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해적왕 (1)
“얼마 안 남았군……!”
30분에 한 번씩, 마스터 레벨의 몬스터를 잡아 댄 결과 로칸의 레벨은 빠르게 상승해 297을 찍고 있었다. 이제 3레벨만 더 올리면 300레벨, 마스터 레벨을 달성하는 것이다.
물론 그에 필요한 경험치가 기존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본래는 여기까지 올리는 데만도 몇 달쯤 걸릴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슬슬 붉은십자군이 대처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일까.
여전히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인 파멸을 봉인하는 쇠사슬의 특수 스킬은 통했지만, 크로노와 하이 마스터인 붉은 근위병들이 즉시 대응에 나서면서 위험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전과 같은 30분에 한 번 사냥도 좀처럼 어려워졌다.
“버서크! 광살!”
퍼버버버버벅!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다른 유저들을 상대하던 붉은십자군들까지도 로칸에게 집중 포화를 쏟아 내니 버서크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큭.”
그러나 버서크의 불사 효과 덕분에 바로 죽는 일은 없었다.
로칸은 아예 그 자리에서 제압한 붉은십자군을 처리하고, 버서크의 남은 시간 동안 천골마와 카이를 변칙적으로 운용하며 도주하는 쪽을 택했다.
기계공학 스킬로 시간을 벌어 간신히 몸을 빼내었다.
‘300레벨만 찍으면 두고 보자……!’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
덕분에 제압의 재사용 시간인 30분이 아니라 버서크의 후유증 종료 시간과 놈들에게 은밀히 접근하는 시간을 더해 1시간에 한 번 정도 사냥이 가능해졌다.
물론 시간을 아끼기 위해 버서크 후유증 시간 동안 적당한 사냥터를 찾아 쥐꼬리만 한 경험치라도 벌어 보고 있지만, 하이 마스터인 붉은 근위병들의 적극적인 개입 때문에 슬슬 도주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한 템포 쉬어야 할까 그래서 놈들의 방심을 유도하면 다시 한 마리씩 낚아채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아니면 검은용군단과의 대회전이 일어나는 것을 노려 뒤통수를 쳐 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이미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의 위치가 분쟁 지역에 다다라서 황금사자 진영과 검은용군단 진영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중이기에 써먹을 수 있는 요소는 많았다.
“아직 1백 마리도 못 잡았단 말이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로칸을 제외하면 제대로 붉은십자군을 처치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기에 애매한 것도 사실이었다.
계속 이대로 한 마리씩 빼먹어 숫자를 줄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오래 걸렸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검은용군단, 또는 황금사자 진영의 마스터와 하이 마스터를 움직이게 만들거나……. 아니면 내가 강해져야겠지.”
벌써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이 해 먹은 거점만 여러 개였다. 다만 그것이 한 종족 또는 진영에 집중된 게 아니라서 절박함을 이끌어 내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들이 전력을 다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크로노와 붉은십자군이 좀 더 힘을 내 줘야만 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자신이 좀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 레벨을 달성하면 간단했지만 그 또한 너무 오래 걸린다.
적어도 붉은십자군을 동시에 두셋이라도 상대할 수 있다면 의외로 상황은 쉽게 풀릴 수 있었다. 어느 한 진영이 움직이기도 전에 로칸이 먼저 마스터 레벨을 찍을 확률이 높으니까.
“템빨……인가 ”
그럼 마스터 레벨을 찍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조합 스킬도, 생성 스킬도 마땅히 손댈 만한 것이 없는 상태였으니 노려 볼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바로 템빨.
아이템을 통한 강화가 가장 빠르고도 간단한 것이었다.
“부착이라…….”
그리고 그 해답은 이미 로칸의 손안에 있었다.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인 파멸을 봉인한 쇠사슬.
제압의 효과가 너무나 뛰어나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한 마리를 제압해 사냥할 때마다 죽음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도박을 해보는 것도 괜찮았다.
장비 부착 시 공격력이 상승하고, 특수 옵션까지 적용된다고 하니까.
어떤 옵션이 붙을지는 부착 전까지 알 수 없고, 한번 부착하면 부착한 장비가 파괴 되어야만 다시 회수가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장 확실하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이었다.
