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
천상계 (2)
“워워, 신입인 것 같은데 너무 열 낼 것 없네. 여기서는 지상의 파벌이나 진영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
물론 공격을 가할 생각은 없었다.
어찌되었건 여기는 마을 내부이지 않은가?
이곳에도 똑같이 경비병이 나타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된 영문이든 상점 카운터에 앉아 있는 인물을 공격하는 건 바보짓이었다.
언데드.
두 눈이 퀭한 일반 언데드와 달리 푸른 귀화가 일렁이는 존재를 가만히 들여다본 로칸은 곧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무기를 인벤토리에 돌려보내고 자세를 바로하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실례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막 천상에 올라온 신입이니 너그러이 용서 바랍니다.”
“하하! 이거 보기보다 예의바른 친구로군. 물론이지.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런다고!”
그러자 언데드인 상점 주인도 호탕하게 웃으며 이해했다.
‘언데드와 인간이 뒤섞인 도시라니……. 그 천상 진영이라는 것 때문인가?’
의심이 되는 부분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천상에서는 힘을 합치고 지상에 내려가면 다시 적대 관계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천상인이 되었으니 지상의 적대 관계라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다른 인간, 노움, 드워프, 하프엘프들과도 적대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사실 만인살 타이틀 덕분에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나중에 지상에 내려가 보면 확인해 보기로 하고 일단은 물건부터 확인했다.
“오…….”
천상의 물건은 확실히 좋았다. 당장 대표적인 소모품인 포션류만 하더라도 지상보다 종류가 많았고, 보다 상위의 물품들도 판매했다.
제법 많은 코인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그 성능과 효용을 생각한다면야.
이제는 생명력이 급격히 늘어 상급 포션 하나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수준이었는데 천상 포션이라 이름 붙은 이것이면 단번에 꽤 많은 생명력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버서크나 광풍 현신을 쓰고 나서 생명력이 0이 될 경우 단숨에 체력을 일정 %까지 채워야 살 수 있는 로칸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아이템인 셈이다.
“일단 이걸로 1백 개 사죠. 마나 포션은 쉰 개, 스태미나 포션도 쉰 개 주십시오.”
“오? 그렇게나 많이? 통 큰 친구로군. 근데, 코인은 충분히 있나? 우리 가게가 특별히 비싼 건 아니지만 이걸 다 사면 꽤 비싼데…….”
“물론입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소모품 구입에 아낄 것이 무엇일까.
로칸은 즉시 인벤토리에서 코인을 꺼내 지불했고 상점 주인은 거죽 없는 두개골을 씰룩거리며 귀화를 더욱 피워 올렸다.
“해독제는? 해독제는 필요 없나? 이 근방에 독을 가진 놈들도 제법 있는데…….”
“해독제는 됐습니다.”
더욱 적극적으로 세일즈에 나섰지만 이것이면 충분했다.
로칸은 잠시 고민하다가 체력, 마나, 스태미나를 각 올려 주는 포션 이외에 이 모든 것을 복합적으로 올려 주는 믹스 포션과 즉시 회복이 아닌, 시간을 두고 토트 힐처럼 회복을 시켜 주는 재생 포션까지 추가로 구입한 뒤 잡화점을 나섰다.
덕분에 꽤 많은 코인을 소비하긴 했지만 아직 코인은 충분했다. 미용 포션 덕분에 하늘섬의 코인이란 코인은 싸그리 긁어모았으니까.
더구나 가지고 있는 골드까지 환전하면 추가로 상당한 코인을 모을 수 있을 터였다.
‘일단은 평판 작업이 필요하겠군.’
직업 길드 하우스는 따로 들를 필요가 없다. 이미 필요한 스킬 북은 조합 스킬과 생성 스킬에 필요한 것까지 모두 지상에서 구입해 두었으니까.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늘어난 스킬 슬롯을 채우지는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스킬을 생성하고 조합할 수 있었다.
생각해 둔 스킬도 몇 가지 있었고.
그러니 다음으로 향한 곳은 환전소. 하지만 평판 부족으로 거절당했다.
처음 진입하는 지역에서 호감도와 평판 보정을 받을 수 있는 타이틀 효과가 있지만 충분치 않은 모양이었다.
