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
신수 사냥 (4)
“유니콘이라…….”
무려 신수다. 그것도 400레벨의. 만약 이것에 전설을 타는 자 효과까지 더해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흐뭇해졌다.
[요정의 환영 주문에 노출되셨습니다.]
“아, 그랬지.”
드록쉬와 조금 다른 의미로 입이 다물어질 줄 모르던 로칸이 어느샌가 다가온 요정들의 수작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돌아보자 거대한 괴물들이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괴상망측하고 거대한 괴물들.
하지만 로칸은 더없이 침착했다. 이미 유니콘을 얻었으니 싸움을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 보인다, 이것들아.”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대 괴수들. 그러나 로칸의 눈은 아주 작은 것을 보고 있었다.
환영으로 일으킨 괴수의 거체 대신, 그 핵을 이루고 있는 요정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폭주 전차.”
로칸이 거센 기운을 일으키며 돌진했다. 광풍 현신을 써야 막을 수 있을 법한 대형 도끼를 무시하고 놈의 몸을 들이받았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광살!”
퍼버버버벅!
그러나 때리는 것은 한 지점이었다.
요정의 환상은 정교했지만 로칸에게는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이 있었다.
거짓을 간파하고 진실을 꿰뚫는 눈이 요정의 본체를 보았다.
끼야아아악!
마법 능력은 어떨지 모르지만 본체의 생명력은 형편없다. 숲의 요정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퍽 하고 사라져 버렸다.
도망친 것이 아니다. 요정의 가루라는 아이템만 남기고 광살의 연격이 끝나기도 전에 소멸해 버렸다.
“흐흐, 별것도 아니군.”
끼아아아아아악!
그와 함께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요정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저 장난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적의를 띠고 덤비기 시작한 것이다.
“제길. 어쩔 수 없군!”
이렇게 되자 소극적이던 드록쉬도 어쩔 수 없이 전력을 다했다.
요정을 적대하는 것이 꺼림칙하지만 그렇다고 죽어 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로칸처럼 환상을 간파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는 썩 그럴싸한 광역기가 있었다.
“웨폰 익스플로젼!”
콰과과광!
허상 뒤에 숨었다 한들 광역기에 휩쓸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무려 유니크 등급의 무기를 희생시킨 폭발에 휘말린 요정들이 몇이나 한 번에 소멸해 버렸고, 로칸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재빠르게 움직였다.
“유니콘!”
그리고 유니콘을 소환했다. 유니콘이라면 요정의 잔재주 따위에는 당하지 않을 테니까.
푸힝?
“저놈들을 처치해!”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킨 유니콘은 로칸의 명령을 받고도 잠시 두리번거렸지만 제대로 주인 등록이 되었는지 곧 기세를 내뿜었다.
“와우.”
퍼억!
공격은 단순했다. 냅다 달려들더니 크고 아름다운 뿔로 받아 버리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허상 따윈 통하지 않는지 요정의 모습이 대번에 사라져 버렸다.
일격사.
단순 돌진 공격력만 보자면 로칸보다도 위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요정의 수면 주문에 노출되셨습니다.]
[신수 유니콘의 가호를 받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크흐흐, 좋구나!”
그뿐이 아니다. 유니콘은 신수라는 이름답게 그 존재 자체만으로 요정들의 주문 효과를 무시하고 본인뿐 아니라 주인인 로칸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반면 로칸의 빠르고 강력한 일격 일격은 요정들의 모습을 꺼뜨려 버리니 이보다 좋은 사냥터가 또 어디 있을까?
유니콘의 효과를 확인한 로칸은 그간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정도로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요정이 주는 경험치는 동 레벨에 비해 짠 편이지만 요정의 숲답게 그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한참을 사냥하니 다시 레벨이 하나 오를 정도.
요정 마법에 면역이 없는 드록쉬는 슬슬 힘겨워했지만 로칸은 오히려 힘이 나는 듯 더욱 날뛰었고, 더 이상 덤벼드는 요청이 없을 때까지 사냥은 계속되었다.
