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8. (18/21)

Chapter 18.

에스퍼로 입사한 지 36년 차, 4구역 센터의 에스퍼 실장인 최 실장은 요즘 머리가 빠지다 못해 탈모가 오는 것이 아닌가 고민을 하고 있었다. 현대인들의 질병의 근원은 대부분 스트레스였고, 탈모는 질병이 아니었지만 이 또한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가지고 있는 증상 중 하나였기에 최 실장의 시름은 점점 깊어져 갔다. 최 실장의 스트레스의 이유이자, 결정체는 바로 지금 그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4구역 센터의 유일한 S급 에스퍼이자, 최 실장과 10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도지윤이다.

“야. 이 새끼야. 너 솔직히 말해봐.”

“뭘요.”

최 실장은 속이 터져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치며 이야기하는데, 맞은편 소파에 앉은 도지윤은 평화로운 얼굴로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너 폭주한 거 맞지?”

우회하지 않고 직구로 뻗어 물어오는 최 실장의 말에, 도지윤은 핸드폰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최 실장을 향해 맹하게 웃어 보였다.

“이 새끼야. 그딴 웃음은 이 대리한테나 짓고, 빨리 말해 보라고!”

최 실장은 저딴 새끼와 인연을 맺게 된 10년 전 과거로 돌아간다면, 도지윤을 동정했었던 그때 자신의 대가리를 두드려 팰 것이라 다짐했다. 막내아들과 동갑이라 동정해서 잘해줬던 것이 인연이 되어, 중앙에서 냉큼 최 실장, 당시에는 최 차장에게로 도지윤의 신상을 넘겨 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금붕어 똥도 아니고 최 실장 가는 곳에 도지윤이, 아니 도지윤 가는 곳에 최 실장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도지윤 뒤처리 전담반이었다.

하지만 만년 차장으로 남아있을 뻔했던 자신이 결국 실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도지윤 덕분이었기 때문에 최 실장은 속을 내리눌러야 했다. 중앙에서 S급 에스퍼를 컨트롤, 아니 뒤처리하는 사람이 차장보다는 팀장이, 팀장인 것보다는 실장인 것이 보기 좋다는 이유로 승진시킨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유와 수단이 어찌 됐든 간에 승진은 무조건 좋은 것이기 때문에 최 실장은 감내할 수 있지만, 도지윤이 가끔씩 치고 올리는 개지랄은 참기가 힘들었다. 그중, 1구역에서 이재하 대리가 전입 오면서부터 시작된 도지윤의 개지랄은 특히나 참기 힘들었다. 절정은 도지윤이 4구역 센터의 정원을 불 질렀을 때였다. 최 실장은 생각만 해도 위액이 역류할 것 같았던 그때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보았다.

그때 최 실장은 도지윤의 정원 방화사건으로 이후 센터장에게 개처럼 까이고 도지윤에게도 지랄지랄 개지랄을 양껏 당하고 있었다.

도지윤을 진정시키고자 이 대리를 불러 도지윤의 장점을 곁들여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었다. 아무리 봐도 도지윤에게 속고 있는 것 같은 이 대리를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자신의 모습에 양심의 가책이 조금 느껴졌지만, 사회란 원래 냉정한 법이었고 본인이 먼저 살아야 했다.

최 실장은 이 대리가 진중한 눈빛으로 ‘전 제가 도지윤 에스퍼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자신이 없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모습을 떠올렸다. 여러 번 생각해도 도지윤한테는 아까운 청년이었다.

이 대리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 반, 그래도 내가 살아야지 하는 마음 반으로 착잡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왔냐?”

살벌한 표정의 도지윤은 인사도 없이 걸어 들어와 최 실장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표정 펴라. 인마. 어디 누구 하나 죽이고 온 줄 알겠네.”

“들켰네.”

“…진짜 죽이고 왔냐?”

“죽진 않았어요.”

최 실장은 머리가 아파,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깊게 눌렀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야. 가이드 실장을 죽이는 게 말이 되냐? 중앙에서 가만 안 있는다고!”

“중앙 새끼들이 가만 안 있으면 어쩔 건데. 꼰대 새끼들. 입만 나불나불대지,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럼 차라리 중앙 이용해서 이 대리 낚아 가든가!”

“걔네 이용하면 질척대서 여기저기 끌려다닌단 말이에요. 나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이 대리님 성격에 그럴 수도 없겠지.”

도지윤은 다리를 꼬고 앉아 살벌한 표정으로 최 실장을 응시했다.

“그러니 그냥 가이드 실장 죽이고, 이 대리님이랑 알콩달콩 잘 살게요.”

“저 이 시발. 그런 거 할 거면 그냥 나 모르게 하라고! 왜 나한테 말해서 휘말리게 만들어?”

“나만 좆 될 순 없잖아요.”

최 실장은 도지윤의 정원 방화 사건 이후, 도지윤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도지윤이 ‘가이드 실장을 죽이겠다.’라고 말했던 그 아연한 기억을 떠올렸다. 온갖 고성이 오갔고, 도지윤에게 ‘이 대리를 너에게 넘기겠다!’라고 약속도 했었다. 혹시나 도지윤이 중간에 돌아버릴까 A급 에스퍼 네 명을 감시 인력으로 붙여두기도 했던 얼마 전을 떠올리자, 또다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리며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야, 가이드 실장, 박 실장이 똑똑한 여자야.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다고.”

“똑똑한데 어떻게 진급했지? 원래 라인 중 제일 멍청하고 충성심 높은 사람이 진급하는 거 아닌가?”

도지윤이 말한 문장 중엔 단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기에, 최 실장은 순간 입술을 깨물고 참아야 했다. 그러다 호흡을 가다듬고, 도지윤을 불러냈던 이유를 상기했다.

“지윤아. 방금 이 대리하고 얘기했다.”

그러자 도지윤이 꼰 다리를 풀고, 몸을 에스퍼 실장에게 기울였다.

“그래서요?”

“네가 뭘 하면 이 대리가 널 동정하디?”

도지윤은 잠시 눈을 굴려 이 대리에 관해 생각했다. 이 대리는 소문난 얼빠였다. 도지윤의 얼굴을 좋아해서 맹하게 웃으면 귀여워해줬고, 환하게 웃으면 같이 눈을 접으며 웃어주었다. 그래도 도지윤이 이 대리에게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했던 행동 중 최고봉을 꼽자면.

“울었어요.”

“…뭐?”

“울었다고요.”

“이 씨발. 너 애한테 도대체 사기를 얼마나 치는 거야.”

최 실장의 황당해하는 발언에 도지윤은 ‘그게 뭐?’라는 듯한 얼굴로 최 실장을 바라보았다.

“됐고, 너 이따 이 대리한테 가서 한 번 더 울어라.”

“네?”

“그냥 이 대리한테 가서 서럽게 한번 울라고!”

“알겠어요.”

도지윤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목이 탄 최 실장은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너 명현이한테 무슨 이상한 실험 가져오라 했다며.”

“아, 그거.”

“너 그런 거 신경 안 썼잖아. 갑자기 그건 왜?”

최 실장이 도지윤을 향해 의아하게 묻자, 도지윤이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이 대리님이 울어서요.”

“…야. 그딴 웃음은 너네 이 대리 앞에서 지으라고.”

도지윤의 웃음에 최 실장은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최 실장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는 부하 직원이자 아마 아들 친구인 도지윤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날 도지윤은 이 대리 집 앞에서 대기를 탔고, 최 실장과 최 실장의 충실한 심복인 다른 A급 에스퍼 두 명은 그런 그들을 감시해야 했다. 이 대리의 집 앞이 잘 보이는 지대를 확보해서 망원경으로 세 에스퍼가 은밀하게 도지윤을 주시했다. 이미 도지윤은 세 에스퍼의 존재를 파악했겠지만, 무료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감시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어린 양 등장했습니다.”

