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재회 (1)
“그래, 이 녀석이 있었지.”
붉은 도끼 드록쉬.
강력한 천족 드워프 전사이자 장인인 그의 이름이 새삼 반가웠다.
실력 좋은 대장장이인 줄은 알았지만 가죽까지 잘 다룰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해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코인으로 수집한 정보에 그의 이름이 떡하니 올라 있는 것이다.
“드워프의 손재주라는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것을 확인한 이후에는 곧바로 수긍했다.
드워프는 단지 금속만 잘 다루는 종족이 아니다. 그들이 타고난 것은 ‘손재주’라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죽을 잘 다루는 것도, 혹은 재봉을 잘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그 특유의 섬세한 손재주를 이용해 암기술을 펼치가니 도적질을 하는 이들도 있지 않던가?
씨익.
로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확실히 400레벨에 근접해 있는 놈이라면 믿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계약서로 옭아맬 수 있는 기간은 끝이 났지만 녀석이라면 어떻게든 어르고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멀리에도 가 있군.”
다만 거리가 멀다는 것이 귀찮기는 했다.
로칸을 피하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녀석의 현재 위치는 경계의 마을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이동하는 것쯤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만약 자신이 간다는 것을 알았다면 놈이 도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알 도리가 없으니까.
로칸은 속도를 높여 놈이 있는 도시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흐음, 역시 그런가.”
그린 와이번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도 꼬박 사흘이 걸려 도착한 곳은 광산 도시였다.
민둥산 전체가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것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광물이 보통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드록쉬가 이곳에 머무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광물의 채굴과 장비의 제작. 파괴할 무기를 만들기 위함인지, 돈을 벌기 위함인지, 그도 아니면 자기만족을 위한 고등급 장비 제작을 위함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사이 놈이 쉽게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붉은 도끼 드록쉬? 그 녀석이라면 지금쯤 광산 안에 있을 텐데?”
“그 녀석이라면 광산과 작업장 두 곳만 뒤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여기 왔을 때부터 미친놈처럼 장비 제작에 몰두하고 있거든. 도끼는 아주 놓아 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니까?”
마을에 들어서서 수소문을 하자 드록쉬의 행방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마을에서 유명 인사가 될 정도로 장비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칸에게 빼앗긴 아이템을 보충하기 위한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쉽게 찾을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광산이라…….”
지상에서도 그렇지만 광산은 의외로 진입하기가 번거로운 곳이다.
일직선으로만 길이 나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거나 엇갈리기도 쉬웠고, 고급 광산의 경우 ‘출입증’이 필요한 것이다.
귀중한 자원이 매장되어 있으니 그만큼 보안을 철저히 하는 것인데, 힘으로 뚫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랬다가는 이 지역을 통치하는 초월자의 눈 밖에 나게 될 게 분명했다.
“번거롭게 구는군.”
때문에 광산 안에 있는 몬스터를 처치하거나, 통치자 또는 관리인이 부여하는 특수한 퀘스트를 수행할 필요가 있었지만 로칸은 다른 방식으로 해법을 찾았다.
[봉인석 광산 출입증을 획득하셨습니다.]
바로 코인이다.
광산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이유가 귀중한 광석의 반출을 염려한 것이라면, 그 가치 이상의 코인을 제시하면 그만이 아닌가?
마을에서 기다려도 됐지만 혹시나 놈이 줄행랑을 쳐 버릴까 염려한 로칸은 딴소리를 못 할 만큼 대량의 코인을 관리인의 목구멍에 밀어 넣고 출입증을 발급받아 드록쉬를 찾아 광산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봉인석이라…….’
출입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로칸은 이 광산에 매장된 광물의 정체를 확인했다.
바로 봉인석.
무엇을 봉인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이름임에는 틀림없었다.
‘광물인 채로는 영향이 없는 건가? 어쩌면 특수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군.’
실제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없지만 기분과 감각은 요상하다.
