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캬루스 VS 로칸 (1)
“젠장.”
로칸 자신 역시 승리에 취해 잠시 바보가 되었었나 보다. 검은용군단의 저항이 약하다고 해서 틈을 허용하다니.
보고를 받은 로칸은 서둘러 마법 스크린을 열었고, 빨갛게 밀려들어 오는 적들의 군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허리를 자르겠다는 거군.”
이 정도면 작정을 한 거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모를 수밖에 없도록 소수 단위로 이동을 했는지 숫자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이동속도나 함락 속도를 생각할 때, 죄다 마스터급 이상으로 채워 넣은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이대로면 중간의 거점을 모두 날려먹고, 적들에게 포위당할 것이 분명했다.
“다른 종족들은 ”
“그들도 지금쯤 알아차렸을 겁니다. 다만 어떻게 행동할지는…….”
인간뿐 아니라 하프엘프, 노움, 드워프 중 누구의 거점에서라도 버틸 수 있다면 그쪽으로 이동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여의치 않았다.
각 종족의 주 병력들은 전방에 흩어진 채 배치되어 있었고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 한들 놈들을 가로막기는 무리였다.
급하게 끌어모은 병력만으로는 시간을 끄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터였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문제로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택지는 총 세 가지였다.
먼저 첫 번째는 역으로 적 쪽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다.
후방에 적의 주력이 모였다는 것은 반대로 전방의 수비가 약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허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적의 병력은 후속 지원 병력들에게 어떻게든 맡기고 오히려 더욱 빠르게 진격해 버리는 것이다.
이 경우 그야말로 치킨 레이스다. 누가 먼저 겁을 먹고 멈출 것인가.
몇 개의 거점을 더 먹어 치운다 해도 허리가 잘린 황금사자 진영은 보급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만약 놈들이 허리를 자른 뒤 그대로 위로 밀고 올라온다면 양동 작전에 당할 수 있었다.
그나마 시간을 번 것을 토대로 각 종족이 한데 뭉칠 수 있기야 하겠지만, 적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는 없으니 결국 후방 지원이 늦는다면 전진해 있는 병력만으로 적의 전체 병력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야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방법은 이대로 빠르게 후퇴하는 것이다. 병력을 모으고, 각 종족이 연대하여 적의 별동대와 맞붙는다.
물론 이쪽의 움직임을 파악한다면 적들도 우르르 병력을 내려 샌드위치를 하려 들겠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누가 먼저 고사하게 될지는 그야말로 붙어 봐야 알 일.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적의 방어가 허술한 지역을 각자 뚫고 나가는 것이었다.
적이 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병력의 규모를 생각할 때 이미 탈환한 지역에 주둔 시킬만한 충분한 병력이 있을 리는 없다.
그러니 적의 본대를 피해 주둔군을 꺾고 길을 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물론 이 역시 자칫하다가는 적의 본대와 마주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으니 엄청난 눈치 싸움이 필요했다.
“고약하게 됐어.”
로칸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선뜻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인간들의, 자신이 이끄는 군단의 안위만을 고려한다면 세 번째 방법이 제일 좋았다. 인간은 네 종족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가장 먼저 공격을 당한 만큼 적의 본대는 그들을 지나쳐 갈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만 살아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들이 살고 드워프, 노움, 하프엘프들의 본대가 전멸하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밀고 나갔던 것과 반대로 황금사자 진영의 수비 라인이 쭉 갈려 나갈 수 있었다.
“난쟁이 놈들의 선택에 맡겨야 하는 건가.”
그러니 로칸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프엘프들이야 그렇다 치고, 종족 퀘스트라는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을 탐해 온 두 종족이 과연 여기서 물러나려 할 것인가.
로칸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통신구를 들었다. 황금사자 진영의 사령관들과의 연결을 시도했다.
-로칸 : 인간 후작 로칸입니다. 검은용군단이 후방에 나타난 건 확인하셨죠 어떻게 대응하실지 공유 바랍니다.
지금과 같은 만약의 상황에 서로 협력하기 위해 미리 통신을 뚫어 놓기를 잘했다.
그러나 연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그들의 대답은 한참 후에나 들려왔다.
