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성자 출현 (2)
성자!
만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거룩한 이름!
성녀, 교황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그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벌써 1~2개월 전부터 나오고 있었다.
들르는 마을마다 상처 입은 자들을 치료하고,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료하고, 병든 자, 불구가 된 자를 일으키는 기적의 사나이.
그런 그의 뒤를 따라 벌써 제자이자 종복을 자청하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고, 그에게 치료를 받은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은 매일 그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 홀리기 좋은 말이지.’
로칸 역시 그의 뒤를 따라 이동하는 중이었지만 평가는 크게 달랐다.
그가 사람들을 치료하고, 치료 받은 이들이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서는 것과 같은 기적을 맛보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 행동과 결과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오오오오!”
“성자님이 또 해내셨다!”
“기적! 기적이야!”
사실 상식에 대입하면 쉬운 일이다. 회복 주문으로는 상처와 질병을 치료할 수 있지만, 질환과 장애는 어찌하지 못하니까.
제아무리 고레벨의 사제라도 암 환자의 암 덩어리를 도려내지는 못하고, 앉은뱅이를 띄울 수는 있어도 제 발로 일어서게는 할 수 없으며, 잘린 신체를 붙일 수는 있어도 새로 돋아나게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오, 신이시여……!”
그러나 그는 했다. 힘든 척은 하고 있지만 제법 수월하게 불가능한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겠지. 그러니까 ‘기적’이라고.
하지만 로칸은 이렇게 생각했다.
‘사기꾼이지.’
불가능은 불가능하기에 불가능이다. 그 간단한 진리에 입각하자 눈앞의 기적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물품 구입.”
그렇게 성자가 새로운 마을에 입성해 기적을 베풀고 한동안 머물 채비를 하는 것을 지켜보던 로칸은 자리를 벗어나 마법 상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을의 위치가 기억된 텔레포트 스크롤을 대량으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룬 북 사용, 타이무라로.”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타이무라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타이무라 내에 있는 그의 상점을 향해서였다.
“벤더 설정.”
즉시 벤더 설정을 조작해 새로운 판매 물품을 추가시켰다.
[한정 판매. 코코모로 마을 이동 스크롤][판매가 : 20쿠퍼]
사실 그렇게 싼 것은 아니었다. 원가가 30쿠퍼였으니까. 한 장에 고작 10쿠퍼 차이. 그러나 한정 판매라는 이름의 힘은 위대했다.
코코모로 마을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한정 판매 문구에 흥분해 일단 사들이고 보는 이들이 꽤 많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가 될 수 있었기에 한 명이 열 장 이상 구입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준비한 1천 장의 스크롤이 금세 동이 나고 말았다.
‘한 템포 쉬고.’
하지만 곧장 물건을 채워 넣지는 않았다. 그들도 이 스크롤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일부 성격 급한 유저들은 일단 스크롤을 사용하고 보았고 코코모로 마을로 이동했다.
‘바로 발견할 수 있을까 ’
그러나 그 스크롤의 의미를 바로 파악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빠르게 파악한다면 꿀을 빨려 할 테고 모른다면 다시 이동 스크롤 판매를 재개한 뒤론 쓰레기 취급만 받겠지.
그렇게 한참 동안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다가 물건을 올리자 처음엔 주춤하던 판매가 어느 순간 치솟았다. 용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가격을 25쿠퍼로 올려도 마찬가지. 코코모로 마을에서 판매하는 이동 스크롤을 로칸이 독점해 버렸기 때문이다.
마크를 사용하기에는 룬 북을 사용하는 데 소모되는 텔레포트 스크롤의 비용이 더 비쌌다.
‘하여간,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니까.’
성자가 있는 마을로 향하는 스크롤이 갖는 의미는 그것이었다. 무료 치유와 버프 획득.
심지어 악인, 머더러라 해도 가리지 않고 치료해 주는 그였기에 포션값 대신으로만 여기더라도 그를 찾는 것은 무조건 남는 장사였다.