무지개 전송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만약 벌써 무지개 전송을 기웃거린다면 조금만 힘들어져도 지상으로 내려가 왕 노릇을 하고 싶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종족 빼고는 다 똑같군.”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고 이리저리 마을 내부를 돌며 위치와 건물, 기능들을 파악한 로칸은 천상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몇 가지 새로운 기능을 하는 건물이나 NPC, 상점들이 있긴 하지만 어차피 써먹을 것은 거기서 거기다.
하늘섬에 탈탈 털어 넣으며 사용해 버린 식량까지 다시 비축한 뒤, 다시 마을 밖으로 나섰다.
[현상 수배 : 카로클][퀘스트]
인근 화전민 마을을 습격하는 멧돼지 인간 대장 카로클을 사냥하라.
-현상금 : 50만 코인, 보통의 명성, 보통의 경험치
아, 한 가지 다른 점은 있었다. 지상에서처럼 NPC에게 직접 퀘스트를 받을 수도 있지만 평판 작업에 주가 되는 것은 바로 게시판에 붙은 현상금 사냥인 것이다.
네임드인 경우도 있고, 그냥 특정 종족인 경우도 있었다. 특정 몬스터 몇 마리를 잡는 것이 목표인 것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별도의 의뢰를 받을 수 있는 용병 길드 하우스가 없었고 여러 종족들이 생활하는 마을인 만큼 특정 종족의 호감을 살 필요도 없었다.
현상금을 타면 덤으로 얻을 수 있는 명성.
오직 명성에 따라 평판이 좌우되었다.
‘편리하군.’
전투 계열이 아니라면 조금 곤란할 수 있지만 로칸의 입장에서는 반길 만한 일이었다.
명성이라는 것은 한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서 얻은 명성이든, 다른 지역에서 얻은 명성이든 충분한 수준이기만 하다면 천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역에서 대우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명성만 얻으면 된다.
이 얼마나 심플한 일인가?
필요에 따라 특정 도시에 머물며 평판 작업을 해야 하던 지상과 달리 무척이나 깔끔한 시스템이었다.
물론 충분한 수준의 명성을 얻기까지는 고생을 좀 해야겠지만.
하지만 전투라면 자신 있는 로칸이기에 그 변화가 기꺼웠다.
일단 듣기로는 당장 타 진영의 습격 같은 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나?
이곳 시작의 마을은 쉽게 말해 초보 존이었다.
초보 존에서까지 진영전을 해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검은 구름 산이라.”
덕분에 눈앞의 적, 몬스터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된 로칸은 설레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도 하이 마스터 수준의 몬스터가 즐비하긴 했지만 역시 초보 존이라는 것인지 선공형 몬스터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그마저도 일단 은신을 한 채 주위를 살피며 이동한 덕분에 피할 수 있었고.
이미 영혼을 저장해 천상에서 부활할 수 있다지만 아직 천상 존재들의 전투력을 모르는 상황에서 힘은 아껴 둘 수 있는 만큼 아껴 두는 것이 좋았다.
‘크진 않지만 현상금이 걸릴 만큼의 네임드 몬스터이니까.’
광풍 현신의 단점과 시간 역행의 단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광풍 현신을 한 번 사용하고 나면 후유증을 보내야 했고, 시간 역행으로 쿨 타임과 후유증을 되돌리자니 획득한 경험치가 아깝다.
그렇게 평원을 지나 목적지인 검은 구름 산에 도착한 로칸은 마음 굳게 먹으며 한 발을 내디뎠다.
[저주받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저주받은 땅에서는 일정 시간마다 일정 확률로 혼란, 공포, 광기 등의 상태 이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흠.”
발을 딛자마자 나타나는 경고 메시지에 역시 천상이구나 싶었다. 혼란, 공포, 광기면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잠깐의 실수가 패배,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레벨의 싸움에서는 특히 곤란한 것들뿐이다.
광기야 공격력 증가 효과가 있으니 운 좋으면 이득이 되기도 하겠지만 나머지 두 개는 답도 없다. 이쯤 되면 굳이 이곳에 화전민 마을이 왜 있는가 싶을 정도다.
‘물론 난 상관없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것은 아니다. 로칸에게는 불굴의 의지가 있으니까.
