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
폭주 (5)
“파멸하라!”
선언하듯 소리치며 검을 내리 긋는 고대 황제의 모습에 로칸이 재빨리 움직였다.
아무리 한 끗발 낮아졌다 해도 하이 마스터다. 게다가 전생의 로칸조차 밟아 보지 못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를 밟아 본 자.
그 경험이라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지랄맞게 세긴 하군.”
그 증거로 벌써 노움 5형제 중 둘이 갈려 나갔다.
하이 마스터이지만, 타락한 힘에 위해 파워 하나만큼은 발군인 탓에 고작 기계 인형으로는 버틸 수 없던 것이다.
그나마 로칸의 분신과 카이는 잽싸게 피하고 막으며 놈을 견제했지만, 그 또한 제대로 된 타격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광살!”
그렇기에 그들을 유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고작해야 시간을 조금 끌 수 있는 정도이기에, 과감히 그것들을 포기했다.
모조리 밀어 넣고 타락한 고대 황제의 제물로 바치는 대신, 한순간의 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캬아아악!”
로칸이 휘두른 배틀 액스가 놈의 전신 곳곳에 틀어박혔다. 점토를 긁어 낸 듯 굵은 상처가 붉게 파였지만 잘리지 않았다.
본래대로라면 사지가 여섯 조각, 그 이상으로 분리되어 마땅하겠지만 한껏 강화된 놈의 방어력이 로칸의 배틀 액스를 밀어낸 것이다.
“큭!”
심지어 반격까지 감행했다.
남은 노움 인형과 분신을 모조리 소멸시키고, 엘리멘탈 바리어를 사용한 카이마저 상처 입히더니, 로칸의 광살까지 받아 내고, 역공을 취한 것이다.
‘부족해.’
덕분에 로칸은 깨달았다. 자신의 압도적인 공격력으로도 조금, 아주 조금 부족했다.
더욱 힘을 끌어 올릴 수단이 필요했다.
“폭격!”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로칸은 즉시 폭격을 쏘아 냈다.
타락한 고대 황제를 향해서 아니다. 그들이 딛고 있는 나무줄기를 향해서였다.
콰과과광! 우지끈!
강력한 폭발이 발밑을 때리자 그저 커다란 나무일 뿐인 건물은 손쉽게 무너져 내렸다.
하프엘프들이 키워 내며 일정 부분 마나를 머금었다 해도 로칸의 공격력을 견뎌 낼 정도는 아니었다.
“아닛!”
“저게 뭐야 ”
“인간들이 왜 여기서……!”
덕분에 주변이 난리가 났다.
다른 곳도 아닌 원로회의 건물이 파괴되며 인간으로 보이는 둘이 떨어져 내렸으니 어찌 적대감을 갖지 않겠나.
타이틀 효과로 로칸의 평판이 보정을 받는다지만 지금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해당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맛이 가 보이는 타락한 고대 황제와 겨루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 수준에 불과하긴 하지만 하프엘프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며 싸울 준비를 했다.
바로 그것이, 로칸이 바라던 바였다.
[타이틀 만인살의 효과로 주변 전투 상태의 존재에 비례하여 공격력과 방어력이 상승합니다. 현재 적용 효과 : 20%]
[인간 종족에 대한 킬로그가 확인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타이틀 만인살의 효과로 주변 존재들의 공포 면역 효과를 제거합니다.]
타이틀 만인살!
‘전투 상태’에 돌입한 하프엘프들의 수가 제한적이라 모든 힘을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당장 부족한 전투력을 메우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적대 종족이거나 방어전이 아니라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파워 업이다.
‘이게 바로 퍼센티지 효과의 매력이지.’
그리고 또 한 가지. 로칸에게는 아직 파워 업의 기회가 남아 있었다.
“세계수의 축복.”
[세계수의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모든 재사용 시간이 30% 줄어듭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제거됩니다.]
[단, 부정한 힘을 사용하는 이에게는 효과가 적용되지 않거나 반대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홀이 가진 특수 스킬 중 하나를 발동시킨 것이다.
