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타락 웨이브 (6)
몰록은 로칸에게 겁을 먹었다. 처절했던 폭력의 순간들이 떠올라 제대로 덤빌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심리적인 요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로칸은 시작부터 전력을 다했다.
“버서크!”
완전체가 된 몰록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버서크를 쓰지 않으면 안 됐다. 그냥 덤볐다가는 무심코 휘두른 팔에 부딪히기만 해도 저만치 날아가 버릴 테니까.
그리고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간 놈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로칸은 놈을 최대한 괴롭히기로 마음먹었다.
“로 킥!”
“커헉!”
머리를 쪼개려던 로칸의 모션이 캔슬되었다.
두 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하는 몰록의 다리를 부러뜨릴 듯 강하게 후려치자 놈의 얇은 다리가 휘청거리며 떠올랐다.
퍼억!
허둥대는 놈의 얼굴에 강력한 펀치를 한 방!
도끼로 찍어 버리는 것보다 확실히 공격력은 약했지만 심리적 타격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바로 지금처럼.
“으어억……!”
전체 생명력으로 보자면 큰 피해도 아니지만 몰록은 자신의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속박 그물.”
거기에 로칸은 다시 한 번 기계공학 장비를 끼얹었다.
속박 그물.
상대를 그물에 가둬 일정 시간 동안 행동을 제약하는 아이템이지만 기계공학 숙련도와 상대의 능력치에 따라 속박 시간이 좌우되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상대의 대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요령 있게 그물을 벗겨 낸다면 괜찮겠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는다면 저절로 벗겨질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몰록은 바보나 다름없었다.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으이잇!”
투두두둑.
결국 놈이 할 수 있는 건 힘으로 그물을 찢어 내는 것뿐이다.
“광살.”
퍼버버벅!
그렇게 비집고 나온 놈의 머리를 로칸의 도끼가 내리찍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열 번이나.
하나하나가 치명타로, 그것도 치명타 대미지를 극대화시킨 일격이었다. 몸과 머리가 갈라지고 붙기를 반복했다.
놈이 흡수한 포션 중에 급속 재생 포션이 있었던지 트롤을 능가하는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귀찮게 됐군.’
이것이 문제였다. 놈을 타격할 때마다 몸속에 내재된 어떤 기운들이 솟아오른다는 것. 소모품들인지라 한번 촉발된 기운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그 시간이 문제였다.
버서크 역시 시간제한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로칸의 선택은 하나였다.
“난무!”
어차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으니까.
놈이 회복한다 그러면 그보다 빠르게 쥐어 패면 그만이다.
놈의 회복력과 로칸의 공격력 중 누가 높은지, 누가 더 빠른지 대결이 시작되었다.
‘동선을 최소화해야 해.’
한쪽이 일방적으로 구타를 하는 모양새였지만 로칸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타격 동선을 최소화해야만 회복력을 뛰어넘는 더 많은 딜을 넣을 수 있을 테니까.
한 방의 대미지는 당연히 풀스윙이 높았지만, 이미 단타만 쳐도 치명타가 터지는 로칸이다. 평균 대미지를 생각하면 굳이 풀스윙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도끼를 휘두르고, 내지르고, 회수하는 모든 동선을 머릿속에 그리며 로칸이 폭풍처럼 공격을 꽂아 넣었다.
“커헉!”
그때마다 몰록의 몸은 제 형체에서 벗어난 기묘한 몰골로 변해 갔지만 수시로 몸 안의 힘이 일어나며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 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로칸의 눈빛이 빛났다.
‘이대로는 안 돼.’
대미지가 부족하다는 것은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전생에 몰록을 잡은 이가 마스터 레벨의 유저였다고 하지만 대미지만이라면 지금의 자신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 ”
폭풍 같은 연타를 밀어 넣던 로칸의 몸이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렉이라도 걸린 것일까 그럴 리는 없었다. 더 로드가 생기고 나서 그런 일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으니까.
다만 로칸이 스스로 행동을 멈추었을 뿐이다.