-에취히 : ……확인했다. 빌어먹을 놈들. 진짜배기를 몽땅 긁어모아 뒤를 친 것 같더군. 조금만 더 진격했으면……. 크흠, 아니다. 못 들은 걸로 하도록.
-이레인 : 후방이 끊기는 건 위험해요. 적들의 전력이 만만치 않아서 후방에서 지원을 오는 병력만으로는 오히려 각개 격파를 당하고 말 거예요. 한데 뭉쳐서 대항을 하든지, 적의 주력을 피해 일단 병력을 돌려야 합니다. 정령들의 말에 따르면 캬루스가 직접 움직였다고 해요.
-히토 : 캬루스가 젠장!
드워프와 노움은 한없이 아쉬워했다.
조금만 더 나아갔다면 원하던 바를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절묘한 타이밍에 적이 치고 들어왔다.
우겨서라도 더 진격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캬루스라는 이름에 모두가 생각을 접었다.
전설적인 트롤 사냥꾼.
살아 있는 전설 그 자체.
대륙 최강이자 현 트롤들의 수장.
어중간한 하이 마스터와 마스터의 조합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가 직접 움직였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이 아니라 현 황금사자 진영의 최강자들이 나서더라도 그와의 일대일을 자신할 수는 없었다.
승률 자체가 3할을 넘기지 않을 터였다. 하이 마스터라는 같은 범주 안에 묶여 있기는 하지만 그는 격이 다른 존재였으니까.
현 시점에서 그랜드 마스터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꼽히는 존재가 바로 캬루스였다.
-로칸 :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취히 : ……일단은 물러나야지. 정말로 저기에 캬루스가 있다면 걸리는 순간 그 군단은 끝장날 테니까.
-이레인 : 뭉치는 건 안 돼요. 이쪽이 숫자는 더 많지만…… 그에게는 숫자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으니까요.
-히토 : 그럼 살아서 보자고, 친구들. 젠장.
놀랍게도 그 이름 석 자가 전군의 행동을 결정했다.
어차피 걸리면 죽는다. 병력이 1만이든, 5만이든, 10만이든. 그를 아는 자들은 그 숫자가 의미 없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따라서 산개. 각개 돌파를 결정했다.
각자의 종족은 각자가 책임질 것.
황금사자 진영이라는 연합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니까.
각 종족의 최강자들이 구원을 와 준다면 모를까, 지금의 그들로서는 모든 것을 걸어야만 놈과 싸워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피하는 것이 상책일 수밖에 없었다.
“전군을 집결시켜라.”
통신을 마친 로칸은 즉시 병력을 끌어모았다.
아마 다른 종족들은 병력을 나누어 일부는 미끼로, 일부는 시간 벌이로, 또 일부는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움직일 테지만 인간은 강자 한 명이 아쉬웠다.
다른 종족들처럼 버리는 패로 쓸 수 있는 것은 유저들이 고작. 로칸의 입장에서는 레벨이 높은 NPC들을 최대한,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만 미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여기다.”
병력을 집결시킴과 동시에 로칸은 지도에서 한 곳을 짚었다.
바로 캬루스와 검은용군단의 병력들이 처음 나타나 움직이기 시작한 지점.
등잔 밑이 어둡다고, 주력이 모두 빠져나간 그곳을 향해 역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쪽으로 오진 않겠지 ’
그러면서도 마법 스크린은 계속해서 주시했다.
캬루스와 검은용군단의 주력은 아직 인간들이 차지한 거점 영역을 지나고 있었다.
자칫 소란을 피웠다가는 아예 놈들이 이쪽으로 병력을 움직일지 몰랐다.
때문에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조심조심 목적지를 향해 속도를 조절하며 진군을 시작했다.
놈들이 기수를 돌려 쫓아오지 않도록, 하프엘프나 노움의 지역으로 넘어갔을 때가 돼서야 길을 뚫을 생각이었다.
“엇, 후작님!”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헛된 바람인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쪽으로 옵니다!”
인간의 영역을 지나쳤다고 여긴 캬루스의 부대가 느닷없이 말머리를 돌려 이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전군 속보!”
