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분기점 (1) (128/500)

 # 128

분기점 (1)

리나이 영지를 포함해 도합 다섯 개 영지의 통합.

크지 않은 영지들이기는 했지만 도저히 남작급의 귀족이 가진 영토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영토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제 승급만 하면 되겠군.”

씨익.

이 정도면 명성과 공훈도만 어느 정도 쌓으면 바로 자작급으로 올라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쉬운 방법도 있다.

[남작에서 자작으로 승급하셨습니다.]

바로 매관매직!

남작의 작위를 얻기는 어렵지만, 남작에서 자작으로 승급할 때는 충분한 돈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다.

일부 영지를 통합 과정에서 매입의 방식을 사용했기에 영지 보유금은 레밍턴 영지를 먹었을 때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자작의 작위를 구입하기에는 충분했다.

마침 적당한 줄도 있지 않은가

“크흠, 오해하지 말게. 자네가 충분한 자격이 있어서 작위를 얻을 수 있던 게야. 조사단 측에 들어 보니 뭐, 타락한 힘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냈다지 내 자네가 나를 도운 공에 대해서도 보고를 올렸으니 곧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을 수 있을 게야.”

크로반에게 무려 5천 골드나 되는 돈을 목구멍까지 처먹이니 자작의 작위를 뱉어 낸 것이다. 원래는 혼자서 챙기려던 공을 조금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덕분에 로칸에게 약속한 황제와의 만남 주선 역시 명분이 서고 수월해졌으니 그의 입장에서도 딱히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의회의 의원이자 대귀족인 그로서는 어차피 황제에게 잘 보인다 해도 그뿐, 더 올라갈 자리가 남아 있지는 않았으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상점의 자본금을 끌어와서라도 백작의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백작은 돈만으로 살 수 없었다. 일단 황제도 주시하기 시작하는 작위이니까.

때문에 다시 한 번 승급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업적을 쌓아야만 했다.

‘이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건 꽤 많지.’

일단 영토를 늘리고 우수한 병사를 양성하는 것이 가능해지니 말이다.

그래 봤자 최고의 전력은 자기 자신일 테지만.

[투기장에 등록한 정보가 확인되었습니다.]

[투기장 : 기사 계급 전투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수락하시면 투기장으로 이동합니다.]

“응 ”

그때, 로칸이 가지고 있던 투기장 출전패가 가늘게 떨려 왔다.

원래는 투기장 내부에 있어야만 작동을 하는 것이지만, 기사 계급의 경우 그동안 등록자가 없었기에 유일한 대전 상대인 로칸에게 이런 식으로 알림이 온 것이다.

이후부터는 로칸도 투기장에 가야만 대전을 치를 수 있을 터였다. 아니면 투기장 포인트를 모아 원격 출전패를 구입하든가.

“벌써 기사 계급인가 ”

벌써 기사 계급이 등장하다니, 전생보다 빠른 속도였다.

“하긴, 그놈들도 기사 퀘스트를 하던 중이었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성 길드라는 놈들도 만약 기사 대전에서 승리했다면 기사 계급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놈들이 특수한 기회를 잡은 것은 맞아도 상위권이 이 정도이니 최상위권은 이미 기사 계급을 달성한 이들이 제법 될지도 모른다. 기사 계급에 올랐다고 무조건 투기장에 등록하는 것은 아니니까.

우우우웅.

투기장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출전패가 진동했다.

간단히 조작하자 시야가 달라졌다. 투기장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어 ”

이미 영주 놀이를 하느라 버서크 후유증도 모두 끝난 상태. 가뿐히 고개를 들어 상대를 살피자 꽤 익숙한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젠장, 역시 로칸인가 ”

지팡이를 창처럼 들고 서 있는 사내.

짧은 로브를 망토처럼 두르고, 안에는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은 마법사의 정체는 전생에 로칸과 마찬가지로 마법사 클래스에 올 인 하여 마스터 레벨을 찍은 대마법사 아레스였다.

마법사 대 광전사.

