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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화.폭주 (2) (239/500)

 # 239

폭주 (2)

크워어어어어어어!

괴수 같은 함성을 내지른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세계수였다. 한참이나 살육을 저지르던 놈이, 어느 순간 괴로워하더니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

“피해!”

“세계수가 미쳤다!”

세계수는 돌연 고블린뿐 아니라 하프엘프들까지 공격하기 시작했다.

단지 공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눈이 돌아 버린 세계수는 그들의 생명력을 마지막 한 줌까지 흡수해 미이라로 만들어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

덕분에 전장은 아비규환으로 변해 버렸다.

하프엘프들과 고블린 모두가 당황하며 달아나려 했지만, 세계수는 놓치지 않았다.

적어도 수천, 수만 갈래로 뻗어진 뿌리를 이용해 놈들의 생명력을 양분처럼 쪽쪽 빨아먹었다.

초혼 강림의 술에 당해 강제로 격이 상승한 놈들도, 애초부터 마스터 레벨이었던 놈들도 꼼짝하지 못하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미이라가 되어 사망해 버렸다.

“흐, 흐낏!”

이쯤 되자 고블린 대사제도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였지만, 무언가를 결심한 듯 주술의 힘을 끌어모았다. 선조들의 영혼에게서 힘을 빌려 강력한 주술을 완성하였다.

“영원한 혼란에 빠져랏! 영겁혼란의 술!”

파츠츠츠츠츳!

어차피 세계수를 맞상대할 수는 없다.

고블린 대사제도 그 사실을 인지했다. 지금의 상태에서 세계수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때문에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

미친 세계수를 더욱 미치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고블린이 아닌 하프엘프와 황금사자 진영을 공격하도록 만드는 것!

갑자기 눈이 돌아가면서 정신 방어가 약해진 세계수는 그대로 놈의 술법에 적중당했고, 저항하지 못했다.

더욱 거친 모습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모두 후퇴하라!”

그 모습을 확인한 고블린 대사제는 전군 후퇴를 명했다.

더 이상 싸워 줄 이유도, 능력도 없으니 최대한 전력을 보전한 뒤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당장 자신의 힘으로는 세계수를 어찌할 수 없지만 예전 종족 전쟁에서처럼, 오크 로드나 트롤 로드의 힘을 더한다면 방법이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크워어엉!

미쳐 버린 세계수는 달아나는 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지만 고블린 대사제는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든 되는 대로 병력을 물리고 썰물처럼 전장을 이탈했다.

“허어…….”

이렇게 되자 난감해진 것은 하프엘프들과 전투를 지켜보던 이들이었다.

세계수가 갑자기 미쳐 버리다니.

영문을 알 수 없는 참상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건…….”

그나마 예측이라도 가능한 것은 로칸이 유일했다.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

그것으로 폭주하는 세계수를 살핀 로칸은 놈에게서 이상한 것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풋사과처럼 생긴 세계수의 덜 익은 열매.

“아니, 열매가 아니야.”

로칸은 그것이 인위적으로 생성된 오브젝트라는 것을 파악했다.

세계수의 열매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묘하게 달랐고, 세계수가 폭주하며 쌓아올린 죽음이 그리로 흡수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확히는 폭주하기 전부터 일어난 죽음이 모조리 쌓이고 있었다.

“타락의 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로칸은 직감했다. 저것은 타락의 힘 그 자체라는 것을.

죽음을 집어삼키며 맺히고 성장한 저 열매를 통해 세계수에 타락의 힘이 공급되고 있는 것이다.

진하게 번들거리는 저 요사스러운 녹빛만 봐도 증거는 충분했다.

“결국 이렇게 됐군.”

재생의 비서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 힘을 이용해 누군가 장치를 만든 것이다.

타락 결탁자들.

‘아니, 아니지.’

타락 사제들.

아마 그들일 가능성이 무척이나 컸다.

“일단은 물러나야겠군.”

학살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표현을 붙이기 어려운 전장의 상황을 지켜보던 로칸이 깔끔하게 포기했다.

고블린 대사제와 마찬가지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러기 싫었다.

‘누구 좋으라고 ’

아직은 이 상황을 좀 더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로칸이 마저 레벨 업을 하기 위해 사라진 이후에도 세계수의 폭주는 계속되었다.

