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가오칸 (1)
로칸의 도발에 얼굴이 시뻘게진 놈은 몸을 부들거리며 그들을 뒤따랐다.
생각 같아서는 무방비인 로칸의 등짝에 공격을 박아 넣고 싶지만 그러기엔 곁에 있는 사자왕이 너무 무서웠다. 저 미친놈의 성질을 잘못 건드렸다간 천계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겁을 먹은 것은 아니다.
그때는 로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신수를 내어 주고 도주까지 허용했지만 이제는, 지금이라면 방심하지 않고 확실히 로칸은 때려잡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자, 이쯤이면 되겠지?”
그러나 자신감 넘치는 것은 로칸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 하이 마스터에 불과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선공을 양보하지. 덤벼!”
덕분에 자신감이 폭발했다. 선공을 취해도 불리할 판에 아예 선공까지 양보했다.
“이놈! 자비를 바라지 마라!”
대충 자리를 잡고 건들거리는 로칸의 모습에 히라엘이 폭주했다.
결투를 선언하지도 않고, 일방적인 PK를 걸어온 것이다.
생사대적으로 생각하는 존재에게 결투씩이나 되는 것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책이라는 것을, 거기까지가 로칸의 노림수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천신의 관심을 받는 인물을 공격했습니다.]
[천신의 분노! 천족으로서의 힘이 약해집니다.]
“……!”
순간 폭발되던 힘이 약해졌다. 이래 봬도 로칸은 천신의 안배를 손에 넣었고, 마족의 심장을 모으며 추락한 평판까지 돌려놓은 상태였다.
히라엘을 비롯한 천족들은 여전히 그를 원수처럼 여겼지만 시스템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신의 관심을 받고 있는 로칸을 공격한 것에 대한 벌로서 놈의 힘을 일부 빼앗아 가 버렸다.
쩌엉!
그런 와중에 힘 빠진 놈의 창격이 로칸의 배틀 액스와 부딪쳤다.
로칸은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본신의 힘을 발휘했다.
“이게 전부냐! 광풍 현신, 전신 무쌍, 무혼 각성!”
“오?”
대대적인 반격.
대폭 하락한 능력에 적응할 새도 없이 몰아쳐 오는 로칸의 공격에 놈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방어에 급급해졌다.
그리고 사자왕은 그 모습을 아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저 힘은 바로 그가 과거에 쓰던 것이지 않은가?
사용하는 무기가 달랐고, 기술이 달랐지만 무혼 각성으로 일어난 황금사자의 기운은 무척이나 익숙하고 친근했다.
마치 자신의 싸움을 보듯 흐뭇하게 전투를 감상했다.
“천신의 심판!”
구르르릉.
싸움은 의외로 일방적이었다.
천신이 힘의 일부를 거두어 가 버린 것도 있지만 히라엘은 기본적으로 근접 전투에 올 인한 타입이 아닌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마창사. 혹은 하이브리드.
안 좋게 말하자면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스타일이다.
때문에 강력한 저항력을 가진 로칸에게는 쪼그라든 신성 주문이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고, 근접 전투 기술과 힘에서는 형편없이 밀렸다.
그나마 스스로를 강화하는 버프가 아니었다면 버티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일까. 놈은 다른 수를 내었다.
“천신의 방패! 홀리 바인드!”
신성한 힘을 일으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로칸의 몸을 옭아매었다. 최대한 거리를 벌리며 마스터 스킬을 발동시켰다.
“발키리 소환!”
자신을 대신해 싸움을 이어 갈 존재를 소환해 냈다.
[천신의 발키리][Lv 430]
그랜드 마스터급의 전사가 로칸의 앞으로 나타났다.
그와 함께 맹렬히 쏟아지는 공격!
창날의 비라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을 연속 찌르기가 로칸의 몸을 때렸다.
“잡았다, 요놈.”
하지만 그뿐이다.
압도적인 방어력을 관통할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지 못했고, 로칸은 놈의 공격을 몸으로 받으며 전진했다.
