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피라미드 (4)
“반격!”
그러나 곧바로 날아든 것은 역습.
생성 스킬로 가볍게 맞받아치는 로칸의 공격을 놈이 대검을 세워 막아 냈다.
쩌엉!
묵직한 울림과 함께 주변의 병사들이 물러났다.
놀라운 것은 로칸의 일격에도 조금의 밀림이 없는 녀석의 움직임.
오히려 바닥에 꽂힌 대검을 중심축으로 삼아 발차기를 날리는 모습에 로칸이 긴장했다.
“좋군!”
간만에 붙어 보는 제대로 된 강자.
레벨별로 오르는 능력치만을 고려한다면 이미 300레벨에 육박하는 로칸이었지만 유저들의 장비빨, 그리고 타이틀 효과까지 고려하여 몬스터들의 수준도 급격히 올라갔기에 힘 수치가 비등할 수 있는 것이다.
“숄더 차지!”
머리를 숙여 발차기를 피해 낸 로칸은 웅크렸던 몸에서 가공할 경력을 뽑아내고 단단한 견갑을 앞세우고 멧돼지처럼 녀석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횡 이동!”
포스의 기운마저 서린 그 돌진에 상급 귀족이자 대장군인 토라도 감히 부딪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생성 스킬을 발동시켰다.
횡 이동.
한순간에 상대의 측면으로 이동하는 고속 이동술.
“쳇.”
연이은 횡 베기가 로칸의 몸뚱이를 가로로 베어 왔지만 로칸은 날리던 몸을 그대로 던져 바닥을 굴렀다.
무협에서는 이런 걸 나려타곤이라고 하던가 꽤나 볼썽사나운 모습이지만 본인은 전혀 추하거나 자존심 상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기는 게 장땡이지.’
자존심 챙기고, 멋을 챙기다가 죽어 버리면 그처럼 추한 게 또 있을까.
땅을 박차고 쏘아지며 놈에게 태클을 시도했다.
“아닛 ”
다리를 끌어안고 넘어뜨리자 놈으로서도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단병기라면 모를까, 놈이 가진 대검으로는 초근접 거리로 다가온 로칸을 공격할 수 없는 것이다.
“흐흐흐, 아니꼬우면 너도 인벤토리 갖든가!”
반면, 로칸은 달랐다. 숄더 차지를 펼치는 순간, 무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가 마운트에 성공하는 순간 다시 불러낸 것이다.
배틀 액스의 크기가 상당해서 그 역시 초근접 거리에서는 쓰기 어려웠지만 도끼 자루를 짧게 잡는 것으로 해결했다. 이 또한 도끼류가 가지는 장점 중 하나. 사람 머리통보다 큰 도끼날을 팍팍 꽂아 대니 놈의 생명력이 쭉쭉 빠져나갔다.
“크으윽, 모래 갑옷!”
하지만 놈도 호락호락 당해 주지만은 않았다. 사막 귀족의 권능을 일으켜 로칸을 밀어 내고 자신의 몸에 모래 갑옷을 둘렀다.
이것이 바로 사막 대장군의 가장 무서운 조합 스킬.
때문에 로칸도 이것이 나오기 전에 끝장을 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아쉽게도 초반에 발동시켜 버렸다.
“귀찮게 하는군.”
그러나 공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로칸의 공격력이라면, 대미지가 반감되기는 하겠지만 모래 갑옷을 터트리고 놈의 몸뚱이에 공격을 꽂아 넣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보다 쉬운 방법도 있었다.
“폭격!”
일단은 견제부터. 견제라기엔 너무도 강력한 일격이었지만 놈은 자신만만하게 모래를 일으켰다. 갑옷을 더욱 두껍게 쌓고 방패까지 만들어 내며 자신 있게 정면으로 막아섰다.
파앙! 푸스스스.
그리고 실제로 막아 내는 것에 성공했다.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아쿠아 붐!”
하지만 그 또한 로칸의 노림수였다. 모래 갑옷까지 일으킨 이상, 놈이 물러서지 않고 버틸 것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때문에 폭격과 연이어 한 가지 마법을 발동시켰다.
바로 아쿠아 붐!
자이언트 비와 킬러 비를 사냥할 때 사용했던 그 마법이 다시 펼쳐진 것이다.
“윽 ”
일단 대미지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모래가 흠뻑 젖으면서 제대로 조종이 어려워진 것이다.
