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종족 대연합 (1)
[인간 황제 카이스만으로부터 실버 라이온 세트를 하사받았습니다.]
황제는 그 자리에서 로칸에게 마스터급 장비를 하사했다.
마스터 레벨 장비 중에서도 최소 중상위급으로 꼽히는 실버 라이온 세트. 그것은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병들과 똑같은 세트 아이템이었다.
‘역시 이거군.’
붉은십자군 현상금 미션처럼 로칸에게 옵션까지 고를 수 있게 해 주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했다.
비록 봉인된 사자왕의 무구들 때문에 완벽한 풀 세트로 갖추어 입기는 어렵겠지만 바지, 견갑, 부츠, 망토와 더불어 반지 아이템인 실버 라이온의 인장까지 총 다섯 개의 아이템이 모여 발휘하는 세트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실버 라이온 5세트 효과가 발동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50만큼 증가합니다.]
[모든 속성 저항력이 30%만큼 증가합니다.]
[이동 속도와 공격 속도가 각각 20% 만큼 증가합니다.]
[특수 스킬 ‘실버 라이온의 광휘’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능력치와 저항력, 이동 속도, 공격속도의 증가.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능력 상승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특수 스킬인 실버 라이온의 광휘는 개인이 아닌 군단 버프 효과를 지닌 기술이었다.
집단전에 능한 인간족에게 꼭 어울리는 능력이지만, 사실 로칸에게는 하나의 개인 버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훌륭했다.
실버 라이온의 광휘에는 이동속도 증가와 함께 강인함 효과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강인함이란 모든 디버프 효과와 지속 시간을 줄여 주는 역할을 하기에 차후 저주 따위가 집중될 때 효과를 발휘할 터였다.
그리고 세트 아이템과 별개로 또 하나의 혜택이 있었다.
[특수 탈것 1기를 선택하여 획득할 수 있습니다.]
특수 탈것의 획득!
특수 탈것이란 크게 네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공중, 지상, 지하, 해상.
특히 공중을 날 수 있는 비행 탈것으로 얻을 수 있는 와이번은 그 자체로 강력한 전투력을 지녔기에 전생에도 많은 이들이 선망하고 갈망하던 것이었다.
‘제길. 고민 되는군.’
전생이었다면 고민 없이 와이번을 택했겠지만 이렇게 빠르게 특수 탈것을 하사받을지는 몰랐기에 로칸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또 다른 비행 탈것인 생명의 빅버드, 카이가 있었으니까.
‘전투력을 생각하면 무조건 와이번이기는 한데…….’
그래서 어렵다. 전투력은 와이번 쪽이 압도적으로 높겠지만 카이가 조금만 더 성장한다면 비행 속도는 더 빠를 테고, 와이번은 천골마처럼 처음 받은 레벨 그 상태로 성장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로칸에게는 탈것 전용 조합 스킬 ‘전설을 타는 자’가 있었다.
이것을 카이에게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와이번보다도 우수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후우, 어쩔 수 없군.”
한참을 고민하던 로칸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특수 탈것 ‘디그독’을 선택하셨습니다.]
[디그독이 당신에게 귀속됩니다.]
로칸의 선택은 디그독이었다. 덩치 큰 개처럼 생겼으나 땅을 파고 이동하는 지하종의 탈것이다.
마다를 유영하는 씨호스도 탐이 났지만 바다 지형으로 이동 할 일은 많지 않았기에 전략적 이동이 가능한 디그독을 선택한 것이다.
‘키워 봐야지.’
이것은 일종의 모험이기도 했지만 일단 조합 스킬을 이용하면 어느 정도 커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째액!
그 선택이 마음에 든 것일까 소환해 둔 카이가 어깨 위에서 기분 좋게 지저귀었다.
“후우, 세팅이 꽤나 변했군.”
이것으로 준비는 모두 마쳤다.
봉인된 사자왕의 무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비가 실버 라이온 세트로 바뀌면서 그가 자랑하던 한 방 세팅, 즉 치명타 세팅이 사라졌지만, 이미 타이틀 효과와 반지, 귀걸이의 효과로 상당한 치명타 확률과 치명타 대미지는 챙겨 둔 상태였다.