주의를 기울이며 더 안으로 들어가자 열심히 채굴 중인 광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쉽게도 드록쉬는 아니다.
하지만 여기 어딘가에는 있겠지.
로칸은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부르르르.
그렇게 한참을 들어가자 진동 벨트라도 찬 것처럼 허리에 진동이 가해졌다. 마신의 이빨 허리띠가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천신의 안배 또는 마신의 안배.
허리띠가 발작하듯 강하게 반응하는 까닭에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
‘자, 어디냐.’
이미 드록쉬의 존재는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놈이야 언제든 어떻게든 찾을 수 있지 않겠나?
발작하는 허리띠의 반응을 따라 길을 골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라?’
허리띠가 반응하는 것은 폐갱도 쪽이었다.
채굴을 마치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갱도이기에 간단한 표지판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었지만 로칸이 어디 곧이곧대로 말을 들을까. 무시하고 안쪽으로 진입했다.
주변을 밝히는 횃불마저 없는 어두운 폐갱도.
하지만 로칸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이 어둠마저 꿰뚫고 있었으니까.
‘응?’
마침내 도착한 폐갱도의 끝.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뚫다가 만 막다른 골목만이 로칸을 반겼다.
‘끝일 리가 없지.’
부르르르르르.
그러나 허리께는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진동하는 중이었다.
‘부순다.’
그렇기에 로칸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확신이 있었으니까.
“파멸의 일격.”
배틀 액스의 공격력은 압도적이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다. ‘파괴’라는 행위에 맞춘다면 뒤지지 않을 정도로.
쿠웅!
막다른 길을 때리자 묵직한 반동이 느껴진다.
‘다르다.’
하지만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감각이 달랐으니까. 바위를 깨부수는 것과 보호막을 부수는 것은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달랐다.
‘그렇다면.’
광부들은 더 이상 캘 수 없는 거대하고 단단한 암석에 걸린 것이라 생각하고 포기했지만 실상은 강력한 보호 결계가 씌워져 있던 것이다.
감각을 통해 그것을 확인한 로칸은 즉시 무기를 바꾸었다. 본신의 힘을 다해 보호막을 깨부수었다.
“광살!”
쩌저저정!
일정 수준 이상의 대미지가 가해지자 보호막이 회복되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자체 수복 속도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공격력이 들어온 탓에 완전 파괴된 것이다.
우우우웅.
그리고 생겨난 게이트. 로칸은 이것을 본 적이 있었다.
천신의 안배를 얻을 적 나타났던 것과 같은 게이트였으니까.
혹시나 보호막이 다시 생겨날까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 시야가 바뀌었다.
“흐음, 천신 쪽이 맞나 보군.”
나타난 것은 거대한 광장이다.
이전처럼 통로에서 나타나지 않은 것이 이상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럴 법도 했다.
천신의 시험이라는 것은 이미 거친 그가 아니던가?
천신의 인정을 받았으니 곧바로 안배를 얻을 수 있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젠장.”
그러나 뜻대로만 된다면 인생이 아니다.
두리번거리며 제단을 찾는 로칸의 앞으로 하얀 빛줄기가 내려왔다. 그것이 뭉쳐 어떤 형상을 이루었다.
[봉인의 발키리][Lv 400]
나타난 것은 무려 400레벨의 천족 계열 가디언.
천신 계열이라는 것이 확실해지기는 했지만 놈이 나타났다는 것의 의미는 분명했다.
저놈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것.
시험은 시작되었다.
“광풍 현신, 전신 무쌍, 무혼 각성!”
놈의 이름이 빨갛게 빛나는 순간, 로칸 또한 힘을 개방했다.
눈치만 보다가 선공을 양보하는 일 따위는 그의 스타일이 아니니까.
그러자 놈이 창을 들어 빛살 같은 찌르기를 펼쳐 왔다.
까앙!
눈으로 좇기조차 어려운 일격이었지만 로칸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돌진을 하면서도 몸을 움츠리고 놈의 움직임에 집중하자 찌르기의 경로가 눈에 보였다.