최 실장은 시발시발거리며, 끊은 담배를 다시 피워야 하나 고민을 하다 이 대리의 등장을 알리는 에스퍼의 말에 재빨리 망원경을 들어 이 대리의 집 앞을 주시했다.

“와. 저 시발새끼.”

망원경으로 보이는 상황에 최 실장은 자신이 욕을 내뱉는지도 모르게 욕을 말했다. 도지윤은 이 대리 앞에서 안타까울 정도로 처절하고, 서럽게 울었다. 그러면서도 제 얼굴이 어떻게 하면 이 대리에게 예뻐 보일까 각도까지 세심하게 조절하며 몸을 움직이는 것이 세 에스퍼의 눈에는 뻔히 보였다. 이 대리의 손이 움칠움칠 움직이고, 얼굴이 침울하게 변하다 입술을 깨물었을 때 최 실장의 마음은 반반이었다.

이 대리, 도망쳐!

이 대리, 너만 희생하면 된다!

그러다 결국 이 대리가 손을 들어 도지윤을 끌어안았을 때는, 안타까워서인지 다행스러워서인지 모를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미친개가 어린 양을 포획했습니다. 작전 성공했습니다.”

부하 에스퍼 직원의 말을 흘려들으며, 망원경으로 계속 그 둘을 바라보았다. 이 대리가 집 문을 열기 위해 도지윤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 도지윤이 최 실장에게 정확히 눈을 맞추었다. 기가 막힌 눈물 연기로 열연을 펼친 덕분에, 눈 밑이 발갛게 올라온 얼굴에서 입이 또박또박 움직여 모양을 읽기 쉽게 했다.

‘잘했어.’

그러고선 곧바로 고개를 돌려 이 대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최 실장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며 아무래도 담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발. 내가 이 나이에, 이 직급에 부하 직원 연애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게 너무 좆같아 울고 싶었다.

그 후로 도지윤의 지랄은 잠시 잦아들었다. 최 실장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날 오후도, 최 실장은 사무실 구석에 비치한 골프 매트에서 골프채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앗, 들어가시면 안 돼요! 도지윤 에스퍼!’

그러나 밖에서 작게 들려오는 소란에, 최 실장은 조건 반사적으로 머리가 아파졌다. 마음을 다스릴 여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검은 에스퍼복을 단정하게 입은 도지윤이 걸어 들어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급하게 따라 들어온 최 주임이 떨리는 동공으로 자신을 보자, 최 실장은 최 주임에게 온화하게 말했다.

“나가 봐요. 최 주임.”

그러자 최 주임은 고개를 숙이며 냉큼 나가버렸다. 최 실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골프채를 세워놓고, 도지윤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또.”

“우리 이 대리님이 너무 귀여워요.”

“아. 씨발.”

최 실장은 주위를 돌아보며 도지윤을 향해 던질 게 없나 찾아보았다. 하지만 테이블은 깨끗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 한가하냐? 어디 전투 지역에라도 보내줘?”

“안 돼요. 이 대리님하고 떨어지기 싫어요.”

얼마 전 살벌한 표정으로 에스퍼 실장실에 쳐들어온 것과는 반대로, 도지윤은 맹한 웃음을 달고 최 실장 앞에서 꿈을 꾸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도지윤을 앞에 두고, 최 실장은 기민하게 지금에야말로 말을 꺼내기 적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윤아. 애들 좀 그만 패고 돌아다녀라. 이 대리 근처에만 있어도 네가 쥐어팬다며.”

“벌레 같은 새끼들이 주제도 모르고 내 걸 넘보는데, 그걸 가만둬요?”

그러나 도지윤은 최 실장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으며, 금세 얼굴에 싸늘한 비웃음을 떠올렸다. 상대하기도 귀찮은 벌레 같은 것들이 연약하고 소중한 이 대리님의 근처를 돌아다녀, 도지윤은 언제나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감시도 붙여놨냐?”

“감시라뇨. 경호죠.”

“경호면 이 대리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아무리 봐도 이 대리는 본인 주변에 에스퍼들이 밀착해서 ‘경호’하는 걸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인지, 이 대리는 하루에 수십 번을 마주친 에스퍼도 못 알아보았다.

“굳이 이 대리님이 아실 필욘 없죠.”

“…그래. 네 알아서 해라. 오늘은 왜 찾아왔어.”

“가이드 실장 죽일래요.”

“야! 도지윤 에스퍼!”

최 실장은 도지윤의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갑작스레 혈압이 올랐다. 얼마 전 건강 검진에서 고혈압을 진단받아, 재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소견을 들어 안 그래도 걱정하던 중이었다. 최 실장 본인이 고혈압이 뜬다면 그건 분명 도지윤 때문이다.

“너, 그 얘기는 이미 끝났잖아! 이 대리 넘겨줬으면 됐지!”

“이 대리님이 제 ‘전담 가이드’를 하고 싶어 하는데, 아무리 봐도 가이드 실장이 협조를 안 해줄 것 같아서요.”

이 대리가 도지윤의 ‘전담 가이드’가 되는 것은 이 대리보다 도지윤 본인이 더 원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도지윤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냥 낮에는 대충 아무나 가이딩 받는 척하고, 퇴근하고 이 대리한테 가이딩 받으면 되잖아!”

“이 대리님이 공사 구별이 너무 철저해서, 가이딩 안 해주려고 해요. 그리고.”

도지윤은 답지 않게 뜸을 들이다 못해, 뺨을 발그레 붉혔다.

“대리님이 제가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 받는 거 싫대요.”

그 모습에 최 실장은 어이가 없어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 분명 폐 기능은 정상으로 건강 검진 결과를 받았건만, 이건 정상일 리가 없었다. 자꾸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죽을병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넌 고작 그런 이유로 실장을 죽이네 마네 하냐?”

“처음에는 별생각 없는데, 자꾸 이 대리님이 걱정하니까 뭐라도 해야겠어요. 솔직히 가이드 실장 죽이는 게 제일 빠르고 효율적이잖아요.”

실장은 지금 이 순간, 그냥 명예퇴직을 할까 고민을 했다. 막내까지 이미 취업해서 잘 살고 있으니 자기쯤이야 명퇴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집에서 도끼눈을 뜨고 있을 와이프이자 제 가이드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가이드 실장 죽이면서 겸사겸사 대리님 납치도 하려고요.”

“이 대리는 왜 납치해. 가만히 있는 사람을.”

“벌레만도 못한 놈들이 쳐다도 못 보게, 나만 보고 싶어서요.”

상큼하게 웃으며 말하는 도지윤에게 최 실장은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가이드 실장 죽여서 대리님을 납치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 이해해주지 않을까요?”

“…그건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이 대리한테 이야기하라고.”

“이 대리님은 다정하고 착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해줄 거예요.”

일반인이라면 절대 죽어도 그렇게 하라고 안 할 거다. 라고 최 실장은 생각했지만 굳이 입 아프게 얘기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도지윤은 들어 처먹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그냥 각인해라. 그러면 되잖아? 매칭률도 70퍼센트 넘겠다. 등급 차이야 네가 무시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다른 에스퍼 같았으면 주먹으로 패서라도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 줬겠지만, 도지윤에게는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았기에 최 실장은 온화하게 웃으며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에 도지윤은 엄청나게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각인!”

“…생각도 안 하고 있었냐?”

“그걸 왜 생각 못 했지? 대리님하고 각인하면 되겠다!”

“이 대리가 그걸 허락하냐고.”

아이처럼 기뻐하는 도지윤에게 최 실장은 어이가 없어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도지윤이 상큼하게 웃으며 말을 했다.

“허락하게 만들어야죠.”

“…이 대리도 쥐어패게?”

그러자 도지윤이 최 실장을 혐오스러운 것을 바라보듯 쳐다보았다.

“우리 연약한 이 대리님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는 거죠?”

최 실장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 대리는, 일반 남성의 표준 키에 약간 마른 체형을 가진 남성이었다. 물론 창백한 얼굴과 색 없는 입술이 사람을 조금 생기 없게 보이게 했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성인 남성이었다. ‘연약한’이란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 네 이 대리는 때릴 데가 없지.”

