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7. (17/21)

Chapter 17.

도지윤은 차가운 옥상에서, 나를 비어있는 가이딩 지원실로 데려와 침대에서 나를 끌어안고 토닥거리며 재웠다. 나는 도지윤의 내려앉는 손길을 느끼며 잠들었다가 화들짝 놀라 깨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지켜보고 있던 도지윤은 식은땀이 맺혀있는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내리며 맹하게, 하지만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잠에 취해 나른한 눈으로 가이딩 지원실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도지윤의 낮은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더 안 자요?”

“몇 시예요?”

“두 시요.”

맙소사. 출근해서 한 일이라고는 도지윤하고 대화하고, 가이딩 지원실에서 잔 것이 다다. 이런 월급 도둑 같으니라고. 몸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자, 날 끌어안고 있던 도지윤이 힘을 줘서 못 일어나게 한다.

“일해야죠. 도지윤 에스퍼. 손 놔요.”

“피곤하잖아요. 그냥 자요. 대리님 없어도 회사 잘 굴러가요.”

맹하게 웃으며 말하는 도지윤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힘을 빼고 다시 털썩 누웠다. 맞는 말이다. 회사는 나 따위 없어도 잘 굴러갈 것이고, 내가 없어도 그다지 큰 걱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도지윤의 향기로 가득 찬 가이딩 지원실의 침대에 누워, 나를 끌어안은 도지윤의 온기를 느끼며 조금 기능이 돌아온 머리를 맹렬히 굴렸다. 그러다 부하가 너무 걸려 다시 연기를 피우며 퍽하고 터져버렸다.

“실험 참가 안 하면, 가이드 실장이 가만 안 있겠죠?”

“아마도요? 왜요? 그냥 실험 참가하지 말까요? 역시 실장을 죽이는 편이….”

“아니요. 그냥 실험 참가해서, 실패시켜요.”

그러나 나는 약해져 버린 멘탈과 경험에서 기인한 불안감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믿어도 돼요?”

도지윤이 내 뺨에 손을 올려, 고개를 들게 했다. 곱게 접힌 도지윤의 눈매가 들어오고, 동백꽃처럼 빨간 입술이 오물조물 말을 뱉는다.

“난 김강민과 달라요. 제 가이드를 놓치는 그런 병신 같은 놈하고 날 비교하지 말아요. 아. 김강민한테 고마워해야 하는데.”

“…….”

“대신에, 실험 실패하면. 이번엔 진짜로 나랑 각인 진지하게 생각해 줘야 해요.”

“각인이라니….”

“그렇게 장난식으로 넘어가지 말고, 날 이용한 대가는 줘야죠.”

도지윤이 내 머리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술을 내리며 중얼거린다.

“세상에 대가 없는 것은 없어요.”

나는 황당함을 섞어 도지윤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를 이용하라고 말한 건, 도지윤 에스퍼였잖아요.”

“이용하라고 했지, 대가를 안 받겠다고 한 적은 없어요.”

도지윤의 곱게 접힌 눈매가 내 얼굴에서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날 따스하게 보고 있었다.

“…사기당한 것 같은데요?”

“대리님. 회사에서 남의 말, 순진하게 다 믿으면 안 되죠.”

도지윤이 손을 들어 내 뺨을 잡아 소중한 것을 만지듯 천천히 쓸며 조용히 덧붙인다.

“그래도, 거래는 지켜야 하는 거 알죠?”

“거래라니….”

“안 지키면 불공정 거래로 신고할 거예요.”

도지윤의 그 말에, 나는 그제야 피식 웃을 수 있었다.

“어디에 신고할 건데요.”

“음… 감사팀?”

도지윤이 맑게 웃으며 입을 내 턱에 붙이고, 동시에 손을 내 상의 안으로 집어넣었다. 난 차분히 도지윤의 손과 고개를 밀어내며 몸에 힘을 줘 일어났다. 도지윤이 날 불만스럽게 쳐다보자, 손을 들어 도지윤의 머리를 마구 문질러 흐트러뜨렸다.

“저리 가요. 너랑 이제 스킨십 안 할 거예요.”

“왜요!”

도지윤의 경악에 찬 외침을 뒤로하고, 난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삐졌어요.”

그러자 도지윤이 뒤에서 내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왜요! 왜 삐졌어요!”

나는 내 허리에 둘러진 도지윤의 팔을 힘을 주어 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튀어나온 셔츠 자락을 주섬주섬 정리하며 도지윤에게 말했다.

“너가 나랑 상의도 없이 그런 거 참가한다 해서요.”

“…그건!”

“연락이 안 되면, 될 때까지 대답을 미뤘어야죠.”

도지윤의 크게 뜨인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른다.

