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작전명 앤트맨 (5)
트롤들은 최전방 거점인 후쉬칸성이 무너지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적의 전멸 같은 극적인 일은 없었다. 애초부터 로칸이 그럴 생각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아무리 사기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는 그 효과가 덜한 법이니까.
‘제대로 붙었다면 못해도 허울 좋은 승리가 되었겠지. 최악의 경우 다시 빼앗길 수도 있었고.’
아무리 1천 기의 강력한 영혼 군단이 추가되었다지만 그중 마스터급에 해당하는 것은 기실 2백 기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저 내성으로 분산되었기에 적의 마스터와 하이 마스터를 상대 할 수 있는 병력은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그대로 정면 승부를 벌였다 아마 그랬다면 잘해봐야 양패구상, 혹은 인간 병력의 전멸로 이어졌을 터였다.
그것을 알기에 로칸은 속도를 내서 후쉬칸 영지를 빼앗으려 들었고,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깨달은 영주는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영주가 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무척이나 치욕적인 일이지만, 하이 마스터나 되는 자신이 죽는다면 종족에 더욱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라는 냉정한 판단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만약 그가 성을 버리더라도 제대로 괴롭히고자 마음먹었다면 로칸이라도 몸 성히 버티기 힘들었을 터였다.
온갖 타이틀 버프들 덕분에 이제 하이 마스터와 비비는 수준이 아니라 어지간한 수준의 하이 마스터는 압살할 수도 있는 로칸이지만, 적어도 놈은 그를 곤란하게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것이다.
그럼에도 놈이 후쉬칸성을 버린 이유는 단 하나다.
로칸이 지난 전투들을 통해 많은 변수를 만들어 냈다는 것.
그러니 이번 역시 남아 있는 변수가 있을 수 있다는 강박이 그를 얌전히 물러나게 만든 것이다.
조금만 더한다면 아예 놈의 머릿속에 망령이 되어 떠돌 수도 있겠지.
어쨌든 덕분에 로칸은 후쉬칸성을 재탈환한 시점에서 전투를 종료시킬 수 있었고, 퇴각하는 트롤의 병력을 적당히 추격하면서 추가 타격도 입힐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만세!”
“우리가 후쉬칸을 함락시켰다!”
비록 깡통이 된 성을 먹어 치운 것뿐이지만 최전방의 성들 중 최고의 난이도로 불리던 곳이기에 병사와 기사들의 환호는 대단했다.
“아싸, 레벨 업!”
“유니크 득템!”
물론 유저들 또한 난리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공성에 성공함에 따라 1레벨 업을 할 수 있었고, 전투 중 획득한 전리품과 퀘스트 성공 보상까지 챙길 수 있던 것이다.
확실히, 전쟁은 유저들에게 재미뿐 아니라 이득을 볼 수 있는 콘텐츠였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반면, 로칸에게는 퀘스트가 주어지지 않았다. ‘병사 1’과 같은 역할로 참여한 다른 유저들과 달리 지휘관의 입장인 그에게는 따로 ‘승리 시 1레벨 업’ 같은 보상의 퀘스트가 부여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똑같이 1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그 스스로가 트롤들을 학살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소속된 병사들이 적을 죽인 것에 대한 경험치 중 일부가 흡수된 까닭이었다.
이로써 307레벨.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척이나 레벨이 오르지 않는 것이 체감되었다.
“영지 창.”
트롤들의 반격 시도가 더는 있지 않음을 확인한 로칸은 여유 있게 일단 성벽과 성문만 보수했다.
이미 꽤 많은 강화를 이뤄 놓은 성이라서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골드가 깨졌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 성에서 이미 땡긴 돈만 해도 얼만데.
그리고 그러는 사이, 고블린 성채인 히랏타의 전투도 슬슬 끝을 보였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드워프, 노움 연합군의 패배.
기세 좋게 덤벼들었지만 고블린의 주술과 언데드의 마법, 네크로맨싱은 강력했다.
서로 교차하듯 능력을 퍼부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주술과 네크로맨싱은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같은 진영으로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네크로맨싱을 주술이 강화할 수도 있었고, 주술을 네크로맨싱이 보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초혼강림의 술’이라는 주술과 ‘서먼 스켈레톤’이었다.
생각해 보라, 양질의 재료로 만들어진 해골 기사에 과거 강력했던 전사의 영혼이 덧씌워지는 것을.
평소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언데드는 적진을 마구 휘저을 테고, 위험한 순간에는 시체 폭발과 강림된 영혼의 폭발이 동시에 일어나 일대를 쓸어버릴 터였다.
노움 종족에도 실력 좋은 마법사와 주술가, 그리고 기계공학자들이 즐비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의 조합이었다.
“하프엘프들은 아직인가.”
물론 그 속에서도 드워프와 노움들은 분전하며 적의 전력을 갉아먹는 데 성공했지만 결정적으로 성벽을 넘는 것에는 실패했다.
성벽이 반파되어 꾸역꾸역 막고 넘어지며 밀고 들어갔지만 놈들이 겹겹이 쌓은 마법 폭탄과 장벽에 가로막혀 목적을 달성해 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싸움은 네 종족 모두에게 엄청난 힘의 소모만을 남기고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그럴 동안 오직 하프엘프들만큼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온건파라지만…….”
각각의 종족이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며 나팔을 불어 댔지만 자신들의 영역에 침범한 이들이 없다는 이유로 직접적인 참전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같은 황금사자 진영의 종족들이 박 터지게 싸우든 말든.
애초에 진영이라는 것이 비즈니스적인 관계였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이 직접 침공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움직이는 일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돕지 않으면 자신들이 포위당해 곤욕을 치르게 될 때뿐이겠지.
