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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화.종족 대연합 (3) (1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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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대연합 (3)

가장 먼저 날아오른 것은 로칸이었지만 가장 먼저 당도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작전 상 그가 먼저 크로노에게 노출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로칸이 잠시 허공에 체류하며 시간을 끄는 사이, 시간 끌기를 맡은 하프엘프와 노움, 고블린, 오크 종족 대표들이 힘을 드러냈다.

“가시 넝쿨 숲!”

“하이퍼 빔 라이플!”

“환영 미로의 술!”

“투귀 강림!”

조합 스킬이지만 하이 마스터들이 전력으로 펼친 스킬들이었다. 방심한 데다 이미 성질을 부리듯 힘을 쏟은 하이 마스터, 붉은 근위병들이 대번에 말려들고 말았다.

가시덤불숲이라 해도 될 만한 넝쿨들이 급격히 자라나며 놈들의 발을 묶었고, 강력한 환영의 힘이 그들을 현혹시켰다.

당황하는 그 틈을 노린 것은 노움족 기계공학의 총체와 조합 스킬이 만나 탄생한 빔 라이플.

판타지에는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강력한 원거리 무기가 그들을 과녁 삼아 마구 쏘아졌다.

마치 시간 끌기가 아닌 이 자리에서 끝장을 낼 것 같은 공격이었지만 적도 만만치 않았다.

“어딜 감히!”

쿠웅.

고대 황제 크로노가 발을 구르자 하이 마스터들을 현혹시키던 환영이 한 번에 걷혔다. 현 인간 황제 카이스만에게도 강력한 버프가 있었듯 그에게도 막강한 버프 능력이 이어진 것이다.

“투신의 춤!”

그때, 놈들의 지척까지 파고든 오크 하이 마스터가 힘을 발휘해 조합 스킬로 강화된 능력을 바탕으로 한바탕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붉은 유성!”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붉은십자군 처리반도 활동을 개시했다.

시작은 가장 먼저 튀어 나간 로칸이었다. 카이를 통해 더 높이 날아오른 로칸이 한 덩어리의 유성이 되어 붉은십자군의 중심부로 떨어져 내렸다.

“꿰뚫는 영혼의 화살!”

“만병지왕!”

“백귀야행!”

뒤이어 트롤, 드워프, 언데드 하이 마스터들이 각자의 힘을 발휘했다.

“이 새끼가 광풍 현신!”

그리고 그것들이 붉은십자군만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 언데드 하이 마스터인 아크 리치가 사용한 백귀야행은 대지에 떠도는 영혼들을 일으켜 공격하는 대단위 공격 마법인 것이다.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인지 놈은 로칸이 공격 범위에 들어있든 말든 아낌없이 힘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런 조합 스킬 따위에 당해 줄 로칸이 아니다. 즉시 광풍 현실을 일으키며 자신에게 달라붙는 귀신들을 베어 없앴다.

“너 이 새끼, 두고 보자!”

“그 정도도 피하지 못하는 버러지라면 그냥 일찌감치 죽어야지!”

로칸이 놈을 향해 이를 갈았지만 녀석은 콧방귀를 끼며 계속 힘을 발휘했다.

“일어나라, 나의 군세여!”

덜그럭덜그럭.

일찌감치 죽어 나간 유저들의 시체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마스터 스킬까지는 사용하지 못하지만 300레벨이 넘는 막강한 좀비 군단이 되어 붉은십자군을 향해 달라붙었다.

폴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네크로맨싱 능력이었다.

“시체 폭파!”

콰과과광!

그러나 시체를 아껴 병사로 써먹을 생각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몸이 베이고, 머리가 부서져도 전진하며 붉은십자군에게 달라붙은 좀비들은 그 자체로 폭탄이 되어 놈들을 타격했다.

연쇄 대폭발이 일어나며 붉은십자군의 몸에 마구 균열을 일으켰다.

“사냥꾼의 통찰, 파괴의 난사!”

그 균열을 요령 좋게 노린 것은 트롤 하이 마스터였다. 사냥꾼의 전투란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 주듯 녀석은 철저하게 붉은십자군의 약점을 파고들며 일격 필살의 위력을 보여 주었다.

그것도 공격 속도가 얼마인지 궁금할 만큼 빠른 연사로.

