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4화.지상 (3) (284/500)

 # 284

지상 (3)

그건 사건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작은 해프닝이자 이변 정도로 끝났겠지만 일대일 대결에 길드원들이 끼어들면서부터 간단하지 않은 문제로 변질되었다.

비열하게 일대일 대결에 끼어든 것은 물론이고, 다수가 소수를 핍박했으니 아무리 적대 진영이라 해도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아니, 비난 정도가 아니다. 이건 길드 간의 갈등 그 이상으로 변모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소수를 핍박한 다수가 무참히 박살 났다는 것에 있었다.

-로칸 : 어떻게 됐어?

-하멜 : 이야기는 됐습니다. 근데 정말 하시게요?

-로칸 : 해야지. 명분이 생기잖아? 흐흐.

신궁 측에서는 쉬쉬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로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작은 수를 내었다.

바로 길드 간의 대립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트롤 종족 중에서도 상위인 신궁에 비해 재학생 마스터가 소속된 트라비아 길드는 중소형 수준에 불과했지만 작은 꾀를 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로 로칸의 길드 가입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연고도 없이 곧장 트라비아 길드에 가입할 수는 없었기에 그나마 친분이 있는 하프엘프 성기사, 성바퀴 하멜을 먼저 가입시켰다.

-하멜 : 아…….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가입 신청한다고 이야기 해 둘게요.

그 역시 얼마 전 마스터 레벨을 찍었다고 했으니 트라비아 측에서야 쌍수 들어 환영했고, 그가 다시 ‘지인’을 가입시키겠다고 했을 때 역시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허락했다.

예상한 대로 일이 진행되자 로칸은 곧장 트라비아 길드에 가입 신청을 넣었다.

인간의 왕국, 레스토니아의 황제이자 최강의 유저인 그가 어설픈 길드에 가입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길드)티키타카 : 헉? 로칸 님?

-(길드)미리내 : 진짜 로칸 님이십니까? 황제? 인간 광전사?

-(길드)토레카 : 와, 하멜 님 인맥 미쳤다. 로칸 님이 우리 길드에 들어오시다니! 이제 우리 길드가 대륙 최강이 되는 건가요?

-(길드)로칸 : 반갑습니다. 사정상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지만 하멜의 권유로 잠시 몸을 담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잘 부탁합니다.

[트라비아 길드장 트리니티가 일반 길드원 로칸에게 부길드장의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가입과 동시에 길드 채팅창에 불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륙 최강자인 로칸이 길드에 들어왔으니까.

심지어 길드장은 면식조차 없음에도 대번에 부길드장 자리까지 내어 주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길드)로칸 : 한데 듣자 하니 신궁 길드와 마찰이 있었다고요?

-(길드)트리니티 : 어…… 벌써 들으셨군요. 역시 황제라 그런지 정보력이 남다르십니다. 그게, 저희 길드원 하나가 신궁 소속 트롤 유저랑 일대일을 하기로 했는데 승리하려는 순간 상대 길드원들이 끼어든 모양입니다. 결국 승리하기도 했고, 생각보다 상대들이 약했는지 혼자서 다 죽인 모양인데 따로 문제 삼기에는 저희 쪽 전력이 부족해서…….

결국 로칸이 먼저 말을 꺼내자 길드장이 대표해서 아는 사실을 늘어놓았다.

로칸에 대한 금칠로 시작하긴 했지만 영 자신 없는 모습.

결국 문제 삼아 봐야 나올 것도 없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도 아닌 까닭에 그냥 덮고 넘어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

그러나 로칸은 이 사건을 그냥 흘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부족한 전력? 이미 자신이 들어온 시점에서 전력의 열세 같은 것은 사라졌다.

더구나 그가 먼저 가입시킨 이들도 이곳에 소속되어 있지 않던가?

클릭저항 밋티.

성바퀴 하멜.

무한의 네크로맨서 폴텐.

이 셋만 있어도 충분히 어떤 길드와도 비벼 볼 만했다.

-(길드)로칸 : 힘이 부족하다고 그런 비열한 짓거리를 한 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지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힘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이참에 배상금까지 두둑이 뜯어내시죠.

-(길드)트리니티 : 배상금까지요? 물론 그래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하지만 어떻게…….

