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8화.심판의 땅 (1) (298/500)

 # 298

심판의 땅 (1)

“자모해타, 요, 흑흑.”

로칸이 봉인구를 착용한지 정확히 5분 뒤, 드록쉬는 퉁퉁 부은 얼굴로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노예 생활 3개월.

어색한 존댓말이 시작되고 드록쉬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한 달을 꼬박 채우지 않았던 이전에도 죽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무려 세 달이라니.

그것도 이미 천족과는 척을 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로칸의 밑에서 말이다.

-절대 로칸에게 협력하지 마라.

그와 같은 지시를 받은 바가 있었지만 지금이라면 어쩔 수 없다. 결투의 조건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때는 천족이 아닌 천신의 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내게 뭘 시킬 거지? 요.”

“간단해. 물건을 좀 만들어 주면 되지.”

“……물건?”

이번에는 제작 노예로 부려 먹으려는 속셈일까? 드록쉬는 잠시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자신 정도의 실력 좋은 드워프라면 탐을 내는 이가 많지 않겠나?

묘한 자부심과 절망감이 뒤섞여 복잡한 표정이 된 녀석의 앞으로 한 꾸러미의 가죽이 떨어졌다.

“이걸로 망토나 후드를 만들 수 있겠나? 벼락을 연달아 맞고도 버틸 수 있어야 한다.”

“벼락을? 그럼 이건…….”

재료를 확인한 드록쉬의 눈빛이 달라졌다. 장인 특유의 도전 의식이 끓어오른 것이다.

“이거라면…… 가능하겠군, 요.”

드록쉬의 긍정적인 답변에 로칸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 목적을 꺼냈다.

“자, 그럼……. 다 꺼내 봐.”

“꺼내다니 무엇을…….”

드록쉬는 짐짓 모르는 척을 했지만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일이다. 로칸이 눈을 부라리자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동안 만들어 놓은 아이템들을 하나둘 꺼내 놓기 시작했다.

와작 와그작.

로칸은 그것들을 허리띠에게 먹였다.

유니크 등급으로 몇 개를 먹여도 딱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허리띠이기에 버릇도 들일 겸 먹이를 주지 않은지가 제법 되었지만 공짜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은가?

그가 꺼낸 아이템들 중 유니크 등급만 골라 배불리 먹이기 시작했다.

딱 딱 딱 딱!

물론 마신의 이빨 허리띠는 아무리 먹어도 만족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의 변화를 겪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마신의 이빨 허리띠가 포식 성장의 효과로 한 단계 성장합니다.]

파앗.

검은 빛을 내뿜는 허리띠는 외형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다만 옵션에서는 약간의 변화를 보였다.

[마신의 이빨 허리띠][갓]

마신이 직접 자신의 이빨의 일부를 사용해 만든 허리띠.

무엇이든 씹어 삼킬 수 있을 것 같다.

-방어력 : 6,666

-내구력 : 파괴 불가

-힘 + 500

-체력 + 500

-[포식 성장] 사용 가능

-추가 방어력 + 1,000

-모든 능력치 + 50

-이동속도 + 5%

추가 방어력과 능력치, 그리고 이동속도를 얻은 것이다.

먹인 아이템의 옵션과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웠다.

추가 옵션 자체로만 보자면 그리 압도적이지 못하지만 새로운 방어구 부위 착용 없이 상승을 이루어 낸 것이니까.

보통 그 조금을 위해 아이템이 증발할 위험을 품고 강화까지 하는 것이 아니던가?

안타깝게도 갓 등급의 아이템에는 강화가 불가능했지만 이렇게 성장시킬 수 있다면 풀 강화를 한 다른 장비들과 비교해도 오히려 우위에 있다 말할 수 있었다.

“그, 그건 대체……!”

드록쉬가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허리띠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뿐이었다. 로칸이 말해 주지 않자 포기한 듯, 자신의 작업실로 이동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지?”

“나라면 하루만으로도 충분하다. 요.”

“그래? 그럼 사흘 주지. 그때까지 재료를 다 써도 좋으니까 최대한 옵션 좋은 놈으로 뽑아 놔. 내가 다녀오는 동안 여기에서 기다려야 하는 건 알지?”

“……알겠다, 요.”

