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
천상계 (5)
로칸이 이동한 곳은 시작의 마을 인근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몬스터인 격노의 라쿤 서식지였다.
일반 라쿤보다는 크지만 그래 봤자 어린아이 정도의 크기인 라쿤들이 모두 이도류를 들고 달려드는 곳으로, 로칸조차 식겁을 하고 물러선 바 있는 장소였지만 이번에는 자신 있었다.
작은 몸과 별개로 공격력이 엄청나고 숫자까지 대단해서, 까딱하다가는 로칸조차 광풍 현신 지속 시간이 끝나고 생명력 관리를 하지 못할 확률도 있었지만 그런 만큼 가장 좋은 시험대이기도 한 것이다.
“자이언트 피데기, 소환.”
쿠웅!
쿤? 쿤쿤!
날개 모드를 개방해 그들의 서식지 상공에 자리 잡은 로칸은 망설이지 않고 즉시 자이언트 피데기를 소환했다.
그 거대한 몸뚱이를 서식지 한복판에 떨구었다.
덕분에 깔릴 뻔한 라쿤들이 벌써 폭주하며 덤벼들고 있었지만 로칸은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많고 많은 몬스터들 중 자이언트 피데기를 테이밍한 이유는 놈이 가진 특수 스킬 때문이었으니까.
“자이언트 피데기, 웅크리기.”
그 순간, 자이언트 피데기의 거체가 잘게 떨렸다.
외형상 차이는 없었지만 로칸은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자이언트 피데기의 방어력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는 것을.
스킬 설명에 나타나는 것만 보자면 오히려 로칸 자신보다도 훨씬 높을지 몰랐다.
‘방어력 500% 상승에 대미지 99% 경감, 기본 체력 재생 속도 증가라니……. 사기지.’
그만큼 자이언트 피데기가 가진 스킬의 위력은 대단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이동을 할 수도, 공격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는 것은 맷집 좋은 샌드백밖에 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니지. 공격 스킬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로칸은 나서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미약하게나마 도발 효과까지 가진 웅크리기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만을.
이미 주변에 있는 라쿤이란 라쿤은 모조리 모여들어 외피를 두들기고 있는 상황이다.
외곽부터 갉아 먹는다면 꽤 손쉽게 요리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경험치를 주워 먹는 게 중요한 시점은 아니다. 스킬의 지속 시간을 체크하며 천천히 기다렸다.
츠즈즈즛.
그리고 약 5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이언트 피데기의 몸이 다시 한 번 잘게 떨렸다.
웅크리기의 지속 시간이 끝나가는 것이다.
그에 맞춰 로칸이 타이밍을 쟀다.
‘5, 4, 3, 2, 1!’
꽥! 퍼버버벅!
로칸이 무언가를 한 것이 아니다. 웅크리기의 지속 시간이 끝나는 순간, 라쿤들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얻어터진 듯 넝마가 되어 쓰러졌다.
웅크리기 효과는 단순히 방어력 증가, 대미지 경감 효과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지속 시간이 끝나는 순간 받은 대미지의 50%를 되돌려 주는 무지막지한 기술! 그것도 실제 입은 대미지가 아니라 그들의 공격에서 일어난 순수 대미지, 일명 트루 대미지라 불리는 그것에 대해 계산되는 것이었다.
공격력과 비교해 생명력은 형편없는 라쿤들에게는 최악의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흐흐흐흐!”
덕분에 로칸은 공짜로 레벨을 하나 올렸다.
이미 많은 양의 경험치가 채워진 상태였긴 하지만 몰이사냥을 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은 덕분에 대량의 경험치를 습득할 수 있던 것이다.
“소환 해제!”
그리고 즉시 자이언트 피데기의 소환을 해제했다.
녀석을 굴종의 구슬로 되돌리고, 한쪽에서 골골대고 있는 현상 수배범, [피의 라쿤 라쿠니]를 향해 떨어져내렸다.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니까.’
자이언트 피데기가 가진 약점 때문이었다.
웅크리기는 확실히 엄청난 스킬이지만 그 지속 시간이 끝나고 나면 반대로 외피가 물러진다.