다른 종족들처럼 세계수를 방치, 또는 차마 공격할 수 없던 하프엘프들은 세계수를 진정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실패했다.

“무슨 공모전 같군.”

심지어는 고대 황제 때 그랬던 것처럼, 정화의 보주와 비슷한 것을 만들기 위해, 혹은 무슨 방법이든 동원해 세계수를 막기 위해 하프엘프와 타 종족을 대상으로 거대한 퀘스트까지 열었다.

[세계수의 정화][퀘스트]

사이한 기운에 잠식당해 폭주하는 세계수를 정화하라!

-성공 조건 : 세계수의 정화

-성공 보상 : 엘프의 보물

하프엘프도 아닌 엘프의 보물!

누구나 혹할 수밖에 없는 그 보상에 로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 여기서 하프엘프의 보물 같은 것을 걸었다면 살짝 실망할 뻔했다.

‘그랬다면 덜 얻어터진 거지.’

그러는 사이에도 세계수는 필드 보스처럼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인지 하프엘프들의 문제 인식은 훌륭했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세계수의 파괴 행위 영향권에 들어있는 모든 종족들이 저마다의 퀘스트를 뿌렸다.

그들의 퀘스트 내용은 좀 더 과격해서, 정화뿐 아니라 세계수를 파괴하는 것까지 허용하고 있지만 단 하나의 퀘스트로 각 종족에서 뜯어낼 수 있는 것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군.”

로칸이 기다린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는 것도 좋지만, 이쪽도 뭔가 남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무보수 명예직인 용사 따위는 사양이었다.

“그것만 따면 되겠지 ”

로칸의 목표는 명확했다.

일명 ‘타락의 열매’를 잘라 내는 것, 그리하여 세계수의 정신을 엉망으로 만든 힘을 떨어뜨려놓는 것.

그것까지만 해도 나머지는 충분히 세계수가 극복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세계수이니까.

이 밖에도 세계수의 정신을 강화하거나 타락의 힘을 정화하는 등의 방법도 찾아보면 존재할 수 있지만, 로칸은 굳이 쉬운 길을 어렵게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아예 길을 정해 주는 퀘스트라면 모를까, 답인지 아닌지도 모를 일을 위해 빙 돌아가는 것은 성미에 영 맞지 않았다.

“카이!”

각 종족의 영지를 돌며 세계수와 관련된 퀘스트들을 모조리 수집한 로칸은 즉시 카이를 타고 날아올랐다.

세계수의 위치는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다.

놈에게 접근해 타락의 열매를 잘라 내기만 하면 끝나는 일.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최대한 신중을 기했다.

타락의 열매에 접근하려면 세계수의 가지에 근접해야 하니까.

“전설을 타는 자, 광풍 현신.”

때문에 이번에도 앤트맨 작전을 실행했다.

한 번의 날갯짓으로 수백 미터 이상 쭉쭉 나아갈 수 있는 대붕 모드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세계수에게 미연에 접근을 차단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속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최소화된 사이즈로 은밀하게 접근한다. 그렇게 해도 걸릴 위험성은 있지만 그때는 또 수가 있었다.

“전속력으로 가자.”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으로 먼 거리에서 먼저 세계수를 발견한 로칸은 미리 스킬들을 쏟아부었다. 지속 시간이 있으니 손해를 보는 셈이지만 상관없다.

일격. 단 일격에 모든 것을 끝장낼 생각이니까.

캬라라락!

그러나 세계수는 세계수였다.

이제 막 세계수로 각성해서 와전한 그랜드 마스터의 힘을 어느 정도까지 다룰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약 1백 미터 안으로 들어오자 수백 개의 가지가 뻗어 나왔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창날이 되어 로칸과 카이를 찔러 왔다.

“흥, 이 정도 컨트롤쯤이야.”

그러나 로칸은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피해 냈다. 작아진 만큼 피해 내기도 훨씬 수월해진 것이다.

거기에 로칸의 회피 컨트롤이 더해지니 세계수의 공격도 그리 위협적이지 않게 느껴졌다.

쐐애애액.

“……제길!”

하지만 세계수도 마냥 접근을 허용하지만은 않았다. 점으로 안 되면 면으로 공격했다.

수백 개의 가지를 하나씩 찔러 오는 대신, 꼬고 묶어서 거대한 철퇴처럼 로칸을 내리쳤다.

