 1구역에 날 싫어하는 사람이야 많았지. 내가 무결한 피해자가 아닌 것도 알고 인정해.”

나는 진정을 하기 위해 작게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런데 네가 나한테 말할 건 아니지. 네가 이렇게 잘났다는 듯이 내가 어쩌고저쩌고, 해명을 어쩌고저쩌고 나불댈 만한 역할은 아니라는 거야. 어쨌든 너도 그 소문 다 듣고서, 지랄같이 애매하게 웃으면서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거 아니야. 그게 동조한 거랑 뭐가 달라.”

“…….”

“저런 거 다 제쳐놓고 너는 나한테 이렇게 당당하게 얘기하면 안 되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몰라도, 너와 나 사이에서 나는 영원한 피해자고 넌 영원한 가해자야. 가해자가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 안 하냐?”

“사람 사이에는 영원한 피해자도, 영원한 가해자도 없어.”

“개소리 하지 마.”

“재하야. 나 너 진심으로 좋아했어.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좋아해.”

처음엔 얇은 가이딩 지원실의 벽 너머로 우리의 대화가 퍼질까 봐 조곤조곤 말하던 것이, 점점 격양되어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할 새도 없이, 우리는 우리만의 대화에 빠져들어 갔다.

김강민의 개소리가 절정을 향해 가던 중 벌컥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옆방에서 시끄럽다고 항의를 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도지윤 에스퍼.”

불길이 일고 있던 내 머릿속에, 한 바가지 찬물이 쏟아 부어졌다. 검은색의 에스퍼복을 단정히 입고 맹한 미소를 띤 도지윤이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대리님 목소리가 들려서요.”

평소에 달고 다니는 윤 주임도 없이, 도지윤은 홀로 들어와 가이딩 지원실의 문을 닫고 등을 기대고 섰다.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도지윤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김강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네가 원하는 대화, 할 만큼 했지? 나 간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김강민이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왜 너만 피해자인 척 굴어?”

“피해자가 피해자인 척 구는 게 그렇게 좆같냐? 그럼 너도 피해자 돼보든가.”

얼굴 가득 빈정거리는 표정을 짓고 말하자, 김강민이 큰소리로 나를 몰아붙인다.

“솔직히 말하자. 난 각인을 간절히 원했어. 재하야. 각인을 거부한 건 너야.”

그러나 김강민이 던지는 큰 돌덩이에, 나는 그새 또 도지윤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하. 네가 각인을 원했다고?”

“도대체 내가 얼마나 너한테 더 각인하자고 얘기했어야 해? ‘각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웃으면서 ‘다른 가이드가 나타날 거야.’라고 말한 건 너였어. 기다리라고, 농담처럼 넘긴 건 너였다고.”

“그건 네가!”

김강민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재빠르게 입을 열었지만, 김강민은 제 할 말만 빠르게 지껄였다.

“난 다른 가이드를 원하지 않았어. 재하야. 내가 원한 건 너였다고. 난 얼마나 더 기다렸어야 하는 거였니.”

우리는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날것 그대로의 각자가 받은 상처를 보여주며, 과거에 상대방이 상처 입혔던 상흔들을 누가 더 큰지 자랑하고 있었다.

“너와 각인을 계속 기다리다… 안정되고 싶었어. 나는.”

나는 혼자서 애처로운 척하는 김강민을 잠시 바라보며 입술 안쪽을 씹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아이가 가지고 싶다며. 술 처먹고 와서 펑펑 울면서 내 앞에서 아이가 가지고 싶다고 우는데, 내가 너하고 각인을 어떻게 하냐? 진지하게 말하지 그랬어? 아이 따위 필요 없이 나를 원한다고!”

“그건….”

나는 과거의 연인이었던 사람을 바라보았다. 태울 신경 한 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그를 향해 꽤나 태울 것이 남아있었다. 어이없음이라든가 혐오감이라든가.

“하지만 넌 날 믿지 않았잖아.”

“내가 사람을 잘 안 믿는 건 맞는데, 그래도 난 널 손바닥만큼은 믿었다고. 네가 아이가 가지고 싶다고 내 앞에서 질질 짜기 전까진 나도 각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었어.”

“거짓말하지 마. 넌 나랑 각인할 생각 없었잖아.”

“그래! 연애만 하다가 너한테 매칭률 70퍼센트 넘는 여자 가이드 나타나면, 그대로 사라져 주려고 했어.”