하지만 에스퍼의 세계에는 직급 위에 주먹이 있었다. 도지윤이 최 실장을 쥐어패지는 않겠지만, 소소하고 크게 엿은 선사할 수 있기에 몸을 사려야 한다.

“그럼 이 대리님을 납치해서 각인하든가, 가이드 실장을 죽이고 납치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해야겠어요.”

“네 선택지에 이 대리 납치를 빼는 건 없어?”

“그게 가장 중요한 건데, 왜 빼야 하죠?”

도지윤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어오자, 최 실장은 다시 숨이 턱 막혔다. 건강 검진 결과가 잘못된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최 실장의 건강 검진보다 잘못된 것은 이 대리의 미래임이 분명했다.

***

‘앗, 도지윤 에스퍼! 들어가시면 안 돼요!’

최 실장은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다, 익숙한 소리를 들었다. 비서인 최 주임은 익숙한 듯 입으로만 ‘안 돼요!’를 소리칠 뿐, 따라 들어온다거나 행동으로 저지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적응된 것이다.

문이 벌컥 열리며 오늘은 살벌한 표정의 도지윤이 안으로 들어왔다. 최 실장은 도지윤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책상에 처박았다. 아주 요즘 연애 좀 한다고 기분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꼬락서니를 보자니, 최 실장의 퇴사 욕구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도지윤은 소파에 털썩 앉더니, 가라앉은 기분을 표현하듯 다리를 꼬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도지윤의 기운에, 최 실장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지윤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왜 또 저기압이야?”

“시발. 김강민 그 새끼.”

도지윤은 입을 열어 말을 했지만, 초점은 최 실장을 향하지 않고 그 뒤 머나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 실장은 기억을 더듬어 ‘김강민’이 누구인가 고민해봤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지윤이 저렇게 감정적이라면 분명 이 대리와 관련된 일일 건데. 이 대리에 키워드를 맞추어 곰곰이 생각을 해보자 곧 생각이 났다. 그리고 곧바로 도지윤에 대한 욕설이 뛰쳐 올라왔다.

“이 미친놈이. 네가 불렀잖아. 김강민.”

그러자 도지윤의 초점이 최 실장을 향해 맞추어졌다. 그 사나운 기색에 최 실장은 조금 쫄았지만, 회사 짬을 생각하며 당당히 시선을 마주했다.

“부르긴 불렀는데, 이렇게 좆같을 줄 몰랐죠.”

“허. 웬일로 죽인다고 얘기는 안 하고?”

주로 이 대리와 스치거나, 대화하거나, 엮인 에스퍼들과 관련해서 도지윤은 ‘죽인다’는 단어를 서슴없이 내뱉었다. 언제나 말리거나, 죽이지 말고 그냥 쥐어패기만 하라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말리는 것이 최 실장의 주된 업무였기에 ‘죽인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은 도지윤이 신기했다.

“제가 왜요?”

“이 대리하고 매칭률이 70퍼센트가 넘는데 안 죽인다고?”

가이드를 독점하고자 하는 욕구는 에스퍼들의 본능이었다. 그렇기에 같은 에스퍼로서 최 실장은 도지윤을 말리면서도, 이 대리 근처를 맴도는 에스퍼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 욕구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매칭률이 70퍼센트가 넘는 에스퍼가 나타났는데 가만히 있겠다고? 그건 같은 에스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 실장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받자, 도지윤이 맹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나 이 대리에게 지어 보이는 ‘나는 무해합니다. 맹~’같은 미소가 아니라, ‘너한테 말해봤자 고아한 내 뜻을 이해할 수 있겠니. 그냥 내 웃음이나 받으렴. 맹~’의 뜻을 내포한, 상대방을 깔보는 듯한 미소였다.

“죽이려고 했는데 이 대리님이 그 새끼가 보일 때마다, 나를 더 좋아해 줘요.”

“…뭐라고?”

“이 대리님이 그 새끼가 보일 때마다, 나한테 집착한다고요. 진짜 귀여워요.”

방금 전까지 저기압이었던 도지윤의 기분이, 다시 고기압으로 바뀌며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대리는 너 이렇게 성격 나쁜 거 알고 있냐?”

“전 성격 안 나쁜데요?”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빡이는 모습을 보자, 이 대리가 껌뻑 넘어간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저놈과 일주일, 아니 하루라도 같이 있으면 왜 다른 사람들이 설설 피하는지 이유를 알 텐데. 하지만 도지윤 저놈이 이 대리 앞에서 작정하고 연기하는 듯하니 이 대리가 알 리가 없었다.

“웬일로 실험 하나 가져온다 했더니만.”

이 대리에 대한 동정심에 아연하게 중얼거렸지만, 최 실장 본인은 이 질척질척한 도지윤의 연애사에 끼어들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 센터 내에서, 아니 이 지구상에 도지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이 대리뿐이었으니 자신은 눈을 감고 모른 척해야 했다.

도지윤은 중앙에 있는 실장의 막내아들이자, 아마도 자신과 친우 관계일 최명현에게 얼마 전 실험 하나를 4구역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지시했다.’라고 간결한 문장으로 썼지만, 실제로는 간결하지 않았다. 1구역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비밀 실험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도지윤은 김강민이 참여하고 있는 실험을 콕 집어 자기 쪽으로 보내라고 압박을 했다.

간도 쓸개도 없는 도지윤 광팬이자 최 실장의 막내아들인 최명현은 그 실험을 기어이 4구역으로 내려보냈다. 도지윤이 요구한 대로 김강민과 함께.

물론 S급 에스퍼인 도지윤의 이름이 가장 크게 작용했겠지만, 지옥으로 향하는 특급열차를 탄지도 모르고 김강민 일행은 룰루랄라 즐겁게 4구역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렇게 도지윤은 스스로 불러놓고서는, 실제로 왔다고 기분 나빠하면서, 그러면서도 이 대리가 김강민이 보일 때마다 자기와 가까워진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미친놈이었다.

“각인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

“실장을 죽이든, 나와 각인을 하든 선택지를 줬는데 대리님은 실장을 죽이느니 나랑 각인하지 않을까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도지윤을 보며, 최 실장은 도지윤의 정신 건강 검사 결과지를 확인했나 하는 의심을 잠시 했다. 그러나 분명 보고 받기로는 4구역의 전 에스퍼의 정신 건강 검사 결과 중 ‘이상 소견 있음’으로 뜬 사람은 없었기에, 애써 도지윤의 정신 건강에 대한 염려를 그만두었다.

“실험은 언제 하기로 했고?”

최 실장은 말을 돌리기 위해 별 의미 없이 아무 말이나 던졌다. 하지만 도지윤은 의외의 말을 답으로 돌려줬다.

“실험? 안 할 건데요?”

“네가 하려고 가져온 거 아니야?”

최 실장이 황당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도지윤이 눈만 깜빡이며 대답했다.

“최명현한테 못 들었어요? 그거 실패한 실험이에요.”

“…실패한 거라고? 왜?”

“실장님 막내아들한테 물어보세요.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세요.”

최 실장을 위아래로 흘기며 귀찮다고 말을 하는 도지윤을 보며, 최 실장은 아들새끼 키워봤자 소용이 없다는 말을 통감하고 있었다. 도지윤에게 간도 쓸개도 가져다 바치는 제 막내아들 새끼는 중요 정보도 아버지가 아니라, 도지윤에게만 가져다 바치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 내려오라고 해서 볼기짝을 때려놔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최 실장이 주말 계획을 시간 단위로 세우고 있자니, 도지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 그 실험 참여한다고 한마디도 한 적 없어요. 그리고 대리님이 싫어할 것 같으니까 할 생각도 없고요. 안 할 거예요.”

“넌 이 대리가 싫어할 것 같아서 실험은 참가 안 하면서, 이 대리가 싫어할지도 모르는 납치는 하려고 해?”