100%가 아닐 뿐, 어지간한 치명타 세팅보다도 더 높은 치명타 확률과 대미지를 자랑했기에 아쉬움은 덜했다.
대신 훨씬 단단해지고 강인해졌다.
“그럼 가 볼까 ”
장비빨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함께 종족 대회의가 열리는 중립 지대의 거점, 카르타고로 천천히 이동했다.
“카이, 가자!”
짹!
황금사자 진영과 검은용군단 진영이 하나의 거점을 동시에 이용하는 중립 지대, 카르타고로는 텔레포트 마법진의 이용이 불가능했다.
어느 한쪽 진영이 텔레포트 마법진의 연결을 이용할 경우, 적의 핵심 거점까지 한 번에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동하는 것은 로칸 혼자가 아닌, 행정관 NPC들도 함께였기에 로칸은 그들을 이끌고 천천히 이동했다.
모두가 백골마를 끌고 가기에 속도가 느린 편은 아니었지만 꼬박 하루는 걸리는 거리다.
그 사이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지역을 지나쳐야 하기는 했지만 마스터인 로칸과 경호원으로 붙은 익스퍼트들이 있으니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할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로칸은 그 기회를 살려 적당히 카이의 레벨을 올리는 여유까지 보였다.
“인간 종족의 대표, 마스터 로칸 폰 레갈리아 백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렇게 사흘을 딱 맞춰 카르타고에 도착하자, 로칸은 곧장 회의장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같이 온 수행원들은 많았지만 대표들만 참석하는 종족 대회의장에 입장할 수 있는 것은 종족별로 한 명씩.
회의 진행을 맡은 노움족만이 두 명 입장할 수 있을 뿐이었다. 노움족은 황금사자 진영이기는 해도, 계산에 밝아서 비교적 가장 약하게 검은용군단을 적대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새끼들, 빨리빨리 좀 다닐 것이지.’
회의장 안으로 들어선 로칸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 역시 시간에 딱 맞춰서 도착한 주제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자들이 있음을 언짢아하는 것이다.
현재 대표가 도착한 종족은 노움과 하프엘프, 고블린, 언데드뿐이었다.
황금사자 진영에서는 드워프 종족이, 검은용군단 진영에서는 오크와 트롤 종족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이 마스터만 됐어도 확 엎어 버리는 건데…….’
그러나 로칸도 이곳에서만큼은 성격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종족을 대표하여 온 것이기도 하고, 상대가 모두 자신의 아래가 아닌 하이 마스터들인 것도 있지만 이곳 카르파고는 블랙 드래곤 카르타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칫 소란을 피웠다가 놈의 기분이라도 상하는 날에는 대회의고 나발이고 이곳 거점이 지워질 수도 있었다.
드래곤은 기본적으로 헤츨링도 마스터급, 성룡은 하이 마스터급이고 에인션트 드래곤은 무려 그랜드 마스터급의 강자였으니까.
그것도 굳이 구분 짓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종족 특성까지 더해지면 한 끗발 위로 쳐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즉, 성룡급인 카르타고는 레벨은 하이 마스터급이지만 전투력은 그랜드 마스터급이라는 소리다.
‘싸늘하구먼.’
그렇게 성질을 죽이며 주변을 슥 돌아보자 각 종족의 대표자들이 당당하되 경계하는 모습으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진영이라 해도 그리 친밀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3차 도시에 진출했을 때, 다른 종족들이 인간을 경멸에 가깝도록 무시한 것처럼 같은 진영이라고 꼭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고를 친 주제에 낯짝도 두껍게 이곳에 나타났군. 역시 인간인가 ”
그 차가운 침묵 속에 작은 목소리 하나가 로칸을 찔렀다.
음산하고 눅눅한 목소리의 주인은 언데드 종족의 대표. 아크 리치인 녀석은 생전에 인간이었던 주제에 인간들의 철면피를 비아냥거리며 중얼거렸다.