형태를 갖출 수 있되, 정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움직이며 방어력을 높일 수 있던 모래 갑옷이 이제 정말 한 겹짜리 허술한 갑옷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광살.”
물론 그것을 파기하고 다시 만들어 내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둘 로칸이 아니다.
아쿠아 붐과 거의 동시에 짓쳐 들어 놈을 난도질해 버렸다.
광살까지는 어떻게든 단단한 몸뚱이로 버텨 냈지만, 이어지는 난무와 연격에 버티지 못하고 전신이 해체되어 버리고 말았다.
“후우!”
[상급 혈석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한 놈의 상급 귀족 머미까지 끝장을 냈다.
그러나 다음 층으로 향하는 열쇠 조각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다른 상급 귀족 머미를 처치하며 열쇠 조각을 모두 모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놈을 잡은 이유는 하나, 바로 상급 혈석 때문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놈의 상급 혈석을 더해 제작하게 될 최상급 혈석 때문이다.
‘아니, 마지막은 아니지.’
상급 혈석을 수거하는 로칸의 눈동자가 진짜 마지막 한 놈을 향해 돌아갔다.
바로 롤피.
롤피의 혈석이 아니더라도 최상급 혈석의 제작은 가능했지만, 로칸은 그에게까지 눈독을 들였다.
최상급 혈석은 자신이 사용할 것이고, 롤피가 가진 상급 혈석은 의회에 제출하려는 것이다.
“일단 제작하고 올 테니까, 작업하고 있어.”
그러나 그 속내를 벌써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일단은 최상급 혈석의 제작부터.
로칸이 최상급 혈석을 제작하는 동안 롤피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남은 병사들을 수습했고, 로칸은 돌아오자마자 그것들을 사냥하며 레벨을 올렸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250레벨! ‘헬렙’ 구간을 아주 간단하게 통과해 버렸다.
“자, 그럼 연달아 가 볼까 ”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리고 곧장, 열쇠 조각들을 이용해 사막 황제가 기다리고 있을 마지막 층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같이 가야지.”
“옛 하지만 전……. 화, 황제에게 가면 반드시 죽임을…….”
“걱정 마. 내가 지켜 주도록 노, 력, 을 해 볼 테니까.”
마지막 상급 귀족으로, 이제는 이 층의 왕으로 군림하게 될 롤피가 기쁜 마음으로 배웅하려 하자, 로칸이 즉시 제동을 걸었다. 애초부터 여기까지가 로칸의 계획인 것이다.
“다, 당신 설마 애초부터……!”
“그래서, 지금 거부하는 건가 ”
절대적인 협력을 약속한 계약의 힘이 롤피를 자극했다. 거부하고 상급 혈석을 내어놓든가, 아니면 함께 황제에게 가서 파괴되든가.
물론 그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노오력’은 하겠지만, 로칸은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막 황제가 그를 발견하자마자 배신감에 분노하며 첫 번째 타깃으로 잡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곧장 폭주 상태로 들어갈 수 있겠지.
그동안 로칸은 한두 방이라도 타격을 할 수 있을 테니 어느 쪽이든 이득이었다.
“역시 인간의 약속 따위를 믿는 게 아니었어……!”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
거의 공황 상태에 빠진 롤피였지만, 로칸은 개의치 않았다.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렸다.
“자, 먼저 들어가라고.”
선택의 순간. 놈이 택한 것은 편안한 죽음이었다.
“네놈…… 네놈을 저주할 것이다!”
파지지직!
그와 함께 놈의 몸에서 붉은 스파크가 튀며 계약이 이행되었다.
여전히 생에 대한 갈망은 존재했지만, 황제의 분노를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느니 편안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상급 귀족 머미 롤피와의 계약이 파기되었습니다.]
[상급 혈석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상급 혈석까지 획득한 로칸은 미련 없이 사막 황제가 기다리는 마지막 층으로 향했다.
[사막 황제의 대전으로 진입하셨습니다.]
알림과 함께 다시 변한 주변 환경.
이번에는 금은보화로 멋스럽게 장식된 대전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위치한 옥좌에는 당연하게도 사막 황제, 스콜피온 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막 황제 스콜피온 킹][Lv 280]
인간, 아니 트롤의 그것이라 해도 믿을 만한 근육질의 상체. 무엇이든 잡아 부러뜨릴 것 같은 집게 발과 전갈의 하체. 특히 강력한 맹독을 품고 있는 꼬리는 누구라도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로칸도 마찬가지.