“대리님이 왜 납치를 싫어해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어오는 도지윤에게, 최 실장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좋아하겠냐?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답변이 예상되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너 그럼 1구역에서 온 실험팀은 어쩌려고?”

“알아서 하겠죠. 제가 그런 거까지 신경 써야 해요?”

“그 팀하고 요즘 가이드 실장하고 쿵짝 잘 맞아서 돌아다니던데.”

오늘 점심때만 해도 최 실장은 1구역에서 온 실험팀과 가이드 실장이 외부 식당에서 같이 간담회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내년에 센터장이 퇴직을 하니, 눈앞의 진급에 눈이 멀어 여기저기 손을 쓰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1구역에서 온 실험팀도 그중 하나여서, 이 실험의 지분을 조금 얻어내 자기 실적으로 써내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도지윤의 말을 따르면, 실험의 실패는 분명하니 가이드 실장이 물먹을 거란 생각에 최 실장은 속으로 조금은 고소해했다.

“같이 쌍으로 묶어서 죽여 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진짜 그럴까. 도지윤이 귀엽게 검지를 입술 위에 붙이며 말을 했다. 이 새끼가 요즘 이 대리한테 잘 보이려고 귀여운 척을 일삼더니 일상화가 된 것 같았다.

최 실장은 도지윤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타이를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곧 포기했다. 도지윤의 갱생은 자신의 삶에서 이뤄지지 않을 과업이었다.

“죽이지 마. 이 대리가 싫어할 거야.”

그렇지만 도지윤을 말릴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입에 담자, 도지윤은 마음에 안 들어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지윤을 10년째 봐온 최 실장은, 이 순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선선히 제 말을 듣는 도지윤을 보게 될 줄이야.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떡 벌리고 있다가, 숨을 토해내듯 급하게 도지윤을 불렀다.

“지윤아.”

“네?”

“너 이 대리랑 반드시 각인해라. 알았냐?”

그러자 도지윤이 일 년에 한두 번 보여줄까 말까 한 예쁜 웃음을 지었다. 두 눈을 곱게 접고, 붉은 입술을 끌어올려, 행복에 빛나는 눈동자와 함께 꽃이 피어나듯 미소를 지었다.

“네.”

최 실장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드디어 미친개에게도 목줄이 채워지는구나. 하고 안도했다.

얼마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너 이 시발. 왜 또 개지랄인데!”

도지윤은 얼마 전에 김강민 때문에 살벌한 표정으로 최 실장의 방을 쳐들어왔을 때보다, 백만 배는 차가운 얼굴로 최 실장 방문을 뻥 차고 들어왔다. 정원을 불태운 직후에 보였던 표정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심각해 보이는 얼굴에 최 실장의 가슴에 날카로운 불안감이 들었다.

“대리님이 주말에 찾아오지 말래요.”

“너 이 개새끼가.”

도지윤이 내뱉은 말에, 최 실장은 화를 참을 수 없어 책상 위에 놓인 업무 수첩을 도지윤을 향해 던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업무 수첩은 도지윤에게 닿기도 전에 멈추어, 다시 두둥실 거슬러가 원래 있었던 자리에 조용히 안착했다.

“실장님. 혈압 있지 않아요? 조심하셔야죠.”

최 실장의 인생 최대의 스트레스인 도지윤은 최 실장을 향해 무성의하게 말을 뱉었다. 말에 담긴 진심이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아 최 실장은 다시 한번 뒷목을 잡았지만, 여기서 쓰러져봤자 저 새끼만 좋은 일이다, 라고 다섯 번쯤 중얼거리고 겨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너 지금 이 대리가 주말에 찾아오지 말라 해서, 나한테 쪼르르 달려온 거냐?”

“아. 그건 아니고.”

도지윤의 얼굴이 다시 심드렁해져 소파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김강민 그 새끼가 개소리를 지껄여서 몇 대 쥐어팬 걸 이 대리님이 봐버렸어요. 깜짝 놀랐던지 눈을 엄청 크게 뜨면서 목소리도 떠는데, 정말 귀엽고 섹시했어요.”

처음 말을 시작할 때는 분명 지나가는 개미에 대해 말하는 듯한 어투였는데, 말 끝날 때쯤에는 사랑에 빠진 소년의 감성이 듬뿍 묻어있었다.

하지만 최 실장이 받아들여야 하는 말의 무게는 당연히 앞쪽이 컸기에 최 실장은 펄쩍 뛰었다.

“야 이놈아. 너 김강민 3층 밖으로 던진 지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 뭐? 몇 대 쥐어팼다고?”

최 실장은 56년의 인생 동안 듣고, 말하고, 쓰고, 읽었던 모든 욕들을 되새김질 했다. 그러나 도지윤은 최 실장의 말을 듣는 척도 안 하고 ‘아. 이 대리님 보고 싶다.’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마 전, 도지윤이 김강민을 이 대리 집 앞 3층 밖으로 던져버린 사건에 대해서 최 실장은 1구역 에스퍼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 설명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별일 아니지만 일단 일어난 사고이니 미안하고, 그렇지만 너네 에스퍼에게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게 누가 가이드 숙소 앞에 그렇게 대기타고 있으라고 했니.’ 하는 요지의 말을 장장 15분 동안 했었다. 깜짝 놀라 펄쩍 뛰는 1구역의 에스퍼 실장의 날카로운 말을 익숙한 듯 흘려들으며, 최 실장은 그날도 머리카락이 한 움큼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었다.

이번엔 도대체 1구역 에스퍼 실장에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 가볍게 생각했다. 그냥 김강민을 내가 데리고 있고, 도지윤 데려가라고 해야겠다.

오랜 경험에 미루어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하면, 상대측은 대부분 횡설수설을 하다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시발.

“아! 제가 말했었나요?”

“왜 또! 무슨 사고 쳤어!”

설마 가이드 실장 죽이고 온 건 아니겠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레 말하는 도지윤을 최 실장은 불안에 떨며 바라보았다. 그러자 도지윤이 뺨을 발그레 붉히며 수줍게 말한다.

“대리님이 ‘재하 형’이라 불러도 된대요.”

“너 이 씨발.”

최 실장은 아무래도 위 내시경도 다시 받아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아니, 이건 심장 마비 전조 증상인가?

좆같아서 이번에 중앙에 말해서 기필코 도지윤과의 인연을 끊어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숨을 고르고 있자, 도지윤이 갑자기 북풍한설이 몰아칠 것 같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을 한다.

“그리고 김강민이 하는 실험 참가해야겠어요.”

“…너 혹시 정신과 의사도 쥐어팼냐?”

아무리 봐도 정신 건강 검진을 통과할 만한 상태가 아닌데 도지윤이 통과한 것을 보면, 도지윤이 정신과 의사한테 뇌물을 줬든가 아니면 쥐어팼든가 둘 중 하나였다.

“좆같은 새끼가 건방지게 그딴 말이나 지껄이고.”

그러나 도지윤은 최 실장이 앞에 있거나 말거나 제 할 말만 지껄이고 있었다. 저렇게 나를 투명인간 취급할 거면 그냥 거울 앞에서 얘기하지, 왜 내 앞에서 중얼거려 내 속만 터지게 만드는 걸까. 최 실장은 자신이 전생에 지은 업보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했다.

하지만 또한 최 실장은 사회화가 잘된 인간이기에 도지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김강민이 뭐라고 말했는데?”

“대리님은 나랑 각인을 안 할 거래요.”

“…그걸 듣고 가만뒀다고?”

“거기서 죽이면 징계 크잖아요. 대리님 오래 못 봐서 안 돼요.”

최 실장은 또다시 감동 받았다. 이렇게 사회와 법과 규정을 생각하며 말을 내뱉는 도지윤을 오랜만에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쥐어팼냐?”

“네.”

그래. 안 죽인 게 어디냐. 최 실장은 선선히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실험은 왜 참가하려고.”

“폭주하려고요.”

“야. 이 미친놈아!”