“무쌍난무!”

그러는 사이 드워프 하이 마스터는 붉은십자군 사이를 마구 휘젓고 있었다.

창으로, 할버드로, 대검으로. 손에 든 무기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형시키며 베고, 부수어 넘겼다.

분명 혼자인데도 마치 여러 명의 하이 마스터가 동시에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며 강력한 일격 일격을 꽂아 넣고 있었다.

“제길, 근접들만 개고생이군. 휠 윈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로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휠 윈드로 주변을 몽땅 쓸어버린 뒤, 사슬 폭풍으로 길을 뚫었고 적토마를 소환해 본격적으로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또 하나.

“광풍참!”

휘이이이이잉!

봉인된 광풍의 배틀 액스가 가진 특수 스킬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칼날 폭풍과 같은 무형의 칼날을 뿜으며 주변 일대를 한순간 쓸어버리는 무기의 내장 스킬이 처음으로 선을 보이며 봉시에 넷이나 되는 붉은십자군을 박살 내 버렸다.

“저, 저거 껴도 되는 거야 ”

“미친놈! 눈먼 칼에 맞아 죽을 일 있냐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근데 저거 로칸 아니야 대체 레벨이 몇이길래 저런 미친…….”

그러는 사이 부활해서 돌아온 유저들은 입을 떡 벌리고 구경만 할 뿐이었다.

아직 퀘스트는 실패하지 않았으니 자리는 지켜야겠고, 승기가 보인다고 끼어들기에는 전투 여파에만 휘말려도 갈기갈기 찢겨 죽을 것 같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구경만 하는 것이다.

그저 불똥이 튀어 죽지 않기 위해 버둥거릴 뿐이랄까.

침만 꿀떡 삼키며 로칸의, 각 종족의 하이 마스터들이 뽐내는 위용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대충 끝나 가는군.’

애초에 이러기 위한 퀘스트이기도 했으니까.

아주 나중에 발동할 수도 있지만, 종족 퀘스트가 퀘스트 진행 상황에 따라 이처럼 일찌감치 발동할 수도 있도록 설계된 이유는 유저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기 위함이었다.

신세계와 같은 힘을 간접적으로나마 맛보게 하고, 거기에 자극받아 더욱 레벨 업에 열을 올릴 수 있도록.

그것을 위해서는 일부 챙겨 먹을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해도 좋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퀘스트였지만, 제작진조차도 이처럼 빠르게 발동할 줄은 몰랐을 터였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다 해 먹을 거라는 생각도.

“속도를 올려라. 저 멍청이들이 힘이 빠진 모양이니!”

그렇게 세 명의 하이 마스터와 한 명의 마스터가 전력을 다해 몰아치자 붉은십자군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갔지만 안심 할 수는 없었다. 고대 황제와 하이 마스터들을 묶어 두기로 한 팀의 상황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발을 묶기는커녕 잘못 시간을 끌었다간 전멸하거나 한둘 정도는 죽어 나자빠질 수도 있을 만한 상황. 붉은십자군 처리 팀은 그것을 파악하고 더욱 스퍼트를 올렸다.

“모두 빠져!”

그리고 모든 붉은십자군을 처리한 순간, 함성 계열의 스킬까지 담아 크게 소리쳤다.

그 순간 여덟 명이 일제히 산개했다.

발목을 잡고 시간을 끄는 것은 순간순간 죽음을 넘겨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몸을 빼내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끄악!”

“어딜 가, 미친놈들아!”

“퀘스트 끝났어, 튀어!”

덕분에 된 서리를 맞은 것은 일반 유저들이었다.

그들 역시 퀘스트 성공 조건인 30분은 이미 채웠지만 정신이 팔려 넋을 잃고 구경하다가 타깃을 잃은 크로노와 붉은 근위병들에게 도륙당한 것이다.

화풀이에 가까운 공격이었기에 더없이 거칠고, 자비가 없었다.

‘저건…….’

그리고 로칸은 도주하는 와중에 무언가를 발견했다. 크로노의 두 눈에 담긴 녹빛의 광기가 더욱 짙어지고 깊어졌다는 것을.

이제는 두 눈과 머리를 벗어나 전신으로 그 힘이 뻗어 가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낼지는 로칸조차도 알 수 없었다.

