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천신의 안배 (1)
“크와앙!”
우두머리의 죽음에 홀리울프들은 도망치기는커녕 더욱 거세게 날뛰었다.
그 마음이 갸륵하지만 그래 봐야 로칸에게는 한낱 몬스터일 따름이다.
“발광할 것 없이 내가 가지!”
로칸은 멈추지 않고 달려들어 유니콘과 함께 놈들을 쓸어버리고 경험치를 쓸어 담았다.
“짭짤하군.”
이미 세린트를 잡으며 레벨이 올랐음에도 제법 넉넉하게 경험치가 차올랐다. 이 정도면 대만족.
하지만 로칸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랐다.
“흠, 이 근처에 다른 놈은 없나? 400레벨대의 몬스터는 제법 있다고 들었는데.”
지배자가 사라진 홀리 마운틴을 광풍 현신의 지속 시간이 끝날 때까지 뒤지며 경험치를 마저 긁어모았다.
“다음은 어디더라?”
그렇게 만족스럽게 경험치를 채우고 나서야 디그독을 이용해 토굴을 파고 들어가 다음 계획을 세웠다.
“어라? 이게 언제 들어왔지?”
그러던 중, 인벤토리에서 못 보던 것을 발견했다.
[성지의 열쇠][에픽]
성지의 문을 여는 열쇠.
설명은 간단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성지라고?”
에픽 등급씩이나 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일반 홀리울프가 아닌 세린트에게서 나온 물건인 듯싶었다.
한데 고작 열쇠가 에픽 등급이라?
“냄새가 나는군. 대박의 냄새가.”
로칸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그러고 보면 아까 놈이 그러지 않았나? 이곳은 천신의 힘이 깃든 곳이라고.
그렇다면 아마 홀리울프들이 천신이 남긴 어떤 것을 지키고 있던 것일 테고, 이 열쇠는 그곳에 도달하는 조건임이 틀림없었다.
“그럼 올라가 보실까?”
광풍 현신의 쿨 타임이 돌아오자 로칸은 지체 없이 토굴을 되짚어 올라갔다.
목적지는 당연히 홀리 마운틴의 정상.
보통 이런 경우 정상에 무언가 있을 확률이 높았고, 아니라 해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뭔가 보일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카이를 타고 가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이미 하늘에 무언가 날아다니는 것을 확인했기에 무리하지 않고 유니콘을 불러 탔다.
‘페가수스처럼 날개만 있었다면 딱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카이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니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정상에 오르자, 예상대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버려진 사원, 뭐 그런 건가?”
무너진 건축물.
천신의 힘이 잠든 곳이라기엔 너무 허접한 느낌도 들었지만 대개 그렇지 않은가? 천족들이 천신을 모신다고는 하지만 천신이 나타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라고 하니까.
안으로 들어가자 무너진 벽들 사이로 벽화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흐음…….”
뭔가 전설을 기록해 놓은 것 같은데 얼핏 얼핏 보이는 그림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군데군데 끊어진 글자들도 천족들의 언어인지 따로 확인하기 어려웠고.
로칸은 일단 그것들을 영상과 스크린 샷으로 저장해 놓은 뒤, 열쇠를 끼워 넣을 만한 장소를 찾았다.
“없네?”
그가 잘못 짚은 것일까? 딱히 열쇠를 넣거나 놓을 만한 장소는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 몰라 카이를 소환한 뒤, 바람을 일으켜 바닥까지 쓸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잘못 찾은 모양.
“유니콘, 소환.”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보기 위해 다시 유니콘을 소환하자 그때 변화가 일어났다.
우우우웅. 히이이잉!
유니콘의 뿔이 밝게 빛나는가 싶더니 무너진 사원 전체에 눈부신 광휘가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너무나 깨끗해서 오래 노출되었다간 정신병이라도 생길 것 같은 순백의 빛이었다.
“으윽.”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가 잠잠해질 때가 돼서야 다시 눈을 뜬 로칸의 앞으로 거대한 문이 나타나 있었다.
