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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종족 대연합 (6) (174/500)

 # 174

종족 대연합 (6)

‘튈까 ’

다시 이지가 돌아온 크로노를 보자 로칸은 도주부터 떠올렸다. 아마 그뿐만 아니라 모두가 동일하게 떠올리고 있는 생각일 터였다.

도망친다. 도망쳐야 한다.

마스터 스킬의 쿨 타임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기 위한 작전상 후퇴라는 말이 뇌리를 맴돌며 입가를 간지럽혔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그럴 리가. 죽음 앞에 자존심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이 마스터로서의 자부심과 자긍심은 높았지만 그것이 개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입이, 그리고 발이 떨어지지 않을 뿐이다.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고대 황제 크로노가 풍기는 기운은 경악스러웠다.

“멍청한 새끼들아, 뛰어!”

콰과과광!

폭급했지만 섬뜩하리만치 잘 갈무리된 기운이 일대를 휩쓸었다.

각 종족 하이 마스터들이 있던 자리를 동시에 썰어 내고 지형을 붕괴시켰다.

[광풍 현신의 지속 시간이 종료하였습니다.]

[앞으로 1시간 동안 재현신이 불가능합니다.]

[광풍 현신의 후유증으로 모든 능력치가 20% 감소합니다.]

“젠장!”

로칸의 외침 덕분에 그 기습 아닌 기습에 당한 자는 없었다.

그러나 로칸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마지막 회피를 끝으로 광풍 현신의 지속 시간이 종료된 것이다.

당장 광풍 현신 상태라도 버틸 수 있을까 말까인데 후유증까지 겪다니 이대로는 짐짝이나 다름없었다.

극심한 탈력과 함께 자괴감이 밀려왔다.

“도망쳐라! 분하지만 지금은…… 상대할 수 없다.”

“맞다. 마스터 스킬을 다시 쓸 수 있다 해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순 없겠군.”

“자신의 분수도 모르는 놈은 없군. 다행이다.”

그 순간, 하이 마스터들은 빠르게 의견을 교환했다. 이대로는 개죽음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후퇴 후 재정비를 선택한 것이다.

“병신들, 지랄하네.”

“…… ”

그러나 그것에는 심각한 오류가 한 가지 있었다. 후유증으로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로칸이 그 점을 냉정하게 짚어 주었다.

“여기서 무사히 튈 수 있을 것 같냐 ”

“…….”

그들이 공포에 젖어 감각이 둔해진 사이, 크로노는 이미 주변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절대 영역.

그것은 로칸도 잘 알고 있는 능력이었다. 바로 고대 황제 크로노의 마스터 스킬이었으니까.

“이런…….”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하이 마스터들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감각을 확장하는 순간, 벨 듯이 달려드는 날카로운 기운들이 이미 검에 찔린 것처럼 고통스러운 느낌을 준 것이었다.

“어떻게…….”

가만히 있어도 식은땀이 흐르고 전보다 오히려 움직이기 어려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움직이는 순간 찔릴 것 같은, 베일 것 같은 기분이 엄습하니 움직이는 것조차,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기에 그 두려움이 더욱 극적으로 느껴졌다.

“방법은 하나 있지.”

“그, 그게 뭐지 ”

잔뜩 움츠러든 하이 마스터들에게 그나마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로칸이었다. 아직 마스터에 불과하기에 오히려 둔감 할 수 있기도 했지만 타이틀 불굴의 의지가 압박감을 일부 상쇄해 주고 있는 덕이었다.

“내가 시간을 끌겠다. 그 틈에 도망쳐라.”

“네가 우리도 어쩌지 못하는 걸 너 따위가…….”

로칸의 제안에 아크 리치가 또다시 까칠하게 나왔다. 그 역시 엄청난 압박감에 아까처럼 말을 쉽게 뱉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로칸의 제안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하이 마스터도 아닌데다 광풍 현신의 후유증으로 약해진 주제에 무슨 수로 어떻게든 고기 방패 역할을 할 수 있다 해도 불과 몇 초가 되지 않아 조각이 나서 바닥에 뿌려질 게 분명했다.