새삼 느끼는 거지만 참 여러모로 잘 써먹는 타이틀 효과다.
시스템의 경고를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어가자 곧 지형 효과가 차례로 나타났다.
[저주 : 혼란에 노출되셨습니다.]
[타이틀 불굴의 의지 효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주 : 광기에 노출되셨습니다.]
[당신은 광전사입니다.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원래 미친놈이다 이거냐.”
다만 저주 : 광기에 대한 반응이 우스웠다. 타이틀 때문이 아니라 광전사라는 클래스 때문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것이다.
뭔가 미친놈이라고 공인 받는 것 같아 머쓱해졌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게 아니라도 미친놈 소리 듣던 게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지.
좀 더 산을 오르자 수풀이 부스럭거렸다.
캬아아악!
“반격!”
[자이언트 스쿼럴][Lv 362]
나타난 것은 거대 다람쥐였다. 거대라고 해 봐야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크기였지만 그 이빨과 발톱이 사나웠다.
이럴 때는 이게 딱이다.
로칸의 외침과 함께 몸이 쭉 뒤로 밀려나더니 재차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대를 파악하고 반응할 시간을 벌어 줌과 동시에 강대한 힘을 배틀 액스에 실을 수 있었다.
푸확!
살육의 일격.
포식자처럼 입을 열리고 뛰어든 거대 다람쥐의 골통이 단번에 부서졌다.
가죽이 잘리고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졌으며 뼈까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놈은 멈추지 않았다. 짧은 팔을 휘두르며 로칸을 공격하려 들었다.
아무래도 지형 효과로 광기에 물든 모양이었다.
“어딜!”
그러나 그런 어설픈 공격에 당해 줄 로칸이 아니다.
베어 냄과 동시에 바닥에 패대기친 다람쥐가 달려들자 발로 툭 차서 한 번 밀어 내고, 재차 달려들자 도끼 자루로 찍어 버렸다. 타이밍 좋게 박살 난 머리 속을 휘저으며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변이된 동물도 이 정도라니.”
빠르게 제압한 덕인지 광기에 물든 까닭인지 따로 마스터 스킬이 발동하지는 않았다.
만약 사용했다 해도 이미 경지에 오른 로칸의 능력이면 광풍 현신을 사용하지 않고도 제압이 가능했겠지만, 작지 않은 소란은 각오해야 했을 터였다.
크릉, 크르릉!
“제길.”
[멧돼지 인간 졸개][Lv 357]
[멧돼지 인간 졸개][Lv 358]
그렇게 거대 다람쥐를 완전히 끝장내자 소란을 감지한 멧돼지 인간들이 내려왔다.
처음에는 현상 수배범인 카로클 하나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로칸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싸우지 않은 것은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불필요한 소요를 일으키지 않기 위한 것일 뿐, 졸개든 카로클이든 얼마든지 처죽일 능력이 있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폭주 전차!”
로칸의 몸이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후다닥 놈들에게 들이쳤다.
돌진 공격력을 증폭시키는 견갑의 힘을 놈의 내장에 터트려 버림과 동시에 등 뒤로 돌려 찬 배틀 액스를 옆구리 쪽으로 빙글 휘돌려 옆에 있던 놈까지 함께 썰어 버렸다.
“트위스트 어택!”
배틀 액스에 실린 거력이 통나무처럼 크고 두꺼운 멧돼지 인간의 허리를 3분의 2 이상 거뜬하게 베어 버렸다.
“뭐야, 허접이잖아? 덩치만 크지 허당이네. 이런 놈들이면 백 마리가 덤벼도 문제없겠는데? 쯧쯧, 아까 그 다람쥐도 너희보단 잘 싸우겠다!”
로칸이 마음먹고 움직이자 실력 차이는 분명히 드러났다.
애초에 하이 마스터이되 하이 마스터의 수준을 뛰어넘은 로칸이 아니던가? 이런 놈들은 트럭으로 가져와도 너끈하게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아오,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쿠구구구구구구구.
그리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로칸은 거대한 진동을 느꼈다. 검은 구름 산의 위쪽에서 가까워지는 진동을.
그리고 저 멀리 까맣게 그을린 듯 털을 두르고 네 발 모두를 사용해 이쪽으로 달려오는 멧돼지 인간 떼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