“급가속! 광기의 시간!”

로칸은 즉시 스킬을 발동해 이동속도를 더욱 높였다.

공격 범위를 벗어났지만, 후폭풍과 같은 풍압에 밀려 제어가 어려워졌다.

“카이!”

끼윳!

방향감각이 엉망이 된 로칸을 향해 다시 뻗어 오는 가지들.

타락의 열매와의 거리를 가늠한 로칸은 즉시 전략을 바꾸었다. 카이의 거대화를 진행했다.

쿠웅!

300레벨에 도달하며 더욱 강력해진 카이가 대붕의 모습으로 화하며 엘리멘탈 바리어를 펼치고 그대로 세계수를 들이받았다.

뀻!

그 과정에서 엘리멘탈의 힘을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상위 호환이라 할 수 있는 세계수가 바리어를 찢고 촉수처럼 가지를 몸에 박아 댔지만 카이는 특유의 생명력과 돌진력으로 공격을 무시했다.

“카이, 미안하다!”

엄청난 크기의 세계수 앞에 있으니 대붕으로 변한 카이도 작게 느껴질 지경이었지만, 오라를 일으킨 부리로 쪼아 대자 잠시 시선을 빼앗기엔 충분했다.

“날개 모드!”

로칸은 카이를 미끼로 던져 두고 스스로의 날개를 펼쳤다. 타락의 열매를 향해 빠르게 날았다.

“폭격!”

그사이 로칸에게도 가지가 뻗어 왔지만 폭발의 힘까지 머금은 손도끼를 능숙하게 뿌려 대자 접근이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에 로칸이 목표에 도달했다.

“미친!”

그러나 세계수도 보통이 아니었다.

로칸이 일격을 날리려는 순간, 타락의 열매가 맺힌 가지를 움직여 버린 것이다.

덕분에 로칸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방어가 약해졌다.

그 틈을 노리고 로칸을 고슴도치로 만들기 위해 수백 개의 가지가 뻗어 나왔다.

“분신 소환!”

하지만 로칸에게도 한 수는 있었다.

“휠 윈드!”

로칸의 날개까지 똑같이 복사해 나타난 분신과 함께 회전을 시작하자 다가오던 가지들이 부러지거나, 물러났다.

제아무리 급의 차이가 있다 해도 로칸의 공격력만큼은 이미 하이 마스터 수준 이상이었기에 가지 정도는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다.

“폭주 전차!”

발을 디딜 곳 하나 없는 허공이었지만 광풍의 날개 효과로 폭주 전차의 위력이 고스란히 발휘되었다.

폭발적인 속도와 함께 적용된 방어력 증가, 슈퍼 아머 효과가 급히 그를 막아서던 가지들을 튕겨 내고 타락의 열매 앞까지 로칸을 데려다 놓았다.

“광살!”

로칸의 모든 힘을 담은 필살의 난무가 세계수와 타락의 열매를 잇는 한 지점을 향해 쏟아졌다.

터엉 텅 텅 텅 텅.

“……!”

그 순간 로칸이 당황했다.

타락의 힘에 의해 보호되는 만큼 상당한 방어력을 자랑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광살이 먹히지 않을 줄이야.

치명타 대미지까지 증폭되어 들어가는 광살마저 안 먹힌다면 로칸의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미친.”

하지만 로칸은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예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입술을 꽉 깨물고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어 댔지만 여전히 타락의 열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우우웅!

가지로는 로칸과 카이를 공격하면서, 뿌리로는 또 다른 적들을 처치하며 생겨나는 ‘죽음’을 맛있다는 듯이 탐식하고 있을 뿐이다.

“파괴 불가인가.”

광풍 현신의 지속 시간이 끝날 때까지 두들기던 로칸은 어쩔 수 없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을 의미하는 바는 아니었다.

단지 방법이 틀렸을 뿐.

약이 잔뜩 올랐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자신의 패배를 선언했다.

“시간 역행.”

그 순간 로칸의 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타깃을 잃은 세계수의 가지들이 잠시 어리둥절 더듬거리다가, 다시 파괴 행위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칸은 그 모습을 먼 곳에서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게 아니라 이거지 좋아. 그렇다면 정공법으로 가 주마. 으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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