속에 있는 울화를 내뱉다가, 나는 다시 작게 속삭여야 했다.

“그러다가 네가 아이를 포기하면 각인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나는 힘없이 김강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한 과거가 있었다. 이미 흘러 지나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강물처럼, 그런 때가 있었다.

김강민과 함께했던 시간 중, 일부는 ‘각인’을 입에 담기도 싫었던 시간도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원한다며 우는 것을 보는 기분은 처참했지만, 난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고민하고 계획했었다. 내 에스퍼에게 더 좋은 가이드를 만나게 하기 위해 잠시 거쳐 가는 다리가 될지라도, 나는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었었다.

“끝까지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말 안 한 건 너였어.”

하지만 김강민은 내가 예상할 수 없었던 최악의 방법으로, 아이도 얻고 가이드인 내 자존감을 철저히 뭉개버렸다.

다른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가 나타나서 그 사람에게로 넘어간다면, 사람들은 ‘에스퍼란 역시. 쯧쯧.’ 하면서 관대하게 넘어가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가이드가 오죽 못났으면.’이란 손가락질이 나에게로 넘어왔다.

에스퍼들은 이기적이었다. 그 문장은 우습게도 그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관대함과 이해심 어린 시선을 안겨주었다. 어떤 행동을 해도 ‘에스퍼니까.’라는 짧은 문장으로 퉁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에 오히려 상처받는 것은 가이드들이었다.

에스퍼 주제에 가이드보다 ‘아이’에게 집착한 것이 이상하지만 결국 그 이상함도 ‘가이드가 오죽 못났으면.’으로 귀결되는 상황이었다. 1구역에서 나는 무결한 피해자가 아니었지만, 적어도 김강민 앞에서 나는 완벽한 피해자였다.

“그리고 우리가 3년을 만났는데, 네가 날 잘 알듯이 나도 널 너무 잘 알거든. 솔직히 말해. 너 그 여자하고 결혼해서 아이도 얻고, 나랑 각인도 하려고 한 거였잖아. 그래서 네 여자한테 애가 들어선 순간에도, 헤어지기 몇 주 전까지도 나에게 각인하자고 얘기했었잖아!”

속에 있는 과거의 감정들을 토해내며, 나는 마지막 잔여물까지 힘을 모아 뱉어내었다.

“네가 나한테 아이를 포기한다고만 했어도….”

이제는 부질없이 매몰되어 버린 가정을 중얼거리다, 이게 무슨 소용이냐 싶어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 솟아오르는 과거의 격렬한 기억에 울컥이는 감정을 다스리며, 나는 냉정히 말하려 노력했다.

“우리가 각인이 실패한 걸, 모조리 다 내 탓인 것처럼 얘기하지 마.”

내 말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서 있던 김강민은, 곧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얼굴 가득 억울함과 화를 담아 고개를 들었다.

“다 네 잘못이야. 네가 나랑 각인만 해줬어도 난 결혼 안 했을 거야.”

“넌 나와 각인이 됐어도, 결혼했을 거야. 둘 다 포기 못 했을 거니까.”

“아니야. 네가 나를 믿지 못해서 내가 이렇게 된 거야.”

무슨 지랄이야 하고 쳐다보자, 김강민은 도지윤을 가리키며 빈정대며 입을 열었다.

“쟤랑 각인할 거야? 쟤는 믿을 수 있어?”

그러나 김강민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도지윤에게 고개를 돌려, 내가 아닌 도지윤에게 입을 열었다.

“말해봐. 이재하가 네 각인 얘기에 응답해준 적 있어?”

“애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미친놈아.”

“네 미래가 나야. 이재하는 에스퍼들은 믿지 않아.”

“네 덕분에 더 믿지 않는 거지.”

모노드라마 찍고 있는 그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다, 나는 김강민에게서 몸을 완전히 돌려버렸다.

“네가 각인하자고 수십 번 외쳐도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나 간다.”

도지윤은 맹하게 웃으며 똑같은 자세로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이렇게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닌데, 손톱만 한 의심이 들었지만 얼른 이 방을 빠져나가고 싶어 얼른 그 의심을 지워야 했다. 눈이 마주치자 도지윤이 언제나 똑같은 목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말을 한다.

“대리님. 대화 끝났어요?”

“네. 이제 나갈래요.”

