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죽음의 홀 (2)
데스 나이트.
한을 품고 죽은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오른 기사를 사령술을 이용해 되살려 낸 전율스러운 존재.
죽음의 기사라는 이름답게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죽음의 기운이 서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 있는 그들이 죽음의 홀 한편에 잔뜩 몰려 있었다.
“뼈 부수기!”
후우웅. 빠각!
로칸의 거친 스윙에 또 하나의 두개골이 박살 났다.
미백이라도 한 것처럼 하얀 두개골에 죽음 같은 검은 금이 그어지고 곧 휑한 빈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에서 일렁거리며 법칙을 거스르도록 힘을 부여하던 귀화가 퍽 하고 꺼져 버렸다.
어설프게 들어 보였던 오라 실린 장검은 이미 반 토막이 나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후두두둑.
또 한 구의 뼈다귀 더미가 필드 한편에 쌓였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자의 공포, 죽음의 기사 데스 나이트라도 로칸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미 여러 타이틀 효과를 받으면서 강화될 대로 강화된 로칸은 하이 마스터가 아닌 이상 광풍 현신을 쓰지 않아도 어지간한 마스터급은 압도할 수 있을 만큼 능력치가 오른 상태였고, 죽음의 홀 깊숙한 곳에 들어가서야 만날 수 있는 하이 마스터급의 데스 나이트가 아닌 이상 곤란을 겪을 일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상대는 아이템 드롭률은 낮아도 경험치는 넉넉히 주는 언데드가 아니던가
작성하고 속도를 내자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휘유, 잘 오르는…….”
퍼엉!
그 순간 로칸의 시야 밖에서 일어난 마나의 기운이 코앞에서 폭발했다.
버스트 플레어!
강력한 화염 폭발 주문이 로칸의 눈을 멀게 했다.
“아오, 이 새끼가!”
그러나 로칸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타이틀 효과로 속성 저항력이 높던 로칸인데 광풍의 날개가 저항력을 더욱 높여 놓은 것이다.
“비행 모드!”
그뿐이 아니다. 망토에서 핏빛 날개로 순식간에 탈바꿈한 광풍의 날개는 로칸에게 가공할 추진력을 부여했다.
장거리 비행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순간 가속이라면 어떤 탈것보다도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것이 날개였다.
로칸은 핏빛 날개를 활짝 펴고 마법의 주인인 스펙터를 향해 초고속 저공비행을 실시했다.
“광살!”
마스터 레벨에게도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버스트 플레어였지만 로칸에게는 후끈함과 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전부였다.
그것에 분노한 로칸은 마침 쿨 타임이 돌아온 광살을 펼쳐 허깨비 같은 놈의 몸을 수십 조각으로 쪼개 놓았다.
푸쉭!
원 샷 원 킬.
스킬 한 방에 마법을 발현했던 스펙터의 영체로 된 몸이 소멸해 버렸다.
하위 호환인 레이쓰라면 모를까, 스펙터는 제법 강력한 물리 저항력까지 갖추었지만 로칸의 공격력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짭짤하군.”
사실 로칸의 레벨 업을 도운 일등 공신이 바로 이 스펙터였다.
속성 저항력 덕분에 대미지를 급감한 데다 주문 계열이라 생명력은 적은 스펙터였으니 피해는 적고 빠른 사냥이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주문 계열인 스펙터는 값이 나가는 마법 스킬이 내장된 장비를 드롭하기 때문에 한몫 챙기기에도 좋았다.
“방금 무슨 폭발 소리 나지 않았어 혹시 먼저 온 사람이 있는 건가 ”
“그럴 리가. 이 미친 난이도의 사냥터에 누가 와 몬스터끼리 영역 다툼이라도 하는 거겠지. 아니면 어떤 놈이 자살하러 왔거나!”
“젠장. 이런 곳으로 보내다니 퀘스트 난이도 한번 극악하군.”
“쉿! 큰 소리 내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조용히 움직여!”