“오호?”
그리고 그 문에는 당연하게도 열쇠 구멍이 있었다.
드르륵. 쿠구구궁!
열쇠를 끼우자 기관 장치처럼 움직이는 문.
반대편에는 여전히 텅 빈 공간뿐이건만, 열려진 문 안쪽으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빙고.”
차원 문이었다. 아니면 워프 게이트이거나.
이 너머가 다른 공간, 혹은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짐작한 로칸은 망설이지 않고 발을 옮겼다.
이미 모든 스킬의 쿨 타임이 돌아와 있으니 겁낼 것이 없었다.
슈우웅.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쿠구구궁.
“흠, 일회용인가?”
로칸이 들어오자 문은 저절로 닫혔다. 다시 돌아 나갈 수도 없는 것이다.
‘까짓 것, 죽기밖에 더할까.’
하지만 로칸은 더없이 여유로웠다. 유저의 특권인 부활이 있으니까.
이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몰라도 죽으면 다시 부활하면 그만이다. 떨어진 레벨이야 나머지 신수를 마저 잡으면 다시 오를 테고.
‘다시 걸어가는 게 좀 짜증 나긴 하지만…….’
물론 천상의 룬을 사용해 다시 천계로 이동할 경우 한참을 걷고, 또 정화의 강을 건너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건 사소한 문제이다.
여차하면 다시 비공정을 타고 넘어와도 되고.
그렇게 마음 편히 안쪽으로 들어가자 던전처럼 생긴 내부에 불이 밝혀졌다.
“서비스가 좋군.”
하나같이 신성력이 가득 담긴 신성 조명이었다.
마족이었다면 타격을 받을 법도 했지만 적어도 중립인 로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렇게 성큼성큼 긴 통로 안으로 걸어가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신의 파수꾼의 인정을 받은 자여.]
“음?”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모르지만 헛다리를 짚었다. 로칸은 인정을 받고 열쇠를 넘겨받은 것이 아니라 놈을 사냥하고 얻었을 뿐이니까.
아마도 중립이 아닌 천계 쪽의 진영이었다면 뭔가 시험이라도 내려졌을 모양인데 로칸이 놈을 사냥하고, 또 우연히 유니콘을 손에 넣으면서 안배가 틀어진 모양이었다.
“거참 미안하군.”
그 때문인지 목소리는 퍽이나 호의적이었고 로칸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천신의 아이로서 그 사명을 다할 준비가 되었는가?]
공허한 물음. 공허한 메아리.
이번에도 로칸은 무시하고 좀 더 안쪽으로 진입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굳건한 의지와 신실한 믿음을 증명하라.]
그러나 세 번째 목소리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건 뭔가 시험을 내리겠다는 뜻이니까.
로칸이 긴장하며 빠르게 무기를 빼어 들었다.
[타이틀 불굴의 의지의 효과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어……?”
아무래도 목소리가 내린 시련이 정신 계열의 공격이었던 모양이다.
설마하니 이것까지 막아 낼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로칸은 시험을 프리 패스로 통과했다.
[장하다, 나의 아이야. 이제 나의 힘을 이어받아 사악한 어둠의 종자들을 물리치거라!]
“……이건 무슨.”
쿠구구궁.
치르지도 않은 시험에 통과한 로칸이 멋쩍어하는 사이, 통로가 끝이 나며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제단이 하나 올라왔다.
“……공짜라니 사양 않고.”
미안하고 민망했지만 거저 준다는데 사양할 이유는 없다. 로칸은 함정이 있는 것은 아닌지 슬쩍 둘러본 후 천천히 제단을 향해 나아갔다.
한 가지 안전장치를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분신 소환.”
바로 분신이었다.
앞에 함정이 있든, 그 밖의 어떤 것이 있든 분신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설령 닿으면 발동하는 어떤 저주가 있더라도 분신이야 소환 해제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 효과가 주인인 자신에게까지 전이 되지는 않으니까.
만약 아무 이상이 없다면?
터억.