도지윤은 신사적으로 문을 열어, 내가 나갈 수 있게 몸을 비켜 주었다. 그리고 내가 문을 나가자마자, 가이딩 지원실의 문은 닫혔다. 나는 당연히 도지윤이 따라 나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문밖에 서 있는 건 나 혼자뿐이었다.

뭐야. 황당해서 눈을 깜빡이며 문을 바라보자, 곧 안에서 와장창 하고 날카로운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겨울의 차가운 냉기를 머금은 손잡이를 재빨리 돌려 문을 열고 들어가 안의 상황을 확인했다.

소파 사이에 있었던 유리 테이블이 산산조각이 나서 방 안 바닥에 핏방울과 함께 이리저리 깨져 퍼져 있었다. 언제 김강민을 바닥으로 패대기쳤는지, 바닥에 쓰러진 김강민 위를 도지윤이 깔고 앉아 주먹으로 김강민의 얼굴을 내려치고 있었다.

“도지윤 에스퍼!”

바닥의 유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도지윤에게 다가가자 김강민의 얼굴은 유리와 도지윤의 주먹으로 피범벅이 되어있었고 도지윤의 주먹도 유리 조각에 스쳐 성하지 않았다. 도지윤은 내 부름에 대답도 없이, 곧바로 손을 내려 김강민의 목을 졸랐다.

나는 깜짝 놀라. 도지윤의 팔을 잡으며, 그의 이름만 목 놓아 불렀다.

“도지윤 에스퍼! 도지윤!”

피떡이 된 김강민의 얼굴과 입술이 하얘지다 못해 파래지는 것이 보이자, 나는 급히 도지윤의 손을 잡아떼어 내려고 했다. 김강민의 목을 조르는 도지윤의 하얀 손에는 김강민의 피와 도지윤의 피가 엉켜 있었다. 본격적으로 도지윤의 손을 잡아떼기 위해,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고 했지만 허공에 애매한 자세로 고정되어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능이었다.

“도지윤 에스퍼!”

고개를 숙여 김강민을 바라보느라 내 쪽에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던 도지윤은, 그제야 나를 바라보았다. 나의 놀란 얼굴이 도지윤의 동공에 반사되자, 그제야 김강민의 목에서 손을 푼 도지윤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애매한 자세로 굳어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당황스러움에 표정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도지윤을 바라보자니 도지윤이 맹하게 다시 웃음 지으며 평소처럼 느릿느릿 말을 한다.

“대리님. 바닥에 유리가 많아요. 다쳐요.”

도지윤의 뺨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방울이 몇 방울 튀어 있었다.

방금 전에 퓨즈가 나간 듯한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는 듯, 도지윤이 다정하게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지만 그 손에도 피가 가득이었다.

밖에는 이미 이 난장판을 구경하러 온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흘낏거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죽을 위기를 넘긴 사람은 바닥에 누워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는 김강민이었지만, 나는 김강민을 무시하고 도지윤을 이끌고 의무실로 향했다. 피로 범벅이 되어있는 손을 차마 만질 수 없어, 도지윤의 팔뚝을 잡고 이끌자 도지윤은 영혼 없는 죄수처럼 나의 손길에 순종적으로 움직였다.

간호사 없는 의무실의 침대에 도지윤을 앉혀 알코올 솜으로 손을 살살 닦아내자 의외로 큰 상처는 거의 없었다. 유리에 긁힌 상처가 서너 군데 있었는데, 얇은 상처인 것 같아 그냥 약만 바르고 말았다.

“도지윤 에스퍼.”

한숨과 함께 도지윤을 부르자, 그가 맹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도지윤은 내 손을 잡아 제 뺨에 붙여 부비적거렸다.

“왜 그랬어요.”

내 질문에 도지윤은 손을 들어 아예 나를 끌어안고 내 배와 가슴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좋아해.’라던데.”

그리고 내 질문은 무시하며 제 할 말을 뱉어내었다.

“…걔랑 다 끝난 인연입니다. 신경 안 써도 돼요.”

“형. 재하 형.”

“도지윤 에스퍼. 좀 회사에서는….”

도지윤이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예쁜 눈이, 눈꼬리를 휘며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말해 줄 생각이었어요?”

“도지윤 에스퍼.”

“매칭률이 70퍼센트가 넘은 에스퍼 새끼를, 내 앞에서 돌아다니게 해요?”

부드럽게 웃는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분노에 찬 목소리에, 나는 도지윤을 달래기 위해 이름을 불렀다.

“도지윤.”