스킬을 사용하기 전보다도 일시적으로 약해지는 시기가 오는 것이다.
생명력 자체도 꽤나 많았지만 그 틈에 공격을 당한다면 버티기 어렵다.
그 점을 알고 있는 로칸은 철저하게 스킬 효과만을 이용해먹었다. 굴종의 구슬로 테이밍한 몬스터의 경우, 탈것이나 다른 소환체들과 달리 한번 죽으면 그걸로 끝이니까.
바톤 터치를 하며 살육의 일격을 라쿠니에게 박아 넣었다.
쿠운……! 털썩.
이미 자신이 쌓은 대미지를 돌려받아 빈사 상태에 빠진 놈이 로칸의 공격력을 버텨 낼 리 없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배틀 액스 같은 중병기는 어렵지 않게 피해 내는 놈이었지만 행동 불능에 가까운 지금은 놈이라도 피할 재간이 없었다.
시작의 마을 인근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라쿤족 사냥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끝이 났다.
“오오, 이게 라쿤의 꼬리!”
“꺄악! 푹신푹신해!”
짧은 사냥이지만 라쿤족을 사냥해 얻은 것은 무척이나 많았다.
먼저 라쿠니에게 걸린 현상금을 타 먹었고, 놈의 부산물이자 사냥의 증거인 ‘라쿤의 꼬리’는 그 특유의 푹신하고 보드라운 촉감 때문에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도류를 사용하는 놈들인 만큼 장비류를 다수 ‘득템’한 것도 무시하지 못할 소득이었고.
그러나 가장 큰 수확은 역시 이것이었다.
[명성 수치가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천상의 한 지역에 알려집니다.]
[한 지역에 한해 누구라도 당신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고 느낍니다.]
[천상에 대한 기본 적응을 마쳤습니다.]
[일부 기능들의 잠금이 해제됩니다.]
현상 수배 퀘스트와 사냥을 마칠 때마다 조금씩 오르던 명성 수치가 일정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적어도 시작의 마을 내에서는 로칸이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고, 그 실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천상의 첫 번째 도시. 그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이제 다음 도시로 가 봐도 좋겠군.”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잡화점 주인이었다.
언데드인 탓에 처음 보자마자 도끼질을 할 뻔했지만 이제는 제법 친해져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가 된 그가 로칸에게 떠날 것을 종용했다.
어차피 주변의 몬스터나 사냥터라고 해 봐야 수준이 고만고만했으니 더 이상 로칸이 활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물론 레벨로만 따지자면 아직 그보다 높은 녀석들이 얼마든지 있지만 그들만 잡아서는 충분한 수준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기에 로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아, 그동안 아껴 두었던 물음을 그에게 던졌다.
“스베노 씨, 당신은 ‘마족’입니까?”
“……뭐?”
화전민 마을에서 설명을 들은 뒤, 시작의 마을에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로칸이었다. 굳이 꺼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떠나는 마당이라면, 다음 도시로 향해 천계와 마계의 존재를 알게 될 거라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잡화점의 주인, 언데드 스베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크흐흐흐! 그 말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잘못 짚었네.”
“……?”
“난 마족이 아니야.”
“무슨…….”
그다음 그에게서 나온 이야기는 다소 의외의 것이었다. 마족이 아니라니? 그럼 설마 언데드인 주제에 천계에 소속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로칸의 의문 가득한 눈을 멍청하게 뜨자 녀석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해답을 내놓았다.
“난 언데드야. 그건 알지?”
“그야…….”
스베노야 어딜 봐도 누가 봐도 언데드다. 한데 지금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제부터는 지상의 개념을 버리도록 해.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인데, 진영은 둘이 아니라 셋이니까.”
“셋이요?”
“그래, 셋. 천계와 마계. 그리고 중립이지.”
“아……?”
중립의 존재. 그것은 지상과 다른 점이었다.
종족을 선택하자마자 황금사자와 검은용군단으로 진영이 강제로 나뉘는 지상과 달리 이곳에서는 진영을 직접 선택할 수 있었고, 또 흑과 백처럼 대립되는 두 개의 진영이 아닌 제3의 선택지를 고를 수도 있었다.