길드장인 트리니티는 두둑한 배상금이라는 소리에 눈이 돌아갔다. 아무리 잠깐 몸을 담는 것이라지만 로칸이 있으니 무엇이 두려울 게 있으랴.

게다가 어차피 상대는 언젠가 싸워야 하는 상대.

적대 진영의 길드였다.

로칸의 적극적인 모습에 절로 자신감이 샘솟고 길드장으로서의 욕심도 커졌다.

로칸이 뒤를 봐준다면, 혹은 그가 자신한 두둑한 배상금만 있어도 길드를 불리는 것은 금방이다.

나중에 탈퇴를 하더라도 로칸이 몸담았던 길드라는 인연을 내세우면 마스터 레벨 이상의 유저를 모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길드)로칸 : 부족하지만 저에게 전권을 주신다면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길드)트리니티 : 물론입니다. 뭐든 하셔도 좋아요. 길드장 자리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준비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끝이 났다. 기회를 포착한 트리니티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니까.

지원이라고 해 봐야 돈 들어가는 일도 아니고 그저 그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길드)로칸 : 아 참, 그 일의 발단이 된 길드원은 당분간 아무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놈들과 부딪칠 때도 빠져 있도록 해주시고요. 만약 그 친구가 죽거나 하면 저 쪽에서 언플을 할 게 뻔합니다.

-(길드)트리니티 : 물론입니다. 그 녀석 저랑 개인적으로도 친합니다. 입 무거운 녀석이기도 하고 로칸 님의 광팬이니 절대 나서지 않을 거예요.

추가로 요청한 사항도 즉시 받아들여졌다.

길드장이 책임지도 그를 단속하겠다고 했으니 정신없이 퀘스트 수행 중일 녀석이 돌아와도 이 사건의 이상한 점 같은 건 나타나지 않을 터였다.

‘우직한 녀석처럼 보이긴 했으니까.’

로칸이 따로 알아본 바로도 녀석은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거나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자랑을 하고 다닐 타입도 아니다.

녀석만 조용히 해 준다면, 로칸이 폴리모프를 해서 벌인 일이라는 것도 소문날 일이 없었다.

[트라비아 길드, 신궁 길드에 책임을 묻다.]

[트롤 종족 최강 길드 신궁에게 시비를 건 트라비아 길드는 어떤 곳일까.]

[속보. 로칸, 트라비아 길드 부길마로 밝혀져.]

[일대일 대결을 방해하고 몰매를 놓으려던 신궁 길드의 비매너 행동을 규탄한다!]

[로칸, 신궁 길드의 책임 있는 사과와 보상이 있지 않으면 대가를 치를 것.]

로칸은 길드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자마자 자신의 힘을 동원해 소문을 퍼트렸다.

다른 곳도 아닌 신궁 길드이기에, 또 다른 이가 아닌 로칸이 끼어든 일이기에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잠시 잠적한 동안에도 무수한 소문을 일으키던 로칸이었으니까.

소문은 당연히 종족, 진영을 불문하고 널리 퍼져 나갔고 한참이 지나서야 상대의 공식적인 답변이 나왔다.

[신궁 길드, 우리는 함정에 빠진 것.]

[신궁 길드, 로칸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다.]

[신궁 길드, 길드원의 패배는 인정하지만 배상을 하라는 것은 터무니없다.]

[신궁 길드, 우리는 고작 이름값 따위에 겁먹지 않는다. 불만이 있다면 직접 찾아와라.]

[신궁 길드, 원한다면 트라비아 길드와 길드전을 치를 용의도 있어.]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표였다.

게임 웹진을 비롯한 각 언론사들은 그 말을 받아 적기 바빴다. 좀 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언어까지 섞어 가며.

덕분에 신궁 길드가 좀 더 난처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 기뻐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로칸과 대립각을 세운다는 것은, 패배하기 전까지는 동급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소리이니까. 오히려 큰소리를 뻥뻥 치며 이름값을 높이고 싶은지도 모른다.

만약 로칸이 정말로 찾아오면? 도망가면 그만이다.

그가 나타났다는 곳을 피해 사냥하고, 피한다는 의혹이 있으면 퀘스트 수행 중이라 둘러대며 상대해 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들의 아지트는 트롤 종족의 수도에 위치해 있으니까.

