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오크 광전사 크록취 (4)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어차피 돌아가면 늦을 수 있으니까.
오크들의 대반격이 시작된 이상 쪼개진 병력만으로는 수성에 버거움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자신들이 지원군이 되어 승리를 거둘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러지 못하다면
만약 패퇴를 했을 경우 몸을 의탁할 곳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적은 징병을 통해 NPC를 보강했다 하나 다 합쳐서 5천이나 될까 싶은 소규모 병력이었다.
3만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와서 함락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피해는 있더라도 빠르게 니힐만성을 탈환한 뒤, 증원군을 쪼개 보내는 것이 유일한 답이었다.
“일제사격 준비!”
그에 응답하듯 크록취도 즉시 대응했다.
그가 나서는 것은 마지막이다. 광풍 현신에는 시간제한이라는 약점이 있으니까.
NPC 병사들을 희생시키고, 외성을 내어 주더라도 마스터 스킬은 아껴 둘 필요가 있었다.
“쏴라!”
단, 마지막 한 번의 기회면 족했다.
“전설을 타는 자, 광풍 현신!”
수비 병력들에게 일제 사격을 지시하고 크록취는 홀로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시 한 번 펜릴을 세상에 풀어놓으며 거신이 되어 적들을 휩쓸어 가기 시작했다.
“젠장, 저걸 어떻게 잡아!”
“우리 마스터들은 뭐 하는 거야 ”
투석기와 발리스타, 광역 마법 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피해는 있지만 종군 마법사와 유저들의 활약으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공격 범위에 휩쓸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는 늑대와 거인 콤비는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무수한 시체만이 남았고, 그들에게 신경이 팔린 사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공성 병기와 광역 마법들이 떨어졌다.
“으아아악!”
“피해!”
어떻게든 발목을 잡아 보려 해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너무도 날렵하게 움직이는 통에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차라리 아군의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광역기를 사용해야 하나 싶을 정도.
그러나 ‘버서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놈의 마스터 스킬에 생명력을 조금 깎는 스킬 따위는 의미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모든 마스터는 집결하라! 놈을 잡는다!”
결국, 적의 지휘관이 결단을 내렸다. 크록취를, 저 미친 오크를 잡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최대한 상대해 주지 말고 막거나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펜릴의 존재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전장에 있는 모든 마스터 레벨 유저와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조금 치사하지만 ‘다구리’를 치지 않고서는 놈을 어찌하기 어려워 보였다.
“내가 놈을 묶겠다. 지원해!”
지휘관은 아예 스스로가 탱커가 되기를 자처했다.
지휘관을 잃는 순간 부대가 오합지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그처럼 위험한 일을 남에게 맡길 수만도 없었다.
하이 마스터인 자신이 이 전장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장 강한 존재 중 하나였으니까.
더구나 근접전이라면, 버티기만 하는 것이라면 누가 와도 자신 있는 그였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라면, 그동안 다른 열 명의 마스터가 각자의 마스터 스킬로 놈을 공격한다면 최소 놈을 도망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실드 차지!”
때문에 그는 생성 스킬을 사용해 오라를 잔뜩 일으킨 방패를 들이밀었다.
전신을 가리는 히터 실드를 앞세우고 크록취가 돌진해 오는 방향으로 맞서 뛰어들었다.
당연히 피할 것이다. 탈것에서 비롯되는 돌진력이 있다지만 이쪽은 하이 마스터이니까.
만약 오만하게 부딪쳐 준다면 놈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고, 피한다 해도 다음 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폭주 전차!”
“……!”
그러나 오만했던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의 돌진을 확인한 크록취는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속도를 높였다. 압도적으로 강화된 돌진 능력을 앞세워 그대로 들이받았다.
“커헉!”
“참격!”
볼링 핀처럼 튕겨 나가는 놈의 육신 위로 거대한 배틀 액스가 떨어져 내렸다.
“바보…… 같은…….”