그렇게 사냥을 계속하던 로칸의 귀에 무언가가 들려왔다. 이곳에서 들리면 안 될 것만 같은 유저들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중에서도 언데드 유저인지 해골 부딪히는 딱딱한 소리가 들리자 로칸은 즉시 반지를 바꿔 끼고 은신을 사용했다.
그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머물며 자신의 사냥을 방해할 것인지를 체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 봐라 ’
잠자코 그들을 관찰하기 좋은 곳으로 자리를 옮긴 로칸은 곧 그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으로 바라보자 300~305레벨 수준의 마스터 레벨 유저 다섯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죽음의 홀 안쪽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들의 레벨뿐 아니라 장비까지도.
갖추고 있는 장비들은 역시 하나같이 유니크급. 가장 떨어지는 자의 장비가 레어 몇 개가 섞인 수준일 만큼 장비도 화려했다.
“젠장, 위장막이 아니었으면 꼼짝 없이 죽었겠군.”
“이것도 만능은 아니니까 입 다물어. 걸리면 난리 난다.”
그중에서도 특히 로칸의 이목을 끈 것은 그들이 투명 망토처럼 뒤집어 쓴 ‘위장막’이라는 아이템이었다.
투명 망토나 은신처럼 완벽히 모습을 감추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언데드처럼 마나를 감지하거나 생체 에너지를 감지하여 적의를 드러내는 놈들에게는 ‘무생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해 주는 특수 아이템이다.
물론 인식이 그러할 뿐이라 유저들의 눈에는 새색시처럼 천을 뒤집어쓴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꼴랑 이 수준으로 여길 온다고 ’
그러나 위장막을 제외하면 냉정히 말해 이곳에 비빌 수준은 아니었다.
위장막의 기능에 의지하여 어찌어찌 몬스터들의 어그로는 끌지 않고 있지만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저 상태로는 더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기척으로도 적을 파악할 수 있는 하이 마스터급 언데드의 눈을 속이지 못해 싸움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물론 전투가 벌어지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이겠지.
그것을 본인들 역시도 알고 있는지 하나하나 몬스터를 피해 갈 때마다 있지도 않은 식은땀을 닦는 시늉을 했지만, 로칸은 그들을 습격하지 않았다.
승부할 자신이 없어서
그럴 리가. 스킬을 쓰지 않는다 해도 어떻게든 잡아 낼 자신이 있었고 광풍 현신까지 갈 것도 없이 버서크만 써도 필승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즉시 들이닥치지 않은 것은 그들의 대화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지막 퀘스트니까 참아.”
“그래, 이것만 클리어하면…….
“우리 언데드가 다 잡아먹는 거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퀘스트 언데드가 다 잡아먹는다
로칸은 그 잡담 속에서 불안함을 느꼈다. 그들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떤 퀘스트여야 할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언데드 종족 퀘스트!’
판도를 뒤집을 만한 것은 그 하나밖에 없었다.
‘언데드 종족 퀘스트가 뭐였더라 ’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 로칸은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일단 황금사자 진영의 경우 인간은 고대 황제의 부활, 노움은 고대 도시의 재건, 하프엘프는 세계수의 탄생, 드워프는 고대 병기의 제작이다.
그럼 검은용군단은
‘고블린은 고블린 대사제의 강림이고, 오크와 트롤은 특별한 아이템을 제작해서 각각의 수장을 그랜드 마스터로 이끄는 것, 그리고 언데드는…… 그래, 데스 로드의 부활이었지.’
한참이나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새긴 로칸은 마침내 떠올려 냈다. 언데드의 종족 퀘스트를.
그것은 바로 데스 로드의 부활이었다.
죽음의 지배자 데스 로드.
얼핏 리치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는 어설픈 리치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함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려졌다.
경지는 그랜드 마스터급이지만 주문 계열의 약점도 통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덕분에 전생에서는 놈의 부활이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심지어 지금과 같은 전생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이걸 잊다니, 나도 바보로군.’