“어?”
분신이 집어서 건네주면 된다. 바로 이렇게.
[천신의 별빛 건틀렛][갓]
천신이 후계를 위해 별빛의 힘을 본따 만든 건틀렛.
착용자에게 별의 힘을 전해 준다.
-방어력 : 10,000
-내구력 : 100,000/100,000
-모든 능력치 + 300
-[별의 의지] 효과로 정신 계열 능력 강화
-[별의 사멸] 효과로 죽음의 순간, 더 강력한 힘을 발휘
“갓이라고?”
아이템 등급은 레전드가 끝이 아니었던가?
아니다. 게임사도,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발견된 최고 등급이 레전드였고, 그것만으로도 절대자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하계, 즉 지상의 일일 뿐이다.
지상의 최강자가 천상에 오르자마자 겉절이 신세가 되는 것을 생각하면 그보다 훨씬 대단한 등급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긴, 천신쯤 된다면 일단 그랜드 마스터보다도 윗줄일 테고…….”
물론 같은 아이템 등급이라도 드롭되는 사냥터의 레벨대에 따라 성능이 하늘과 땅 차이고, 고레벨 사냥터의 매직 등급 아이템이 저레벨 유니크보다 우월하기도 하니 레전드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무려 ‘신’이 고작 ‘전설’에 만족한다는 것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진짜 신이 나타날지는 모를 일이지만…….”
로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천신의 별빛 건틀렛을 다시 바라보았다.
딱히 제한이나 저주가 걸린 것이 아니라면 착용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
철컥.
그렇게 건틀렛을 바꾸어 끼자 생각지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별의 의지 효과로 타이틀 불굴의 의지의 등급이 변화합니다.]
[불굴의 의지][레전드]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당신!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당신의 의지는 누구도 꺾을 수 없습니다.
[보유 효과]
-모든 부정적인 정신 계열 효과 무효화
-모든 부정적인 정신 계열 효과를 강화 효과로 전환
-생명력이 10% 이하로 하락할 시 모든 능력치 100% 상승
바로 로칸의 핵심 타이틀 중 하나인 불굴의 의지가 변화한 것이다. 에픽 등급에서 레전드 등급으로!
그렇지 않아도 천신의 시험조차 무력화시키던 정신 계열 효과 저항 능력이 더욱 강화되어 이제는 디버프를 버프로 전환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존 생명력이 5% 이하로 하락할 시 발동하던 효과가 10% 이하일 때로 조기에 발동하게 되었으며 능력치 상승도 50%가 아닌 100% 상승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미쳤네.”
이건 로칸이 봐도 사기였다.
생명력 10% 이하일 때 발동에 능력치 100% 상승이라고? 전체 생명력의 10%면 이미 생명력이 뻥튀기 된 로칸에게는 충분히 여유 있게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버서크나 광풍 현신을 사용했을 때도 적용되는 효과가 아닌가? 그야말로 일발 역전의 기회를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이것도 사긴데 하나 더라니…….”
어디 그뿐인가? 천신의 별빛 건틀렛에는 또 하나의 특수 효과가 붙어 있었다.
바로 별의 사멸.
별이 소멸할 때 더 크고 밝게 빛나는 것에서 이름을 따왔는지 죽는 순간 발동하는 효과였다.
버서크나 광풍 현신 상태에서는 발동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더 강력한 힘을 발휘 할 수 있게 해 준다니?
그 증폭률은 따로 표시되지 않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수준일 터였다.
그것을 생각하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아주 재미난 생각이 난 것이다.
“흐흐, 이건 이제 갈아 낄 이유가 없잖아?”
장비를 착용하는 동안 한정적인 변화라지만 무려 갓 등급이다.
그 위가 있는지, 혹은 레전드와 갓 등급 사이에 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이니 졸업 템이라 해도 무방할 터였다.
심지어 그 사자왕의 무구보다도 윗줄이니까.
“가만?”
그때, 로칸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갓 등급의 아이템쯤 된다면 ‘무혼’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