물론 그렇다 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로칸이지만 더 쉽게 풀어낼 방법이 있는데 어려운 길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은신.”
기본은 은신이다. 몸을 숨기고, 놈의 감지 거리에 걸리지 않을 만큼만 가까이 접근을 했다.
“기계 쥐, 사용.”
찌지지직!
다음은 기계 쥐. 한 방이면 침묵할 소모품이지만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세 개나 풀어 버리니 시선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누가 감히 신성한 대전에서 소란을 피우느냐!”
콰지직.
그러나 그 또한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기계 쥐가 자체적으로 ‘도발’ 능력을 지녔기에 시선이라도 돌린 것이지, 세 개든 다섯 개든 수십 개든 일격에 터트려 버릴 정도의 능력이 사막 황제에게는 있는 것이다.
고작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모래 조종 능력을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을 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리프 어택!”
하지만 로칸에게는 딱 그만큼의 틈이 필요했을 뿐이다. 몸을 잔뜩 웅크려 추진력을 얻을 로칸은 즉시 놈의 얼굴을 향해 뛰어올랐다.
“가소롭구나!”
벼락같은 돌진이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상대가 너무 강력했다.
로칸은 거리를 반도 좁히기 전에 발각당하고 말았다.
쉬이익.
요사스러운 독을 가득 머금은 전갈 꼬리가 날카롭게 번뜩거리며 로칸을 마중 나왔다.
“폭주!”
독침이 꽂히다 못해 꿰뚫어 버릴 듯 날아드는 순간, 로칸이 생성 스킬을 발동시켰다. 버서크를 비롯한 온갖 공격과 방어 스킬을 쏟아부은 순간 무적의 스킬을!
까가가가가각!
스콜피온 킹마저 로칸의 배틀 액스와 부딪히는 순간, 화들짝 놀라 온몸을 비틀 정도의 위력이었다. 무려 버서크의 힘까지 더해진 스킬이니까.
“돌격! 숄더 차지!”
그렇게 놈의 반격에서 벗어난 로칸은 즉시 발버둥치는 스콜피온 킹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놈의 거체를 몸으로 들이받아 버렸다.
“커흑!”
갑주처럼 단단한 껍질에 보호받는 놈이지만 작정하고 들이받는 로칸의 숄더 차지에 마냥 무사할 수는 없었다.
윽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상체가 꺾이고 4미터 높이에 있던 머리가 사람 키만큼 낮아졌다.
“회피.”
로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또 다른 생성 스킬 회피 사용해 빠르게 놈의 품에서 빠져나오는가 싶더니 숙여진 놈의 얼굴 앞으로 달려갔다.
고통으로 벌려진 입을,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채고는 무언가를 입안으로 던져 넣었다.
“입 벌려, 혈석 들어간다.”
어렵게 만든 최상급 혈석을 스로잉까지 사용해 입속 깊숙이 던져 버렸다.
“커헉!”
[사막 황제 스콜피온 킹이 최상급 혈석을 사용하였습니다.]
[사막 황제 스콜피온 킹의 생명력이 최대치까지 회복됩니다.]
[사막 황제 스콜피온 킹이 최상급 혈독에 중독되었습니다.]
혈석은 그 자체로 회복제이기도 했지만 강력한 독이기도 했다.
그것은 사막의 존재들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만약 이 혈독을 완벽히 해소할 방법을 찾았다면 이들이 피라미드에 아직까지 묶여있지 않았을 테니까.
따라서 스콜피온 킹 역시도 최상급 혈석이 만들어 내는 혈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흐흐흐. 이제 진짜 시작해볼까 ”
최상급 혈독의 위력은 로칸과 스콜피온 킹 뿐 아니라 마스터 레벨이라도 능히 죽일 수 있을 정도. 그렇기에 남은 것은 시간을 보내는 일뿐이었다.
이대로 도망만 치더라도 스콜피온 킹은 스스로 자멸할 테고, 로칸은 승리자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시간 동안 버텨 내기만 한다면.
그러나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로칸의 취향이 아니었다.
이왕 버서크까지 쓴 거, 로칸은 배틀 액스를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스콜피온 킹을 향해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