“……어 ”
그뿐이 아니다. 단단하게 로칸을 지키던 갑옷들이 어느새 모두 벗겨져 있었고, 로칸의 몸 또한 시간이 멈춘 듯 제자리에 정지해 있었다.
누가 본다면 마네킹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며 몰록이 불안하게 몸을 일으켰다.
“에잇!”
퍼억!
잠시 망설이던 놈은 잽을 날리듯, 주춤거리는 몸짓으로 주먹을 뻗었고 그 일격에 로칸의 몸이 기역 자로 꺾였다.
‘빨리 좀 때려라!’
하지만 그뿐, 로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굳은 척 연기를 하며 얼굴과 심장만 교묘하게 보호할 뿐이었다.
“설마 ”
그런 로칸의 속도 몰라주고 몰록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저 멀리, 타락한 몬스터들을 언데드로 되살리고 유저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네크로맨서 키렌에게 시선이 옮겨 갔다.
그가 떠나기 전 무언가 대비를 해 둔 것일까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스스로 그렇게 확신한 몰록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지금까지 당한 복수를 하겠다는 듯,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고 로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큭, 요령 없는 새끼.’
하지만 주먹질이 형편없었다.
싸움을 해 보지 않은 티라도 내듯 제대로 타격을 주기 어려운 부위들만 때리자 로칸은 아예 타격 순간 몸을 살짝 비틀어 대미지가 많이 나올 만한 부위를 가져다 대었다.
덕분에 쭉쭉 깎이기 시작한 생명력.
무기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워낙 엄청난 능력치를 기반으로 한 공격들인 데다 타락한 힘을 너클처럼 두르고 때리기 시작하자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공격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60초 후에 버서크의 지속 시간이 종료됩니다.]
[생명력이 5% 이하로 하락했습니다.]
[타이틀 ‘불굴의 의지’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50% 상승합니다.]
그리고 정확히 버서크의 지속 시간이 1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 로칸의 생명력이 5% 이하로 떨어졌다.
어차피 버서크 발동 중에는 0%가 되어도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었지만 대신 불굴의 의지 효과가 발동하며 모든 능력치가 50%나 상승했다.
“타락 사냥.”
마지막 한 가지까지 발동시켰다. 타락한 힘에 의한 대미지 중 30%를 축적해 일격에 방출시키는 타이틀 특수 효과.
이것과 결합할 것은 역시 하나였다.
“흐힉!”
로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몰록이 당황했다.
그 당당하고 이 악물던 모습은 사라지고 샌드백 하나가 눈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광살.”
다시 한 번 광살이 터지며 놈의 몸을 뭉개 놓았다. 그러나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힘이었다.
그저 몸을 뭉개 놓았을 뿐이던 광살이 놈을 아예 다져 놓았다. 회복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20초.’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참상을 즐길 여유도 없었다. 이미 사방에는 적들이 깔려 있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강력한.
게다가 벌써 주인을 잃은 몬스터들이 이상 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미친! 이것들 왜 이래 ”
“가만 놔둬! 괜히 어그로 끌지 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타락한 몬스터들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눈치가 빠른 유저들은 최대한 놈들이 날뛰는 범위에서 벗어났지만 일부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휩쓸려 버렸다.
결과는 당연히 사망.
그사이 일부 길드들은 수많은 피해를 딛고 공략을 마쳐 가고 있었다.
“잡았다!”
“좋았어!”
“모두 흩어져!”
사냥 성공. 그것을 알리는 알림과 함께 놈을 사냥하던 유저들이 모조리 흩어졌다. 주위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크윽…….”
“빌어먹을.”
“이걸 대체 어떻게 잡으라는 거야 ”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과 떨어진 어느 한 점에서는 유저들이 처참한 몰골로 죽어 가고 있었다.
바로 타락 집행자 헬븐.
그가 타락한 힘을 발휘해 달려드는 모든 존재를 도륙한 것이다. 네크로맨서 키렌과 달리.
“멍청한 놈 같으니.”