기분은 상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고, 여기서 발끈하면 지는 것이기에 로칸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마스터 레벨도 할 수 있는 걸 하지 못해서 손가락뼈나 빨고 있을 줄은 나도 몰랐지.”
“이 구더기 같은 놈이……!”
그리고 로칸 자신 이외에 붉은십자군을 제대로 막은 이가, 종족이 없음을 돌려서 깠다.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인간이 맞지만 당장 지금까지는 인간 이외에 아무도 그들을 막거나 수습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지 않은가
물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겁을 먹고 덤비지 못한 것도 사실이기에 오히려 발끈한 것은 놈이었다.
“그만하세요. 이러자고 모인 자리가 아닐 텐데요 ”
당장이라도 로칸에게 저주를 중첩시킬 것 같은 아크 리치의 움직임을 나서서 막은 것은 하프엘프의 대표였다.
언데드가 인간을 싫어하듯 균형과 순리의 수호자인 하프엘프 역시 언데드를 싫어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중재를 하고 나선 것이다.
“꼴에 같은 진영이라고 편을 드는군. 이번 일이 끝나면 피부를 한 꺼풀씩 벗겨 그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지 확인해 주마, 인간.”
아크 리치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지만 말이다.
“오크 종족의 대표, 하이 마스터 쿠훌란 대족장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사이, 오크 종족의 대표도 도착했다.
타고난 전사 종족이라는 수식어답게 거대한 몸집과 우람한 근육을 뽐내며 입장한 녀석은, 같은 전사 계열인 로칸을 보고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자신의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드워프 종족의 대표, 하이 마스터 에취히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트롤 종족의 대표, 하이 마스터 예스란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이어 드워프와 트롤 종족의 대표들이 도착, 착석하며 다시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역시 진행을 맡은 노움족의 행정관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모두 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족이 부활시킨 고대 황제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죠.”
“……그 점은 우리 종족을 대표해 유감을 표합니다.”
진행자의 멘트에 맞춰 로칸이 종족을 대표한 유감 표시를 했다.
사실 서로를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하는 입장에서 사과를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고대 황제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파괴를 일삼는 까닭에 모두가 피해를 입고, 세상이 엉망이 된 것에는 충분히 유감을 표시할 수 있었다. 일단 같은 진영들도 피해를 입었으니까.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되었고, 다행히 부활한 고대 황제가 전성기의 실력은 아니라는 점은 큰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문제는 고대 황제와 그를 호위하는 하이 마스터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인데……. 모두 아시는 것처럼 열한 명의 하이 마스터와 2백여 마스터는 특정 한 종족이 막아 내기에 버거운 상대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잠시나마 힘을 합쳐 놈들을 분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더 시간을 끈다면 피해를 더 커지겠죠. 그것이 어느 종족이 될지는 알 수 없을 테고. 물론 반대 진영의 피해를 반기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 피해의 대상이 자신의 종족이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누구도 갖기 어려울 겁니다.”
노움 종족의 진행자는 인간족에 대한 불만을 슬쩍 드러내면서도 균형 있게 말을 이어 갔다. 모두가 생각하던 바를 공식적으로 꺼내 놓으며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질문이 있다. 힘을 합치는 건 그렇다 치고, 뒤통수를 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어떻게 하지 특히 뒤통수 잘 치기로 유명한 종족도 있지 않나 ”
이번에도 딴죽을 걸로 나선 것은 아크 리치였다. 대놓고 인간족을 찍어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란 사실은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점은 이걸 이용할 겁니다.”
진행자가 꺼낸 것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바로 계약서.
고대 황제를 공략하는 동안 상호 불가침을 맺으며, 고의로 공격을 가할 경우 심장이 파괴되어 죽는다는 무시무시한 조항이 들어간 계약서였다.
시스템이 개입하는 계약서의 힘을 절대적이기에 모두가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은 여덟 장의 계약서를 나눠 받으며 종족을 대표해 심각한 표정으로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재미있는데 ’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계약서를 받아 들고 찬찬히 내용을 살피던 로칸만이 남몰래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