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만인살 (5)
이제 목표까지는 100킬이 남은 상황.
까가가강!
“멈추게!”
그때, 보다 못 한 에취히가 로칸을 막아섰다.
이미 마스터 스킬을 소진한 그였지만 타고난 전사의 체격을 갖췄다 평가받는 드워프족의 하이 마스터답게 간단한 생성 스킬을 이용해 휠 윈드를 막아 낸 것이다.
“크흐! 말살의 사슬!”
“안 돼!”
하지만 로칸은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몸을 반대로 돌려 재빨리 사슬을 회수하더니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사슬 폭풍을 뿜어낸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고 킬 수를 올리는 것이지, 하이 마스터를 상대하거나 쓰러뜨리는 것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끄억……!”
덕분에 갑작스런 로칸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드워프와 유저들만 맥없이 죽어 나갔다.
‘지금 나는 피아 구분이 안 되는 상태이니까 말이야.’
핑계도 좋았다.
불굴의 의지 때문에 피아 구분이 불가능한 일 따위는 없는 로칸이지만 원래대로라면 버서크를 쓰는 순간 피아식별이 안되는 게 정상인 것이다.
그들 역시 자신이 버서크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의심은 가도 확신을 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로칸은 이제 인간 종족의 후작. 증거도 없이 함부로 몰아세웠다가는 종족 간의 문제로 커질 수도 있는 것이다.
‘좀 죽어라!’
“막아라!”
“그를 제압하라! 여의치 않다면……. 죽여도 좋다.”
그러나 그 또한 마냥 생각처럼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에취히가 마스터, 하이 마스터들을 움직여 로칸을 둘러싼 것이다.
게다가 심하게 저항한다면 죽여도 좋다는 명령까지 내렸다. 방문자이니, 한 번쯤 죽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이딴 짓을……!’
이제 목표까지 10여 킬 정도가 남은 시점에서 치명적인 일이었다.
광풍 현신보다 한 단계 낮은 스킬인 버서크인 것도 문제였고, 오크의 숫자가 급감하며 타이틀 효과가 푹 꺼져 버린 것도 문제였다.
로칸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만한 상황.
그러는 사이 마지막 오크들이 공격당하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휘익!”
선택의 여지가 없다. 로칸은 즉시 천골마를 소환했다.
카이를 불러 공중으로 이동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드워프들에게 공중 공격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폭주 전차!”
대신 천골마에 강화 돌진 효과를 부여했다.
적토마 수준은 아니지만 강력한 돌진의 힘이 깃들며 드워프 마스터들의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딜!”
“더는 갈 수 없다!”
그러자 드워프 마스터들이 즉시 반응했다. 각자의 무기를 시간 차로 휘두르며 천골마의 머리부터 쪼개려 든 것이다.
말 위에서 휘두르는 로칸의 배틀 액스도 매서웠지만 일단 돌진부터 저지시키지 않으면 어렵다고 판단했다.
“점프! 폭격!”
하지만 그 또한 로칸의 계산에 있었다.
로칸은 놈들이 공격을 퍼붓는 순간에 맞춰 기계 체조를 하듯 몸을 비틀며 뛰어올랐다.
강력한 파괴력이 담긴 손도끼 열 자루를 거의 동시에 투척하며 자신을 막아섰던 드워프들의 뒤통수를 노렸다.
“크읏!”
그러나 그들 역시 베테랑 전사였다. 통나무 같은 허리를 유연하게 회전시키며 손도끼를 힘으로 막아 냈다.
“디그독!”
타앗!
로칸은 애초부터 그들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충분히 목숨을 끊어 놓을 만한 위력이었지만 그 묵직한 견제를 막아 내는 사이 디그독을 소환해 내더니 녀석의 크고 단단한 집게발을 딛고 다시 뛰어올랐다.
“리프 어택!”
후우웅. 콰앙!
사람이 뛰는 것인데 공기가 찢기는 소리가 났다.
리프 어택을 펼친 것도 모자라 로칸이 스로잉으로 배틀 액스를 던진 뒤, 그 힘에 몸을 맡겨 더욱 빠르게 이동한 것이다.
“휠 윈드!”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휠 윈드를 펼쳐 범위 안에 들어온 모든 존재들을 고깃덩이처럼 다져 놓았다.