“울어도 소용없어요. 누구 씨가 자기는 울어도 말 안 들어준다 해서, 나도 벤치마킹 해보려구요.”

순식간에 눈물이 사라진 도지윤의 큰 눈이, 억울함을 담아 나를 째려본다.

“알잖아요. 저 뒤끝 길어요.”

가이드복 상의를 찾아 다시 입고 눌린 머리를 손을 들어 재정비했다. 그동안 침대에 앉은 도지윤이 나를 보며 여전히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나는 그에게 가서 뺨을 두 손으로 밀어 못난 얼굴을 만들었다. 하지만 못난 얼굴이라는 건 내 생각일 뿐, 도지윤의 얼굴은 여전히 귀여웠다.

“내일 실험 실패하고 만나요.”

손을 놓고 방문으로 걸어가자, 도지윤이 뒤에서 다급하게 소리친다.

“납치는 아직 유효한 거 알죠?”

“…몰라요.”

나는 가이딩 지원실의 문을 열고 내가 전부라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벗어나, 내가 작은 부품일 뿐이라고 외치는 회사로 다시 들어갔다.

***

내가 원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가고, 다가오지 말라고 빌어도 인생의 중요한 순간과는 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된다. 이게 과연 잘한 짓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밤새 고민해 보아도, 존재하는 다른 방법은 이보다 더한 최악의 방법뿐이었다.

‘거래’를 통해, 내가 도지윤에게 요구한 것은 ‘나에게 다시 돌아오라.’라는 것이었고, 도지윤이 내게 요구한 것은 ‘각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달라.’였다. 매우 온건한 요구사항들이었지만 한쪽 가슴이 불안하고 서늘한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거래’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냥 실연의 횟수가 늘어나고 에스퍼에 대한 믿음이 먼지만도 못하게 되는 것뿐이고, 도지윤은, 알아서 하겠지. 시발.

곱씹고 되새김질할수록 점점 도지윤에 대한 연애의 감정이고 좋아하고 나발이고, 나를 가지고 놀고 입맛대로 휘두르려고 했던 가이드 실장에 대한 분노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더불어 그 옆에 딱 달라붙어서 입을 나불나불댔던 김강민도 함께.

각인이 어쩌고 저째?

마우스를 들었다 부서질 듯이 책상에 한 번 내려치자, 옆에 앉은 김 주임이 나를 돌아본다.

“아, 마우스가 이상해서요. 시끄럽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대리님.”

김 주임이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자, 나도 마주 웃으며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나는 속으로 내 행동을 꾸짖고 다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화면에 띄워진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실험 시간까지는 좀 남았다.

다시 김강민의 엿 같은 모습에 대해 생각을 하자 뒷골에서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일단 곱씹고 또 곱씹어 생각을 해야 했다. 각인이 어쩌고 시발. 생각만 해도 엿 같은 말을 지껄인 놈을 떠올리자 속이 타는 것 같아 급하게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김강민의 발언에서 실험이 실패할 것 같은 인상을 받은 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도지윤은 실험이 실패할 거라고 했다. 물론 자신만만하게 내가 원하면 실험을 성공시키겠다고도 했지만.

그렇다면 둘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 텐데, 나는 도대체 누가 나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구별을 할 수가 없다. 다만 두 놈 다, 믿을 수 없는 에스퍼였고 나에게 각인을 요구할 뿐이었다.

문제는 한 놈은 유부남이고, 한 놈은 S급 에스퍼라 회사 내에 얽힌 이야기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김강민의 제안이 속살거리며 머릿속을 파고든다. 날 배신한 놈이 각인을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쪽 구석에서 1구역의 실험에서 또 뭔가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김강민과의 각인이라. 거참 생각만 해도 좆같네.

그래도 생각해보면 김강민의 말처럼, 정신계 에스퍼라 가이딩 할 것도 거의 없고 일반 직장과 병행해서 하면 충분할 것도 같다. 센터에서 영원히 멀어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반면 도지윤과의 각인은.

도지윤을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날 바라보며 맹하게 웃는 예쁜 얼굴이 떠올랐다. 도지윤의 등급을 생각하면 영원히 센터에서 메여서 이리저리 치일 확률이 높지.

감정의 씨발스러움과 이성의 씨발스러움이 머릿속에서 격렬히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인간은 감정에 의해 좌우되고, 사고치고, 행동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아침부터 실험 이야기로 바쁜 센터 속에서 나 혼자 괴리되어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실험, 도지윤, 실패, 김강민, 가이드 실장의 이야기를 핑핑 돌리며 아무것에도 집중 못 하고 모니터만 계속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완벽한 월급 도둑이었다.

