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고대 도시 (1)
키탄로성의 탈환!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단지 거점 수복만이 아니었다.
적 주력의 분산.
그리고 각개격파.
전멸까지 가기에는 상호 간의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인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드워프, 노움 연합군이 후퇴를 결정했지만 그렇다 해도 전체 병력의 20% 이상이 이미 갈려 나간 상태였다.
“예상대로군.”
거기다 한 가지 더. 드워프, 노움 연합군은 니힐만성까지 버렸다. 반파도 아닌 ‘완파’ 상태인 그곳에서 수성을 시도했다가는 더 큰 피해를 입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크들도 마찬가지인지 굳이 니힐만성까지의 진출은 포기했고, 그렇게 니힐만성은 무풍지대로 묘한 정적에 휩싸였다.
“지금이라면…….”
그 덕에 크록취도 여유를 찾았다. 종족 퀘스트를 향한 노움들의 집념이 무섭기는 했지만 아직 그들도 고대 도시의 위치를 특정하지는 못한 상태일 테니 괜찮을 것도 같았다.
더구나 니힐만성을 포함해 키탄로, 힐로스성까지 넘어야 하는 상황.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긴 크록취가 전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크록취의 잠적을 아직 모르는 오크 유저들은 영웅 크록취의 이름을 높이 찬양했다.
크앙이 만든 유저 등급표에 즉시 그의 이름을 높이 올렸고, 그의 전투를 실제 목격한 이들은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SS급(추정 불가, 추정 불가) : 크록취
표시되는 것은 전투력 등급, 레벨 랭킹, 레벨의 순이었다.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는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났기 때문에 레벨은 추정할 수 없고 랭킹도 매길 수 없지만, 전투력 평가는 유저들 중 최상급인 SS급으로 평가를 받았다.
마스터 레벨의 유저라고 모두 SS급으로 평가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때 대단히 높은 평가였다.
그가 허구의 인물인지도 모르고.
“제길, 누가 내 욕을 하나 ”
그리고 그 시각, 파란의 장본인은 귀를 후비며 오크들의 땅을 누비는 중이었다.
“중국에서 왕서방 찾기도 아니고 원…….”
힐로스 영지의 후방에 위치한 ‘버려진 철과 모래의 땅’.
돌과 고철이 많아 개간을 하거나 건축을 하기에도 적합하지 않고 특별한 지반이 단단하지도 않아 쓰이지 않는 땅이었다.
원래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고대의 언제부터인가 사막화가 진행되어 바닥이 굵은 모래로 되어 있고 어떤 지점에서는 땅으로 푹 꺼지기도 해 사냥은커녕 이동조차 쉽지 않은 곳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몬스터마저 까다롭기 그지없다.
“귀찮게 구는군.”
사막 개미 시리즈는 단단한 외피와 모랫바닥에 송송 나 있는 구멍을 통해 이동하면서 까다롭게 구는 주제에 경험치며 아이템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스콜피온의 독과 갑옷 같은 외피는 더욱 무서웠다.
오브젝트인 척하고 있다가 수백 개의 가시를 날려 대는 선인장 괴물, 사보텐더도 지랄맞았고 그밖에 ‘사막’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몬스터들 중에는 ‘가뭄’ 효과를 지니고 있어 체내의 수분을 빼앗고 상태 이상을 일으키는 종류가 많아 ‘수통’ 아이템의 소비가 커지도록 만들었다.
퍼억!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수준에 한해서였다. 로칸에게는 사막화된 지형의 열기도 통하지 않았고, 스콜피온의 독도 백독불침의 효과로 무시할 수 있었다.
갑옷처럼 단단한 외피 진짜 갑옷도 종잇장처럼 찢고 뼈를 가르는 로칸이었다.
유저들에게도 외면당한 지역인 만큼 버려진 철과 모래의 땅에는 몬스터가 그득그득했지만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대형 배틀 액스에 묻은 몬스터의 체액을 털어 내는 로칸, 아니 크록취의 곁에는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쓰러진 잔해가 가득했다.
보통 이 정도면 자리를 옮기거나 할 테지만 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두두두두.
그리고 잠시 후, 바닥의 진동과 함께 무언가가 모랫바닥을 뚫고 나타났다.