“살육의 일격.”
퍼억!
그리고 역으로 묵직한 한 방을 꽂아 넣었다.
이미 공격당한 창대를 부여잡은 상태라 회피도 불가능했다.
남은 것은 일방적인 폭력뿐!
로칸의 배틀 액스가 발키리의 팔과 다리를 베고 머리통을 박살 내었다.
제대로 힘을 쓰기도 전에 빛으로 흩어 버렸다.
“형편없군.”
소환사가 바보이니 놈이라고 별수 있을까.
소환체도 마스터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채 쓰기도 전에 끝장내고 히라엘을 붙잡았다.
다시 날아든 홀리 바인드? 그것은 로칸이 피의 집중을 가하자 간단하게 풀렸다.
덕분에 놈에게 당한 것보다 많은 생명력이 감소했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데 그 정도 희생이야 우습다.
거대한 악력으로 놈의 머리를 움켜쥐고 명치에 묵직한 한 방을 꽂아 넣었다.
“파멸의 일격.”
뻐억!
그 한 방에 놈의 갈비뼈가 몽땅 으스러져 회복 능력으로도 단시간에 회복하기 힘든 뼈의 분절을 일으켰다.
그리고 남은 것은?
살해.
천신의 대사제 하나가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가, 감히 천신의 대사제를……!”
놈을 뒤따라온 천족들이 고함을 질렀지만 그래 봤자 짖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놈들이다. 로칸이 그들을 돌아보며 씨익 웃는 것만으로도 바지에 오줌을 지릴 지경이었다.
놈들의 마음속에 본능적인 공포가 자리했다.
짝 짝 짝.
그때, 사자왕이 좋은 구경을 했다는 듯 만족스레 박수를 치며 나섰다.
짖어 대던 천족들조차 꼼짝 못 하게 하는 박력.
그는 놈들을 쓰윽 돌아본 뒤,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뭐 하냐? 승부 난 거 안 보여? 덤빌 거 아니면 입 닥치고 꺼져!”
“이익!”
천족들은 분노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대사제씩이나 되는 이가 처참하게 격살당했는데 자신들이라고 다를 것이 있을까.
지금은 눌러 참으며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곧 장내가 정리되었다.
“정말 놀랍군. 내 무구들을 모은 것이야 그렇다 쳐도 무혼 각성까지 얻다니. 이거 전성기의 나보다 강하겠는데?”
로칸과 가오칸. 둘만의 시간이 마련되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의 앞에서는 로칸도 감히 건방을 떨 수 없었다.
멋쩍게 웃어 보이자 그는 활짝 웃으며 로칸을 칭찬했고, 얼굴에 금칠하는 시간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곳에서도 사자왕이라 불리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다 로칸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아, 그거? 너도 그랜드 마스터가 되면 알겠지만 그때는 스킬 창조가 가능해지거든.”
“스킬 창조요?”
귀중한 정보였다.
하이 마스터까지는 정보가 있지만 그 이상은 없지 않던가.
그랜드 마스터의 특권에 대해 미리 알 수 있다면 나중에 그 역시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을 때 큰 힘이 될 수 있을 터였다.
마스터에 오르자마자 광풍 현신이라는 최상급 스킬을 만들어 냈듯이.
“그래. 자신이 기억하거나 강하게 이미지를 가진 기술을 그대로 만들어 내거나 변형하는 것이 가능해지지. 제약을 걸어 더 강한 위력을 내게 만들 수도 있고. 나 역시 처음에는 익숙한 기술을 창조해 낸 거고.”
대충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술을 만들어 낸다면 한계가 있지 않을까?
물론 변형이나 아예 새로운 이미지를 떠올려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점도 느꼈다.
“그럼 지금은?”
“흐흐, 글쎄? 그건 비밀이지!”
달라졌다는 뜻이다.
천상에서조차 사자왕이라 불리던 가오칸의 새로운 창조 스킬이 무척 기대가 되었다.