“감히, 둘이 같이 저 방에서, 내가 없는 곳에서 단둘이 있어요?”

“정말 그 사람이랑은 아무런 인연이 아닙니다. 아니, 이미 끝난 인연이에요.”

“말을 했어야죠. 내가 몇 번이고 물어봤었잖아요.”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서 말 안 한 겁니다. 도지윤 에스퍼가 신경 쓸 만한 인물이 아니에요.”

“왜 신경 쓸 만한 인물이 아니에요.”

도지윤의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듯한 얼굴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그는 오히려 손을 들어 내 등허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화를 내고 분노를 억누르는 것은 도지윤 본인이었지만, 마치 내가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다는 듯 도지윤은 나를 도닥이고 있었다.

“형하고 매칭률이 70퍼센트가 넘고, 거기다가.”

거기까지 말한 도지윤의 표정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천천히 표정을 지운 도지윤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내 미래의 모습이라잖아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그런 개소리를 믿습니까.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인 겁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형한테 선택받지 못한 내 모습이라잖아요.”

“도지윤 에스퍼.”

도지윤의 예쁜 눈이 점점 반질반질하게 풀려가는 게 보였다.

“난 형의 뭐예요?”

“네?”

“우린 무슨 관계에요?”

“…….”

“저 새끼는 ‘전 남친’, ‘각인할 뻔한 사이’라는 타이틀이라도 있지. 난 뭐예요?”

“그게 중요합니까.”

“네.”

난 한숨을 내쉬며 도지윤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우리의 관계는 무엇일까.

머리를 굴리며 고민을 해봐도 우리 사이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이는 유리 같은 관계 정의는 되어있지 않다. 다만 서로 마음으로만 쓰다듬을 수 있는 애매한 어림짐작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의 관계를 나타낼 수 있는 단어 중, 가장 선명하고 가장 확실하며 누구에게 말해도 인정할 수 있는 단어를 뽑아 들었다.

“회사 동료입니다.”

가장 최악의 답변이었다.

“그거뿐이에요?”

방금 전까진 도지윤은 웃는 얼굴에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를 냈다면, 이번의 도지윤은 무표정한 얼굴에 부드러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를 내었다. 마치 나를 꾀어내겠다는 듯이.

나는 입을 몇 번 달싹이고 우리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립해보고 수 시간 같은 수초가 지난 다음에 간신히 대답을 뱉어내었다.

“아마, 썸?”

나는 도지윤이 나에게 말했던 수많은 말들 중, 나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믿었다. 나는 가이드였으니까, 그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나는 도지윤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반만 믿었다. 에스퍼들은 이기적이었고 제 생명 유지를 위해, 더 강력한 수단이 나타나면 나 따위는 잊었다는 듯이 돌아섰다.

김강민만 하더라도 그랬다. 나는 그를 개쓰레기지만, 그래도 사랑에 미쳐 가이드를 버린 또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가이딩을 확보한 상태에서 본인에게 가장 최상의 상황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도지윤이 다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은 나 안 믿죠?”

“…….”

“김강민을 안 믿듯이?”

나는 여전히 나를 꽉 껴안은 도지윤의 팔을 어루만지며, 입사 2년 차 때 꽐라가 되어 펑펑 울던 배정화가 부르짖었던,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던 그 말을 도지윤에게 해주었다.

“회사 사람은 믿는 거 아닙니다.”

결국 내가 사랑했었던 김강민도, 고작 회사 사람에 지나지 않았었다. 우리의 관계가 증명해 보였다.

도지윤 다시 고개를 숙여 내 품에 파묻었다. 그러나 나의 냉정하고 정떨어지는 발언에도, 도지윤은 내게 팔을 떼지 않고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나는 그런 도지윤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울한 생각에 잠겼다.

나는 또 상처받기 싫었다. 도지윤과 김강민은 다르지만, 난이도는 도지윤이 훨씬 더 높았다. 믿음의 퍼센티지, 회사의 간섭, 가이드 실장의 지랄. 단순한 연애라고 보기에는 도지윤은 나에게 너무나 많은 희생과 손가락질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가고 나서도, 마지막에 ‘변심’이라는 단계를 직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것이 에스퍼의 마음인지라 나는 아직도 그들에게 믿음을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품에 안긴 에스퍼의 작고 동그란, 검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가녀리고 약해 금방이라도 피 흘리며 쓰러질 것 같은 도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정적인 상상 속의 미래와 내가 만지고 있는 동정심 사이에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렸을 적부터 고통 속에서 외롭게 살아온 이 여린 에스퍼에게, 나보다도 훨씬 전부터 타인의 손가락질과 평가의 틈에서 자라온 도지윤에게 흠 많고 모자란 나까지 상처를 줘도 되는 건가 싶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얼마 전의 기억이 생생한데, 그 이후로 나는 도지윤을 웃게 만들기는커녕 불안에 떨게만 만들었다. 심지어 도지윤이 그동안 친 사고조차도, 과격했지만 모조리 다 나를 위한다는 핑계가 있었다.