일견하기에도 로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직업 상성 같지만,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기에 로칸은 방심하지 않았다.

반가운 것은 반가운 것이고, 전투는 전투인 것이다. 애초에 친한 것이 아니라 동질감 같은 것이 있을 뿐이고.

그리고 이놈은 그 못지않은 또라이였다.

“자,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빨리 갑시다.”

“먼저 가지.”

감히 로칸을 상대로 지팡이 끝을 까딱이는 아레스.

이미 전투는 개시되었기에 로칸도 망설이지 않았다.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향해 도약했다.

“에헤이, 급하기는! 블링크, 그리스, 파이어 월!”

전광석화 같은 빠르기였지만 아레스는 예상했다는 듯 자리를 벗어나 준비한 마법들을 빠르게 쏟아 내며 단숨에 로칸을 압박했다.

근거리 순간 이동으로 공격을 피해 냄과 동시에 바닥을 미끄럽게 만들어 로칸의 균형을 빼앗고, 동시에 불의 장벽을 세워 그를 산 채로 구워 버린 것이다.

“흥!”

콰앙!

너무나 매끄러운 연계에 다른 이들이라면 당황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겠지만 로칸은 자연스럽게 행동을 이어 갔다. 발이 미끄러짐과 동시에 도끼를 들어 바닥을 찍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미끄러울 뿐 반탄 능력이 없는 바닥은 파괴되었고, 솟구치던 불꽃 역시 촛불처럼 꺼졌다.

제대로 솟구쳤어도 높은 화염 저항력을 가진 로칸에게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쩝! 역시 로칸인가 ”

하지만 아레스 역시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겨우 이 정도에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듯, 툴툴대며 빠르게 다음 캐스팅을 이어 갔다.

“월 오브 스톤!”

“숄더 차지!”

이번에는 돌벽을 일으키는 장벽 마법. 하지만 로칸은 피하지 않고 부쉈다.

“패럴라이즈 필드. 월 오브 스톤.”

[패럴라이즈 필드에 노출되셨습니다. 5초간 몸이 마비됩니다.]

그때 시간 차로 깔린 것은 사지를 마비시키는 마비 주문. 이번만큼은 로칸도 어쩌지 못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속 효과인 패럴라이즈 필드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다시 한 번 코앞으로 돌벽이 솟아올랐다.

‘5초…….’

그 상황에서 로칸의 초인적인 힘으로도 할 수 있는 건 팔을 들어 주요 급소를 방어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5초. 돌진 시간까지 합치면 약 7초.

마비가 풀린 뒤 곧장 움직인다 해도 돌벽을 부수고 넘어가려면 약 10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아레스에게 그 정도면 굉장히 커다란 기회였다.

“더블 스펠, 메모라이즈, 균형, 조합, 압축.”

그것을 증명하듯 아레스의 주위로 초고열의 불꽃들이 떠올랐다.

더블 스펠에 이은 메모라이즈. 도합 트리플 캐스팅이 동시에 펼쳐지는가 싶더니, 한곳으로 뭉쳐 회전하며 하나의 더욱 큰 불이 되었다가 처음의 세 조각일 때보다 더욱 작아지며 내면에 폭발적인 힘을 담은 붉은 구슬로 변했다.

“메가 플레어!”

그리고 타이밍 좋게 돌벽을 부수고 나타난 로칸을 향해 맹렬히 쏘아졌다.

콰과과광!

대폭발.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일어났다.

로칸이 있던 공간 자체를 터트리며 불꽃의 축제를 만들어 냈다.

“크허허헝!”

그 속에서 울부짖는 한 마리의 괴수.

생성 스킬과 조합 스킬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묶어 낸 아레스의 필살기를 버서크로 간신히 막아 낸 로칸이 광기를 번뜩이며 적의를 뿜어냈다.

“항복!”

그리고 그때, 아레스의 입에서 다급한 선언이 터져 나왔다.

항복, 혹은 기권.

투기장 전투를 끝내는 명령어의 등장에 로칸의 버서크가 강제로 풀리고 주변 환경까지 바뀌었다. 승리한 것이다.