오후 3시쯤 당 떨어질 시간에 사무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최 주임과 주 주임의 잡담 소리가 들려온다.

“실험 지금쯤 시작하겠네요. 2시에 시작한다더니 늦춰져서 3시에 시작한대요.”

“엄청 중요한 실험이라던데, 도대체 뭘까요.”

“도지윤 에스퍼 참가시킨 거 보면, 돈을 엄청 처바른 실험이겠죠.”

“아 맞다. 실험에 2팀의 윤 주임 참가한다던데요?”

둘의 재잘거리는 대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일단 가이드 실장은 머릿속으로 영원히 아웃시켰다. 매칭률이 너무 높네 어쩌고 하면서 다른 가이드 투입시킨다고 하더니만 거짓부렁이었다. 윤 주임이 가지고 올 타 센터 가이드 실장의 정치적 지원이 절실했나 보다.

설마 성공해서 70퍼센트 이상 매칭률이 보이면 어떻게 하지? 보정 매칭률로 각인에 관한 실험으로 넘어가게 되나?

“대리님! 물! 물!”

“네?”

온 정신을 실험에 집중하고 영혼 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어서, 나는 내가 정수기 앞에서 물을 뜨고 있었다는 것도 까먹었다. 컵에 넘쳐흐르는 물을 확인하자마자 컵을 떼 내었지만 이미 바닥에는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아, 이런.”

“여기 휴지요.”

“감사합니다.”

컵에 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정수기 위에 올려놓은 다음 주 주임이 건네준 휴지를 받아 바닥에 넘친 물을 슥슥 닦았다.

쪼그려 앉아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순간 현기증에 바닥이 꿀렁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단순 현기증이라고 하기에는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무엇인가 있었다.

“응?”

나는 서 있는 최 주임과 주 주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이드 팀 여기저기서 ‘어?’ 하는 소리들이 퍼져왔다.

“방금 지진 아니었어요?”

나는 그제야 내가 느낀 위화감이, 지진이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아, 지진이었나 보네요.”

“헉, 지진 왔어요? 난 몰랐는데? 못 느꼈는데?”

가이드 팀의 대부분 사람이 느낀 지진을 느끼지 못한 주 주임만 ‘저도 지진 느껴보고 싶어요.’ 하며 철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지진이 느껴졌다. 방금 전보다 훨씬 센 강도로 떨리는 진동 때문에, 정수기 위에 올려놓았던 컵이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바닥에 처박혀 물바다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주 주임도 느꼈던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리저리 돌아보고 있었다.

“책상 아래로 빨리 들어가세요.”

생각보다 길고 강도가 점점 세지는 지진에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의 집기들이 흔들리며 바닥으로 우당탕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배경음처럼 울려 퍼졌다.

한참을 떨리는 지진에 공포감을 느끼며 우리는 각자의 책상 아래에서 숨을 죽이며 버텼다.

지진이라기엔 너무나 긴 시간을 견디자, 마침내 진동이 가라앉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자 여기저기서 ‘와. 무섭다.’ ‘미친.’ 등등 작은 탄성들이 튀어나왔다.

최 주임과 주 주임, 나도 책상 아래에서 벗어났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지진으로 인한 것인지 통신 불능 상태로 전환이 되어있었다.

“얼른 밖으로 나갑시다. 또 올 수도 있으니까요.”

서둘러 외투를 집어 들며 두 주임에게 말하자, 두 주임도 자신들의 외투를 챙기며 밖에 나갈 채비를 했다. 모두가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순간, 사내의 스피커에서, 아니 스피커라기보다는, 머릿속에서 바로 울려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능이었다.

[사내에 계신 직원 분들에게 알려드립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당장 본관 지하에 있는 비상 대피실로 이동해주시길 바랍니다.]

에스퍼가 가이드나 일반인에게 뇌로 직접 ‘컨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의 몇 년 만에 느껴보는 ‘컨택’에, 등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과 어지러움에 머리를 잡고 헛구역질이 올라오려는 몸에 힘을 주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당장 본관 지하에 있는 비상 대피실로 이동해주시길 바랍니다.]

인간의 언어가 청각이나 시각을 통해서가 아닌, 텍스트의 형태 그대로 뇌에 직접 입력되는 낯선 감각을 감내하며 버티자 드디어 ‘컨택’이 끝났다. 내 오감이 정상적인 기능을 되찾는 것이 느껴졌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문지르며, 나는 팀원들에게 눈을 돌려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아마 처음 느껴봤을 소름 돋는 감각에 주 주임과 최 주임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두 주임을 다독이며 얼른 나가자고 재촉하려는 찰나였다.