최 실장은 어떻게 해서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에스퍼를 반드시 찾아내리라고 다짐했다. 그 에스퍼를 찾아내 과거로 돌아가면, 도지윤을 죽이든가. 아니 그때도 도지윤은 S급 에스퍼였으니 죽이진 못할 것이고 그냥 자기 자신을 암살하든가, 아니면 얼른 도망가라고 설득을 해야겠다.

“폭주가 장난이냐? 어?”

도지윤을 앞에 두고 차분히, 자신의 연륜에 걸맞게 조곤조곤하고 온화하게 말할 거라고 늘 다짐을 하지만 늘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실장님한테 말씀드리잖아요. 잘 막아보세요.”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도지윤에 최 실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야, 이 미친 새끼야. S급 에스퍼가 폭주하는데 그걸 누가 막어? 아니 그 전에. 왜 폭주하겠다는데? 폭주 안 하게 네가 원하는 거 해줄게!”

“이 대리님하고 각인이요.”

냉큼 대답해오는 도지윤의 말에 최 실장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네 연애까지 도와줬으면 됐지, 네 각인까지 도와줘야 하냐?”

“제가 알아서 하게 폭주한다니까요.”

어이가 없어 바다에 쓸리는 모래처럼 스르륵 힘을 잃은 목소리에 도지윤이 명랑하게 대답한다.

“아니, 시발. 그냥 이 대리한테 가서 각인하자고 해. 저번처럼 바짓가랑이 붙잡고 서럽게 울라고. 너 아주 애처롭고 가증스럽게 잘 울던데 한 번 더 울어!”

최 실장은 본인이 울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도지윤을 향해 애원했다. 그러자 도지윤의 얼굴에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사냥하기 직전의 포식자 같은 얼굴이 되었다.

“우리 대리님이 마음이 아주 여려서, 자꾸 도망가려고만 하잖아요. 도망갈 구멍을 다 막아버려야지.”

“…뭔 개소리야.”

사회화가 조금 되었구나 하고 뿌듯한 감정을 느낀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미친놈으로 복귀한 도지윤의 모습에, 최 실장은 퇴직은 아니더라도 휴직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너 이 미친놈아. 네가 폭주했는데 이 대리가 각인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쩔 건데?”

“같이 죽을 건데요?”

최 실장은 자신의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도지윤을 어이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지윤이 개지랄을 떨며 불태웠던 정원이 거의 복구되어 있었다. 도지윤이 만약 폭주를 하게 된다면, 시설팀이 돈을 처발라 복구하는 보람도 없이 저 정원은 다시 폐허가 될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냐?”

혹시 너 혼자 죽는다든지, 폭주 안 하고 죽는다든지, 아니면 조용히 이 대리랑 둘만 죽는다든지. 최 실장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최 실장이 본 도지윤은 미친놈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내뱉은 말을 잘 지키는 미친놈이었다. 시발스럽게도 그것이 더 환장할 점이라는 게 문제였다.

“음. 없는 것 같아요.”

“지윤아. 내가 너한테 말한 적 있냐?”

“뭘요?”

“너 너무 극단적이라고.”

시발. 각인 아니면 죽음이라니. 이 대리는 이걸 알고나 있나. 아니, 도지윤이 말했을 리가 없지.

“야. 안 돼. 폭주는 안 돼.”

“제가 하겠다는데, 실장님이 왜 반대예요?”

“그럼 나한테 말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폭주하라고! 넌 나한테 와서 ‘폭주하겠습니다.’ 하면 내가 ‘그래. 어서 폭주해라!’ 하고 받아줄 줄 알았냐?”

“S급 에스퍼가 폭주하면 재앙급인 걸 아니까 실장님한테 왔죠.”

방금 전까지 비이성적인 말만 늘어놓다, 갑자기 정상적인 발언을 하는 도지윤에게 최 실장은 울화가 치밀었다.

“아는 놈이 폭주하겠다고 하냐?”

“실장님에게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전 폭주하는 척만 할 거예요. 실험동에서 실험한다고 했으니까, 이 대리님 실험동으로 반드시 보내세요.”

“이 대리가 너 실험하는 거 싫어할 거라며.”

“가이드 실장 좀 이용하죠. 실험 성공할 줄 알고 몸이 달았을 텐데.”

중얼거리듯 말하는 도지윤을 보며 최 실장은 ‘성격 더러운 놈’이라고 생각을 했다.

“나중에 이 대리님 없이 나 혼자만 실험동 나오면.”

도지윤이 고개를 들어 예쁘게 웃었다.

“진짜 폭주한 거니까 그냥 사살해요.”

“야, 이 미친놈아….”

최 실장은 위액이 역류하다 못해, 위경련이 온 것 같은 느낌에 급히 손을 가슴으로 올렸다.

“이 대리가 실험동으로 안 오면 어떻게 해?”

그러자 도지윤이 봄날에 피는 꽃처럼 부드럽고,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 대리님은 다정하고 착해서, 내가 폭주했다고 하면 반드시 올 거예요.”

최 실장은 그냥 지금 이 순간, 뇌졸중이나 심장 마비로 뒈져버리고 싶었다.

***

최 실장은 도지윤의 ‘이 대리와 각인 프로젝트’를 자신이 왜 진두지휘하고 있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도지윤 뒤처리 전담반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했다. 모든 계획은 착착 진행이 됐지만, 좆같게도 김강민이 이 대리에게 ‘도지윤이 실험에 자원했다.’는 사실을 말해버려서 최 실장은 등에 한줄기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도지윤은 생각보다 개의치 않아 했다.

“이 실험 내부 품의랑 실험 계획이랑, 어쨌든 관련된 모든 문서에 내 이름 넣은 거 입안자가 김강민 맞죠?”

그리고 의외의 것을 물어보는 통에, 최명현은 수십 개의 문서들을 읽고 확인하고 검토해야 했다.

“좆같은 새끼가 내 이름 흘리자마자 좋다고 덥석 물었으면서, 자원했다고 말을 해?”

도지윤은 자원하겠다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실패할 것이 분명한 실험에 ‘자신의 가이딩 거부 현상’과 ‘S급 에스퍼’, 그리고 ‘흥미롭군요’ 등의 내용을 최명현을 통해 열심히 전달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보아온 최 실장의 속마음은 ‘네가 자원한 거 맞네.’였다.

“너 근데 이거 망한 실험인데, 왜 하겠다고 한 거냐?”

“대리님 울린 새끼 얼굴이나 보려고 했죠. 엿이나 조금 먹이고 말려 했는데.”

김강민이 책임지고 있는 실험은 이미 실패한 실험이었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실험이라 다들 쉬쉬하며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리버리하고 있던 김강민에게 곧 터질 폭탄이 떠넘겨진 것이다. 김강민 입장에서도 환장할 만한 것이, 단순 팀원이었을 때는 성과도 보이고 성공할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는데 책임자가 되고 보니 이건 그냥 폭탄이었던 것이다. 신혼여행의 달콤함에 젖어 복귀하자마자 책임자로 진급을 해 ‘승승장구’라는 말을 직접 맛보던 김강민은 바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발등에 꺼진 불을 끄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상부에 실패라고 보고를 해도 ‘책임지고 성공시켜라.’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실패’의 ‘실’ 자만 보고서에 들어가도 상부에서는 사인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실패’ 선언을 하기에는 투입된 자본과 인력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뛰는 와중에 4구역에 있다는 ‘가이딩 거부 현상’의 ‘S급 에스퍼’가 무려 이 실험에 ‘흥미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완벽했다. 이제껏 실험값을 조금씩 고치면서 어떻게 해서든 실험이 안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S급 에스퍼가 이 실험에 대해 부작용을 보인다면 실험은 바로 재고될 것이다. S급 에스퍼를 이용해서 실험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가 피어오르면, 상부에서도 더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김강민 입장에서는 ‘실험의 실패’를 조용하지만 빠르게, 그렇지만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화제성 있게 알리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실험이 재고되든, 아니면 상부에서 김강민은 책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교체를 시키든 둘 중에 한 가지가 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도지윤이 정확히 노린 것이었다.

