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
천년 전기뱀장어 (1)
“뭐, 피똥 좀 싸 보라지.”
이른바 천상 러시. 그것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흥미로운 글들을 접한 로칸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결국 그들이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 아니던가? 오
히려 그들이 그 과정에서 무수히 죽어 나가고, 레벨이 다운되고, 개고생을 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흐흐흐, 그렇다면 나라고 몸 사릴 수는 없지.”
또한 그 덕분에 천년 전기뱀장어를 상대로 걱정부터 하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남들은 저렇게 죽어 나가는데 자신이 언제부터 몸을 사려가면서 플레이를 했단 말인가?
잠수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고, 즉시 천년 전기뱀장어 사냥에 나섰다.
“고약한 곳에도 사는군.”
천년 전기뱀장어의 서식지는 중립지대에 있었다. 다만 마계라 해도 좋을 만큼 고약한 지형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 밀림.
어떤 의미에서는 사막보다 고약하고 설원보다 난해한 지형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지형의 특성상 숲과 나무, 풀 더미를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데 그들과 닿기만 해도 온갖 상태 이상이 일어났으니까.
[대지의 축복 효과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전천후 스킬인 대지의 축복이 밀림의 골칫거리를 단번에 해결해 준 것이다.
정말이지 몇 번을 생각해도 대지의 타이탄을 먹어 치운 것은 잘한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서리의 타이탄이 아쉬워지는군.”
때문에 서리의 타이탄과 검은용의 심장이 못내 아쉬워지는 로칸이었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다.
배틀 액스 이외에 밀림용 마체테를 꼬나 쥔 로칸은 툴툴대면서도 즐겁게 밀림을 헤치고 나갔다.
끼기기긱?
상태 이상 때문이 아니라도 밀림은 꽤나 골 때리는 동네였다. 이곳에 기거하는 동식물 중 도무지 제대로 된 놈들이 없는 것이다.
거대한 식인 꽃, 식인 원숭이, 사람 몸뚱이만 한 살인 말벌 등, 형태는 물론 전투 방식까지 까다로운 놈들이 종합 선물 세트처럼 나타났다.
“크허허허허헝!”
어지간한 놈들은 광기의 외침 한 방에 침묵하거나 달아나 버리기는 했지만 개중에는 용감하게 싸움을 걸어오는 놈들도 많았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덕분에 로칸이 레벨업을 할 지경.
타이탄 등 최상위 몬스터를 연달아 사냥하고 밀림을 혼자 뚫은 덕분에 로칸은 무려 393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앞으로 6레벨.’
천년 전기뱀장어를 비롯해 밀림의 몬스터들을 몰아잡고 전격의 타이탄까지 잡는다면 1레벨쯤은 더 올릴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정말 그랜드 마스터가 코앞으로 다가온다.
399레벨이 되면 그랜드 마스터 승급 퀘스트를 받을 테니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어쩌면 그랜드 마스터 승급 퀘스트 또한 이전 승급 퀘스트들과 같이 이전의 기록이 소급 적용되어 자동 승급이 될 수도 있고.
“캬아아아아악!”
“제길, 귀찮은 놈이 나왔군.”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이동하던 로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뱀이었다.
[천상 밀림의 맹독 아나콘다][Lv 381]
인간 따위는 한입에 꿀떡 삼킬 수 있는 거대한 존재.
일단 아가리부터 벌리고 덤벼드는 놈을 힐끗 쳐다본 로칸은 귀찮다는 듯 두 손을 뻗었다.
놈의 위턱과 아래턱을 잡고 있는 힘껏 벌렸다.
부우욱!
가죽 북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놈이 침묵했다.
장기인 몸통 조이기 따위는 시도해 볼 틈도 없이 그대로 죽어 버린 것이다.
[타이틀 만독불침의 효과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빨을 타고 흐르는 맹독이 몇 방울 튀었지만 로칸에게는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래도 가까이 오기는 한 모양이군.”
로칸 같은 괴력이 없다면 매끈하고 단단한 피부는 무기도 잘 박히지 않아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주제에 경험치는 쥐꼬리만 한 놈이었지만 로칸은 투덜대는 대신 긍정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아나콘다는 물 주위에 사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렇다는 것은 그가 찾고 있는 천년 전기뱀장어가 살고 있는 강에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빙고.”
아니나 다를까, 조금 더 걷자 밀림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거대한 강이 나타났다.