“중립 진영이신 거군요, 스베노 씨는.”
“그렇지.”
“중립 진영이라는 것에 어떤 이점이 있습니까?”
“크크크!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하는군. 그건 다음 도시에 가서 직접 알아보도록! 자네 정도라면 어느 진영에서든 서로 데려가려고 할 테니 말이야.”
“흐흐, 발에 채는 것이 하이 마스터인데 설마요.”
“그거 겸손인가? 나도 이곳에 온 지 꽤 오래되었지만 자네처럼 빠르게 적응하고 성장하는 인물은 처음 봤네. 더구나 죽음의 가호를 받는 ‘방문자’이니,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도 충분하지. 그러니 얼굴에 금칠하는 소리가 듣고 싶은 게 아니거든 겸손 떨지 말고 얼른 사라져 버려!”
“쳇, 저 없다고 서운해서 울지나 마십시오.”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마치고 로칸은 잡화점을 빠져나왔다.
그의 말처럼 이제는 다음 도시로 넘어갈 때였다.
“다음 지역이라…….”
천상에서는 다음 지역으로 어떻게 넘어갈까. 지상의 경우 걸어가거나,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땅 덩어리가 워낙 크기도 하고, 걸어서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도 있다 보니 걸어서 가자면 끝이 없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비행 탈것’이었다.
개인의 것이 아닌 공용 탈것. 마차처럼 일정 비용을 지불하면 정해진 경로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인데, 비행 탈것의 경우 지상에서도 구하기 어려웠으니 이곳에서 처음 타 보는 이들도 분명 존재할 터였다.
“경계의 마을까지? 50만 코인입니다.”
꽤 비싼 요금이지만 근방에서 사냥을 조금하면 모으기 어려운 금액도 아니다.
물론 주변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모은 코인으로 장비를 바꾸고, 소모품을 몽땅 갈아치운다면 코인이 부족할 수 있지만 로칸에게는 해당이 없다.
가뿐하게 코인을 지불하고 그린 와이번에 올라타자 놈이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사뿐히 날아올랐다.
‘승차감은 카이가 훨씬 낫군.’
속도 역시 카이 쪽이 우위겠지만 로칸이 굳이 코인을 들여 그린 와이번에 탑승한 이유는 하나다.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
처음 천상에 진입했을 때 보았던 와이번 떼의 공격이라든가, 방향을 잃는 것 등에 대한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일단은 안전하게 이동하려는 것이다.
크릉!
스포츠카의 엔진음 같은 으르렁거림과 함께 그린 와이번이 세차게 날아올랐다.
천상의 두 번째 마을을 향해서.
경계의 마을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뒤였다.
‘타길 잘했군.’
경계의 마을에 무사히 안착한 로칸은 괜한 객기를 부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오는 도중 만났던 무시무시한 와이번 떼가 그린 와이번에 탄 로칸을 힐끗 쳐다본 뒤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고, 안개 지대와 균형을 잃게 만드는 돌개바람 지대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카이를 타고 이동을 감행했다면 길을 잃었거나 와이번들의 습격을 받았을 확률이 높았다.
대붕으로 변해 속도로 따돌릴 수도 있겠지만 리스크가 있던 것은 분명했다.
“흠, 여기까지는 비슷하군.”
그렇게 도착한 경계의 마을.
마을 내부의 풍경은 시작의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거대하게 우뚝 솟은 두 개의 탑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일까.
“저게 천족인가? 닭둘기 같군.”
그리고 또 한 가지. 돌아다니는 이들 중 조금 다른 모습을 한 자들이 있었다.
일명 천사의 날개라고 불리는 큰 새의 날개를 등에 달고 있는 자들과 박쥐 날개 같은 악마의 날개를 달고 있는 자들이 눈에 띄는 것이다.
아무래도 진영 선택을 하면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종족은 드워프인데 천사의 날개를 단 녀석이 지나갔다.
“뭐야? 이 버릇없는 놈이 어디서 시비냐!”
덕분에 꼴은 꽤 우스웠고 로칸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자 녀석은 곧장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하이 마스터급의 존재답게 그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로칸은 경계의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시비가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