“후우, 못 먹어도 고인가 ”
왼손에 들린 쇠사슬과 오른손에 들린 격노왕의 도끼를 번갈아 보던 로칸이 굳게 마음을 먹었다.
격노왕의 도끼는 250레벨 제한임에도 광전사 특화 옵션들 때문에 아직까지 더 괜찮은 장비를 찾기 어려울 만큼 좋은 장비였지만, 3레벨을 더 올려 300레벨이 되면 어차피 바꾸어야 할 장비였다.
부착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여차하면 파괴할 수 있는 장비라는 뜻이다.
쏟아부은 강화석이 아깝기는 했지만 이미 강화석과 고급 강화석이라면 차고 넘칠 만큼 가지고 있는 로칸이기에 벌벌 떨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격노왕의 도끼를 잃을 경우, 300레벨이 될 때까지 적지 않은 공격력 감소는 각오해야겠지.
자칫 어려운 길을 가게 될 수 있었지만 로칸은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여차하면 다시 한 번 격노왕을 잡으러 갈 생각까지 하며 파멸을 봉인한 쇠사슬과 격노왕의 도끼를 겹쳐 놓았다.
“파멸을 봉인한 쇠사슬, 부착. 격노왕의 도끼로.”
번쩍!
명령어를 읊조리자 검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파멸을 봉인한 쇠사슬이 도끼 자루의 끝에 결합되며 하나의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 냈다.
[+8 격노왕의 사슬 도끼(광분)][에픽]
격노왕 란도르가 사용하던 쌍도끼 중 하나가 파멸을 봉인한 쇠사슬과 결합했다.
더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 결합됨에 따라 무기의 등급이 상승했다.
도끼의 끝에 쇠사슬이 달림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활용이 가능해졌다.
-공격력 : 4,050
-내구력 : 5,000 / 5,000
-[광전사] 클래스 사용 시 기본 공격력 20% 상승
-버서크 사용 시 공격력 50% 증가
-[광분] 효과로 적중 시 5% 확률로 공격 속도 7% 증가(최대 10회 누적)
-[무한의 쇠사슬] 효과로 쇠사슬 길이 최대 100m까지 확장 가능
-[무한의 쇠사슬] 효과로 쇠사슬의 길이와 움직임 조종 가능. 쇠사슬에도 동일한 공격력 부여.
-착용 제한 : 250레벨
“헉.”
그야말로 헉 소리가 나오는 결과였다. 무기의 등급이 오르며 공격력과 모든 옵션 효과가 상승한 것은 물론, 무한의 쇠사슬이라는 능력까지 생겨났다.
마음대로 조종이 가능하고, 쇠사슬에 맞아도 도끼에 맞은 것과 같은 대미지를 입는다니 활용하기에 따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될 놈은 된다니까!”
덕분에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로칸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누군가 본다면 무섭다고 이야기하겠지만,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제압 스킬이 계승 되기라도 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충분했다.
“연습이 필요하겠군.”
하지만 너무 들뜨지도 않았다. 새로 얻은 무기의 강력함을 아는 만큼, 섣불리 싸우러 갈 생각도 없었다.
쇠사슬이라는 장치가 붙은 만큼 활용법도 그동안의 도끼들과는 다를 터, 마스터 레벨이 된 후 사용할 봉인된 광풍의 배틀 액스에도 부착하게 될 테니 충분히 연습을 한 뒤 실전에서 사용할 생각이었다.
무기의 이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시에 마스터 여럿을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 마침 좋은 상대가 있군.”
그때,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로칸은 버서크의 후유증이 풀리는 즉시,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 아주 먼 어디론가 이동했다.
“연습에는 역시 실전만 한 게 없지.”
로칸이 이동한 곳은 하네스라는 이름의 항구도시였다. 해상 무역이 활발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인근의 한 섬에 강력한 해적 무리가 있는 것이다.
해적왕.
왕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저 바다에 살고 있었다.
“흠, 일단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겠지.”
하네스에 도착한 로칸은 마을을 한 바퀴 돌며 관련 퀘스트를 받은 뒤 쾌속선 1척을 구입했다.
