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1화.폭주 (4) (241/500)

 # 241

폭주 (4)

로칸의 수색과 추적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타락 사제들이 있는 곳을 찾아 없애고, 드롭템을 챙겼다. 그리고 파멸의 예언서 조각을 수집했다.

처음에는 단어뿐이었지만 그것이 몇 번 반복되자 단어가 아닌 문장들이 남는 경우가 생겼고, 로칸은 그것을 조합해 얼개를 짤 수 있었다.

“타락의 힘이 세상을 파멸시킬 것이다. 고대의 주문 아마겟돈으로 잊혀진 ○○을 부활시킨다. 이건가 ”

그 또한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략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기에는 충분했다. 게임 짬밥이 얼만데, 뻔하디뻔한 클리쉐가 아닌가

그리고 또 한 가지. 남은 단어를 조합해 어떤 장소를 유추 할 수 있었다.

“이곳이 엘프 쪽 타락 사제들의 거점, 그러니까 컨트롤 타워라 이거지 ”

타락 사제들을 족쳐 세계수에 타락의 힘을 불어 넣은 자들의 거점을 찾아낸 로칸은 다소 의외라는 눈빛을 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설마 하프엘프들의 ‘원로회’가 놈들의 본거지일 줄이야.

이곳에 있는 하프엘프 원로들 모두가 세계수의 타락에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랑이 굴임에는 틀림없었다.

“가자, 카이.”

하지만 로칸은 거침없었다.

하프엘프의 친구라는 칭호를 비롯해 몇 가지 평판과 호감도 관련 타이틀을 가진 로칸이지만 원로회의 문까지 여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몰래 들어가는 수밖에.

카이와 함께 작아진 로칸은 잽싸게 안으로 진입했다.

세계수에 온 정신이 팔린 하프엘프들은 로칸의 침입을 결코 눈치챌 수 없었다.

“저쪽.”

세계수를 본 딴 듯한 거대한 나무를 건물 삼아 만들어진 원로회의 내부는 전생을 통틀어서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업그레이드된 타락 나침반이 있었다. 그 이름 중 하나를 쫓자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이크!”

더구나, 하프엘프의 진영을 돌아다니는 데 있어서 극적으로 작아진 몸은 무척이나 유용했다.

원로회 건물 자체가 나무줄기가 얽혀져 만든 것처럼 생겼기에 미세한 틈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굳이 어렵게 빙빙 돌아가지 않고 틈을 찾아 직진만 해도 충분했다.

그렇게 최단 거리를 통해 원로회의 내부로 진입한 뒤 타락 나침반을 통해 더욱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을 때, 로칸은 의외의 상황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니 됩니다.”

“뭐가 안 된단 말이오 어서 내놓으시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됩니다. 이 교신기를 이용하면 오크와 트롤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두 명의 하프엘프 원로들이 무언가를 두고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랍쇼, 이것들 봐라 ’

그런데 그 대화 내용이 사뭇 놀라웠다.

“우리의 대업에 그런 것은 필요 없소. 세계수를 조종하다니, 결국 하프엘프들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욕심이 아니오 ”

“아닙니다. 저는 그저 완벽한 대업의 달성을 위해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들이 무언가로 세계수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계수가 제멋대로 폭주를 하는 와중에도 미묘하게 오크나 트롤의 거점 쪽을 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대뜸 방향을 돌려 황금사자 진영의 종족들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런 순간적인 제어 불가 현상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 조종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 또한 연기였을 수도 있겠지.

‘저걸로 조종하는 거군.’

로칸은 그 교신기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들의 대화가 워낙 직접적이기도 했지만 그 형상이 눈에 익은 까닭이었다.

타락의 열매.

놈이 들고 있는 교신기는 폭주하는 세계수에 달린 것과 똑 닮아 있었다.

‘근데 저놈은 뭐지 ’

목표를 찾았으니 당장 달려들어 뺏어 내야 할 텐데, 상황이 미묘했다.

교신기를 들고 있는 자와 말다툼을 벌이는 저 자는 아군이라고 봐야 할까 하지만 놈이 타락의 힘을 다루는 걸 모르지 않는데

“틀렸어.”

푸욱!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교신기를 조작하던 이를 꾸짖던 하프엘프 원로가 대뜸 칼을 휘둘러 놈을 찌른 것이다.

“커억……. 어째……서…….”

푸훅, 푹 푹 푹 푹.

거기서 끝이 아니다.

교신기를 들고 있던 녀석의 생명력이 바닥을 칠 때까지, 몇 번이나 칼을 찔러 넣고 마법과 타락의 힘을 발휘해 회복을 방해했다.

회복하거나 도망갈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숨을 끊어 버렸다.

“파멸 앞에서는 그 무엇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건 하프엘프들 역시 마찬가지.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 뒤, 새로운 세계가 시작될 것이다.”

광기에 찌든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교신기를 집어 들었다.

“폭주 전차, 급가속!”

“……!”

바로 그때, 로칸이 달려들었다. 좁쌀만 하게 변했던 몸을 회복하며 돌진의 힘을 강화했다. 놈의 몸을 그대로 받아 버렸다.

“뼈 부수기!”

거기서 끝이 아니다. 로칸은 즉시 교신기를 집어든 놈의 오른팔을 노렸다. 뼈까지 부수고 잘라 낼 듯, 강력한 일격을 내리쳤다.

“크윽, 타락화!”

쩌엉!

그러나 실패했다. 방어구 관통 효과까지 가진 뼈 부수기가 통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놈의 피부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타락화.

타락의 힘에 몸이 잠식되는 대신 막대한 힘을 얻는 능력.