바로 심장.
로칸이 광전사 클래스라는 것을 알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철저하게 급소를 공략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오히려 상대하기가 편했다.
‘정직하리만큼 정교하군.’
발키리의 창술은 그가 본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교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상대하기 쉬웠다.
급소라 할 수 있는 부위들만 노려 대니 공격 범위가 제한되고, 반격의 타이밍도 잡기 쉬운 것이다.
후웅!
살을 주고 뼈를 친다.
따라서 로칸은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다. 발키리의 창을 맞아 주고, 더 가까이 접근해 놈을 베어 버린다!
“제길.”
그러나 녀석도 만만치 않았다. 로칸이 가까이 파고드는 순간, 빛으로 화하더니 다른 위치에서 나타난 것이다.
무척 까다로운 이동기였다.
“천신의 이름으로…… 구속하라.”
“……!”
그리고 그때, 다시 나타난 발키리가 다시 한 번 스킬을 발동했다.
그와 함께 벽이 진동하는가 싶더니 네 개의 고리가 튀어나왔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고리들은 곧장 로칸에게로 쏘아졌다.
“어딜!”
까앙!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로칸은 즉시 배틀 액스를 떨쳐 그것들을 쳐 냈다.
하지만 유도 기능이라도 달렸는지 놈들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철컥.
그리고 마침내 수갑과 족쇄처럼 그의 양팔과 다리에 매달리고 말았다.
[천신의 봉인구를 착용하셨습니다.]
[능력치가 제한됩니다.]
[스킬의 위력이 제한됩니다.]
“미친.”
그 결과는 처참했다. 광풍 현신으로 상승했던 능력치가 단숨에 곤두박질을 쳤고, 스킬의 위력마저 제한된 것이다.
“천광 난무.”
“점멸!”
퍼버버벙!
로칸이 당황하는 사이, 그가 있던 자리에 강력한 연격이 떨어졌다.
지금의 능력치로는 받아 내는 것조차 힘들 만큼 어마어마한 위력.
점멸을 통해 어떻게든 피해 내긴 했지만 요행을 거듭 바라기는 무리일 것만 같았다.
“오라 폭격!”
때문에 로칸은 일단 놈을 떨어뜨리는 것에 집중했다. 시간을 벌어 해법을 찾으려는 것이다.
‘시간 역행을 사용할까? 자해하듯 수갑과 족쇄를 때려 파괴해야 하나? 아머 브레이크면 통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천신의 심판!”
“반격!”
그나마 다행인 것은 로칸의 컨트롤이 절정에 달했다는 것이다.
버프를 사용했는지 발키리의 능력치 또한 급상승을 해서 능력치마저 비등하거나 살짝 밀리는 감이 있었지만 철저히 급소만을 노리는 발키리의 공격 패턴을 읽어 간신히 버텨 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버티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만약 이 상태로 시간이 지나 광풍 현신의 지속 시간마저 끝나 버린다면 로칸에게 희망은 사라지는 셈이었다.
‘수를 내야 해.’
때문에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가 필요했다.
“전격 발출!”
쿠르르릉.
무한의 마나에 기반하여 방법을 찾을 때까지 최대한 놈을 떨쳐 내는 것에 집중했다.
“제길.”
그러나 그 또한 여의치가 않다. 위력이 약화된 스킬들로는 놈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기 어려웠으니까.
힘이든 민첩이든 어느 능력치 하나만 조금 더 높았다면 일발 역전을 노려 봤을 텐데, 아슬아슬했다.
몇 번의 공방으로 그것이 확인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버티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만?’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조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했다.
성공 여부도 가늠하기 어려웠고, 실패하면 그만큼 리스크가 클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잠시 행동이 멈춘 순간 일격을 당해 심장이 터지고 목이 잘려 나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로칸은 문득 떠올린 생각을 곧장 실행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