“하여간 제멋대로인 놈들이라니까.”
덕분에 하프엘프의 유저들은 불만이 꽤 쌓인 상태였다.
황금사자 진영의 종족들 중에서 가장 유저가 이득을 볼 수 있는 종족으로 알려진 것이 하프엘프가 아니던가
그런데 막상 종족 단위로 재미를 볼 수 있는 전쟁에서는 발을 쏙 빼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한 전투에 참여하더라도 같은 종족에게 여러 이점을 줄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로칸은, 같은 유저로서 그 짜증과 불만을 이해했다.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기회를 제공했다.
[쉬오름성 공략전][퀘스트]
트롤들의 거점인 쉬오름성을 공략하라.
-성공 조건 : 쉬오름 거점 획득 시 완료
-성공 보상 : 대량의 명성, 대량의 경험치
-특별 보상 : 공략전 성공 시 기여도에 따라 종족과 관계없이 작위 수여
-퀘스트 진행 중 획득 경험치 1.2배
아무래도 최전방의 핵심 거점이 아니다 보니 1레벨 상승 같은 파격적인 보상은 붙지 않았다.
그러나 로칸은 다른 조건을 걸어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었다.
‘이걸 보고도 안 넘어올 놈들이 있을까 ’
종족과 관계없는 작위 수여!
한 종족에서 작위를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 유저들이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보상이었다.
그래 봤자 남작 정도의 작위겠지만 그것만 해도 어딘가 더욱이 하프엘프의 경우 지위를 얻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고레벨이지만 아예 관련 퀘스트 자체를 포기한 이들도 많은 상태였다.
그런데 종족과 관계없이 작위를 준다고
없던 욕심도 소환해 낼 만큼 매력적인 보상이 아닐 수 없었다. 아예 하프엘프들을 겨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파격적이다.
와드 : 아니,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남의 종족은 왜 챙기는 거야
└갓엘프 : 그건 너희 인간 놈들이 형편없기 때문이지. 역시 뭘 아는 로칸갓! 지금 싸우러 갑니다.
└허슬 : 인간 유저가 수도 적도 레벨링도 딸리니 이렇게 하는 게 맞기는 한데……. 가뜩이나 미쳐 날뛰는 하프엘프 놈들만 노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젠장.
물론 인간 유저들의 반발은 있었다.
로칸이라고 무작정 작위를 뿌려 댈 수는 없었으니 남은 자리는 한정적일 텐데 그걸 다른 종족에게 내줄 수도 있다니 서운하고 답답한 게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키보드를 두들겨 댄다고 결정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로칸이 남긴 댓글이 모두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로칸 : 그럼 인간 유저가 공을 세우면 되겠네.
그렇다. 다른 종족에게 작위를 내주는 것이 아니꼽다면 인간 유저들 중 누구 하나를 밀어주든, 자력갱생하든 인간이 공을 세우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아직 로칸을 제외하면 마스터 레벨 유저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투정을 부리는 인간 유저들은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하프엘프 유저들이 로칸의 결정에 환호하고 공을 세워 작위를 받기 위해 후쉬칸성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군.”
그들을 위해 로칸은 가장 기본적인 상점들을 성내에 개설했다.
몽땅 팔아 치운 까닭에 기존에 판매하던 것과 같은 고급 장비나 소모품이 아닌 가장 기초적인 것들뿐이었지만 이미 유저들의 눈은 돌아가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 소모품과 장비를 구입해 가며 출정의 날을 기다렸다.
뿌우~! 뿌우, 뿌우~!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드워프와 노움이 이를 갈며 히랏타 성채 공략에 재도전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로칸이 쉬오름성으로의 출정을 결정한 것이다.
충분한 시간적 여유와 보상을 제시했기에 모여든 유저의 숫자는 기존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무려 6만. 하프엘프의 고레벨 유저들 중 작위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이 몰려든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숫자가 모여든 것이다.
하프엘프뿐이 아니다. 인간도, 드워프도, 노움도 지지 않고 모여들었다. 아예 한 사람에게 전공을 몰아주기 위해 길드 단위로 지원을 한 곳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쓸 만하군.”
그들을 슥 둘러본 로칸의 평가는 냉정했다.
이 정도면 꽤 쓸 만했다. 일부 상위 길드들이라면 하이 마스터는 무리라도 마스터 레벨 한둘쯤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로칸은 이번 공략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가장 큰 무게를 갖던 후쉬칸성이 무너진 이상, 이후의 성들에 대한 공략은 상대적으로 쉬워질 수밖에 없었고 이번이 아니라도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작위가 아까운 것은 아니지만 함부로 남발할 수는 없지.’
그렇기에 이번 공략전은 잘되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작위를 받을 꿈을 부풀어 있는 유저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NPC 병력의 지원도 형편없었다.
클래스 익스퍼트급은 제법 따라붙지만 하이 마스터는 아예 제외되었고 마스터급도 셋밖에 나서지 않는다.
그마저도 로칸이 은밀히 불러 불리하면 곧장 도망칠 것을 명해 둔 상태였다.
“출정하라!”
그렇게 다른 생각을 품은 이들이 함께 진격하기 시작했다. 트롤들의 전선 두 번째 거점인 쉬오름성을 향해서.
‘이만하면 시선을 빼앗기엔 충분하겠지. 그럼 나도 움직여 볼까 ’
같은 시간, 로칸은 따라갈 것처럼 유저들에게 얼굴만 비친 뒤 홀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쉬오름이 아닌, 언데드들의 최전방 거점인 데스 캐슬로.
그리고 약 2시간 뒤, 더 로드의 유저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해야 했다. 로칸이 단신으로 데스 캐슬을 함락시켰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