“그럼 네가 할래 ”

“…….”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로칸의 도발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언데드라지만, 크로노에게 덤볐다가는 재생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될 것 같았으니까.

“할 거야, 말 거야 시간 없으니까 결정해!”

잠시 정적이 흐르자 로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크로노가 다시 힘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대로 큰 기술이라도 날렸다간 협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모조리 갈려 나갈 게 분명했다.

“조건은 ”

“이 일이 끝나면 지금 차고 있는 장비 중 하나 내놔. 당연히 선택은 내가 한다.”

“개소리를…….”

“싸군. 무기만 아니라면 수락하겠다.”

그런 희생에 조건이 없을 리 없다. 그것을 알기에 트롤 하이 마스터는 냉정히 판단했다. 발끈하는 언데드 하이 마스터를 무시하고 그 조건을 수락했다.

“좋아요.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장비 하나쯤은 싸지.”

그러자 곧 모두가 동의했다. 그들은 유저들과 달리 목숨이 하나뿐이니까.

여기서 목숨을 잃으면 모든 장비를 잃게 될 테니 그런 조건이라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로칸이 스스로 내건 조건을 만족시킬 때 주기로 하는 것이니까.

“알았으니 어서……!”

결국 언데드 하이 마스터까지 모두 동의했다.

그리고 그 순간, 로칸은 이미 크로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설사 한둘쯤 반대한다 해도 일단은 저지르려 한 일이니까.

고대 황제의 정신을 흩어 버리고 장악한 공간을 되찾기 위해 내면의 힘을 이끌어 냈다.

봉인된 광풍의 사슬 배틀 액스가 가진 또 하나의 특수 능력을 발동시켰다.

“버서크!”

후유증 없이 발동한 버서크! 광풍 현신을 사용했을 때와 같지는 않았지만 미증유의 기운이 로칸을 휘감았다. 혈액을 뿜어내듯 전신에 퍼져 나가며 로칸을 강화시켰다.

“휘익! 전설을 타는 자!”

그와 동시에 천골마가 소환되었다. 조합 스킬의 힘을 받아 적토마로 변신했다.

“가자, 적토마! 폭주 전차!”

이전처럼 거대해지지는 않았지만 힘과 속도만큼은 그대로다. 덩치가 작아진 만큼 회피력은 오히려 더욱 상승하였다.

“초승 검기.”

푸확!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이미 고대 황제의 힘은 그랜드마스터의 그것에 닿아 있었으니까.

가볍게 휘두른 손톱 같은 검기가 적토마를 횡으로 베어 내었다. 목을 떨어뜨리고 강제 역소환을 시켰다.

[‘적토마’가 강제 역소환되었습니다. 앞으로 1시간 동안 소환이 불가능합니다.]

“붉은 유성! 휠 윈드!”

하지만 로칸도 함께 당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 놈의 검기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생성 스킬 점프를 사용했다. 붉은 근위병을 크게 몰아붙이고, 결국에는 무릎 꿇게 만들었던 스킬 조합을 다시 한 번 발동시켰다.

유성의 돌진력과 휠 윈드의 회전력을 더해 강력한 일격을 놈에게 꽂아 넣었다.

“반월 검기.”

쩌엉! 출렁!

하지만 그조차 오래 버티지 못했다. 반달 모양의 검기가 묵직하게 로칸의 배틀 액스를 때린 것이다.

정확한 타점, 압도적인 힘.

마치 로칸을 조롱하듯 예리한 공격이었지만 그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회심의 일격이 파훼되는 순간, 사슬을 조종해 반월 검기를 막아 낸 것이다.

완전히 방어하거나 힘을 해소해 낸 것은 아니지만 사슬을 앞세워 적어도 검기 자체에 직격하는 것은 면했다.

“크윽!”

덕분에 로칸의 몸이 형편없이 튕겨 나갔다.

“흐흐흐!”

“…… ”

그러나 로칸은 웃고 있었다. 한 가지 노림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광살!”

까가가가가가강!

바로 분신 소환. 점프로 날아올라 시선을 끈 동안 분신을 몰래 소환해 둔 것이다.