수백 골드나 하는 가격이지만 한 방에 결제를 끝내고 임시 선원까지 고용했다.
해적왕이 거주하는 섬까지 가야 하기에, 꽤 비싼 값을 치르긴 했지만 몇 가지 특수 능력을 갖춘 NPC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출발하지.”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가속!”
로칸이 올라타자 선원은 즉시 배를 움직이고, 그의 스킬을 더해 쾌속선의 속도를 더욱 끌어 올렸다.
“은신 이동.”
그리고 한참을 나아갔을 때, 쾌속선 전체에 은신 효과를 덧입혔다.
로칸이 카이를 타고 은신을 사용한 것처럼 뱃사람 NPC에게도 배와 연동되는 스킬이 있는 것이다.
해적들의 레벨은 250~280 정도로 로칸의 상대는 아니었지만, 배 위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물속으로 들어가면 전투력이 급감할 수밖에 없으니 섬에 배를 대기 전까지는 로칸도 긴장하며 사방을 경계했다.
“조심하십시오. 이 주변부터는 감지당할 수도 있습니다.”
저 멀리, 섬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NPC는 로칸에게 주의를 주었다. 은신을 하기는 했지만 토벌을 염려한 해적들이 주변에 알람과 은신 해제 장치들을 깔아 놓은 것이다.
자칫 발각되어 멀리서 포격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접근도 해 보지 못하고 수장될 수도 있겠지.
때문에 애초부터 카이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아직 카이의 체력이 버티지 못할 수 있었고 너무 눈에 띄었다.
섬의 곳곳에 위치한 초소가 그를 발견하고 집중 사격을 가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천천히, 천천히. 로칸이 해적섬에 가까워졌다.
‘빈틈이 없군.’
어느 정도 가까이까지 다가간 로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해적이라고는 하지만 정규군 못지않게 빈틈없는 경계망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사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초소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그 사이를 순찰하는 경계병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래 봐야 어중간한 레벨일 뿐이지만, 확실히 아직 유저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서인지 해적들의 숫자가 넘쳐났다.
“쾌속 돌진.”
“도, 돌진요 ”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로칸이 결단을 내렸다.
선원 NPC가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상관없다. 그는 로칸이 무슨 결정을 내리든 따라야 할 테니까.
“쾌속 돌진.”
“으윽, 가속!”
로칸이 다시 한 번 지시를 내리자 쾌속선이 은신을 풀고 해안 경계 초소를 향해 빠르게 돌진을 시작했다.
“적이다!”
“적 쾌속선 1척 발견! 포격하라!”
피유우웅. 퍼엉! 펑! 펑!
어차피 이 이상 다가가면 발각된다.
그 간격을 제대로 본 덕에 조금 더 가까이까지 다가갔지만 즉시 포격이 시작되었다.
두 개의 초소에서 쏘아지는 포탄과 화살이 쾌속선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끄악!”
터엉! 꾸르르륵!
가속을 이용한 급발진으로 처음 몇 발은 피했지만 계속해서 공격을 피해 내는 것은 무리였다.
쾌속선이 포탄에 맞아 뒤집어질 듯 흔들렸고, 갑판 가득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틀어박혔다.
배 안쪽에서 방향을 잡던 선원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팽그르르.
선원이 죽으며 쓰러지는 바람에 쾌속선의 조타 핸들이 돌아가며 쾌속선이 제자리에서 회전했고, 빠르게 침몰하기 시작했다.
[타이틀 ‘바다를 가른 자’의 효과로 물속에서의 이동 속도가 50% 상승합니다.]
‘됐군.’
그사이, 타이밍 좋게 배의 바닥에 구멍을 낸 로칸이 바닷속을 유영해 해적섬으로 잠입하고 있었다.
은신을 유지한 채, 해안 초소가 있는 절벽 밑까지 안전하게 도달했다.
“여기가 해적섬이군.”
“적이다!”
“적이 침입했다!”
“죽여라! 침입 신호를 보내!”
맨손으로 절벽을 기어올라 무사히 해안 초소의 안으로 들어온 로칸은 주변의 소란과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섬의 안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해적왕이 있는 곳.
그리고 사자왕의 무구가 있는 그곳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