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3화.지상 (2) (283/500)

 # 283

지상 (2)

개강 모임은 꽤 애매한 분위기에서 끝이 났다.

티격태격 부딪치던 신입생과 재학생 마스터가 결국 2차에서 한판 붙기로 하고 자리가 파한 덕분이었다.

물론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긴 만큼 구경꾼들이야 흥미로울 뿐이고 일부는 내기를 걸기도 했지만, 은연중 서로의 패가 갈리면서 두 그룹으로 나뉜 것이 문제다.

나중에 들어 보니 결국 신입생과 재학생 마스터가 각자 3차를 주도해서 공식적인 술자리는 2차가 끝이었고 나름 전통적으로 가던 3차 포장마차는 가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서로의 재력을 과시하듯 꽤 괜찮은 펍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물론 영민이야 찬업과 함께 교수들을 보내고 따로 술자리를 가져 보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제법 심각했다고 한다.

지는 쪽은 학교를 다니기 편치 못할 만큼.

“재미있군.”

씨익.

다음 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영민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장에서 어린애들 싸움 같은 그 결투가 어떻게 끝이 나든 상관은 없지만, 이걸 이용해 먹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캬루스가 신기를 얻었다라…….”

놈이 말실수로 내뱉은 캬루스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로칸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이미 한 차례 놈과 붙으면서 굴욕 아닌 굴욕을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하이 마스터에 오르고, 무혼 각성으로 그랜드 마스터급까지 거꾸러뜨릴 수 있게 되면서, 또 지상보다는 천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복수전은 딱히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신기’를 획득한 트롤의 마스터가 할 일은 뻔하기 때문이다.

전쟁.

암묵적 휴전 상태가 되었던 지상의 판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인간 황제인 로칸이기에 그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신기를 이미 얻었다면 익숙해지기 전에 빼앗거나 격살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건 너무 아쉽다. 모처럼의 강자인데 그리 쉽게 처리하는 것도 아깝지 않은가.

과거 경험해 보았던 캬루스의 전투력은 신기가 없어도 실로 무시무시한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이쪽도 상황이 달랐다.

새로운 스킬들도 얻었고, 사자왕 가오칸에게 지옥 훈련도 받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활쟁이를 상대하는 방법 역시 혹독하게 대비했으니 설령 그가 진정한 그랜드 마스터의 수준에 오르더라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다시 천상에 오르기 전 한번 밟아 줄 필요도 있겠지.”

지상은 이제 로칸에게 훌륭한 자금 공급책이 되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막대한 골드가 수중에 들어오니, 천상에서 코인 걱정 없이 돈지랄을 하기 위해서는 지상의 영지들을 안정적으로 굴릴 필요가 있었다.

물론 미용 포션과 지금 수금한 골드만 있어도 돈이 부족할 일은 거의 없겠지만, 타이탄을 처치하고 너무 바로 천상을 향한 탓인지 감히 자신을 얕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도 불쾌했다.

오죽하면 신궁이니 하는 트롤 유저 길드까지 자신을 폄하하고 있을까.

없는 자리에서는 나라님 욕한다지만 그걸 들어 버린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머릿속으로 빠르게 작전을 짠 로칸은 후배 재학생인 마스터 레벨 유저의 아이디를 떠올렸다.

딱히 감추지는 않은 탓에 찬업을 통해 이름을 알아내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는데, 마침 인간 종족인 까닭에 그를 불러내는 일 또한 쉬워졌다.

“이게 좋겠군.”

놈의 이름을 떠올린 로칸은 즉시 재상을 불렀다. 자신이 전면에 나설 경우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전 황제인 그의 이름을 빌어 퀘스트를 내린 것이다.

그것도 대결의 약속 시간 직전에.

시간제한을 걸고 다른 지역으로 보내 버리는 사실상의 감금 퀘스트였으니 로칸쯤 되지 않는 이상 약속 시간까지 돌아오는 것은 무리다.

만약 퀘스트를 포기하고 대결을 치른다? 그럼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터였다.

아무리 마스터 레벨이라지만 재상씩이나 되는 존재가 직접 내리는 퀘스트를 거부하고 분노를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전 로칸처럼 전쟁 상황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어 재상이 오히려 숙이고 나와야 할 때가 아니라면.

“그럼 가 볼까?”

거기다 아주 매력적인 보상까지 걸어 두었으니 한 번의 굴욕을 감수하고라도 꼭 완료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샘솟을 터였다.

“폴리모프.”