봉인된 광풍의 사슬 배틀 액스는 양손 무기였지만 로칸은 막대한 힘을 가진 덕분에 한 손 무기처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때문에 쌍수 무기를 들 듯, 다른 한 손으로 죽음의 홀을 꺼낸 것이다.
물론 그것뿐이다. 스킬을 사용한 뒤, 다시 집어넣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가만 ’
그 순간, 로칸의 뇌리를 스치는 가설이 있었다.
타락의 힘을 만들어 내는 원천이 무엇인가 공포, 비명 등의 마이너스 에너지가 총체적으로 작용하긴 하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에너지는 바로 ‘죽음’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홀에는, 그 죽음을 흡수하는 능력이 내장되어 있었다.
“데스 드레인.”
죽음의 홀이 타락한 고대 황제를 향했다.
뭔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듯 몸을 틀어 피해 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데스 드레인은 논 타기팅 스킬이 아니라, 확정적으로 작동하는 타기팅 스킬이니까.
우우웅! 파츳!
죽음의 홀에서 뿜어진 칠흑 같은 죽음의 빛이 놈이 가진 타락의 힘과 어울렸다.
누가 압도한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데스 드레인이, 타락을 좀 먹고 있었다.
[데스 드레인의 효과로 죽음의 힘을 흡수합니다.]
[사용자의 몸에 흑마력이 쌓입니다.]
[세계수의 축복 효과로 흑마력이 정화됩니다.]
[흑마력이 마나로 치환됩니다.]
재미있는 일이다. 데스 드레인이 타락의 힘을 갉아먹더니 로칸의 마나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물론 당장은 광풍 현신의 효능으로 마나 무한의 상태이긴 했지만, 평상시에도 써먹을 수 있다면 상당히 괜찮은 마나 회복 수단이 될 것 같았다.
“죽어라!”
그러나 타락한 고대 황제도 데스 드레인과 싸우고만 있지 않았다. 그것은 기운 대 기운의 싸움일 뿐, 그의 행동은 자유로운 탓이다.
타락의 힘을 가득 머금은 장검이 로칸을 쪼개기 위해 거칠게 휘둘러졌다.
쩌엉!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만인살에, 세계수의 축복이라는 버프까지 더해지자 조금 밀리는 감이 있던 로칸의 공격력이 그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맞대결의 승자는 역시 로칸.
타락한 고대 황제의 검이 반동을 먹어 크게 튕겨졌고, 덕분에 가슴이 활짝 열렸다.
“파멸을 그렇게 좋아하면 이거나 먹어라! 파멸의 일격!”
촤르륵!
로칸의 왼 주먹에 사슬이 감겼다. 방어력을 무시하는 가공할 일격이 놈의 가슴을 꿰뚫었다.
[파멸을 봉인한 쇠사슬의 특수 효과가 발동됩니다.]
[강력한 타락의 힘을 지닌 존재에게 추가 대미지가 적용됩니다.]
“……!”
퍼엉!
그 순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알림이 눈앞에 나타났다.
‘특수 효과 추가 대미지 ’
가슴이 휑하니 터져 나가며 구멍이 뚫린 고대 황제의 몸을 황망히 바라보던 로칸의 눈이 복잡해졌다.
파멸을 봉인한 쇠사슬에 이런 효과가 있었을 줄이야.
그럼 왜 그동안 타락한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나오지 않은 거지 힘의 총량 문제인가
강력한 타락의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서
‘파멸.’
잠시 당황하던 로칸은 곧 안정을 찾았다. 예언서에서 보았던 한 단어가 떠오른 것이다.
타락한 힘과 관련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파멸. 그리고 파멸을 봉인한 쇠사슬.
그 파멸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우연찮게 얻은 이것이 타락의 힘과 극상성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말살의 사슬!”
퍼버버버버벅!
생각을 마친 로칸은 사슬 스킬을 이용해 놈을 마무리했다. 지금의 공격력이라면 배틀 액스로도 놈을 썰어 버릴 수 있지만 확실한 타격 수단이 있는 마당에 무리 할 필요는 없었다.