“이제 갈까?”
“헉, 헉. 괴물 같은…….”
그렇게 더 이상 잡을 요정이 없자 로칸은 가뿐하게 몸을 털며 요정의 숲을 나섰다.
가는 길에 하나쯤 신수가 더 나타난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었지만 일단 마을까지만 무사히 도착해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터였다.
“가는 길에는 신수가 없을까?”
“욕심이 과하군. 신수가 그리 흔한 족속들이 아니야, 요.”
이제는 존댓말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드록쉬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미 이무기와 유니콘까지 잡는 것을 보았으니 그가 거짓을 이야기할 가능성을 별로 없었다.
“다만…….”
“다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요.”
뭔가 의뭉스런 말이었지만 로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설령 그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다 해도 뚫고 나갈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둘은 한참을 걸었다. 비공정으로도 제법 시간이 걸렸으니 걸어서는 족히 하루 이상 걸어야 할 확률이 높았지만 겸사겸사 나타나는 몬스터를 잡아 경험치를 올리니 그리 나쁘지 않은 행보였다.
덕분에 로칸은 중간에 로그아웃도 해야 했지만 미리 드록쉬에게 어디 가지 못하도록 이야기를 해 두자 말끔히 해결되었다. 계약에 의해 그의 말에는 당분간 절대 복종해야 하니까.
“이제 여기만 지나면 마을에 닿을 수 있겠군.”
그리고 마침내, 마을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여기를?”
하지만 드록쉬가 가리키는 곳을 본 로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곳은 아무래도 편히 지나기 어려워 보이는 지형인 것이다.
“크흠, 정화의 강이라 불리는 곳이지, 요. 이곳에 몸을 담그면 모든 것이 정화되어 버리니 장비는 아공간에 담아 두지 않으면 안 될 거야, 요. 보는 것처럼 하늘에는 폭탄 구름이 떠다니니 날아서가는 것도 무리고.”
“강이라…….”
딱 봐도 폭탄 모양으로 빚어진 구름이 낮게 떠있다 싶더니 진짜 폭탄처럼 터지는 모양이었다.
‘카이를 이용해 날려 버리는 것도 안 되겠지?’
그렇다면 천생 헤엄을 쳐서 건너야 한다는 말인데, 헤엄을 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이 속에 있을지 모를 수중 몬스터가 꺼림칙했다.
“저 안에 몬스터도 있나?”
“신해어가 있지, 요. 아, 당연히 신수로는 분류되지 않으니 혹여나 잡을 생각은 하지 마, 요. 그래도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으니 염려할 것도 못 되고.”
“그럼 뭐가 문제지?”
“그건……. 천족이 아닐 경우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하면 능력치가 초기화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요.”
“능력치 초기화?”
“그 전에 생성 스킬과 조합 스킬부터 초기화되겠지만.”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아무리 정화의 힘을 가진 물이라지만 능력치까지 지워 버린다고?
어이가 없어진 로칸이 강과 드록쉬를 번갈아 보았지만 그는 장난이 아니라는 듯,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천족은 상관없다면서 왜……. 아.”
그를 스윽 훑어본 로칸은 곧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드워프 특유의 짧은 팔과 다리. 그렇다면 피해는 없어도 남들보다 한참을 헤엄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거 참…….”
씁쓸한 일이지만 그보다 자신의 일이 더 급했다. 강의 폭이 좁지 않은데 시간 내에 도착해야 한다? 아무리 이동기를 팍팍 쓴다 해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아?”
그때, 로칸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팔과 다리.
드록쉬가 팔다리가 짧아 시간이 더 걸린다면, 반대로 팔다리가 더 길면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을 마친 로칸은 씨익 웃으며 장비를 해제했다.
그의 말처럼 자칫 사자왕의 무구가 정화되어 옵션을 잃어버린다면 그만한 낭패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맨몸이 된 로칸은 간단히 준비 운동을 하고, 정화의 강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럼 먼저 가지. 빨리 부지런히 따라오라고!”