“성격 더러운 놈.”

하지만 제 살길을 찾아 계획을 세운 김강민도, 부작용도 적당한 수준의 부작용이지 폭주까지는 예상 못 했을 것이다.

“이 대리님과 나의 사랑의 다리나 놓으라고 내버려뒀는데, 건방진 새끼가 좆같은 말만 해대잖아요.”

최 실장은 잠시 이 대리의 앞날에 대해 묵념을 했다. 그렇지만 이 대리를 너무 사랑해서 저런 거니 이해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자기 일도 아니기에 최 실장은 가볍게 넘겼다.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던 도지윤은 돌연, 환한 웃음을 짓고 최 실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최 실장은 흠칫 불안에 떨었다.

“대리님이 이 실험 실패시키면, 나랑 각인해 준대요.”

“…이 사기꾼 새끼.”

그러거나 말거나 도지윤은 ‘오늘 대리님이 내 품에서 울었는데 너무 귀여웠어요. 다시 돌아오라는데 진짜 납치해서 나만 보고 싶더라.’ 등등 최 실장의 뇌에 입력되지 않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여하튼 시간은 흐르고 실험 당일 날이 되자, 도지윤과 계획한 대로 ‘폭주 같아 보이지만 폭주가 아닌 상황’을 만들었다. 그렇게 믿었다.

매뉴얼에 따라 응급 코드를 보내고 중앙에 적색 발령을 냈다. 중앙에서 폭주를 진압할 에스퍼를 보내기까지는 약 1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 안에 결판을 내야 한다.

“실장님.”

“응?”

“S급 에스퍼의 폭주는 달라도 다르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저희 다 죽는 걸까요?”

실험동 앞에서 에스퍼들을 진두지휘하며 얼른 이 대리가 나타나길 바랐다. 이건 그냥 훈련 상황이다, 에스퍼의 폭주에 대비한 훈련 상황이다 하고 속으로 되뇌며 임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폭주 같아 보이지만 폭주가 아닌 상황’이라기엔 스케일이 너무 컸다. 도지윤은 실험동 일부만 부술 것처럼 말했었지만, 점점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도지윤이 힘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에너지의 범위가 커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 대리가 나타났다. 최 실장은 안타까움을 담아 얼른 비상 대피실로 피하라고 조언했지만 책임감 강하고 코 꿰인 이 대리는 도지윤에게 간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 반 응원하는 마음 반으로 실험동 진입을 허락하자, 도지윤 이 개새끼는 다른 에스퍼들은 실험동에 손끝도 못 붙이게 하더니만 대놓고 티 나게 이 대리만 낼름 받아들였다.

이걸 보면 또, 아직 폭주는 아닌 거 같고.

이 대리가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진동이 더 심해졌다.

“실장님. 방금 에스퍼 한 명 진입 성공했습니다.”

“…성공했다고?”

성공하면 안 되는데? 최 실장이 에스퍼의 진입의 성공에 당황하자, 이 소식을 알려온 다른 에스퍼 또한 당황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네. 현장 주시해.”

서늘한 불안감이 들었다. 도지윤이 통제력을 잃고 있었다.

다시 한번 바닥이 진동하더니 실험동의 벽 일부가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사무동의 벽 일부도 같이 떨어져 나갔다.

“실장님!”

다른 에스퍼가 부르는 소리에 최 실장이 고개를 돌리자, 정원의 일부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수도관이 터져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바닥이 쿵, 진동하며 시멘트가 갈라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고 있었다.

“중앙 지원은 언제쯤 온대?”

“S급 에스퍼라서, 타 센터의 S급 에스퍼들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넷밖에 없는 S급 에스퍼 중 한 명이 폭주 상황이라, 중앙에서도 사살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살려둘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시간이 좀 더 있을 것이다.

“진입은 멈추고, 다들 준비해! 도지윤이 실험동을 나오는 순간을 노려서 사살한다.”

최 실장은 10년 동안 도지윤을 보아왔고, 거의 삼촌과 조카 같은 사이였으며, 서로 볼꼴 못 볼꼴 많이 보아왔었다. 하지만 최 실장의 직책은 ‘에스퍼 실장’이었고, 에스퍼들을 보호하고 국가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무리 아끼고 친한 에스퍼라 할지라도, 규정과 절차에 따라 ‘폭주’를 했다면 사살해야 한다.

도지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 시발새끼. 진짜 폭주한 거 아니겠지.

폭주가 아닌 상황이라면 이 대리를 만나 어떻게 해서든 이야기가 되겠지만, 폭주는 이성이 없는 상태다. 아직 각인하지도 않은 이 대리를 보자마자 죽여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S급 에스퍼를 사살할 수는 있나.

최 실장은 움푹 퍼져 지하로 내려가 형태가 일그러지는 정원을 암담하게 바라보았다. 실험동의 한쪽은 이미 무너져 내부를 휑하니 드러냈고, 사무동도 점점 형태가 일그러졌다.

“도지윤 에스퍼 3주 동안 가이딩 못 받았다고 하던데.”

옆에 에스퍼가 중얼거리는 말에 최 실장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3주우?!”

최 실장의 머릿속에 ‘이 대리가 공사 구별이 철저해서 저녁에 가이딩을 안 해준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거 상황 해결되고 나면, 가이드 실장 목 날아가겠네요.”

그 전에 상황이 해결되야 말입니다.

다른 에스퍼의 중얼거리는 말을 흘려들으며 최 실장은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 이 또라이 미친개가 폭주 한 번 해서 1타 3피로 원하는 것을 죄다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가이드 실장을 골로 보내고, 김강민도 날리고, 이 대리를 얻고.

덤으로 내 머리숱도 없애고.

다행히, 상황은 해결되었다. 활짝 웃는 얼굴로 도지윤이 이 대리를 끌어안고 실험동에서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개새끼.

***

기나긴 회상에서 벗어나, 최 실장은 다시 눈앞의 도지윤을 바라보았다. 행복한 웃음을 걸고 문자를 하는 꼴을 보니, 묻지 않아도 누구에게 보내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좋냐?”

“네.”

눈도 돌리지 않고 바로 대답을 하는 도지윤을 향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해 보라고. 뭐라 안 할게.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너 폭주한 거 맞지?”

힘을 잃고 중얼중얼 물어보자, 그제야 도지윤이 핸드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맹하게 웃으며 에스퍼 실장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안 나요.”

“…뭐?”

“기억이 안 난다고요.”

“…네가 폭주한 게 기억이 안 난다는 거야, 아니면 그 상황 자체가 기억이 안 난다는 거야?”

“그 상황 자체가 기억이 안 나요.”

실장은 숨이 턱 막힌 게, 순간 뇌졸중인가? 하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야 이 새끼야! 그게 폭주한 거지, 기억이 날아갔는데! 어쩐지 이상하더라!”

“실험실에서 그 새끼가 실험 시작 선언한 이후로, 기억이 없어요.”

“이 시발놈이! 폭주한 척한다며!”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요.”

“언제부터 정신 돌아왔는데.”

아연함에 손을 들어 손바닥에 눈을 깊게 눌렀다. 그러자 도지윤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눈썹을 내리깔았다. 시발, 그딴 표정은 이 대리 앞에서나 지으라고.

“대리님이 ‘넌 내가 필요해.’라고 할 때부터요.”

부끄럽다며 제 손을 올려 그 속에 얼굴을 파묻는 도지윤을 보자니, 최 실장은 한쪽 벽에 곱게 세워진 골프채를 들고 도지윤의 대가리를 깨고 싶었다.

“그래서 이 대리가 너랑 각인한다니?”

“네.”

“언제?”

“아마, 곧?”

도지윤이 맹하니 웃었다.

“야 이 시발. 이제 너 알아서 해. 폭주니 누구 죽이느니 그딴 개지랄 떨기만 해봐.”

그러나 도지윤은 최 실장의 울분에 찬 말을 듣지도 않고 ‘프러포즈는 금괴로 할까.’라는 등의 말을 중얼거렸다.