인공적인 소리가 가이딩 패드에서 들려왔다. 첫 음이 시작되자마자, 가이드 1~3팀이 같이 있는 한 공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가이딩 패드에서 기계음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작게 들려오는 ‘에이 시발.’ 소리를 귓가로 넘기며, 나는 가이딩 패드를 재빨리 확인했다. 도대체 무슨 ‘실제 상황’이길래 이렇게 요란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괴수라도 센터 상공에 출현을 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가이딩 패드에 떠 있는 것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RED 01]. 폭주 코드였다.

“대리님!”

주 주임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날 불렀다. 하지만 주 주임이 날 부르는 소리가 먼 곳에서 부르는 듯, 아득하게만 들렸다.

폭주 코드 옆에 붙어있는 에스퍼의 사진은,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도지윤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펌프질을 하며 내 피를 밖으로 빼내겠다는 듯이 격렬하게 운동하는 소리는 곧 내 따뜻함을 빼앗아 차가운 공포로 나를 채우고 있었다.

순간 발밑이 쑥 꺼진 듯,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간신히 힘을 줘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가이딩 패드를 힘줄이 돋아나도록 부여잡았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인가 싶어 멍하니 가이딩 패드를 응시하고 있자니 주 주임이 내 손목을 잡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숨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듯이 숨을 토해내었다.

“대리님, 나가야 해요!”

도지윤의 폭주 코드에, 이미 회사 사람들은 패닉 상태였다.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가는 사람들과 침착하게 주변을 챙기며 뛰쳐나가는 사람들. 어쨌든 모두가 도망치고 있었다.

“주 주임. 도지윤 에스퍼, 지금 어디 있습니까?”

“대리님! 폭주예요. 얼른 도망가야 해요! 비상 대피실로 가야 한다고요!”

“실험동 어디에서 실험 중인지, 알고 있어요?”

“대리님!”

주 주임의 비명과 함께 또다시 건물이 흔들렸다. 이번에는 꽤 크고 심각하게 흔들려서 나는 주 주임을 품에 껴안아 혹시나 떨어질지 모르는 낙하물에 대비했다. 그러나 센터 건물은 생각보다 내진 설계가 잘 되어있었던 듯, 사무용품들이 와르르 쏟아지긴 했어도 천장이 갑작스럽게 내려앉는 일은 없었다.

“괜찮습니까?”

지진이 잦아들자 주 주임을 내 품에서 떼어내었다. 주 주임은 얼굴을 발그레 붉힌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 주임! 정신 차려요! 도지윤 에스퍼 어디서 실험 중입니까?”

나의 간절한 외침에 정신을 차린 주 주임은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막아섰다.

“안 돼요! S급 에스퍼의 폭주라고요! 죽어요. 대리님!”

“주 주임!”

긴박한 상황에 한 겹 한 겹 포장되어있던 본심이, 급격히 치솟는 심박 수를 타고 총알처럼 쏘아져 내 목구멍에서 뛰쳐나왔다.

“내 에스퍼가 폭주하고 있는데, 가이드인 제가 어딜 갑니까! 얼른 알려주세요!”

주 주임은 내 호통에 잠시 안타까운 표정을 짓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실험동 지하 2층이요. 거기 대규모 실험장이라 실험실 딱 2개밖에 없어요.”

“감사합니다. 주 주임. 얼른 비상 대피실로 가세요.”

나는 뒤에서 ‘대리님!’ 하고 부르는 주 주임을 무시하며 실험동으로 뛰쳐나갔다.

사무실에서 실험동까지 뛰어가면서, ‘실험. 실패시켜요.’라고 말을 했던 내 대가리를 치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언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도지윤에게 어떻게 실패시킬지 면밀하고 세심한 지시를 내렸어야 했다.

‘폭주’를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비상 상황을 대비한 매뉴얼을 생각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해 복도의 벽을 부여잡았다. 훈련 때 언제나 흘려들었던 에스퍼의 ‘폭주’ 상황의 끝은, 폭주한 에스퍼의 사살이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일그러졌다. 손을 들어 눈을 거칠게 닦아 내며 나는 다시 실험동으로 뛰어갔다.

이 미친놈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맹한 웃음을 지으며 ‘실험은 실패할 거예요.’라고 말을 했는지, 닦달을 해서 알아냈어야 했다. 왜 뜬금없이 나한테 ‘살려주세요. 내 가이드.’라고 괴상한 소리를 했는지 이유를 캐물었어야 했다.

좁은 시야로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어지러운 상황에 휘말려 자기 연민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도지윤이 들려주는 달콤한 말을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분석했어야 했다. 이 모든 후회와 자책의 끝에는 ‘대리님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며 가냘프게 떨던 도지윤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이 되었다.

그러다가 방향을 상실한 원망이 나에게서 다시 도지윤에게로 옮겨갔다.