내가 입으로 작은 한숨을 내뱉자, 도지윤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도지윤 에스퍼.”

“…네. 형.”

내가 나지막이 도지윤을 부르자, 도지윤은 여전히 나를 껴안고 내 품에서 고개를 떼지 않고 대답을 해온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아까 들어서 잘 알겠지만, 김강민 에스퍼하고는 3년을 만났어요. 각인은 하려고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실패했고, 걔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걔 졸라 싫어해요.”

도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분히 단어를 골라 말을 시작했다.

“각인을 실패한 이유는… 걔한테 있든 저한테 있든 어쨌든 걔가 한 말 중에 맞는 건 전 사람, 특히 회사 사람은 잘 못 믿는다는 거예요.”

말을 내뱉으면서 앞에서는 나를 위로하는 척 참담한 얼굴을 했지만, 뒤로는 나를 비웃으며 손가락질해댔을 1구역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개중에 특히 에스퍼는, 김강민 덕분에 더 잘 못 믿게 될 거 같아요.”

안 그래도 나를 꽉 껴안은 도지윤은, 이제 내 허리를 끊어먹을 듯 힘을 주었다.

“힘 좀 풀어요. 아파요.”

그러나 내가 도지윤의 팔을 톡톡 치며 말하자, 도지윤이 살짝 힘을 풀었다.

“그래도 도지윤 에스퍼. 난 여전히 사람을 잘 못 믿지만….”

도지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그대로 그의 머리를 내 품으로 더 끌어당겼다.

“그래도 도지윤 에스퍼는 좋아해요.”

마음속에 제 알아서 씨가 뿌려지고, 뿌리가 내려오고, 줄기를 세워 이제 만개까지 해버린 내 본심을 더 이상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감추려 해보았지만, 도지윤의 애처로운 모습에 더는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네?”

도지윤이 내 품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좋아해요. 도지윤 에스퍼.”

나는 보고서의 한 줄을 읽듯이, 수치에 근거한 결과값을 말해주듯이 덤덤히 입을 열어 고백했다. 그러나 도지윤의 놀란 듯 크게 뜨인 눈동자를 마주하자, 나는 순식간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닫고 얼어 버렸다. 수 초간 움직임이 멈추고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에, 나는 손을 들어 도지윤의 눈을 가려 버렸다.

“손 치워봐요.”

도지윤은 여전히 나를 껴안은 손을 풀지 않은 채,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 나를 바라보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나는 필사적으로 도지윤의 얼굴을 손으로 눌러 내 얼굴을 못 보게 했다. 그러자 도지윤은 움직임을 멈추고, 손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한다.

“다시 말해줘요. 형.”

“…싫어요.”

“날 좋아한다고요?”

“모릅니다.”

정신을 차린 내가 최대한 냉정하고 딱딱하게 말했지만, 이미 도지윤은 구름 위를 둥둥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기분 좋은 모습에 나도 작게 웃고 눈을 가린 손을 도지윤의 뺨으로 옮겨 잡았다. 다른 쪽 손도 들어 그의 양쪽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냉정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좋아한다고 했지, 믿는다고는 안 했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덧붙였다.

“하지만 믿도록 노력해 볼게요.”

두 눈을 반짝이며 곱게 접은 도지윤은 행복한 듯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하며, 나도 작게 미소를 띄웠다. 내가 원한 건, 내가 도지윤에게서 보고 싶었던 것은 이런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도지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기분이 좀 풀렸어요, 도지윤 에스퍼?”

“네! 그럼 이제 나랑 사귀는 거예요?”

아까 성난 모습의 도지윤은 어느새인가 사라지고, 행복해 폴짝폴짝 뛰어다닐 것 같은 모습의 강아지 같은 도지윤만이 남아있었다. 그 귀여운 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내려 도지윤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도지윤 에스퍼.”