그리고 그가 재상에게 직접 퀘스트를 받는 것을 확인한 로칸이 그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를 대신해, 대결이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다.

물론 상황이 난처하게 된 녀석이 현실에서 메시지 등을 보내 대결을 취소하려 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어리둥절한 답을 받게 되겠지.

이미 와 놓고 무슨 소리냐고 말이다.

그렇게, 로칸은 놈을 대신해 대결 장소에 섰다.

‘얄팍하군.’

대결 장소는 인간과 트롤의 접경 지역이었다.

현재는 휴전 상태라서 기껏해야 분쟁 지역 정도로 분류되는 곳이었으니 병사들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때문에 난입의 여지가 있는 것은 자잘한 몬스터들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레벨이 높지 않아 영향을 주기는 어려웠다.

신입생은 그 점을 이용했다.

‘같잖은 무력시위라니.’

상대를 위압하기 위함인지 무력시위를 하듯 자신의 길드원들을 잔뜩 이끌고 온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주변 몬스터 정리, 그리고 참관이라고 하지만 그 의도는 명맥해 보였다. 그들 하나하나가 이 근방 사냥터의 레벨과 맞지 않는 마스터 레벨이었으니까.

반면 이쪽은 혼자다.

어차피 길드 대 길드의 구도를 가져가면 불리한 것은 고수의 숫자가 부족한 자신 쪽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인간 광전사인 재학생은 따로 아군을 부르지 않았다.

전투에 대한 결과를 판정하는 것이야 동영상 녹화를 뜨면 그만이니까.

‘머리가 나쁘지는 않군.’

로칸은 그 판단에 손을 들어 주었다. 만약 길드원들을 끌고 왔다가 문제가 될 경우 길드전이나 몰살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겠나.

상대가 비겁하게 나온다면, 어차피 적대 진영인 그들이 살아남기는 어려울 테니까.

“오, 안 쫄고 나오셨네요?”

폴리모프로 모습을 바꾼 로칸이 가슴을 쭉 펴고 나서자 신입생은 이죽거리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 뒤로 팔짱을 끼고 으스대며 선 트롤들의 뻐드렁니가 우스웠다.

“시작할까?”

목소리로 들킬 수도 있는 노릇이기에 로칸은 말을 아꼈다.

목소리를 깔고 곧장 대결을 시작했다.

“풉, 목소리 깔면 누가 무섭답니까? 아 참, 지금 이 모습 학교 애들도 관전 중인데 괜찮죠?”

마스터는커녕 익스퍼트에 간신히 들어 있는 이들도 보인다 싶더니 동기나 선배 몇을 대동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박살날 건 하나이니 상관없지.

로칸이 으쓱거리자 놈의 눈빛이 바뀌었다.

트롤 중에서도 이름 날리는 신궁 길드의 일원인 자신을 얕보았다고 느꼈는지 즉시 활을 들어 올리며 결투 시작을 선언했다.

“그럼 시작하죠.”

파바밧.

자신감 넘치는 놈이지만 선공을 양보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놈의 주력 클래스는 사냥꾼. 거리를 확보할수록 유리해지는 것이기에 지체 없이 화살을 쏘아 냈다.

따당!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다.

견제가 아닌 전력을 다한 공격임에도 로칸은 꿈쩍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화살들을 모조리 쳐냈다.

“용용이 소환, 얼음 덫, 둔화의 화살!”

그 모습에 놈이 인상을 쓰며 좀 더 거리를 벌렸다.

앙증맞은 날개가 달린 공룡 소환수를 소환하고, 로칸의 접근을 막기 위해 덫 설치와 견제를 동시에 이루어 냈다.

‘제법이군.’

그 연결이 꽤 자연스러워서 로칸도 녀석을 달리 보았다.

‘하긴, 마스터 레벨쯤 되려면 저 정도 컨트롤은 기본이지.’

[타이틀 드래곤 슬레이어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하지만 악수다. 용족 계열의 소환수를 전투력에서 최고로 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황일 때의 이야기였다.

감히 드래곤 슬레이어인 로칸에게 어쭙잖은 용족을 꺼낸다? 그건 죽여 달라고 사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타이틀 드래곤 슬레이어의 효과는 비단 용족을 대상으로 하는 위력 증폭에만 있지 않으니까.

용족을 대하는 것만으로 능력치가 상승하고 저항력이 올라갔다.

황금사자 세트가 아닌 다른 장비를 착용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라면 놈이 정타를 날려도 로칸에게 대미지를 주기 힘들 터였다.

“전신의 돌격.”