[연속 10,000kill 달성!]
[기적적인 업적! 당신은 한 전투에서 연속으로 1만이나 되는 존재를 격살하였습니다.]
[타이틀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인살 / 영웅]
그와 동시에 기다렸던 알림이 나타났다. 1만 킬 달성을 축하하듯 터진 업적 달성의 알림!
그러나 이번에는 기존과 달랐다. 업적 달성에 따른 정해진 타이틀을 부여하는 대신 업적 달성자가 직접 타이틀을 선택 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나왔군.’
로칸은 두 가지 타이틀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전생에도 아주 유명했던 타이틀이니까.
로칸 자신은 전투 지속력에 어려움이 있어 결국 얻어 내지 못했지만 이 타이틀을 얻은 이들은 몇이나 있었다.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지.’
바로 ‘영웅’이라는 에픽 등급의 타이틀로.
영웅은 어찌 보면 폭군과 반대되는 타이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군의 숫자에 따라 강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중 일부를 [영웅의 오라]라는 스킬로 아군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었다.
그 혼자의 힘도 강력하지만 1백 명 가량에게 강력한 버프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전쟁뿐 아니라 길드전에서도 더없이 유용했기에 이 타이틀의 조건을 맞춘 이들은 하나 같이 망설임이 없었다.
“만인살을 선택하겠다.”
로칸은 예정했던 대로 만인살을 선택했다.
영웅의 타이틀 효과도 탐이 났지만 그에게는 영웅보다 만인살의 타이틀이 더욱 유용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길드를 만들 것도, 레이드나 전쟁에서 집단 전투를 이끌 일도 별로 없는 그이기에 단체일 때 유용한 영웅보다는 개인에 특화된 만인살이 더욱 효율적이라 할 수 있었다.
[최초][만인살][에픽]
한 명을 벤다면 살인자가 되지만 만 명을 벤다면 영웅이 될 수 있다. 한 번의 전투에서 만 명을 죽인 당신의 무용은 충분히 역사에 기록될 만하다.
[보유 효과]
-머더러 카운트 표시되지 않음
-범위 내에서 전투 상태를 유지하는 존재의 수에 비례하여 공격력과 방어력이 최대 50%까지 상승합니다.
-주변 존재들의 공포 면역 효과를 제거합니다.
-한 번이라도 베어 본 적 있는 종족과 대적 시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으흐흐흐흐!”
그야말로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옵션이었다.
하나하나가 버릴 것이 없다 못해 유니크 등급의 타이틀 이상 가는 엄청난 옵션이 로칸에게 적용되었다.
“아니…… 자네 ”
그것을 획득하는 순간, 일단 에취히의 반응이 달라졌다.
로칸을 광인으로 규정하고 제압하거나 격살하려던 그였지만 타이틀을 획득했기 때문인지 행동을 멈추었기 때문인지 다시 포위만 할 뿐, 적극적인 공격이나 위협을 가하지 않는 것이다.
‘머더러 카운트 삭제……. 이걸로 PK가 될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되겠군.’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로칸은 그것이 만인살이 가진 첫 번째 옵션 덕분이라 생각했다.
머더러 카운트 표시 삭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로칸이 이제 같은 진영이나 같은 종족을 죽이더라도 머더러라 불리는 상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PK를 해도 페널티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캔슬. 항복! 항복입니다.”
자신의 범죄 수치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로칸은 씨익 웃으며 버서크마저 캔슬했다. 전투가 끝났으니 굳이 스킬을 유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듣지. 전군 전열을 정비하라! 30분 휴식 후 곧장 취힐라만 요새를 공략한다!”
로칸이 두 손을 들어 적대 의사가 없음을 밝히자 에취히가 굳은 표정으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로칸의 입지가 있으니 당장 함부로 대하기보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 결정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오크와의 대회전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취힐라만 지역 오크족의 사기가 크게 떨어집니다.]
[취힐라만 지역 오크족의 능력치가 일정 시간 동안 5% 감소합니다.]