전쟁이 나지 않고서야 설마하니 여기까지 찾아오겠나?

그런 속셈일 게 분명했고, 로칸도 충분히 예상하던 바였다.

‘잔뜩 쫄아서 숙이고 나왔으면 실망할 뻔했어.’

다른 길드라면 숙이고 나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칸이 이처럼 강하게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신입생이 나불거리던 말이 컸다.

캬루스가 신기를 얻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을 정도라면 그 길드 내부에서는 이미 꽤 퍼진 생각과 소식일 테니까.

곧 로칸과 황금사자 진영을 엎어 버릴 수도 있다고 믿는 놈들이 이 정도 협박과 엄포에 끄떡이나 할까?

로칸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이 같은 도발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상대의 반응은 딱 예상대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쪽도 예정된 대응을 하는 수밖에.

“그럼 가 볼까?”

씨익.

사악한 웃음과 함께 로칸이 카이를 소환했다.

날갯짓 한 번에 수십 미터씩 쭉쭉 뻗어 가는 대붕의 기동력을 살려 단숨에 트롤 진영의 깊숙한 곳까지 뻗어 나갔다.

“이쯤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신궁 길드가 자주 출몰하는 사냥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지상에서 마스터 레벨들이 사냥할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게다가 슬슬 마스터 레벨에 오른 유저와 그들을 보유한 길드들이 늘어나면서 ‘전용 사냥터’와 ‘공용 사냥터’가 구분되기 시작했기에 장소는 더욱 한정적이었다.

신궁 길드 전용 사냥터, 파괴의 망치 오우거 둥지.

무지막지한 괴력을 발휘하는 마스터 레벨 오우거들의 서식지이지만 원거리에서 상대를 농락하는 것이 주특기인 신궁 길드에게는 이만큼 쉽고 효율적인 사냥터가 따로 없었다.

로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카이, 붉은 유성.”

로칸은 자신의 조합 스킬에서 붉은 유성을 지웠다.

하지만 놀랍게도, 카이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상태였다.

카이 역시도 스스로 마스터 레벨에 오른 만큼 엘리멘탈 바리어와 광풍의 칼날 이외에 몇 가지 스킬을 추가로 습득한 것이다.

물론 로칸의 스킬과 결합했을 때 더 강한 파괴력을 발휘하겠지만, 고작 마스터 레벨 유저들을 상대하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 저기……!”

콰과과광!

대붕으로 변한 카이의 추락에 대응할 수 있는 자는 얼마 없었다.

특유의 몸놀림으로 회피를 시도했으나 범위가 워낙 넓어 대부분 충격을 피할 수 없었고, 간신히 피한 놈들도 비슷한 위치에 모이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오라 폭격!”

콰과과과과과과광!

그런 놈들의 머리 위로 로칸의 광기 어린 오라가 떨어졌다.

로칸의 공격력에서 한층 증폭된 위력!

과연 그것을 받아 내고도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자들이 있을까?

어불성설이다. 그건 천상의 하이 마스터들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전신의 돌격!”

쿠당탕탕!

그나마 빗맞아 버티거나 방어 스킬을 중첩하고, 동료를 방패 삼아 살아남은 자들도 로칸의 질주에 형편없이 무너졌다.

팝콘처럼 튀어 오르며 시체가 될 뿐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설마 로칸이 여기까지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방심이 큰 화를 불러왔다.

“호오, 쏠쏠하겠는데?”

사냥꾼의 전매특허 스킬인 ‘죽은 척하기’까지 간파하며 시체 하나하나를 확인 사살한 로칸이 듬뿍 쌓인 아이템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른 진영인 탓에 PK 사냥만큼이나 드롭률이 좋은 것이다.

단 한 번의 습격으로 신궁 길드에 큰 타격을 준 로칸은 적당히 파괴의 오우거들을 상대로 컨트롤 연습을 하며 놈들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에이, 연습도 안 되네.”

한 30분쯤 기다렸을까. 놈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로칸이 이곳까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죽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소나기는 피해 가라.

유명한 격언이지만 실컷 맞도발을 한 입장에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오게 해 줘야지.”

때문에 로칸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놈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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