이 어딘가에 천년 전기뱀장어가 있다.
로칸은 즉시 물에 들어갈 채비를 했다.
“멀록의 아가미, 사용.”
물속에서도 한시적으로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는 멀록의 아가미.
원래는 탁한 물속을 깨끗한 시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투시의 물안경도 써야겠지만 로칸에게는 더 좋은 것이 있었다.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
그것을 사용하자 필터를 단 것처럼 흙탕물 같던 밀림의 강이 에메랄드빛 바닷속처럼 시원하게 보였다.
‘어디냐…….’
하지만 그렇다고 천년 전기뱀장어를 찾기 쉽다는 뜻은 아니다. 밀림의 강 속에는 꽤나 많은 몬스터들이 있으니까.
[자이언트 피라냐][Lv 370]
[자이언트 엘리게이터][Lv 387]
그냥 들어갔다가는 물고기 밥이 될 것만 같은 이름들이지만 로칸은 겁을 내는 대신 몸을 풀었다.
리프 어택을 사용해 단숨에 강의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불청객의 방문에 수중 몬스터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대부분은 도망쳤고, 몇몇은 경계했으며 일부는 탐욕을 드러냈다.
이곳의 제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로칸을 물어뜯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은신.”
하지만 로칸은 전투를 피했다. 어차피 목적은 하나였으니 이놈들과 드잡이질을 해 봐야 나올 것이 없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10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서야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참지 않았다.
감히 자신을 먹잇감으로 바라본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었다.
“크허허허허헝!”
광기의 외침을 담은 음파가 물을 타고 거칠게 퍼져 나갔다.
파다다다다닥.
그 일갈에 놈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힘의 차이를 느끼고 화들짝 놀라 도망치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굴하지 않고 꿋꿋이 다가오는 놈들도 있었다.
바로 자이언트 엘리게이터.
숲으로 따지자면 사자나 호랑이는 몰라도 늑대쯤은 되는 놈들이 은근한 속도로 다가오며 로칸을 노렸다.
“오라 폭격.”
퍼어어엉!
물살을 가르며 날아드는 오라의 향연. 그러나 놈들은 거구에 맞지 않게 유연한 몸놀림으로 피해 냈다.
아무래도 원거리 공격은 물속에서 느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밀림의 강물은 보통의 물이 아니라 다량의 마나를 함유하고 있었으니까.
“어쭈?”
그것이 로칸의 심기를 자극했다.
“점멸. 파멸의 일격.”
퍼억!
원거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붙으면 그만이지!
로칸은 즉시 놈의 배 쪽으로 이동했다.
방어력을 꿰뚫는 한 방을 내질러 놈의 몸을 뒤틀어 놓았다.
“살육의 일격.”
이어 도끼질까지!
자이언트 엘리게이터의 방어력은 천상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었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제대로 물이 오른 로칸의 공격력은 약간의 저항감을 끝으로 놈을 가뿐히 썰어 버렸다.
물을 타고 퍼지는 핏물.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 덕분에 시야가 가려지는 일은 없었지만 놈들의 흉성을 자극한 것이 문제다.
‘좋아. 도화선을 당겼으니 됐겠지.’
겁을 먹고 도망치던 놈들까지 눈이 돌아가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로칸이 이동 스킬을 총동원했다.
지독한 난전이 펼쳐질 그곳을 벗어나 다시 은신으로 몸을 숨겼다.
아비규환.
물어뜯기는 것은 로칸에게 당한 자이언트 엘리게이터만이 아니었다.
놈을 뜯어 먹는 놈들은 또 다른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었고, 먹이사슬의 하위에 있는 놈들이라고 그냥 당해 주지만은 않았다.
힘껏 저항하며 서로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이런 뷔페에 대형종이 빠질 수 없다.
잠시 경계하고, 틈을 노리던 대형 수중 몬스터들이 다시 그들을 덮쳤다.
어설프게 물고 물리던 놈들이 단숨에 놈들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청소가 되었다.
‘아직인가?’
그 참상에 한 다리 걸칠 수만 있다면 꽤 많은 경험치를 주워 먹을 수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로칸은 잘 눌러 참았다.
이 모든 것은 이 강의 최상위 포식자, 천년 전기뱀장어를 끌어내기 위함이니까.
‘왔다!’
그리고 잠시 후, 기다리던 놈이 나타났다.
‘저게 뱀장어라고?’