나를 지켜준다 했잖아. 에스퍼는 가이드를 지켜주는 거라고 했잖아.

자꾸 눈물이 나오려 울컥거리는 감정을 다스리며 실험동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 심장이 운동 부족인 내 몸 밖으로 뛰쳐나올 듯 거세게 뛰고 있었다.

실험동 바로 앞에 센터의 에스퍼들이 죄다 뛰쳐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몇몇은 실험동으로 진입하려고 노력 중이었고, 몇 명은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에스퍼들의 중앙에서는 에스퍼 실장이 그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시선에 압사할 것 같은 느낌으로 쭈뼛거렸겠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검은색 에스퍼복들의 사이를 하얀 가이드복을 입고 헤쳐 나가는 동안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실장님.”

고르지 못한 호흡으로 가까스로 에스퍼 실장을 불렀다.

“이 대리! 여기서 뭐 하는 건가. 가이드는 비상 대피실로 들어가게.”

에스퍼 실장은 나를 흘낏 보며 큰 소리로 말을 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다른 에스퍼들과 대화를 했다.

“실장님!”

나는 다시 강하게 실장을 불렀고, 그 순간 땅의 낮은 비명 소리가 더 심하게 들렸다. 맞물려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고개를 들어 확인하자, 실험동의 유리창들이 제각각 소리를 내며 쩍 금이 가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 들어가서 안에 상황부터 파악해!”

에스퍼 실장은 정신계 에스퍼로 보이는 사람을 통해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실장님!”

나는 다시 한번 강하게 불렀다. 그제야 실장은 나를 돌아보았다.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S급 에스퍼의 폭주야. 재앙이라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센터의 S급 에스퍼가 올 때까지 시간 끄는 게 다일세.”

“그때가 되면 도지윤 에스퍼는 사살되는 거 아닙니까!”

입 밖으로 ‘도지윤의 사살’에 대해 꺼내자, 상실에 대한 공포가 슬그머니 내 그림자에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도지윤이 죽어버린 세상. 도지윤이 없는 세상. 내 에스퍼가 없는 세상.

내가 굳은 표정으로 에스퍼 실장을 바라보며 말하자 에스퍼 실장도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자네가 들어가서 뭘 하겠다는 건가?”

“일단 가이딩을 시도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실험동의 유리창들이 일제히 터지는 소리가 허공을 가름과 동시에, 사무동의 일부 창문이 쩍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피해의 범위가 커지고 있었다.

“난 자네 목숨을 책임질 수 없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실험동 3층의 외벽의 일부가 굉음과 함께 떨어져 바닥에 자욱한 먼지를 일으켰다.

“안 되겠다 싶으면 빨리 나오게.”

그 전에 살아날 수 있다면 말입니다.

나는 에스퍼 실장이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고, 실장에게 고개를 한 번 꾸벅인 뒤 실험동으로 뛰어 들어갔다. 에스퍼들은 실험동으로 진입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었지만 무형의 벽에 막히거나 혹은 튕겨 나가 어딘가로 날아가 처박혔다. 쉽지 않은 상황에 나는, 나도 튕겨져 나갈 각오를 하며 실험동 입구에 손을 댔다. 그리고 난 너무 쉽게 들어왔다.

“어?”

당황스러움에 에스퍼 실장을 휙 돌아보자 에스퍼 실장도 그 주위의 다른 에스퍼들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다시 고개를 휙 돌려 실험동 복도를 뛰어갔다.

뭐, 일단 아무런 문제 없이 들어왔으니 나야 감사할 일이지.

주 주임이 말한 대로 나는 대규모 실험실을 찾아 지하 2층으로 빠르게 내려갔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은 몸뚱어리가 주인에게 한계임을 알려왔지만, 지금은 그런 한가한 알림을 들어줄 때가 아니었다.

다른 건물보다 층고가 높은 실험동의 계단을 끝없이 내려가서야 지하 1층에 다다랐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려고 계단을 꺾어 몸을 돌렸을 때 나는 멈칫거리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찾는 것이 그곳에 있었다.

까마득한 계단 아래에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도지윤이, 그곳에 있었다.

“도지윤 에스퍼.”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가까스로 입술을 열자, 혹사당한 폐와 목구멍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의 부름에도 도지윤은 대답도 없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그와 대치하면서, 나는 안타까움을 담아 도지윤을 한 번 더 불렀다.

“도지윤.”

내 부름이 끝나자마자, 시야가 뒤바뀌는 강렬한 충격이 고통과 함께 내 등과 머리를 강타했다.