“어때 ”
도리도리.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디그독이었다.
고대 도시를 찾기 위해 크록취가 준비한 두 가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디그독을 이용해 지하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참 동안이나 풀어 두고 땅속을 노닐게 했지만 발견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버려진 철과 모래의 땅은 결코 작은 필드가 아니었으니까.
단번에 찾는다는 것이 더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그렇기에 남은 한 가지 방법에 기대를 걸었다.
“노움족을 기다릴 수는 없으니 남은 건 역시 이것뿐인가.”
다른 방법도 있었다. 오히려 정석적인 방법은 따로 있었다.
노움 종족 퀘스트를 받은 노움 유저가 여러 힌트와 장치들을 가지고 이곳에 도착해 수색하고, 기관을 작동시키는 것이 정석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전생에도, 고대 도시가 발견된 것은 전혀 다른 방법을 통해서였다.
쿠구구구구구구.
발밑에서 거센 진동이 느껴졌다.
정찰을 나갔던 디그독이 다시 돌아온 것일까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큰 울림이었다.
“왔구나!”
그 순간, 로칸이 딛고 있던 모랫바닥이 먹혀 버렸다. 바닥에서 솟아난 거대한 입속으로.
[자이언트 샌드 웜][Lv 332]
사막 지형 최강의 몬스터라는 샌드 웜이 그를 집어삼켰다.
치이이익.
식도와 위장이 꿀렁이며 입안에 들어온 것들을 삼켰다.
크록취로 변한 로칸도 마찬가지다. 씹지도 않고 공간째로 삼켜진 탓에 그가 쌓아 올린 몬스터의 사체와 함께 나뒹굴었다.
[자이언트 샌드 웜의 위액에 노출되었습니다. 초당 30의 지속 대미지를 입습니다.]
[주의하세요! 생명력이 다하기 전에 탈출하지 않으면 사망할 수 있습니다.]
위액에 함께 버무려져 생명력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지금.’
어지럽게 뒹굴던 크록취가 어느 순간 몸을 고정시켰다. 쉼 없이 이동하는 자이언트 샌드 웜의 몸속에서 어렵게 중심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1차 목적은 성공.
이제 죽기 전에 자이언트 샌드 웜을 때려잡고 빠져나가는 일만 남았다.
크록취는 즉시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크록취가 쓰던 대형 배틀 액스는 아니었다. 봉인된 광풍의 사슬 배틀 액스. 폴리모프는 풀지 않았지만 로칸의 주 무기가 그의 손에 들렸다.
이 안에서 만큼은 적어도 누군가에게 들킬 일이 없는 것이다.
“폭격! 말살의 사슬! 휠 윈드!”
“크워어어어어어엉!”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스킬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자이언트 샌드 웜의 내부를 휘젓고 살점을 터트렸다.
그럴 때마다 자이언트 샌드 웜이 고통스레 몸부림을 쳤지만 그뿐이다. 몸속에 있는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이게 유일한 공략법이라니, 끔찍하지.’
외부의 타격에 엄청난 저항력을 발휘하고, 어지간한 마법 공격로 그냥 먹어 삼킨다는 샌드 웜은 전생에도 거의 무적의 존재였다.
샌드 웜을 잡는 것보다 차라리 나이 어린 드래곤을 잡는 게 더 편할지 모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나마 나중이 되어서 알려진 처치 방법도 단 두 가지뿐이었다. 어디인지도 모를 배 아래 쪽에 콩알만 한 크기로 존재하는 약점을 공격하거나, 입안으로 들어가 배를 찢고 나오거나.
저항력과 생명력이 무지막지한 놈의 특성을 생각할 때 어느 쪽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로칸은 후자를 택했다.
놈에게 깔려 죽기 전에 약점을 찾아 몇 번이고 거듭해서 공격하는 것은 어렵지만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속에서 난장을 피우는 것은 자신 있으니까.
“광풍 현신!”
자이언트 샌드 웜의 속살을 한참이나 두들기던 크록취는 타이밍을 쟀다.
생명력이 바닥을 치려는 순간을 노려 아껴 두었던 광풍 현신을 발동시켰다. 처음부터 광풍 현신을 사용했다가 자칫 공격력이 부족할 때를 노린 것이다.