“네. 형.”

그리고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지윤아. 뒈질래?”

“아파요! 대리님!”

“야. 아까는 형, 형 잘만 하더니 불리하니까 대리님이라고 하냐?”

“왜요!”

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않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내가 도지윤을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이놈의 사고치는 습관은 고쳐놓아야겠다.

“너! 거기서 걔를 그렇게 피떡이 되게 패버리면 어떻게 해?”

“대리님하고 내 앞에서 ‘각인’ 운운하는데! 그 자리에서 참을 수 있는 에스퍼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도지윤은 지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그답지 않게 빠르게 말했다.

“지금 그 새끼 걱정하는 거예요? 끝난 사이라면서! 왜 날 좋아하는데 그 새끼 걱정해요?”

도지윤은 다시 내 품으로 고개를 묻어버렸다.

“야! 그 새끼 졸라 싫어한다고! 나한테 말을 하든가. 4구역 에스퍼도 아니고, 타 구역 에스퍼를 그렇게 패면 안 되지!”

“에스퍼는 그 정도로 안 죽어요!”

“아오. 속 터져!”

도지윤은 내 허리를 끊어먹을 듯이 다시 세게 끌어안았다.

“야! 손 안 떼?”

“다정하게 대해줘요.”

“지금 존나 다정하게 말하고 있는 거거든?”

“날 좋아한다면서. 왜 화만 내요!”

“지윤아.”

소리 지르는 도지윤을 다정하게 부르자, 도지윤의 행복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불만이 차 있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너, 지금 당장 가서 에스퍼 실장님한테 가서 김강민하고 주먹다짐했다고 말씀드리고, 김강민한테는… 에이, 씨발. 사과는 하든 말든 너 알아서 하고!”

차분히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점점 말할수록 열이 올라와 끝에 가서는 결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손에 힘을 주어 나를 붙잡은 도지윤의 팔을 잡아떼어 버렸다.

“너 그리고 주말에도 우리 집 출입 금지야.”

“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오늘까지였잖아요!”

“넌 그럼 그 사고를 쳐놓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냐? 안 돼. 반성해!”

“너무해! 나 좋아하는 거 맞아요?”

“너 좋아해. 존나 좋아해. 시발. 욕 나올 정도로 좋아한다고! 그런데 저건 아니지 인마!”

내가 의무실을 나가려고 하자, 도지윤이 재빠르게 다시 내 허리를 잡는다. 그 손에서 벗어나려고 용을 쓰면서 나는 놓으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야 했다. 기필코 도지윤의 손을 잡아떼어내고, 의무실을 벗어나자 도지윤이 뒤에서 소리를 지른다.

“다음 주가 끝이에요!”

몰라 인마!

내가 잊고 있었던 문제를 상기시키는 소리에, 나는 씩씩거리며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나는 도지윤을 의무실에 버려놓고 솟아오르는 위액에 급히 양배추즙을 찾으며, 팀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주 주임이 나를 보며 울 기세로 달려왔다.

“대리님!”

“네. 주 주임. 무슨 일입니까?”

“1구역에서 온 예쁜 에스퍼랑, 도지윤 에스퍼가 대리님을 두고 주먹다짐했다면서요?”

씨발.

“…누가 그럽니까?”

“그래서 도지윤 에스퍼가 이겼다면서요. 왜죠? 왜 그런 거죠? 왜 1구역의 에스퍼는 정신계인 거죠?”

나는 차마 주 주임에게, 1구역의 에스퍼가 내 전 남친이며 이미 결혼을 했고 바람나서 나를 찼으며, 걔가 나하고 다시 만난다는 게 더 큰 충격일 거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김강민. 이 시발새끼.’라는 문장 옆에 ‘도지윤. 이 시발놈.’이라고 한 줄 더 추가만 해두었다. 앞의 문장은 평생 가겠지만, 뒤의 문장은 주말의 끝과 함께 지울 예정이었다.

“주 주임.”

“네. 대리님.”

내가 조용히 주 주임을 부르자, 주 주임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본다.

“위가 아파요. 휴직할 수 있을까요?”

“헉. 대리님. 많이 아프세요?”

가슴을 부여잡으며 내 자리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주 주임이 옆에서 호들갑을 떨며 양배추즙을 꺼내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 주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이드를 두고 두 에스퍼가 싸운 건 6개월 만의 사건이네요.”