“윽”

도지윤은 계단 아래에서 무감정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듯이, 이번에는 나를 바닥에 눕혀 깔고 앉아 내 위에서 나를 무감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엔 갈무리하지 못한 에너지가 일렁거렸고, 홍채는 이미 붉게 변해있었다.

순식간에 역전되는 시선의 높이에 적응할 새도 없이, 나는 안타까움과 두려움 그 어느 사이에서 손톱을 주먹에 쥐고 꾹 견뎌야 했다.

초점이 흐려졌다 다시 돌아오는 시야 너머로 도지윤의 하얗고, 예쁜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올라와 있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난 저 눈이 아래로 내려가고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짓는 맹한 미소가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도지윤은 익숙한 것 하나 없는 생경함으로 무장한 채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목에 가져다 대었다. 나는 다가올 또 다른 고통에 대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지만, 도지윤은 내 목을 조를 것처럼 제 두 손을 가져다 대면서도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고개를 약간 모로 기울인 도지윤은 가만히 내 위에서 내 목에 손만 올리고 있었다. 점점 미간이 찌푸려지는 도지윤의 얼굴에 나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들어 도지윤의 뺨에 묻어있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빨간 피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다. 하지만 피는 닦아지는 것 없이 오히려 더 번져, 도지윤의 모습을 한층 더 야차처럼 보이게 했다.

“도지윤 에스퍼.”

제 손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리던 도지윤은, 내가 작은 목소리로 저를 부르자 그제야 내 눈에 붉은 시선을 맞추었다.

“에스퍼는, 자신의 가이드에게 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나를, 도지윤은 말간 눈으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내 목 위에 올려놓았던 한 손을 허공에 들자,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한 에스퍼가 나타났다. 그 에스퍼의 머리가 도지윤의 손으로 빨려들듯이 들어갔고 도지윤은 그저 무감정하게 그 에스퍼의 머리를 계단 아래로 던져버렸다. 에스퍼 본인의 중력과, 그 이상의 힘을 받은 몸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처박혔다.

“도지윤 에스퍼.”

도지윤의 무감정한 눈에서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방금 등장한 에스퍼 덕분에 내가 알아낸 것은 도지윤은 지금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생물체를 보듯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지윤은 내 목에서 손을 떼, 제 두 손을 바라보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도지윤은 천천히 일어나 나를 벗어났다. 누워있는 내 시야에서, 나를 버리고, 천천히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지윤 에스퍼!”

내가 도지윤을 불러도 도지윤은 내 부름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충격을 받은 나의 에스퍼는 지상으로 올라가면 죽을 것이다. 회사의 무자비한 매뉴얼에 따라 사살될 것이다.

“도지윤!”

나는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유리 조각이 내 손바닥을 긁어내렸지만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도지윤 에스퍼. 가지 마세요!”

절박한 외침에 도지윤은 내 명령을 듣는 로봇같이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나는 급히 도지윤을 따라 계단을 올라,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도지윤.”

“그냥 죽이는 게 나은데, 왜 죽일 수도 없을까.”

도지윤이 말하는 너무 작고 속삭임 같은 말이 귀가 아닌 심장으로 박혀 들었다.

“도지윤.”

“왜 나를 안 믿어?”

“도지윤. 잠깐 나 좀 봐봐요.”

혼이 나가 혼자 중얼거리는 도지윤에게 나는 거의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도지윤이 천천히 뒤를 돌아,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한 손으로 도지윤의 허리를 꼭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도지윤의 손을 찾아 깍지를 세게 쥐었다. 접촉은 되었으니 가이딩을 시작했다.

가이딩이 시작하자마자 칠흑과도 같은 깜깜한 외로움 속에 나는 내동댕이쳐졌다. 구역질이 치밀어 속을 게워내고 싶었지만, 나는 버텨야 한다고 다짐하며 도지윤을 불렀다.

“도지윤.”

도지윤은 가이딩이 진행되고 있는, 그와 내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그는 크게 손을 내저어 내 손을 뿌리쳤다. 나는 그 힘에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지만, 도지윤의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은 다른 쪽 손으로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도지윤은 몸을 돌려 나를 홀로 남겨놓고 다시 지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옮겼다. 나는 다시 그를 따라가, 그의 바로 아래 계단에서 그의 허리를 강하게 껴안았다.

“도지윤. 넌 내가 필요해.”

그의 등에 고개를 박고 세상의 진리를 말하듯 확신에 찬 어조로 도지윤에게 말을 하자, 도지윤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언제까지?”

“도지윤 에스퍼.”

“다른 가이드가 나타날 때까지만?”

그러나 처음의 속삭이듯 말한 것과 달리, 이번의 말은 올라선 계단의 높이만큼 반대로 낮아지며 갈라지는 고통의 목소리였다.