“……!”

그러나 로칸은 그조차도 맞아 줄 생각이 없었다.

말살의 사슬을 지우고 새롭게 조합해 낸 돌진 계열 조합 스킬.

그것이 발동하며 놈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마, 막아!”

퍼억!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가속에 놈이 당황했다. 그리고 실수를 했다.

이동 스킬을 사용해 몸을 피해도 부족할 판에 감히 그를 가로막으려 든 것이다.

로칸이 정면으로 밀고 들어왔고, 또 그 사이에 깔린 얼음 덫을 믿은 것이겠지만 로칸의 새로운 조합 스킬에는 이미 ‘슈퍼 아머’ 효과가 들어가 있었다.

모든 부정적 효과를 무시하는 슈퍼 아머가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빙결의 기운을 깨뜨렸다.

용용이라 불리는 공룡 소환수를 튕겨 내 버리고 놈의 가슴팍까지 도달했다.

“컥!”

그 한 방에 놈이 패대기쳐졌다.

사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생명력이 못해도 50%쯤까지는 내려간 듯싶었다. 로칸의 숄더 차지는 그만큼 어마어마한 위력을 갖고 있었으니까.

이어 한두 방만 더 때려도 놈을 끝장낼 수 있겠지만 로칸은 여유를 부렸다. 대게 이런 놈들은 너무 일찍 끝낼 경우 반칙이니 방심이니 하며 계속해서 덤벼들기 마련이니까.

아예 다시는 덤빌 생각도 못하게 처음부터 철저히 짓밟아 줄 필요가 있었다.

“미친 새끼!”

자신의 꼴을 뒤늦게 알아차린 놈은 시뻘게진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상대가 일부러 공격을 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길드원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망신이 또 없었다.

이걸 만회하는 방법은 단 하나, 승리를 가져오는 것뿐이었다.

“증식하는 덫! 화살 비! 생명 회복!”

이를 앙다문 녀석은 재빨리 스킬을 연계했다.

최대 다섯 개까지 불어나는 덫을 뿌리며 하늘을 향해 화살을 연사했다.

그러면서도 소환수의 생명력과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접하군.”

그러나 너무 평범했다.

로칸이 유령처럼 횡으로 이동하자 화살 비는 애꿎은 땅을 때릴 뿐이었고, 덫은 다가서지 않으면 그만이다.

“오라 폭격.”

대신 다른 것을 날려 보냈다. 난무를 펼치듯 오라를 뽑아내 놈에게 마구잡이로 쏘아 낸 것이다.

폭격처럼 손도끼라는 매개가 없어 소모되는 마나 양은 상당했지만 그만큼 위력 또한 증폭된 원거리 공격이 놈이 있던 자리를 초토화시켰다.

“용용이, 광폭화! 가이드 샷!”

하지만 놈 또한 이동기를 발현해 피해 냈다.

조합 스킬로 회피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일반 스킬로는 피하기 어려운 공격임에도 어렵지 않게 피해 내고 반격을 가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소환수의 광폭화. 그리고 추적 기능이 달린 화살 공격.

정석적이기에 너무나 지루한 그것을 보며 로칸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점멸.”

번쩍!

로칸의 몸이 빛과 함께 소멸했다. 그리고 놈의 머리 위에서 다시 생성되었다.

“헉!”

가시거리 내의 장소까지 단숨에 이동하는 조합 스킬이 놈의 심장을 멎게 만들었다.

데구르르.

놈이 볼썽사납게 바닥으로 몸을 굴렸지만 정작 이어지는 공격은 없었다.

로칸이 일부러 공격을 하지 않고 놈을 농락한 것이다.

대신, 먼지를 뒤집어쓰고 급히 몸을 일으키는 놈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뒤 잡기.”

“……!”

다시 로칸의 몸이 허깨비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놈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이 또한 새로운 생성 스킬.

반원을 그리듯 초고속으로 이동하여 상대의 뒤를 잡는 스킬로 무방비한 등짝을 마주했다.

쐐애액!

그때, 바람을 찢는 소리가 났다. 관전 중이던 트롤들이 일제히 공격을 쏟아 낸 것이다.

퍼억!

하지만 무시. 놈들 따위의 공격은 무시하고 눈앞의 상대부터 머리를 쪼개 놓았다.

“아니!”

“미친! 방어력이 몇이야!”

길드원의 처참한 패배를 지켜볼 수 없어 개입한 그들의 행동은 곧 자신들에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끼어들었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로칸이 그들을 향해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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