‘한판 붙어 보자고 할까?’
한판 붙어 보고 싶을 만큼.
적어도 황금 사자의 힘보다는 강력한 것일 테니 나중에 그 역시 창조 스킬을 만들 때 도움이 되지 않겠나?
‘아니야.’
하지만 곧 생각을 거두었다.
지금이야 그랜드 마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혼 각성으로 황금사자의 힘을 쓰고 있다지만 언제까지 그 힘에, 사자왕의 잔재에 매몰되어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만약 가오칸의 새로운 기술을 보게 된다면 무의식적으로라도 그것을 따라가게 될 것 같았다.
사자왕과 광풍.
이 둘은 로칸에게 있어 쫓아가야 할 존재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넘어서야 할 존재들이었다.
“아 참, 혹시 광풍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물론 사자왕이라는 표현처럼 이름이 아니라 별칭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광풍? 광풍이라……. 아, 그러고 보니 들어 본 것도 같군.”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답변은 놀라웠다.
아무도 광풍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기에 기대도 하지 않고 던진 말인데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온 것이다.
어쩌면, 퀘스트 광풍의 발자취를 완료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더불어 봉인된 채로도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봉인된 광풍의 배틀 액스의 진짜 힘을 이끌어 낼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네? 정말입니까? 혹시……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아십니까?”
“뭐, 대충은?”
“어디입니까? 아니, 그는 누구죠?”
“흐흐, 맨입으로?”
하지만 가오칸은 짓궂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대체 뭘 원하는 것일까. 그 정도 되는 인물이 천상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로칸의 코 묻은 코인을 원하는 것도 아닐 테고.
그 의문은 곧 풀렸다.
“한판 뜰까? 대신 마스터 스킬은 사용하지 않고.”
“흐흐흐, 좋습니다.”
그의 성격 역시 로칸과 비슷한 것이다.
마스터 스킬, 창조 스킬을 쓰지 않는 것이라면 로칸도 환영이었다.
‘버서크를 쓰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조건이라면 버서크만 써도 충분히 레벨 차이는 극복 할 수 있지 않을까?
컨트롤이라면 자신이 있는 로칸이었으니 자신감과 함께 호승심이 짙게 피어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잠시 후, 광풍 현신의 후유증이 끝나는 타이밍에 둘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 * *
“쿨럭, 이거 반칙 아닙니까?”
“흐흐, 다른 스킬을 쓰지 말라는 소리는 없었잖아?”
대결의 결과는 로칸의 처참한 패배였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비벼 볼 만했다.
이미 한 차례 겪어 본 적 있는 가오칸이지 않은가?
완벽히 파악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전투 스타일은 눈에 익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 대결은 일방적으로 변했다.
버서크.
놀랍게도 가오칸이 사용한 것은 로칸과 같은 버서크였다.
분명 그는 광전사 클래스가 아니었건만, 버서크를 사용하며 힘의 격차를 압도적으로 벌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가오칸은 버프부터 디버프, 속박 주문까지 다양한 능력을 사용했다.
이 정도면 반칙이라고 말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면 반칙은 아니다.
“그랜드 마스터가 괜히 초월자라 불리는 게 아니거든.”
그 또한 가오칸의 일반 스킬인 것이다.
달리 초월자라고도 불리는 그랜드 마스터.
로칸이 또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그랜드 마스터에 이를 경우 다른 모든 직업의 스킬을 익힐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특수한 제약이 붙는 스킬은 사용하지 못하고, 숙련도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쌓을 수 없어 스킬 레벨은 부족하지만 다양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효용은 엄청났다.
지금 로칸이 허무하게 패배한 것처럼.
“끄응, 어쨌든 이제 알려 주시죠.”
“좋아. 내가 아는 그 양반이 그 광풍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들어 볼 때 맞는 것도 같군. 그는…….”
대결이 끝나고, 둘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광풍의 존재.
가오칸이 추정하는 그의 존재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