로칸이 이를 악물었다. 진격의 속도를 크게 높이는 동시에 유저들을 대상으로 퀘스트를 발동시켰다.
[추격 저지][퀘스트]
검은용군단의 추격을 저지하고 본대를 목표 지점까지 안전하게 이동시켜라.
-성공 조건 : 본대의 안전한 이동
-성공 보상 : 레어 아이템(랜덤), 대량의 명성, 대량의 공훈도
추격 저지라고 적었지만 사실상의 물귀신 작전이었다.
고작 마스터 레벨이 두 자리 수라도 놈들을 막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데 유저들은 고작해야 클래스 익스퍼트였다.
개중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벌써부터 이동 주문서로 도망을 치거나 로그아웃을 시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량의 명성과 공훈도, 레어 아이템이라는 유혹에 낚인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처치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만 끌면 된다니 한번 도전해 볼 만하다고 착각한 것이다.
‘전투 상태에만 돌입시키면 돼.’
전투 상태가 되면 그다음에는 도망조차 어려울 터였다. 아니, 도망치려는 행위 하나하나가 시선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볼 테니 그것도 괜찮았다.
로칸은 부관들에게 부대의 지휘를 맡기고 유저들을 이끌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는 수밖에.
아예 부대의 이동 방향도 수정하여 최단 루트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제아무리 캬루스라 하더라도 적 진영 깊숙한 곳까지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지는 못할 테니까.
이 사태에 대해 소식을 보냈으니 황제가 나름대로의 구원 병력을 보내기도 했을 테고.
‘일단 이놈들을 밀어 넣고…….’
로칸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지간한 하이 마스터도 찜 쪄 먹을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캬루스라면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전생에도 하이 마스터 유저 여럿이 놈에게 덤벼 전멸당한 바가 있었다. 괜히 트롤 종족 최종 보스가 아닌 것이다.
‘쫄따구 숫자라도 줄인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다. 놈을 따라온 마스터, 하이 마스터라도 어떻게든 데려가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로칸도 한 번 죽을 때마다 얻는 페널티가 엄청 나지만 핵심 병력을 모두 잃는 것보다는 백번 나은 일이다.
그렇게 몇 번쯤 들이받아서 시간을 끌고 어떻게든 캬루스를 떨어뜨려 놓을 수만 있다면, 미친 척 놈에게 도전해 볼 생각도 있었다.
‘영혼을 써 버린 게 아쉽군.’
로칸이 마주 오는 검은용군단의 병력들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며 영혼 수집자의 권능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전 영혼을 5천 개나 써 버리는 영혼 군단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초월 각성을 써서 일대일로 겨뤄 볼 만했을 텐데.
아쉬운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거의 행동에 미련을 두기보다 현재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오, 온다.”
그리고 잠시 후, 놈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어느 한 종족이 아니었다.
그동안 인간에게, 황금사자 진영의 종족들에게 당한 것을 갚아 주겠다는 듯 캬루스를 선두로 언데드, 오크, 고블린 할 것 없이 뒤섞여 광기 어린 눈빛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공격!”
“선빵 필승이다!”
“미친놈아, 어차피 못 이겨! 그냥 시간이나 끌어!”
눈이 돌아간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전투력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수적인 우세가, 집단의 광기가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맹목적인 희망이 피어올랐다.
퍼버버버버벅!
“컥!”
“……미친.”
바로 그때, 한 발의 화살이 전장을 꿰뚫었다.
가로막는 모든 이들을 꿰뚫고 유저들의 틈에 몸을 숨기려는 로칸을 정확히 노렸다.
조합 스킬도 아니었다.
그저 단 한 발의 평범한 화살.
캬루스는 그것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광기에 젖어 덤벼들려던 인간들의 사기를 단숨에 꺾어 놓았다.
쩌엉!
“큭.”
로칸은 황급히 배틀 액스를 비틀어 그것을 막아 냈지만 손에 전해지는 충격의 여운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다.
로칸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정확히 쳐다보고 있는 캬루스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자넬 보러 왔는데 숨바꼭질을 하려 하면 쓰나.”
그런 로칸을 향해 캬루스가 삐죽 솟은 엄니를 드러내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