천년을 살았다더니 놈의 몸집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저 먼바다에 산다는 고래상어가 이만할까.
뱀장어라는 이름은 연상하기 어려운 거대한 몸집에 살짝 주눅이 들 정도였다.
파지지지직!
그런 놈이 등장하자 모든 몬스터가 행동을 멈췄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한 정적이었다.
공포? 아니다. 놈에게서 강력한 전격이 뿜어진 것이다.
강력하지만 교묘하다. 놈들을 새까맣게 태우는 대신 근육과 신경으로 침투해 마비를 일으켰다.
그 난리를 치던 놈들이 이제는 얌전히 멈춰 서서 강의 주인, 천년 전기뱀장어의 처분을 기다렸다.
허어어어어업.
그러나 강의 주인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자신이 멈춰 놓은 놈들을 흡입하듯 모조리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지켜보며 로칸도 타이밍을 재었다.
‘몇 분 지났지?’
정확히 30분 전, 자신이 있던 자리를 기억했다. 무려 10분이나 머물렀던 그곳을.
‘지금!’
그 위치에 천년 전기뱀장어가 도착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준비해 둔 수를 꺼내 놓았다.
“시간 역행.”
로칸의 시간이 빠르게 되감겼다.
모든 스킬이, 행동이, 위치가 30분 전 과거로 돌아갔다.
만약 그곳에 지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속에서 나타나리라.
눈이 쌓였다면 눈에 파묻힐 것이고, 건물이 올라갔다면 돌 안에 끼게 될 터였다.
천년 전기뱀장어가 그곳을 지나가는 중이었다면? 자연히 놈의 배 속에서 나타나겠지.
치이이익.
“윽.”
예상은 했지만 벌써 위액에 주변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가장 좋은 위치는 식도 쪽이지만 이 또한 상점 범위 내였다.
“읏차!”
로칸은 일단 주변을 파악하고 다른 몬스터들의 몸을 방패 삼았다. 놈들을 강제로 위액에 밀어 넣으며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전기뱀장어를 잡는 가장 쉬운 방법은 놈을 자극해 방전되게 만든 다음 힘이 빠지면 잡는 것이지만, 이 천년 묵은 괴물이 언제 지칠지, 아니 지치기는 할는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로칸은 플랜 B이자 가장 화끈한 방법을 선택했다.
외부에서, 즉 물속에서 상대하기 어렵다면 놈의 내부로 들어가자, 놈에게 잡아먹히자!
그 과정에서의 소요를 피하기 위해 시간 역행이라는 꾀를 내기는 했지만 어차피 두 번의 기회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제아무리 천년을 묵었어도 고작해야 뱀장어가 아닌가?
이쪽은 신수부터 타이탄까지 다양하게 잡아 보신 몸이다.
“슬슬 시작해 볼까? 광풍 현신!”
이리저리 몸을 옮겨 다니며 놈의 이동에 꿀렁거리는 몸의 변화를 적응해 낸 로칸은 즉시 광풍 현신을 일으켰다.
다행히 광풍 현신으로 거대해진 몸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놈의 내부는 충분히 넓었다.
마치 거대한 광장과 같달까.
그것을 통해 새삼 놈의 어마어마하게 거대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가자, 카이!”
어느새 소환해 낸 카이가 날개를 잃은 로칸을 태우고 날아올랐다.
꿀렁꿀렁.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발생하는 바람이 간지러웠는지 몸이 움찔움찔 떨렸지만 그런 것쯤은 문제 되지 않는다.
“전설을 타는 자!”
영향이 없을 만큼 사이즈를 줄이면 그만이니까.
모든 힘을 집중시켜 안에서 몸을 헤집어 놓거나 뚫고 나가는 것은 하책이다.
가장 상책은 놈의 몸 안 어딘가에 있을 심장을 찾아 심장을 먹는 아귀를 찔러 넣는 것이었다.
‘충분하지. 충분하고말고.’
당초에는 이놈의 심장을 먹일 생각이 없었지만 놈을 보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단순히 덩치가 커서가 아니라, 이만한 존재감을 지닌 놈이라면 슬롯 하나를 채우기 모자라기는 않을 터였다.
당장 하이 마스터 끝자락에 걸쳐 있던 수많은 수중 몬스터들을 일시에 마비시킨 그 능력만 가져올 수 있더라도 대만족이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로칸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천년 전기뱀장어의 몸 내부를 빠르게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