인형에 가까웠던 타락한 고대 황제는 심장이 터지고도 살아남았지만, 결국 로칸의 폭력을 견뎌 내지 못했다.
다시 부활한 것이 허망해질 만큼 간단하게 처리되고 말았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던 최종 병기급의 존재라는 것일까, 수준으로만 따지면 하이 마스터 최상급에 불과했지만 들어오는 경험치가 어마어마했다. 하이 마스터에 근접한 로칸이 2레벨을 단숨에 올릴 정도.
344레벨.
이것으로 하이 마스터 승급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349레벨까지 5레벨밖에 남지 않았다.
‘경험치 바도 거의 끝자락이니까 4레벨쯤으로 봐도 무방하겠군.’
물론 그 4레벨을 올리기가 무척이나 요원한 일이지만 말이다.
“로칸…… 님 ”
광풍 현신을 캔슬하고 몸 상태를 회복하고 있자 그를 알아본 하프엘프들이 다가왔다.
이렇게 된 이상 숨길 것이 무엇이랴.
로칸은 연판장과 타락의 나침반을 공개하고 인간 공작이자 조사단원으로서 하프엘프들에게 정식으로 협조를 요청했다.
이곳에서만 둘이나 잡아내긴 했지만 아직 하프엘프들 중에도 타락 사제이거나, 타락 결탁자인 이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당장 이들을 잡아들여라!”
“절대 도망가게 두어선 안 된다!”
원로 중 무려 둘이나 가담하여 세계수를 타락시켰다는 사실에 하프엘프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곧 회복했다. 충격보다 더 큰 분노가 그들을 잠식한 것이다.
그토록 염원해 왔던 세계수의 부활을 고작 타락의 힘 따위로 망쳐 버리다니. 원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하프엘프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악마보다 더 독한 마음을 먹었다.
로칸을 대신해 배신자들을 빠르게 수색하고, 잡아들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놈들은 쉽게 죽긴 어려울 터였다.
“문제는, 세계수인데…….”
그사이 로칸은 세계수에 대해 고민했다. 교신기가 박살 나면서 세계수를 컨트롤할 수단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 또 비슷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 들쑤셔 놓았으니 그들은 더욱 모습을 감출 터였다.
게다가 이미 한 번 보았듯이 교신기로 인해 세상의 파멸이 뜻대로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놈들은 얼마든지 세계수를 컨트롤하겠다는 의지를 버릴 수도 있었다.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어쩌면…… ”
그런 의미에서 타락한 고대 황제와의 전투는 로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렇다면 해볼 만하겠군.”
로칸의 머릿속으로 작전이 떠올랐다. 이것만으로 충분할지는 모르지만 충분히 비벼 볼 만해졌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이 이상 세계수가 난동을 부린다면 인간들 역시 피곤해진다.
더구나 교신기까지 박살이 난 상태이니 언제 방향을 돌려 황금사자 진영을 공격해 올지도 모르고.
“세계수가 나타난 지 얼마나 됐더라 슬슬 때가 된 것 같은데…….”
하지만 단신으로는 어렵다.
아무리 로칸이라 해도 보조해 줄 마스터, 또는 하이 마스터가 있지 않는 이상 그랜드 마스터인 세계수를 혼자 상대하는 것은 어렵다.
지난번처럼 일격에 잘라 낼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그에게 남은 방법은 시간이 제법 필요한 일이었다.
때문에, 누군가를 기다렸다.
“응 후후, 역시 왔군.”
전생에서도 세계수가 나타난 지 정확히 한 달 뒤에 나타난 이들.
그들은 바로 엘프들이었다.
엘프, 그리고 하이엘프.
세계수가 사라진 뒤 개체수가 급감하긴 했으나 모두가 최소 마스터, 하이 마스터인 소수 정예의 종족.
홈페이지를 뒤지며 이것저것 정보를 수집하던 로칸은 어떤 움직임을 발견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