황금사자 진영의 유저들이 몽땅 달려들고도 그 피해가 막심했으니 유저들이 덜 여문 지금 나타난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을 터였다.
로칸은 다른 퀘스트를 수행하는 중이라 놈과 직접 부딪쳐 본 적은 없었지만 놈이 만든 참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볍게 몸이 떨려 왔다.
‘한데 이게 벌써 완성된다고 언데드들도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야.’
요즘 언데드들의 공세가 주춤하다더니 아무래도 종족 퀘스트에 매진하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가만, 이거 잘하면…….’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던 로칸의 머릿속에서 아주 재미난 상상이 떠올랐다.
적대 진영의 종족 퀘스트라고 꼭 원천봉쇄를 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결국 몬스터나 그에 준하는 존재를 사냥하고 레벨을 올려야 하는 입장에서 죽지만 않는다면 사냥감이 많아지는 것은 반겨 마땅한 일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폴리모프.”
로칸의 눈이 음흉해졌다.
그리고 즉시 폴리모프를 시전했다. 언데드 전사의 모습으로.
물론 그들과 합류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대신 은신을 유지한 채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로칸이 나서는 것은 아주 결정적인 순간일 터였다.
그들이 전멸하거나, 무언가를 얻으려 할 때 말이다.
“후우, 이제 중앙으로 진입한다. 잡담 금지. 한 발자국 내딛는 것도 조심해!”
그렇게 잔뜩 긴장한 탓에 로칸이 뒤따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놈들은 조심조심 죽음의 홀 안쪽으로 진입했다.
목표는 뻔하다. 죽음의 홀 중심에 있는 죽음의 신전.
그곳에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아마도 죽음의 홀.’
죽음의 기운이 응축되어 있다는 지팡이 아이템. 그것에 대한 소문은 로칸도 들어 보았기에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조심스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스스스슷.
특수한 부츠 아이템이라도 신은 것일까 말소리까지 죽인 그들은 유령처럼 움직였다.
발소리도, 기척도 내지 않는 통에 주의해서 보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로칸도 추격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은신은 유지하는 통에 이동속도는 저하되었지만 기본 속도가 있으니 놓치지 않을 정도로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 역시 다른 몬스터에게 발각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너무나 조심스럽게 움직였으니까.
레벨이 높아 어지간한 위치까지 접근하지 않는 한 발각될 위험이 적은 로칸으로서는 몬스터의 위치와 동선만 미리 파악해 두면 거칠 것이 없었다.
적어도 죽음의 홀까지는.
[죽음의 신전에 진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원래대로라면 최초 방문자 보너스를 받아야 했지만 놈들이 앞장을 선 까닭에 그것은 포기해야 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사냥을 하는 것은 로칸으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니 크게 아쉽지도 않다.
안전지대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이동을 시작한 녀석들을 따라 그 중심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데스 나이트 한리발][Lv 353]
[아크 리치 도란트][Lv 354]
죽음의 신전 내부에서 순찰을 돌 듯 이동하는 몬스터들은 그 면면이 화려했다. 가장 약한 몬스터도 340레벨대였고, 350레벨 이상의 하이 마스터급도 심심치 않게 모습을 보였다.
그것을 놈들도 확인했는지 침을 꼴깍 꼴깍 삼키는 듯했지만, 아쉽게도 벽에 바짝 붙어 이동한 까닭에 전투가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지도가 있나 보군.’
사실 이쯤 되면 아무리 마스터급 유저라도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정상이지만, 놈들은 느려도 확실한 루트를 발견해 냈다.
아무래도 미리 정보를 가지고 이동을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것이 과연 죽음의 신전 끝에 다다를 수 있을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꽤나 신중하고 확실하게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오, 이러다 성공하겠는데 ’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신전 끝자락까지 닿을 수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음침한 왕좌와 그 위에 놓인 ‘죽음의 홀’을 목격할 수 있었다.
당연히, 로칸은 그들이 목적을 이루는 꼴을 볼 생각이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