다만 한번 발동시킨 힘은 다시 되돌리지 못하고 사용자는 결국 타락의 힘에 잡아먹히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놈은 기꺼이 제 자신을 내던졌다.

잠시간의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어서라도 꼭 해야 하는 대의를 이루기 위해.

“제기랄, 광살!”

퍼버버버버벅!

그러나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놈이 로칸의 손아귀를 완전히 벗어난 것 또한 아니다.

놈을 깔아뭉갠 로칸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배틀 액스를 휘둘러 댔고, 내부를 울리는 타격에 놈은 죽은 피를 마구 토해 냈다.

“인간의 공장, 마스터 버서커 로칸……이었던가 ”

그러나 웃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교신기를 놓지 않은 채로 하얀 이를 드러냈다.

원로쯤 된다면 인간의 대귀족을 아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로칸은 그 웃음이 마냥 찝찝했다.

“알거 없어, 새끼야!”

배틀 액스를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남은 스킬들을 몽땅 쏟아부었다.

“흐흐흐, 소용없다. 네놈의 버서크처럼 나 역시 불사의 상태이니까.”

“그래 그럼 목을 따 주면 되겠네.”

퍼억!

소용 없었다. 피분수를 뿜어 대는 것이 타격이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목이 잘려 나가는 일은 없었다. 마치 파괴 불가 효과가 걸리기라도 한 듯싶었다.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히죽 웃는 놈의 면상에 로칸이 다시 한 번 공격을 꽂아 넣었지만 생각처럼 입을 닥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어떻게 여기를 찾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마디만 하지.”

“…… ”

“넌 실패했다.”

퍼석!

그 순간, 놈이 쥐고 있던 교신기가 파괴되었다.

타락의 힘을 지닌 존재만 파괴할 수 있던 것일까 허망하게 박살이 난 그것을 보고도 로칸은 화를 낼 수 없었다.

화낼 대상이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타락화 자체가 교신기, 혹은 타락의 열매라 부르던 그것과 연동된 힘인지 그 자신도 함께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가며 파멸을 부르짖은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내 알 바 아니지.”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광신도들의 사상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파괴된 타락 교신기][????]

파괴되어 힘을 잃어버린 타락 교신기. 타락의 힘을 매개로 어떤 의지를 전달하던 교신기이자 죽음의 기운을 흡수해 머금음으로서 반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한 타락 충전기의 역할을 한다.

지금은 파괴되어 기능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이 교신기를 이용해 조종하던 어떤 것을 영영 컨트롤할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치겠군.”

교신기의 잔해를 아무리 살펴도, 이건 세계수와 연결된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정녕 세계수를 쓰러뜨리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고민하는 사이, 소란을 알아챈 하프엘프들이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들어가도 되겠습니다 ”

둘의 엄명이 있었던지 함부로 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경비대로서의 소임을 당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여차하면 강제로 밀고 들어올 생각까지 하는 듯싶었다.

“일단 피해야…….”

츠즈즈즛.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죽은 두 하프엘프 원로들의 시체가 스르륵 녹아내려 사라진 것이다.

몬스터들의 경우 필드와 던전 정리를 위해 죽은 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시체가 사라지곤 하지만 NPC들의 경우 조금 다른 루트를 거치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녹아 흘러내리더니 땅속으로 스며들어 버린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로칸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확신할 수 없어도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란 늘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폭격!”

그 즉시, 바닥을 부수었다.

나무 그 자체인 바닥이 파괴되고 건물 전체가 흔들렸지만 뚫려진 바닥으로 뛰어내려 흔적을 찾았다.

“이건 ”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아래층일거라 생각했던 바닥에는 비밀 공간이 존재했고, 그 안에는 한 구의 시신이 눕혀져 있었다.

“고대 황제 ”

정화의 보주를 이용해 해치운 뒤, 멍청한 하이 마스터들이 방심하는 바람에 잃어버렸던 시신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돌겠군.”

타락한 세계수도 모자라 타락한 고대 황제까지 상대해야 하다니 어느 한쪽만이라면 모를까, 둘은 로칸도 자신이 없었다.

‘아직은 괜찮을지도.’

그래서일까, 은근한 희망을 품었다. 타락한 황제가 아직 눈을 뜨지 않은 것은 부활 의식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일 수 있다고.

하기야, 타락의 힘과 상극인 정화의 보주에 노출되었으니 시신이라 해도 그 기운이 남아 있지 않겠나 타락의 힘을 쑤셔 넣어 부활시키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끝장……!”

우우우웅.

그리고 그때, 놈의 몸에 사라졌던 두 원로 하프엘프들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기운들이 스며들었다.

부족했던 타락의 기운을 미력하게나마 불어 넣고, 고대 황제의 방어기제를 작동시켰다.

[타락한 고대 황제가 적의를 감지합니다.]

“젠장,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타락한 고대 황제가 임의로 잠에서 깨어납니다.]

“오직 파멸만이 있으리라.”

‘눈이 갔군.’

강시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는 고대 황제의 모습에 로칸이 혀를 찼다. 눈빛이 완전히 맛이 갔다.

인간들이 부활시켰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의 이성이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타락의 힘에 뇌가 절여진 게 분명해 보였다.

오직 파괴와 파멸만을 아는 힘센 바보. 그것이 현재 놈의 상태였다.

“그래도 그랜드 마스터도 아닌 놈에게는 질 수 없지.”

그런 놈을 향해 로칸이 먼저 짓쳐 들었다.

아직 미완성되었기 때문인지 놈의 수준은 아직 하이 마스터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질 리 없다.

“분신 소환, 노움 5형제, 카이!”

뀻!

광풍 현신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 끝장을 보기 위해 로칸이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내었다.

속전속결.

타락 사제들의 지원이 오기 전, 적어도 고대황제만큼은 파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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