도지윤의 ‘폭주인 것 같았지만 폭주가 아닌, 그렇지만 알고 보니 진짜 폭주였던 상황.’의 결말은 후폭풍은 컸다.

이번 도지윤의 폭주로 인해, 건물이 심각하게 붕괴해 32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부상자야 어쩔 수 없지만 ‘폭주’란 단어가 등장해 미디어에 대서특필되었다. 덕분에 중앙에서도 발칵 뒤집어져 책임자를 색출하기 위해 눈이 벌게졌다.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온 것은 ‘3주 동안 가이딩 받지 못한 S급 에스퍼’와 ‘부작용을 생각하지 못한 무리한 실험 진행’이었다. 전자에 가장 큰 책임을 진 가이드 실장은 실험실 붕괴로 인해 발목뼈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무보직으로 발령이 나고, 퇴원 후 고강도 감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회사에서는 이 사건의 책임자로 적합한 고위직인 실장을 반드시 잘라버리겠다는 일념으로, 과거에 했던 일부터 차근차근 탈탈 털고 있었다. 회사에서 간접적으로 회사를 위한 희생자가 필요하니, 가이드 실장 개인의 명예를 위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는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이드 실장은 길길이 날뛰며 거부했고, 그렇게 회사에서는 가이드 실장을 해임시키기 위한 준비를 온 감사실에서 달라붙어서 하고 있었다.

감사가 끝나는 대로 실장은 해고될 것이다. 최 실장은 꼬시다고 생각했다.

실험 진행과 관련해서는 입안자, 검토자, 책임자 중 검토와 책임에 사인을 했던 고위직들은 발을 빼고 결국 입안자인 김강민만 뒤집어썼다. 실험실에 있던 김강민도 역시나 사지가 멀쩡하지는 못했는데, 유독 얼굴 부분이 많이 상해 최 실장은 도지윤을 의심했다.

김강민은 실험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의혹도 있어 특별 감사를 받게 될 것이고, 감사가 끝난 뒤에 회사에서 김강민을 고소할 것이라고 했다. 김강민은 당연히 회사에서 해고될 예정이지만, 에스퍼라는 특성상 센터에서 최소한의 가이딩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어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가이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김강민을 가이딩하게 될 가이드를 고르는 데 있어, 도지윤의 보이지 않는 입김이 많이 작용할 예정이었다.

“지윤아.”

“네?”

“이 대리는 네가 쓰레기 새끼인 거 아냐?”

최 실장이 어이가 없어 물어보자, 도지윤이 환하게 웃었다.

“네. 저보고 예쁜 쓰레기래요.”

도지윤이 자랑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최 실장이 속이 쓰려 힘없이 한숨을 내쉬자 도지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센터장 이번에 그냥 빨리 퇴직하겠다고 했다면서요. 무보직으로 있겠다고.”

일련의 사건을 겪은 센터장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중앙에 무보직을 내달라고 졸랐고, 받아들여졌다. 덕분에 4구역에 센터장 자리는 공석이었고, 가이드 실장 자리도 공석이었다.

“실장님이 센터장으로 승진한다던데. 축하해요.”

어부지리로 꿰차게 된 센터장 자리였지만, 그래도 최 실장의 입꼬리는 씰룩씰룩 움직였다. 최 실장 본인이 도지윤의 온갖 개지랄을 다 참아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떨어지는 달콤한 꿀 때문이었다.

“그러고 최명현 이번 주에 온다던데, 오지 말라고 해요.”

내 아들을 왜 네가 오라 말라 하는 거야!

최 실장은 소리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최 실장의 막내아들 최명현은 아버지의 말보다 도지윤의 말을 더 잘 들었다.

“대리님은 저 친구 없는 줄 알아요.”

최 실장은 잠시, 도지윤이 자신을 ‘친구’라고 칭했다며 기뻐할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럼 저 가볼게요. 대리님한테 좆같은 에스퍼 새끼가 꽃다발 들고 간대요.”

“공개 연애하는데도 들이대는 에스퍼가 있냐?”

“그러니까요.”

짜증스럽게 대답하며 일어서는 도지윤을 바라보며 에스퍼 실장은 온화하게 말을 했다.

“적당히 쥐어패.”

도지윤은 대답하지 않고 에스퍼 실장실을 나섰다.

도지윤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최 실장은 얼마 전 도지윤의 ‘폭주인 것 같았지만 폭주가 아닌, 그렇지만 알고 보니 진짜 폭주였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도지윤이 상큼하게 웃으며 기절한 이 대리를 공주님 안기로 들고 나왔을 때, 최 실장은 잠시 도지윤이 이 대리를 죽여서 들고 나온 건가? 그럼 혼자 나온 거니까 사살해야 하는 건가? 등의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에스퍼들이 숨소리도 못 내며 모여 있는 공간 속을 사뿐사뿐 걸어 에스퍼 실장 앞에 선 도지윤은 의아한 듯이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난장판이에요?”

“…김 팀장. 중앙에 보고하게. 상황 종료됐다고.”

최 실장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그리고 수많은 에스퍼들의 눈을 의식해 덧붙여 소리쳤다.

“이 대리가 제 한 몸 희생해서 성공적으로 가이딩을 했나 보군. 하하하.”

그러나 누가 들어도 어색하고 거짓된 목소리와 몸짓이라 에스퍼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했다.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도지윤은 이 대리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며 쌩하니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을 아연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이제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이승훈이라는 신입놈이 실장에게 말을 붙였다.

“저 실장님.”

“뭔가.”

인생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하자니 이승훈이 발랄하게 물어온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도지윤 에스퍼가 정말 어렸을 때 아동학대 당해서 저렇게 성격이 나빠진 거예요?”

요즘 어린놈들답게 우회하는 법 없이 직설적으로 물어오는 이승훈을 흘끗 바라본 뒤, 최 실장은 머나먼 곳을 바라보듯 초점을 붕괴된 정원 너머로 잡았다.

아동학대라….

“아동이 성인을 학대한 것도 아동학대인가.”

도지윤의 저 더러운 성질머리는 어렸을 때부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 도지윤의 교육과 실험 때에는 언제나 비명이 난무했다. 물론 도지윤의 비명은 아니었다. 그것이 잘못된 소문을 타고 나가더니 외부에서 아동학대를 사유로 들어 취재를 나왔는데, 하필 도지윤이 가이딩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보게 되어 그대로 뉴스와 신문을 타고 나갔다.

그때 털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최 실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행히 해명할 겨를도 없이 가이드 인권 문제로 화두가 옮겨가면서 그대로 묻혔지만 그 소문은 꼬리표처럼 도지윤을 따라다녔다. 뭐, 도지윤은 적절히 이용해 먹는 것 같았고.

최 실장이 별다른 말도 없이 허공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자, 눈치 없고 발랄한 이승훈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실장님, 왜 도지윤 에스퍼 별명이 ‘미친개’예요?”

이승훈의 작은 질문에 청력 좋은 에스퍼들의 귀가 한꺼번에 최 실장의 입에 쏠렸다. 온갖 억측이 난무한 도지윤의 소문 중 하나의 진상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씨발 미친 또라이 개새끼.”

“네?”

“부를 때마다 ‘이 씨발 미친 또라이 개새끼.’라고 부를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줄여서 ‘미친개’네.”

***

머리가 아프고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끝에 힘을 줘 집중하는데, 누군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정신 들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가물가물한 내 정신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강제로 힘을 주어 눈을 뜨자 창백한 하얀 얼굴의 예쁘게 생긴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누구지.’ 하며 잘 돌아가지 않은 머리를 굴리려 애를 쓰는데 예쁜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 줄까요, 대리님?”

“아… 도지윤.”

기억의 끝에 걸린 이름을 끄집어 올리니, 눈 뜨기 이전의 상황들이 줄줄이 생각났다. 급히 몸을 일으켰다가 핑 도는 어지럼증에 나는 다시 머리를 베개로 처박아야 했다.