‘괜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

타락의 힘은 기본적으로 사용자의 힘을 강화시켜 준다. 그것이 과연 크로노에게는 어떻게 작용하게 될까.

‘어쩌면…….’

어쩐지 섬뜩한 생각마저 드는 로칸이었지만 애써 부정적인 생각들을 지워 버리고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 * *

“흥, 별것 아니더군.”

“그런 것치고는 너무 늦던데요 ”

“너희가 약해 빠진 거겠지. 고작 발목을 잡는 것도 제대로 못 해서는…….”

산개 후 다시 모인 여덟 종족의 대표들은 조금 전의 성과에 만족하면서도 서로에게 으르렁대기 바빴다.

팀워크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모습.

어차피 이번 일만 끝나면 각자의 종족으로 돌아가 칼을 겨누게 될 사이이기는 했지만 과연 이 상태로 무사히 승리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는 어떻게…….”

“어떻게는. 각자 한 놈씩 맡아 해치운 뒤, 고대 황제까지 끝장내는 거지.”

“하지만 적의 숫자가…….”

“이래서 약해 빠진 놈들하고는 말이 안 통하는군. 걱정 마라. 내가 두 놈을 동시에 맡지. 그래도 네놈들보다는 빨리 끝장을 낼 거다.”

누가 성격 급한 오크 아니랄까 봐 오크 하이 마스터는 말을 툭툭 자르며 치고 들어왔다.

“나도 둘을 맡지.”

그러자 질 수 없다는 듯 트롤 하이 마스터 역시 2 대 1을 선언했다.

하지만 황금사자 진영 쪽은 조용했다.

일대일이라면 모를까, 가지고 있는 스킬이 동급의 다대일의 전투에 적합하지 않기도 했고, 황금사자 진영과 검은용군단의 무력 차이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 고대 황제는 누가…….”

“발을 묶는 정도라면 내가 가능할 것 같군.”

이번에도 검은용군단이었다.

로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아크 리치. 강력한 마법사인 동시에 네크로맨서인 놈이라면 확실히 시간을 끄는 것에 가장 적합했다.

‘뭐! 뭘 봐 ’

로칸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아크 리치에게 저도 모르게 한마디 하려다가 간신히 눌러 참았다.

솔직히 하이 마스터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으니까. 스스로 리스크를 짊어져 준다는데 초를 칠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검은용군단의 분들이 수고해 주시겠군요. 저희도 최대한 빨리 지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흥, 쓸데없는 소리라니까.”

당장이라도 놈들을 잡아먹을 듯 자신감이 넘치는 하이 마스터들이지만 어차피 당장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마스터 스킬을 사용하지 않은 이도 있었지만 사용한 이들도 있어 꼬박 하루는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다른 이들은 재정비를 깔끔하게 마쳤고, 한 가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미쳐 날뛰는군.”

붉은십자군을 모두 잃은 고대 황제가 미쳐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수하들을 모두 잃은 분노 때문인지 타락한 힘에 완전히 침식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붉은 근위병들과 함께 인근의 거점을 마구잡이로 타격하고 다니고 있었다.

디데이가 잡혔으니 각 종족들은 굳이 대응해 주지 않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놈은 멈추지 않았다. 파괴의 화신이라도 되는 듯 성벽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를 멸절시켰다.

“준비들 됐나 고대의 유물을 끝장낼 시간이다.”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파괴된 거점만 무려 다섯 개.

그것을 꾹 눌러 참고 지켜본 종족 대표들은 마스터 스킬의 쿨 타임이 돌아온 다음 날,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고대 황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출정했다.

‘수상해…….’

모두가 자신만만한 모습. 그 속에서 유일하게 의심을 품는 것은 로칸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빈집에 가까운 상태라지만 거점 다섯 개를 마구잡이로 박살 내고도 건재하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간의 힘의 소모까지 생각한다면 전력이 크게 손실되었을 게 분명한 상황 아닌가

당장 몇 시간 전까지도 거점을 파괴했고 지금도 빠르게 이동 중이라 하니 시스템이 놈을 오버 밸런스로 판단하고 일부러 페널티를 준 것이 아니라면 이토록 일이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놈이다.”

그렇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사이, 고대 황제와 붉은 근위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중앙 대륙 최강자들끼리의 정상 결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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