그것이 자신들의 속을 갉아먹을지도 모른 채.
‘흠, 이 정도면 되겠지 ’
모든 것을 알고도 독점해 둔 이동 스크롤을 모조리 상점에 풀어놓은 로칸이지만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그가 아니더라도 전생에 어차피 벌어졌던 일이니까.
자신은 그것의 시기를 조금 앞당겼을 뿐이고, 결과적으로 더 빠르게 종식시킬 테니 전혀 문제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실제 유저들의 경우 피해를 보기도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활용 여부에 따라 이득을 보기도 할 테니 마냥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 ”
그렇게 적당한 타이밍을 재고 있는 로칸에게 한 장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것도 긴급 전송된 마법 편지.
발신인은 다름 아닌 리나이 영주였다.
“터진 건가 ”
그것을 받자마자 씨익 미소를 지은 로칸은 편지를 뜯으며 즉시 리나이 영지로 이동해 영주성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갔다.
“찾으셨습니까.”
“아, 왔는가.”
다급하고 초조해 보이는 모습. 손을 부들거리고 창백해진 그의 얼굴만 보아도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봤나 ”
편지의 내용을 묻는 것이다. 오면서 슬쩍 열어 확인해 보았기에 로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
“글쎄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
하지만 로칸은 답을 주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그의 의중을 물었다.
돌아오는 것은 침묵.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는 것이 없었다.
“영지를…… 포기하란 말인가 ”
두 번째 광산 개발의 실패. 그로 인해 소진된 영지의 잔고.
아직 약간의 자금은 남아 당장 꾸려 가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이미 한 차례 과실을 맛본 이들이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그것만 해도 괜찮았다. 문제는 두 번째 광산 개발에 들어간 이후부터 자꾸 친한 척을 해 오는 레밍턴 영주가 슬금슬금 영지에 사람들을 보내는가 싶더니 최근 자주 시비와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아예 공식 항의 서한과 함께 무서운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이 항의 서한을 보게. 이대로라면 분명 레밍턴 영주는 영지전이라도 벌이고자 할 게야.”
‘항의는 무슨, 대놓고 시비 거는 거지.’
누가 봐도 그쪽의 잘못, 혹은 별문제도 아닌 일로 영지민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겠다며 강한 어조로 비난하고, 불의의 상황에는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시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하지만 문제는 리나이 영지에 대항할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로칸이 어떻게든 벌어 준 돈으로 병사를 육성한 것도 아니고, 농업이나 상업을 장려한 것도 아니고, 유력 인사에게 줄을 댄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특산물이라 할 수 있는 광산을 개발하여 1백 년 먹거리를 개발하려던 영주의 욕심 아닌 욕심이 광산 개발 실패와 함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어떤…… ”
가만히 침묵으로 응대하던 로칸이 조심히 입을 떼자 리나이 영주가 간절한 눈으로 주목했다.
“더 늦기 전에 영지를 파십시오.”
“뭣 그럴 수는 없네!”
“그럼 어쩔 수 없죠. 영지전에 휘말려 모두 죽는 수밖에.”
리나이 영주의 생각보다 단호한 대답에 로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란 정해져 있으니 굳이 설득하려 든다는 인상을 주기보다 아픈 곳을 더 후벼 판 것이다.
“……레밍턴 영주는 욕심이 많은 자야. 설령 온전히 영지를 넘긴다 해도 영지민들이 착취를 당할 걸세.”
“그럼 안 그럴 사람에게 팔면 되죠.”
“모르는 소리. 귀족 중에 그런 인물이 흔한 줄 아나 게다가 우리 영지는 계륵이야. 고작 구리 광석 조금밖에 나지 않는 영지를 누가 큰돈 들여 구입하려 하겠나.”
리나이 영주는 진심이었다. 자신의 거취도 문제겠지만 진심으로 영지민들의 안녕을 염려하고 있었다.