그들이 잠시 휴식을 시작하자 곧 취힐라만 지역 오크들의 능력치 감소 페널티가 발생했다.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 그것도 대군이 서로 맞붙는 대회전에서 패배했으니 능력치 5% 감소로 끝난 것이 용할 만큼 사기가 꺾였을 터였다.
하지만 조금함을 가져서도, 자만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
오크족에 가용 가능한 전력은 클래스 익스퍼트급만 따져도 50만 이상이었고 그들 중 일부만 증원을 와도 취힐라만 요새의 공략은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시간 내에 도달하는 것은 무리지.’
그러나 설령 증원이 있다 해도 시간 내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다.
양측의 병력이 몇 날 며칠을 싸우며 시간을 끈 것도 아니었으니까, 당장 충원될 수 있는 병력이라고 해 봐야 클래스 익스퍼트인 유저들이 고작이었다. 그 숫자 또한 맥시멈 1만 정도.
반면에 이쪽은 희생된 병력의 숫자를 감안하더라도 5만에 가까운 숫자가 살아남았고 대회전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면 추가 병력이 지원을 올 터였다.
애초부터 공성 병기는 대회전에서 승리했을 때 움직이도록 약속했으니까.
“조용히 따라오게.”
“물론이죠.”
그렇기에 에취히는 짧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이동을 명령했고, 로칸은 버서크 후유증 상태인 채로 포로처럼 그들 사이를 걸었다.
이번 전투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사후처리는 취힐라만 요새를 빼앗은 뒤 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자고로 과는 공으로 덮는 법이지.’
덕분에 아군에게 경계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으며 이동하게 되었지만 로칸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마지막의 난동이야 앞에서 세운 공을 생각하면 별것 아닌 일에 불과했으니까.
더구나 마스터급의 피해는 없었으니 최소한 벌을 받을 리는 없었다.
‘타이틀 효과도 있고.’
타이틀 효과와 명성, 지위, 평판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면 오히려 상을 받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전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버서크 후유증이 종료되었습니다.]
휴식에 이은 이동. 그동안 로칸의 페널티가 모두 사라졌다.
광풍 현신의 쿨 타임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지만 버서크는 당장이라도 다시 사용이 가능했다.
“발사 준비!”
그러나 로칸이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적당한 거리를 잰 드워프들은 즉시 운반해 온 투석기를 조립하기 시작했고, 오크들의 원거리 공격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기어코 완성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투석기의 위력은 쏘아 보내는 돌덩이에서 나오지 않던가 하지만 그들이 그만한 바윗덩이까지 들고 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기에 투석기 위에는 무거운 공기만 내려앉았고, 그 곁으로 다가간 드워프 하나가 수를 내었다.
“스톤 엣지!”
쿠웅!
드워프 마법사의 주문이 완성되자 허공에서 커다란 바윗덩이가 나타났다.
원래는 허공에 바위를 소환해 떨어뜨리면서 적을 찍어 누르는 주문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투석기가 쏘아 낼 투사체를 공급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읏차!”
그것을 대기하고 있던 드워프들이 받아 내 터질 듯한 근육으로 옮기더니 투석기의 발사대 위에 안착시켰다.
곧바로 떨어뜨리면 투석기가 망가질 수도 있기에 수를 쓴 것이다.
‘정말 마법이 만능이군.’
알고 있는 방식이긴 했지만 그 말도 안 되는 활용 방법에 로칸도 혀를 내둘렀다.
일반의 상식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는 곳. 그렇기에 더 로드가 재미있는 것이었다.
“쏴라!”
후우우웅!
에취히의 지시에 투석기가 거칠게 튀어 올랐다.
전력을 다해 바윗덩이를 날려 취힐라만 요새의 성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꽈아앙!
그러나 요새라는 이름답게 한 발로는 큰 영향이 없었다. 취힐라만 요새의 두꺼운 성벽은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된다면 어떨까
드워프들은 계속해서 바위를 소환하고 쏘아 내기를 반복했고, 오크들은 필사적으로 그것들을 방어해 냈다. 각자가 가진 조합 스킬들을 펼쳐 바위를 요격하기 시작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뭣 ”
“시간을 단축시켜 드리죠.”
그때, 지루해진 로칸이 몸을 일으키고 거칠게 몸을 풀며 취힐라만 요새의 성벽을 무너뜨릴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