“전설을 타는 자!”
거기에 펜릴까지 추가로 소환했다. 공격력이라면 발군인 펜릴을 소환해 생명력이 다할 때까지 공격만을 지시한 것이다.
카이를 소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만약 거대화된 몸뚱이를 자이언트 샌드 웜의 질긴 가죽이 버텨 내 버린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로칸 쪽이었다. 압사당하거나, 상당한 시간을 낭비하게 될 테니까.
“광살!”
마스터 스킬까지 끌어 올린 크록취는 그야말로 전력을 다했다.
사실 광풍 현신까지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생명력의 하락 속도가 빨랐고, 생명력이 어마어마했다.
조금의 외부 타격 없이 시작한 것과, 같이 소화되는 중인 몬스터들의 사체가 놈의 생명력을 일부 회복시키는 까닭이었다.
때문에 더욱 힘을 낼 필요가 있었다.
모든 공격 스킬을 한 바퀴 돌려 사용하고 말사의 사슬과 휠 윈드로 지속 대미지를 넣는다. 그러다 다시 쿨 타임이 돌아오면 공격 스킬로 한 점을 집중 공략했다.
퍼엉!
그렇게 공격이 집중되자 자이언트 샌드 웜도 버틸 수 없었다.
두꺼운 속살이 모두 폭파되고 질긴 가죽에 구멍이 뚫렸다. 크록취의 탈출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위액으로 범벅이 된 온몸이 찝찝했지만 맑고 청량한 레벨 업 알림이 기분을 전환시켰다.
결사 항전 퀘스트로 1레벨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때 얻은 극대량의 경험치, 그리고 자이언트 샌드 웜을 잡아 획득한 경험치가 합쳐져 또 한 번의 레벨 업을 이루어 낸 것이다.
본래는 ‘레이드급’ 몬스터로 분류될 것을 혼자 잡았으니 보상이 큰 것도 당연했다.
“보물 고블린이 따로 없군.”
게다가 보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버려진 철과 모래의 땅 곳곳을 누비며 먹을 것, 못 먹을 것을 모두 삼킨 자이언트 샌드 웜의 배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아이템들이 쌓여 있었다.
어중간한 물건들은 모조리 위액에 녹아 버린 탓에 최소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들만 남았다.
[모래 폭풍의 심장][유니크]
사막의 심처에서 발견된 특수한 보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 강력한 화염의 기운을 품고 있다.
-화염 저항력 + 30%
-화염 속성 공격력 + 30%
-화염 마법 시전 속도 + 50%
-지능 + 100
-체력 + 100
[사막의 메마름][유니크]
메마른 사막의 힘을 담고 있는 단검. 상대에게 메마른 자의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 준다.
-공격력 : 1,300
-내구력 : 800 / 800
-화염 저항력 + 25%
-화염 속성 추가 공격력 + 15%
-적중 시 일정 확률로 [메마른 사막의 저주] 발동
-체력 + 90
사막 지형의 특성 때문인지 대부분 화염과 관련된 옵션이 딸려 있었고 개중에는 유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을 법한 것들도 상당수 딸려 있었다.
그런 것이 무려 수십 개나 한꺼번에 인벤토리로 들어왔다. 샌드 웜이 괜히 움직이는 보물 창고, 혹은 보물 상자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크록취는 다른 아이템들보다 잡템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더욱 주목했다.
[알 수 없는 고대의 기계 장치 부품][레어]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 장치 부품. 음각으로 새겨진 고대의 문양이 특이하다.
“빙고.”
씨익 로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즉시 폴리모프를 해제했다. 이것을 발견한 이상 더 이상 오크의 모습으로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디그독!”
로칸은 즉시 디그독을 소환하고 샌드 웜이 만들어 놓은 땅굴을 거슬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처음부터 찾게 될 줄은 몰랐지만 ‘고대 도시’에서 삼킨 것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먹어 치운 샌드 웜을 만났으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놈이 굴을 파며 지나온 길을 되짚어 가면 어딘가에 고대 도시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
자이언트 샌드 웜이 지나온 거대 땅굴을 역으로 되짚어가며 로칸과 디그독이 지하로, 지하로 내려갔다.
마침내, 기대하던 고대 도시를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