도지윤이 등이 크게 부풀었다,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건물이 웅웅 진동을 하며 멀리서 쿠궁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렸다.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가 안 그래도 탁한 지하의 공기를 한층 더 텁텁하게 만들었다.

도지윤은 허리를 붙잡은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풀고 계단을 앞질러 올라가 그의 앞에 서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도지윤의 붉은 시선을 마주하자, 도지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리님.”

도지윤이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뺨을 쓰다듬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정신이 듭니까. 도지윤 에스퍼.”

“날 살리러 온 거예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도지윤의 팔목을 잡고 가이딩을 시도했다. 헛구역질을 억지로 참으며 도지윤의 시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면, 같이 죽으러 온 건가?”

도지윤이 눈을 접어 웃으며, 가이딩을 시도하는 내 손을 다시 털어 떨쳐내었다.

“도지윤!”

“같이 죽어요. 대리님.”

“왜 이렇게 극단적이에요! 그냥 안 죽고 내 가이딩 받고 살아서 나가요!”

폭주의 경계에 서서 그런지, 평소보다 날카롭고 예민한 도지윤이 환하게 웃었다.

“나한테 살려달라면서요! ‘내 가이드. 살려주세요.’라고 했잖아요.”

“그 뒤에 내가 같이 죽는 것도 좋다는 말은 왜 빼먹어요.”

도지윤이 잠시 눈을 감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다 내쉬었다. 다시 건물이 진동하며 어딘가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땅이 가라앉는 소리가 들렸다.

“실험, 실패시켰어요. 대리님.”

도지윤이 눈을 뜨더니 맹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날카롭고 위험한 붉은 눈동자가 나를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속대로 대리님한테 돌아왔고요. 아닌가? 대리님이 나한테 온 건가? 어쨌든 그게 그거죠. 뭐.”

“도지윤 에스퍼….”

어이없음과 아연함에 도지윤을 부르자, 도지윤이 조금 더 눈을 접어 웃었다.

“나는 대리님이 시킨 거 다 했어요. 언제나 대리님이 말씀하신 거는 다 지켰죠. 이제 대리님 차례예요. ‘거래’를 지켜요.”

“우리 거래는….”

“‘각인’이죠.”

나는 은근슬쩍 말을 고치는 도지윤에게 말을 정정해주기로 했다.

“각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거였죠. ‘각인’이 아닙니다.”

내 말을 들은 도지윤은 입을 잠시 다물고, 눈을 왼쪽으로 살짝 굴렸다가 다시 나를 응시했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각인’으로 해요.”

“그렇게 마음대로 바꾸는 게 어디 있어요!”

“누가 봐도 이 상황은 제가 유리한데, 제가 왜 손해 봐야 하죠?”

마치 도지윤은 ‘순진하시네요.’ 하고 눈으로 말하는 듯했다.

“지윤아.”

“어? 불리하니까 왜 말 놔요. 안 돼요. 대리님. 안 들어줄 거예요.”

이 새끼가.

내가 일부러 다정하게 도지윤을 부르자, 도지윤이 칼같이 내 말을 차단한다. 나는 이를 악물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도지윤 에스퍼.”

“네. 대리님.”

그러나 바로 도지윤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가 서 있던 비상계단의 벽이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쩍 하는 소리와 함께 큰 금이 갔다. 나는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 급히 말을 뱉었다. 타 센터의 S급 에스퍼가 와서 사살당하기 전에 건물에 깔려 죽을 것 같았다.

“실험 실패로 폭주할 거 알고 있었죠! 왜 말 안 했어요!”

“…실험은 실패하지만, 폭주는….”

그러고선 도지윤은 애매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추궁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해, 나는 도지윤의 어깨를 짚고 균형을 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갑자기 여기서 각인을 어떻게 합니까! 지금 당장 준비해도 한두 달은 걸릴 건데!”

천장 어딘가에서 부스스 떨어지는 콘크리트 가루에, 나는 도지윤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머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다시 지진이 멈추고 나는 내 품의 도지윤을 내려다보았다. 도지윤은 표정도 없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지윤이 천천히 내 허리에 손을 올려 나를 감싸 안았다.

“일단 나랑 동거해요.”

“네?”

“각인될 때까지 나랑 살자고요.”

“…그럼 각인되면 따로 살아도 돼요?”

그러자 도지윤의 표정이 대번에 사나워진다.

“장난인 거 같아요?”

“…미안합니다.”

확실히 도지윤은 지금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나랑 여기서 살아서 나가고 싶으면, 이제부터 나랑 동거해요. 그리고 각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 각인용 가이딩을 하겠다고 약속해줘요. 날 믿겠다고.”