그리고 로칸이 당하는 사이 분신은 은밀히 움직여 자신의 최강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고대 황제가 순수한 검술로 그것들을 모두 받아쳤다.

“말살의 사슬!”

거기에 로칸도 힘을 보탰다.

상쇄를 넘어 역으로 상처를 입고 있는 분신을 구원하기 위해, 아니 고대 황제의 뒤통수를 후려치기 위해 다시 한 번 조합 스킬을 발동시키며 놈을 타격했다. 나아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다리를 휘감아 버렸다.

“짐 앞에서 감히…… 수작을 부리다니!”

휘익, 퍽!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 레전드 등급인 쇠사슬 자체는 고대 황제조차 힘으로 파괴하지 못했지만 근력만으로 쇠사슬을 조종해 로칸을 패대기친 것이다.

도리깨를 치듯 비참하고 불쌍하게 바닥에 내리쳤다. 혼이 나갈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간접 타격을 입혔다.

“큭, 풀어라!”

결국 로칸은 스스로 사슬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 있는 힘에서조차 한참 밀리고 있으니 이대로는 아예 머리가 뭉개지고 말 것 같았다.

“폭격!”

대신 혼미한 정신을 붙잡고 손도끼를 날렸다. 다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수준이었다.

“공간참.”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고대 황제는 아예 공간 자체를 베었다. 공간을 찢어 로칸이 던진 손도끼를 세상의 어디론가 던져 버리고 로칸마저 찢어 버리기 위해 검을 떨쳤다.

“파멸의 일격!”

이미 피하기도 늦었다. 몇 번이나 골이 흔들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로는 주변의 공간까지 집어삼키며 날아오는 검기를 피해 낼 수 없었다.

그러니 부딪칠 수밖에!

끌어당긴 사슬을 왼팔에 겹겹이 두르고 짓쳐 든 검기의 중심을 때렸다.

힘 대 힘의 대결.

사슬 덕에 적어도 잘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전신의 힘을 한 점에 모았다. 고대 황제가 가볍게 날린 검기를 전력으로 후려쳤다.

“크악!”

로칸의 예상은 맞았다. 다만 반만 맞았다.

고대 황제의 검기와 맞선 주먹은 잘리지 않았지만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팔이 뒤틀린 것이다.

감도 설정상 실제와 한참 차이가 나는 통증일 텐데도 말을 잇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한 격통이 찾아왔다.

“커헉!”

통증은 그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고통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어느새 다가온 고대 황제가 로칸의 복부를 발로 차올렸다.

몸이 뒤집힐 만한 강력한 킥에 호흡이 멈추고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스릉.

그런 로칸의 살갗을 뜨겁게 파고드는 서늘한 기운이 있었다.

“분노하고 절망하라. 이제 내게 반기를 든 인간들 또한 처참히 무너질 것이다.”

바로 무심한 고대 황제의 검. 그의 말처럼 그와 대적하는 이들에게는 이 같은 분노와 절망만이 있을 것 같았다.

그 두려움을 담아, 로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까고 있네, 병신이.”

“그 비천한 입으로 내 귀를 더럽힐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푸욱.

“크아악!”

고대 황제의 검이 로칸의 몸속을 더욱 헤집었다.

복부가 꿰뚫리며 내장이 보이는 것을 넘어 잘리고 헤집어지기 시작했다.

포션으로도, 생명 충전으로도 어쩔 수 없는 심각한 장기 손상이 일어났다.

“크흐흐흐흐! 쿨럭!”

그 상황에서 로칸은 웃었다.

고통을 참지 못해서 절망감에 모든 것을 놓아 버려서

아니다. 그가 웃은 이유는 단 하나,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보자, 병신아. 캔슬.”

이미 애초의 목표였던 하이 마스터들은 모두 몸을 빼낸 상태였다.

로칸 자신은 죽음을 면하기 어렵겠지만 어차피 그는 방문자가 아닌가 한 번의 죽음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버서크를 해제했다.

붉고 검은 시야와 함께 죽음을 받아들였다.

[당신은 사망하였습니다.]

[지정된 거점에서 부활하시겠습니까 즉시 부활 / 시체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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