“아직 어지러울 거예요.”

도지윤이 내 몸을 잡아 살짝 일으키며 입가에 컵을 대주자 나는 급격한 갈증이 느껴져 물을 받아 마셨다. 물을 다 마시고 도지윤을 바라보니, 그가 맹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내 귀 뒤로 넘겨주었다.

“도지윤. 폭주는….”

“형 덕분에 해결됐어요.”

도지윤은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에 누운 내 옆에 몸을 구겨 나란히 누웠다.

“솔직히 말해봐. 폭주 아니었지.”

잔뜩 갈라지고 낮아진 목소리로 던진 불신으로 가득 찬 내 질문에 도지윤이 맹하게 웃으며 내 이마에 키스했다.

“폭주의 경계라고 해둘게요. 실험 시작하고 나서, 형 나타나기 전까지는 진짜 기억 안 나요.”

“실험은… 어떻게 된 거야. 넌 어떻게 실패할 거 알고 있었고?”

역가이딩의 후유증인지, 단순히 잠이 덜 깬 것인지 멍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나는 도지윤에게 물었다.

“그거 원래 실패한 실험이에요.”

“어?”

나는 도지윤의 웃음기 섞인 의외의 말에 깜짝 놀랐다.

“돈은 많이 들어갔는데, 결과는 그만큼 뽑아지지 않아서 이리저리 폭탄 돌리기 하고 있던 실험이에요. 아마 결과값 조작도 좀 있었던 것 같고요. 김강민이 위의 지시로 그렇게 한 건지, 아니면 본인이 알아서 그렇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도지윤이 손을 들어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그 실험은 나한테 오면 무조건 실패하게 되어있는 거였어요. 작정하고 실패시키려고 가져온 거예요.”

“뭐라고?”

나는 도지윤의 말에 멍청하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가이딩에 문제 있는 에스퍼에게 그런 실험을 들고 오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요. 김강민은 알고서 실패의 책임을 나에게 돌리려고 가져온 거고, 가이드 실장은 진급에 눈이 멀고 급해서 제대로 안 알아보고 덥석 물었고.”

도지윤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자, 도지윤이 ‘아, 귀엽다.’라고 중얼거리며 이마에 다시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나는 성인 남성을 앞에 두고 귀엽다고 지껄이는 그에게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내야 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지는 김강민 쪽도 몰랐겠지만, 그거야 제가 신경 쓸 일인가요.”

“…내가 원하면 실험 성공시킬 수도 있다면서.”

도지윤이 이불 속에 감춰진 내 손을 잡아 들었다. 실험동에서 살짝 쓸렸던 것 같은데, 붕대로 칭칭 감아져 있어 조금 놀랐다.

“이렇게 많이 다쳤어?”

“…네. 죄송해요. 형.”

아무리 생각해도 살짝 쓸렸던 것 같은데… 도지윤을 믿을 수 없어 붕대를 풀어헤치려고 하자, 도지윤이 손을 들어 내 손을 방해했다.

“실험 성공시키는 거는 결과값 조작만 하면 되니까요. 적당히 타협 봐서.”

중얼거리던 도지윤이 그냥 내 몸을 끌어당겨 품으로 안아버렸다.

“덧나요. 풀지 말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붕대로 칭칭 감을 만큼의 상처는 아닌 거 같은데….”

“형은 안 봐서 모르잖아요. 피범벅이었어요.”

도지윤이 말하며 내뱉는 숨소리가 내 이마를 간지럽혔다.

“난 김강민이 이 실험 때문에 날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맞을걸요. 계속 지지부진하다가, 일 년 전쯤에 한 에스퍼한테 결과값이 좋게 나왔었거든요. 다른 실험값들도 좀 괜찮게 나오고. 희망을 봤나 보죠. 그러고서는 계속 죽 쒔지만.”

도지윤의 차분한 목소리가 덩그렁 덩그렁 내 귓속을 울렸다. 더불어 나에게 뜬금없이 각인하자고 했던 김강민이 생각났다. 이 쓰레기 같은 놈. 다 알고 그랬구만.

나는 잠시 도지윤에게 이걸 이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질투 많은 놈이 이런 얘기 들어봤자 나 없는 데서 사고만 치겠지.

나는 도지윤 쪽으로 몸을 좀 더 붙여,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래서 김강민은 어떻게 되는 거야? 가이드 실장은?”

“책임을 져야죠. 건방지게 그딴 실험을 나한테 들이밀고, 내 가이드를 내 옆에서 뺏어가려고 한 책임을 져야죠.”

“…그런 말 하기 낯짝 안 뜨겁냐?”

내가 다 부끄럽네.

도지윤이 몸을 살짝 떼어내 나를 쳐다보았다. 두 뼘 정도 떨어진 내 시야에서 도지윤이 맹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썩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거래 지켜요. 형.”

“…생각해보니까. 너!”

나는 ‘거래’를 말하는 도지윤의 목소리에, 실험동에서의 일이 생각나 몸을 벌떡 일으켜야만 했다.

“야! 이 사기꾼아! 거기서 말을 그렇게 바꿔?”

“…거래의 기술이죠. 형.”

나를 따라 앉으며 담담히 말을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나는 다시 한번 뒷골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 거래의 기술?”

내가 한껏 비꼬며 도지윤이 한 말을 따라 하자 도지윤이 맹하게 웃었다.

“그럼 거래 파기해.”

“네? 뭐라고요?”

그러나 그 뒤에 내가 담담히 말하자 도지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경악에 차서 바라본다.

“이 사기꾼!”

“사기꾼은 너지! 그 긴박한 상황에서 나한테 그런 식으로 협박을 해?”

“나한테 어떻게 그래요! 날 좋아한다며!”

다시 도지윤의 눈에 작은 눈물이 차오른다. 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터지는 속과 함께 웃음도 터져버렸다.

“왜 웃어요! 이게 웃겨요? 나 다시 폭주할 거예요. 그냥 형하고 죽는 게 나았어!”

기어코 찰랑찰랑 눈물을 올리며, 한 방울 떨구는 예쁜 얼굴을 보며 나는 도지윤의 멱살을 잡고 끌어와 입을 맞췄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 입을 열고 들어오는 도지윤의 혀를 느끼며, 나는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내 쪽으로 끌어당겨 더 깊고 깊게 도지윤을 받아들였다. 나를 필요로 하는 도지윤의 애정이, 넘치게 흘러들어와 나를 물들이고 있었다.

한참을 키스하다, 나는 숨이 차 그제야 입술을 떼어내고 숨을 급히 몰아쉬었다.

“지윤아.”

나는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도지윤의 이름을 불렀다.

“네. 형.”

“좋아해.”

“…저도요. 그래도 거래는 못 물러요.”

그렇다. 회사생활에서 거래란 한번 체결하면 무를 수 없다.

도지윤이 손을 들어 엄지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닿는 피부에 뜨거움인지, 차가움인지 강렬한 감정이 서렸다가 공중으로 증발했다.

“지윤아.”

“네. 형.”

“아무리 생각해도 넌 쓰레기 중에 핵폐기물급 쓰레기가 맞는 거 같아. 그래도 예쁜 쓰레기라 다행이야.”

내 말에 내 얼굴을 쓰다듬는 도지윤의 손길이 멈칫한다. 나는 그 손을 부여잡으며 도지윤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내가 수거해가도 다른 사람들이 아무 말 안 하겠지?”

내 말에 도지윤이 눈가가 곱게 접히고, 붉은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밝은 햇살이 빛을 갈라 뿜어내듯, 스테인드글라스의 유리들이 찬연하게 제 색깔을 뽐내듯, 꽃이 피어나 생명력을 뽐내듯, 보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도지윤이 웃었다.

“네.”

나는 도지윤에게 마주 웃으며 천천히, 그렇지만 내 온 감정을 담아 말을 했다.

“각인하자.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나에게 애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에스퍼는, 영원히 내 앞에서 연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속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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