나는 도지윤의 명확한 요구에 침을 삼키고, 에너지로 일렁이는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시 망설임을 담아 도지윤의 뺨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다가, 도지윤 에스퍼에게 다른 가이드가 나타나면 어떻게 합니까. 난… 나만 최선을 다하게 되면 어떻게 해요.”

“다른 가이드가 나타나기 전에 얼른 낚아채 가요.”

도지윤이 부드럽게 웃으며 나에게 느릿느릿 말했다.

“사내 정치도 고민하지 말아요. 이렇게 사고 쳐 놨으니, 밖에 저 머저리들도 다 알게 될 거예요. 내 가이드는 대리님이라는 걸.”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도지윤이 잠시 눈을 몇 번 더 깜빡이더니 덧붙인다.

“그래도 아니라고 하면, 폭주 한두 번 더 하죠. 뭐.”

“야!”

“도대체 뭘 망설이는 거예요. 대리님? 나처럼 예쁘고, 어리고, 몸 좋고, 돈 많은 에스퍼가 대리님하고 각인하자고 하는데 냉큼 수락해야죠.”

나는 도지윤의 뻔뻔한 발언에 입을 벌리고 도지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어딘가에서 진동 소리와 텅텅텅 하는 건물의 붕괴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게… 혹시 나랑 각인하면 나중에 후회할까 봐. 다른 가이드가.”

횡설수설하며 두서없이 말을 하자니, 도지윤이 말을 잘라먹고 제 할 말을 한다.

“그럴 일 없어요. 어차피 날 좋아해 주는 가이드도 없어요. 대리님 빼고.”

도지윤이 날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내 인생에서 날 평범하게 만들어주는 가이드는 대리님밖에 없어요. 날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람은 대리님밖에 없다고요.”

도지윤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는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듯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빨리 결정해요. 대리님. 저 진짜 한계예요.”

도지윤이 내 품으로 고개를 내려 박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랑 각인할지, 같이 죽을지 결정해요.”

내 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 협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 바닥에 거대한 진동과 함께 훅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몇 초 사이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도지윤에 대한 애정과, 도지윤이 없는 세상에 남겨진 나의 상실감에 대한 상상이 향기처럼 확 퍼졌다. 더불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어서 대답하라 내 등을 퍽 하고 쳐올렸다.

“할게요! 할게! 각인합시다!”

이성적인 사고 따위 지하로 던져버리고 무의식의 영역에서 내려진 결정이 목구멍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진동이 멈추고, 도지윤이 고개를 휙 들었다.

“진짜예요?”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는 여전하지만, 갑자기 멀쩡해 보이는 도지윤의 모습에 속에서 꿀렁이며 위액이 치솟는 게 느껴졌다. 육감으로 캐치한 무언가를 해석할 여유도 없이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판사판이었다.

“합시다. 까짓거. 각인하자고요! 고작 B급 가이드하고 각인하는 게 아니었다고 땅 치고 후회하지 마세요.”

그러자 잠시 놀란 듯이 날 바라보던 도지윤의 눈이 곱게 접히고, 입꼬리가 올라가고 유리에 태양이 반사되듯, 파도가 빛을 부수듯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죠. 나랑 각인하는 거예요.”

“그래요. 합시다. 대신.”

내가 사족을 붙이자 순식간에 도지윤의 눈초리에 불만이 서렸다.

“도지윤 에스퍼가 우리 ‘거래’를 약간 바꿨으니, 나도 내 조건을 바꾸겠어요.”

나는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는 도지윤의 뺨을, 천천히 손을 들어 감싸 잡았다.

“어차피 이렇게 개판 된 거, 가이드 실장 방도 좀 박살 내줘요. 거기 내가 꼭 한 번은 난장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자 도지윤의 얼굴에 다시 봄꽃 같은 웃음이 올라왔다.

“또 있어요?”

“…정원도 부숴버려요. 새로 생긴 거 마음에 안 들어요. 다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내 말에 도지윤이 행복한 듯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마주 바라보며, 눈을 곱게 접고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확신에 차서 말을 뱉었다.

“너 폭주한 거 아니지. 개새끼야.”

내 말에 환한 미소를 지은 그대로 경직된 도지윤이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내 뺨을 붙잡고 다급히 고개를 가까이 붙였다. 입술이 닿자 도지윤이 재빨리 한마디 뱉었다.

“‘거래’는 취소 못 해요.”

도지윤의 뜨거운 입술에 입을 순순히 열어주며, 나는 도지윤의 목을 끌어안았다. 맞닿은 입술을 통해 도지윤의 역가이딩으로 에너지가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도지윤이 강한 힘으로 나를 붙잡았다. 점멸하는 의식 중, 현실과 어둠 사이의 경계에서 나는 코 꿰였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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