어째서 처음부터 마스터 스킬을 쓰지 않았을까. 상대는 강화된 능력 자체가 마스터 스킬인 것을.
자신의 실수를 탓할 새도 없이 허리께가 화끈해지며 허전한 느낌과 함께 몸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대량의 혈액이었다. 어쩌면 영혼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크록취의 대형 배틀 액스가 그의 허리를 가르고 피 분수를 쏟아 내었다.
“광살.”
하지만 크록취는 멈추지 않았다. 필살기인 광살을 펼치며 확실하게 놈의 숨을 끊어 놓았다.
한순간의 방심이 불러온 비극.
“안 돼!”
“제길, 이거나 먹어라!”
모두가 비명으로 화답했지만 몇몇은 그 틈을 노렸다.
강력한 스킬 후에 오는 반동을 생각하며 이 미친 오크 광전사의 숨을 끊기 위해 목을 베어 갔다.
“크왕!”
그때, 펜릴이 그들을 역으로 덮쳤다.
오크의 탈것인 늑대는 인간의 말과 다르다. 그 자체로 전투 요원이라 할 만큼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했다.
하물며 전설급의 존재로 진화를 한 지금은 어지간한 마스터 레벨을 찜 쪄 먹을 만큼 강력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크록취의 앞을 막아서며 사나운 발톱을 휘두르고, 종유석 같은 이빨로 물어뜯었다.
기껏해야 인간의 절반을 조금 넘는 사이즈의 드워프와 그보다 작은 노움 종족은 거대화된 펜릴의 점심거리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와그작와그작.
그 작고 둥그런 몸이 펜릴의 입안에서 사탕처럼 굴러가고, 꼬치처럼 발톱에 꿰이며 목표를 잃었다.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해 펜릴을 향해 발버둥을 쳐야만 했다.
“크허허헝!”
“아우우우우우!”
크록취와 펜릴이 함께 울부짖으며 적들을 공포에 빠뜨렸다.
다른 하이 마스터와 마스터들이 수비적으로 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스터급의 능력치마저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저 전율스러운 함성 스킬은 마치 유일은 SSS급의 랭커, 로칸을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제, 제길!”
“엄청난 녀석이 나타났군.”
“누구 로칸이랑 연락되는 사람 없어 저건 평범한 마스터 레벨로는 못 막아!”
압도적인 폭력은 강자들의 전의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지옥 같은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광전사 계열의 유저들에게는 일명 ‘유통기한’이라 불리는 시간이 있으니까.
물론 후유증 페널티를 받고도 무시무시한 로칸에게 적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이긴 했지만 크록취는 로칸이 아니었다.
후유증 상태에만 빠지게 만든다면, 어떻게든 해치우거나 도망치게 만들 수 있을 거란 믿음 하나로 필사의 저항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군.’
전생은 사기 싸움이다. 그것은 이처럼 일 대 다수의 전투에서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비현실적인 무력, 압도적인 강함 앞에서는 ‘집단의 광기’ 따위가 발휘되지 않았다.
어쩌면 군단 효과를 삭제하고, 공포 면역마저 해제시키는 타이틀 효과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또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었다.
그저 힘만 강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이라 할 만큼 거칠면서도 깔끔한 크록취의 컨트롤이 뒷받침되었기에 단신으로 수만의 병력을 몰아세울 수 있었다.
“쳇. 어쩔 수 없군.”
그렇게 20여 분 동안 적들을 도륙하던 크록취가 돌연 몸을 돌려 다시 니힐만성을 향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놈이 도망친다!”
“쪼, 쫓아라!”
하지만 소리만 지를 뿐, 적들은 그를 쫓을 수 없었다. 그가 마음을 돌려 다시 돌아서는 순간, 죽음을 맞이할 것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때문에 말로만 그를 쫓으며 오히려 성벽으로부터 물러났다. 거리를 벌리고 숨을 골랐다.
끼이이익, 쿠웅.