잘살지는 못했어도 영지민들과 가족처럼 지낸 그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로칸은 더 조심스럽게 원하던 말을 내뱉었다.
“제가 구입하죠.”
“……자네가 ”
그 순간 리나이 영주의 눈빛이 변했다.
너 역시 그런 목적이었냐는 듯, 로칸을 향해 보내던 한없는 신뢰가 불신과 배신감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제게 돈이 조금 있습니다. 마침 명예 남작 작위를 얻어 영지를 가질 조건도 충족됐지요. 하지만, 저는 영지를 경영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그러거나 말거나, 로칸은 제 할 말을 이었다.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영지를 직접 경영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영지 경영이야 사실 일 잘하는 행정관이면 훌륭하죠. 물론, 영주님은 아닙니다.”
팩트 폭력. 가감 없는 독설에 리나이 영주가 치명타를 맞은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헛소리 말라며 깽판 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무능은 스스로도 알고 있던 바이니까.
“제가 보니 새론 양이 일을 참 잘하더군요. 그 정도면 영지의 살림을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영주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
새론이라면 그 역시 눈여겨보던 아이였다. 똘똘하니 맡은 일을 잘 해결해 낼 뿐 아니라 늘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오던 아이.
평민만 아니었다면, 여자아이만 아니었다면 큰일을 했을 거라 생각하던 그 아이를 파격 기용하겠다니 로칸을 다시 보는 것은 물론 생각이 흔들렸다.
“계속해 보게.”
“물론 혼자서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로티, 미키, 탄탄이 도와주면 제법 잘 꾸려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소꿉친구이기도 하지만 각자 다른 방면으로 재능을 보이는 녀석들이니까요.”
끄덕.
리나이 영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그들을 크게 쓸 용기가 없었을 뿐, 생각하던 바였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영지 관리를 맡는다면 실제 자신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씁쓸해하기도 했다.
“만약 영주님이 이곳에 남기를 원한다면 자리는 하나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흠, 치안대장 정도면 좋겠지요 ”
“치안대장 자네…….”
바로 로칸과 같은 자리였다. 일신의 무력이 일천한 리나이 영주가 맡기에는 어림도 없는 자리.
그러나 리나이 영주가 품은 생각은 분노나 모멸감 따위가 아니었다.
치안대장의 자리는 영지 관리에서 상당한 알짜자리인 것이다.
영지민을 쥐어짜기 위해서는 가장 냉정하고 믿을 수 있는 측근을 그 자리에 앉혀야 했다. 자신처럼 유약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만 보아도 로칸이 최소 영지민을 쥐어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아.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하지만 레밍턴 영지는 어쩔 셈인가 ”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레밍턴 영주. 그가 탐욕의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이상, 리나이 영지를 지키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밟아야죠.”
그러나 로칸의 해답은 명쾌했다.
마치 잡화점에서 물건 사 오듯 너무나 간단하게 말을 하는 까닭에 리나이 영주는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잠시 착각할 정도였다.
“어떻게…… ”
쥐어짜 내듯 소리를 내는 영주의 물음에 로칸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벼이 대꾸했다.
“어차피 현 황제의 기조를 생각할 때 영지전으로까지 가는 건 무리입니다. 그 역시 탐욕이 많은 자이니 결국은 자신의 신하이자 병사가 될 인원이 줄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겠죠. 그러니 레밍턴 영주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입니다.”
“……대리전 말인가 ”
“예. 기사들을 내세워 대리전을 치르고자 하겠죠. 어차피 영주 간의 일기토는 이쪽에서 받기 어려울 테니 말이죠.”
“으흠…… 자신 있나 ”
그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리나이 영주가 건넨 말에 로칸은 대꾸 없이 씨익 웃었다.
‘아마 그놈이 270레벨 정도였지 ’
고작해야 300레벨도 안 되는 놈들을 상대로 자신 있냐고 대답하기도 우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