타다닷.
최대한 멀리서부터 달리기 시작하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힘을 발휘했다.
“광풍 현신!”
그와 함께 거대해지는 몸.
로칸은 있는 힘껏 도움닫기를 해 먼 곳으로 뛰어들었다.
[정화의 물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멀리까지 잠영으로 이동했다. 자유형도 빠르지만 가장 빠른 것은 역시 잠영이다.
거인의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자 쑥쑥 물살을 가르며 몸이 나아갔다.
이 정도면 불과 몇 분이 되지 않아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음, 파! 음, 파!”
언젠가 수영장에서 배웠던 자유형을 구사하며 한참이나 물살을 가로지르자 모공을 통해 흡수되는 듯하던 정화의 기운이 어떤 작용을 일으켰다.
[정화의 물이 당신의 몸을 정화합니다.]
[몸속의 노폐물이 정화됩니다.]
[당신의 몸에 순수한 마나의 기운이 깃듭니다.]
[모든 능력치가 10만큼 상승했습니다.]
“……!”
너무 놀라 하마터면 헤엄치는 법까지 잊을 뻔했다.
늦으면 능력치가 초기화된다더니 오히려 능력치가 오른다? 드록쉬가 자신에게 거짓말이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고.’
그건 불가능하다. 로칸은 즉시 생각을 정리했다.
과유불급. 아마도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능력치가 초기화되는 것이겠지.
‘좋아, 그렇다면…….’
판단을 마친 로칸은 일단 최대한 빠르게 강을 건넜다.
그러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정화의 기운이 몸속의 기운들을 정화했고, 능력치가 저절로 상승했다.
[모든 능력치가 100만큼 상승했습니다.]
심지어 누적된 능력치 상승 폭이 100을 넘어섰다. 그것도 특정 능력치가 아니라 모든 능력치가!
그리고 그에 맞춰 로칸의 몸이 정화의 강을 거의 다 건넜다.
‘기다린다.’
어떻게 할까. 이것으로 만족하고 빨리 건너 버려야 할까?
아니다.
로칸은 드록쉬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능력치가 초기화되기 전, 생성 스킬과 조합 스킬이 초기화된다는 것을.
어차피 생성 스킬과 조합 스킬이라면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으니 버텨 보기로 한 것이다.
[모든 능력치가 200만큼 상승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50만큼 상승했습니다.]
언제든 튀어나갈 수 있도록 정화의 강에 몸을 계속 담그고 있자 능력치는 꾸준히 올랐다.
200, 250을 넘기고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상승했다. 오히려 상승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모든 능력치가 300만큼 상승했습니다.]
[생성 스킬 반격이 삭제되었습니다.]
‘지금!’
그리고 누적된 능력치 상승이 300에 달했을 때, 비로소 생성 스킬이 삭제되기 시작했다.
타이밍을 재고 있던 로칸은 즉시 또 다른 생성 스킬 점프를 이용해 정화의 강에서 벗어났고, 별다른 피해 없이 정화의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천족이 되지 않길 다행이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생성 스킬 하나가 삭제되긴 했지만 슬롯째 날아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아직도 헤엄치는 중인 드록쉬를 힐끗 쳐다보고는 그 자리에서 삭제된 생성 스킬 반격을 다시 생성해 냈다.
순전히 이득만을 본 채로 정화의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푸하! 그 스킬은 정말 사기군, 사기야! 나도 이참에 비슷한 걸 하나 만들든지 해야지…….”
뒤늦게 기운이 쪽 빠진 드록쉬가 앓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씨익 웃어 보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고작 헤엄을 치느라 소모한 스태미나쯤이야 포션 한두 병만 마셔도 회복될 테니 오래 기다려 줄 필요는 없었다.
[천계의 입구에 진입하셨습니다.]
다시 기분 좋게 길을 떠난 지 30여 분.
둘은 드디어 비공정이 먼저 도착한 천계의 첫 번째 관문에 들어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