[경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현재 연승 기록 : 1]

[투기장 포인트 20을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투기장 포인트 : 296]

“참 나, 이 새끼…….”

아레스, 이놈도 참 여전하다. 아마 지금쯤 훅 갈 뻔했다며 가슴 쓸어내리고 웃고 있겠지.

끝까지 싸웠으면 당연히 자신이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버서크가 없는 조건이라면 광전사에게 버서크를 빼라고 하는 것도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 전에 자신을 이처럼 몰아붙인 이가 있던가

당장 아레스의 레벨은 자신보다 못해도 20 정도는 낮을 테고 레전드 타이틀로 떡칠을 한 것도 아닐 텐데

어이없는 웃음과 함께 정신이 확 들었다.

아무리 상대가 마법사라지만, 그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대마법사라 불리던 아레스라지만 너무 아픈 일격이었다. 육신보다 방심하던 마음이 뜨끔했다.

자신은 적수가 없을 만큼 강하지만 동시에 아직 약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좋아. 다음에 다시 붙어 보자고.”

로칸은 투기장 내부 어딘가에 있을 아레스에게 인사를 보내며 유유히 빠져나왔다.

아마 다시 매칭을 신청하면 또 두 사람이 붙게 될 테니 그 역시 더 이상 경기를 진행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영지 문제는 해결됐고, 템도 이만하면 아직 쓸 만하고.’

자작의 위까지 받은 마당에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는 퀘스트가 엄청나게 많았다.

귀족의 지위를 이용해 받을 수 있는 퀘스트나 영지와 병력을 갖춘 이들만 진행할 수 있는 토벌 퀘스트 등 남들과 보상부터가 차별화되는 퀘스트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다면 위업과 레벨링인가 ’

하지만 로칸은 딱 이것만 보았다.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리하여 특별한 힘을 손에 쥘 수 있느냐, 없느냐.

뻔하게 돈과 경험치를 주는 보상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돈이야 다섯 개 영지에서 들어오는 세금으로도 충분했고, 두 곳의 방문자 상점에서 매일 올라오는 매상 또한 어마어마했다.

경험치 빠르게 레벨을 올리는 것은 물론 좋지만 그렇기만 해서는 진정으로 강해지지 못한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전생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렇기에 그 어려운 가시밭길을 골라 걸으며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때문에 지금의 상태에서 자신이 위업을 쌓을 수 있을 만한 것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가장 간단한 건 타락한 몬스터겠고.’

조사단에서 업그레이드받은 마법 지도의 힘으로 위치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라, 이조차도 간단하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타락한 몬스터 사냥은 큰 힘이 된다. 드롭템도 꽤 괜찮은 편이지만 타락한 힘을 흡수하여 각인 [영혼을 꿰뚫는 힘]의 효과를 강화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이것은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타락한 힘과 이 힘을 뿌린 자들의 꼬리를 밟을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러니 일단 보류시켰다. 그럼 남은 것은 무엇이 있을까

찬찬히 살펴보고 생각하던 로칸은 잠시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일단은 빈칸부터 채워야겠지 ”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에 앞서, 잠시 자신을 다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로칸이지만 아직 갖춰야 할 것조차 완전히 다 갖추지 못한 것이 많았다.

“마지막 각인은 역시 그거지.”

바로 각인이다. 각각 한 칸씩의 슬롯을 차지하는 [영혼을 꿰뚫는 힘]과 [피의 각인]을 새겨 넣으면서 이제 남은 각인의 자리는 세 칸뿐이었다.

많다면 많은 슬롯 수였지만 모든 각인이 한 칸씩만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개, 혹은 한 개만으로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한번 새겨 넣으면 지울 수 없는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아직 두 칸인 만큼 강력한 무언가를 손에 넣지 않고 있던 것이다.

로칸으로서는 바쁘기도 했고, 때를 기다린 것이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지독한 사치요, 오만으로 볼 수도 있었다.

때문에 로칸은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더 로드에 새로운 분기점을 여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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