그러나 그 역시 분통을 터트렸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에게 발목이 잡혀 몰록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순식간에 해치우고 놈을 지키러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빌어먹을 것들은 거머리보다도 지독하게 달라붙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임무에 실패했다.
“어쩔 수 없군. 멍청하긴 해도 나쁘지 않은 소모품이었는데. 다른 방법을 택하는 수밖에.”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로칸을 노려보다가, 전장에서 사라졌다.
저 빌어먹을 족속들은 죽여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조금 전의 전투로 지겹게 겪은 것이다.
‘튀기 전에…….’
하지만 로칸은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타락한 몬스터들의 폭주는 시작되었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30초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리프 어택을 펼쳐 놈들의 중심부로 날아 떨어지는가 싶더니 전력을 다해 고함을 내질렀다.
“크허허허허허헝!”
집 나간 정신도 돌아오게 만드는 외침에, 날뛰던 타락한 몬스터들이 일제히 반응했다.
타락한 힘이 깃든 그들보다 더욱 광기가 흐르는 그 음성에 겁을 먹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생명력이 부족합니다. 5초 이내에 최대 생명력의…….]
“생명 충전.”
그 직후 버서크의 지속 시간이 풀렸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은 타락한 몬스터들은 제각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로칸은 즉시 팔찌에 내장된 힘을 발동시켰다.
“조수 소환. 점퍼.”
불러낸 것은 조수. 그중에서도 점퍼라 불리는, 공간 이동 계열에 특화된 존재였다.
조사단원의 팔찌를 이용해 분신이 아닌 조수를 불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전생에도 사용해 본 적 있는 아이템이기에 보다 자세한 기능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우우웅!
그렇게 연달아 몇 번의 점프를 하며 로칸은 순식간에 전장에서 이탈했다.
‘나쁘지 않군.’
버서크의 후유증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로칸은 정보를 훑었다.
타락 웨이브를 주도하던 보스 몬스터가 사망하고, 보스급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딱히 누가 알리지 않아도 금세 퍼졌다.
[월드 이벤트 : 타락 웨이브가 종료되었습니다.]
[월드 이벤트 분기 1-2 : 타락 잔당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배가 풀린 타락한 몬스터들을 사냥하세요.]
[주의하십시오. 지배력을 잃은 타락한 몬스터들은 힘의 일부를 잃은 대신 스스로에 대한 제어력을 확보했습니다.]
월드 이벤트 공지가 모두에게 알려 주었으니까.
타락한 몬스터들은 몰록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며 더 이상 타락한 힘을 주입받지 못했기에 기존보다 크게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만만하게 생각하면 큰 코 다칠 터였다.
약해졌다 한들 여전히 유저들이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수준이었고, 스스로에 대한 제어력을 확보했다는 것은 본래의 지능과 컨트롤을 되찾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원래 멍청한 종족들이라면 모를까, 만약 두뇌 회전이 빠른 타입이라면 단신으로도 일방적인 학살을 자행하고 다닐지 모른다.
‘대충 7 대 3인가.’
그런 만큼 흩어진 놈들이 움직이는 방향마다 곡소리가 났다.
홈페이지가 마비될 만큼 소란이 일며 실시간으로 중계하듯 불만을 토로하는 글들이 올라온 것이다.
로칸은 그것을 통해 대략의 상황을 파악했다.
검은용군단 진영에 7, 황금사자 진영에 3 정도의 비율로 타락한 몬스터들이 흩어진 것이다. 덕분에 황금사자 진영 유저들도 월드 이벤트의 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마냥 손해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검은용군단은 이미 그만한 피해를 입었고, 타락 잔당들을 처치하면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
과연 이득이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지금 잔당을 쫓는 건…… 의미가 없지.’
그렇게 월드 이벤트의 부스러기로 대륙 곳곳에 난리가 난 것을 지켜보며 로칸이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약화된 만큼 보상도 낮아진 타락 잔당을 쫓기보다는 그사이 새로운 일들을 벌이려는 것이다.
어쩌다 마주친다면 모를까, 먼저 찾아다니며 학살을 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버서크 후유증이 끝나는 대로, 음흉한 미소와 함께 이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