김 주임이 담담하게 말하는 절망적인 사실에, 나는 조용히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금요일 퇴근하기 직전, 가이드 실장에게서 호출이 들어왔다. 왜 성스러운 주말을 앞두고 재를 뿌리는 걸까, 속으로 욕을 하며 나는 얼굴에 비즈니스용 웃음을 장착하고 실장실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앉아요. 이 대리.”

이미 소파에 앉아있던 실장은,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엉덩이를 소파에 붙이자마자 실장은 바로 입을 열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대리. 전에 말했던 것. 대답해 줄 수 있나요?”

“…실장님.”

서론도 없이, 앉자마자 훅 치고 들어오는 강한 스트레이트에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어색한 미소를 띠며 시간을 끌었다.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요즘 터지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대리.”

실장이 자애롭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나는 가이드고, 기본적으로 가이드 편이에요. 특히나 도지윤 그 새끼. 알죠? 운전 미숙으로 내 차를 박살냈더라고요.”

거기까지 말한 실장은 빡쳤는지 심호흡을 했다. 그러더니 곧바로 생긋 웃더니 능숙하게 말을 이었다.

“뭐, 덕분에 새 차로 바꾸네요. 어쨌든, 나는 도지윤보다 이 대리에게 더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여요.”

“감사합니다. 실장님.”

“그래서… 이 대리는 달갑지 않겠지만 다시 한번 말하자면.”

실장이 눈을 내리깔고 밑밥을 깔았다.

“에스퍼들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어봤죠?”

“…네?”

“전 미각인 시절에 수백 번은 들었던 것 같네요. 매칭률이 높든, 낮든 에스퍼 놈들은 하나같이 좋아한다며 들러붙죠.”

“아… 예.”

실장이 젊은 시절 자기 잘나갔다고, 자랑하려고 날 부른 건가?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가 나타나면 재빠르게 갈아타죠. 뭐, 거의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가버리는데 처음엔 황당하더라고요.”

과거의 먼 곳을 바라보며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실장의 모습이 낯설었다.

“알잖아요. 이 대리. 그렇게 쓰레기같이 굴어도 에스퍼들은, ‘에스퍼잖아.’라는 문장 한마디로 다 이해를 받는다는 것.”

나는 맞는 말을 하는 실장에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게 수 번 반복이 되면, 점점 에스퍼들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거죠.”

“…….”

“믿을 수 있어요? 도지윤 에스퍼를?”

“…여기서 대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죠. 개인적인 문제니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깊이 빠지지 말라는 거예요.”

저 문장이 나를 위해서인지, 실장 본인을 위해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언 비슷한 걸 받은 입장에서 좆같지만 나는 입을 열어야 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실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실험으로 돌아가서, 도지윤 에스퍼를 실험에 참가하게 해야 해요.”

“실장님….”

“그때도 말했지만, 에스퍼와 가이드에게 엄청난 자유를 가져다줄 거예요. 그리고 이 대리 개인적으로는 도지윤의 진심을 가릴 수 있겠죠.”

“…….”

“둘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제가 보기에 도지윤은 이 대리의 가이딩에 집착하는 거예요. 도지윤이 가이딩에게서 자유로워지면, 그때 도지윤이 이 대리에게 취하는 태도에서 그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얄미울 정도로 내 심장에 콕콕 박히는 말을 하는 실장에게, 입을 열어 반박을 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힘없는 일개 대리였다. 그저 주먹을 꼭 쥐고, 손톱을 손바닥에 박고 실장이 하는 개소리에 흔들리지 않으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

너는 속고 있어. 버려질 거야. 도지윤은 널 떠날 거야. 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우회적으로 끊임없이 속삭이는 실장을 보자니, 이제 실장이 도지윤을 짝사랑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지경이었다.

나는 실장이 하는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아, 급하게 말을 뱉어야 했다.

“실장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잠시 망설였지만, 자세를 똑바로 하고 실장을 바라보았다.

“아까 실장님께서 하신 질문에 답해보자면, 전 도지윤 에스퍼를 믿습니다. 조언은 감사하지만 직원의 사적인 일에까지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실장의 자애로운 표정에는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

“그리고 도지윤 에스퍼에게 실험에 참가하라고도 못하겠습니다.”

눈빛으로 더 이상 말 시키지 말라는 의지를 쏘아 보내자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실장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보라는 몸짓을 바로 캐치한 나는 인사를 하고 미련 없이 실장실을 나갔다. 힘들었던 한 주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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