로칸이 굳이 성벽을 올라타지 않아도 안에서 타이밍 좋게 성문을 내려 주었다.
확실한 빈틈이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는 적군들. 다시 성문이 올라가고 적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되자 비로소 안심했다.
[광풍 현신의 지속 시간이 종료하였습니다.]
[앞으로 1시간 동안 재현신이 불가능합니다.]
[광풍 현신의 후유증으로 모든 능력치가 20% 감소합니다.]
곧 광풍 현신의 후유증 페널티가 돌아왔다.
꽤 오랜만에 겪어 보는 후유증이었다.
“이걸 쓰긴 아깝지.”
시간 역행을 사용할 수도 있다. 광풍 현신의 쿨 타임을 다시 되돌리고 한 번 더 날뛸 기회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티가 많이 났다.
크록취로 활동하는 이유가 단순히 검은용군단의 편에 서서 황금사자 진영을 도륙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로칸이라는 것을 아직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크록취는 광풍 현신의 후유증을 기꺼이 감수했다. 1시간이라면, 어떻게든 버텨 낼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까.
특히 저렇게 겁을 잔뜩 집어먹은 상대를 대상으로는 말이다.
“지금이 기회다! 뚫어!”
“놈의 버서크 후유증이 풀리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한다! 서둘러!”
한 차례 후퇴하며 시간을 버리긴 했지만 적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시간을 주면 자신들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억지로 사기를 북돋았다.
크록취라는 악마가 다시 나타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병사들을 쥐어짜 니힐만성의 공략을 시작했다.
“모두 쏟아부어! 무조건 성벽을 넘는다!”
하지만 거기서도 놈들의 실책이 드러났다.
후유증 상태에서도 다시 당당하게 성벽 위로 모습을 드러낸 크록취의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조합 스킬이며 마스터 스킬을 몽땅 쏟아부어 성문을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킬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마스터 스킬의 평균 쿨 타임은 10시간이 넘는다.
아예 24시간인 경우도 많았고, 파괴력에 올 인한 경우 그 이상인 경우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 것이 고작 NPC 병사들뿐인 외성벽을 무너뜨리는 데 쓰이고 있는 것이다.
“애들 쓰는군.”
그러니 로칸이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마스터 스킬이 없어도 마스터 레벨의 존재는 충분히 강력했지만, 유저들의 컨트롤이라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크의 주 전력은 외성이 아닌 내성 안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전군 후퇴! 내성으로 진입하라!”
거기에 NPC 병사들까지 더해졌다. 크지 않은 내성에 순대 속처럼 꽉꽉 병력이 들어찼다.
크록취는 아예 시체의 산을 쌓아서라도 버텨 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키탄로성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결사 항전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꾸역꾸역 버티고 버텨서 간신히 제한 시간까지 놈들을 막아 낸 것이다.
‘어떻게든 됐군.’
원래는 버티기 어려웠다. 어쨌든 물량의 차이가 있었고, 적에게는 마스터와 하이 마스터라는 한층 강화된 전력이 있으니까.
그러나 적의 마스터나 하이 마스터가 움직이려 하면 크록취가 나서서 모습을 보인 것이 큰 역할을 했다.
크록취를 발견할 때마다 놈들이 움찔하며 다시 뒤로 숨은 탓에 몇 번이나 뚫려야 할 상황에서 버틸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 거신으로 화한 크록취의 활약이 컸다.
펜릴을 타고 밀어붙이자 통로 가득 밀려들었던 병력이 일제히 갈려 나간 것이다.
그렇게 공간을 확보한 오크들은 빠르게 빈자리를 메웠고, 재차 진입을 시도해야 할 드워프와 노움들은 날뛰는 크록취에 발목이 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키탄로성이 먼저 무너지며 결사 항전 퀘스트가 완료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크록취 : 각자 알아서 튀어라!
부대 메시지를 통해 마지막 전언을 남기고, 크록취가 가장 먼저 전장을 이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