다행히 제작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한 부수 재료들이야 로칸이 구해 주었으니 부족함이 없었고, 금속을 제련하는 것이 아니라 가죽에 특별한 처리를 해서 자르고 이어 붙이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손재주 좋은 드워프 중에서도 상위라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드록쉬라면 하루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 대답을 들은 로칸은 씨익 웃으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천년 전기뱀장어 가죽을 이용한 가공품을 만들 재료는 충분했지만 그 같은 장인을 일회용으로 써먹는 것도 아까운 일이 아닌가?

이참에 허리띠에게 먹일 유니크 등급 아이템을 넉넉히 만들어 둘 생각이었다.

그렇게, 약속했던 사흘의 시간이 지났다.

와르르르.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드록쉬는 자신의 작업실 한편에 산처럼 쌓인 광물들을 보며 기겁을 했다. 하나같이 다루기 어렵고 값비싼 광물들이었으니까.

천상에서만 생산되는 광물들인 데다 천계 쪽이 아닌 마계 쪽의 광물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 때문에 광물 자체에 마기가 서린 것들도 상당했고.

다루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로 장비를 만들면 어떤 끔찍한 놈들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뭐긴 뭐야? 이것들로 제작 좀 해 줘. 가능하면 재료가 적게 들어가는 놈들로!”

“……재료가 적게?”

하지만 그의 우려와 달리 로칸의 목적은 하나였다. 다수의 유니크 아이템을 만드는 것이다.

그의 실력이면 흉갑이나 대검 같은 물건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결국 허리띠의 먹이가 될 텐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재료가 덜 들어가는 놈으로 최대한 많은 숫자를 찍어 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알겠네, 요.”

덕분에 드록쉬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까라면 까는 수밖에.

게다가 이만한 재료들을 정련해 장비를 만들어 내는 작업은 그에게도 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막대한 경험치를 쌓을 수 있는 행위였다.

전사이기도 하지만 장인이기도 한 그에게 있어 ‘제작’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무엇을 만드느냐에 따라 상당한 경험치를 습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레벨 업 방법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로칸에게 반발하는 대신 장인 정신을 불태울 수 있었다.

[천년 벼락의 로브][유니크]

천년 전기뱀장어의 가죽을 이용해 만든 로브.

재료 특유의 성질을 강화하는 것에 집중하여 전투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방어력 : 4,500

-내구력 : 100,000 / 100,000

-전격 속성 공격 무효화

-모든 능력치 + 20

-착용 시 얼굴 인식 불가

천년 전기뱀장어씩이나 되는 놈의 가죽을 재료로 사용해 놓고 에픽 등급도 아닌, 유니크 등급이 고작이었다.

아예 가죽 갑옷 같은 놈을 만들었거나 다른 옵션들을 끼워 넣었다면 너끈히 에픽 등급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로칸의 지시에 따라 오직 전격 속성 무효화에만 집중을 한 까닭에 옵션도, 등급도 떨어지는 놈이 나온 것이다.

드워프의 장인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은 까라면 까야지.

“좋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로칸이 그것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대미지를 경감시키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아예 무효화 옵션이 뜨지 않았나? 로칸의 상황과 목적을 생각할 때, 이 정도면 만족이 아니라 대만족이었다.

‘천족을 상대할 때도 좋겠군.’

그리고 또 한 가지. 전격 속성 무효화 옵션을 천족들을 상대할 때도 유용했다.

물론 로브와 망토는 같은 부위로 인식되기 때문에 광풍의 날개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천족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격 중에는 전격 계열 속성인 것이 꽤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록쉬는 지금 자신이 소속된 천계에 쥐약을 뿌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다녀오지.”

아직 자가 수복 중인 광풍의 날개를 대신해 로브를 뒤집어쓴 로칸은 곧장 천상의 룬 북을 꺼내 천계로 이동했다.

‘심판의 땅이…… 이쪽이었지?’

얼굴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효과까지 있었기에 이전처럼 로칸을 보고 경계하는 눈빛은 없었다.

진영을 선택한 천족뿐 아니라 순수 천족마저 테스트 겸 돌아다니는 그의 곁을 지나갔지만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얼굴을 좀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 가지 난관은 있었다. 천계의 이동 수단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본인 확인이 필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보이면 분명 이용이 제한될 것이기에 로칸은 공용 이동 수단을 이용하는 대신, 걸어서 도시를 빠져나왔다.

“어쩔 수 없군. 유니콘!”

대신 유니콘을 소환해 올라탔다.

이동속도라면 대붕으로 변신한 카이 쪽이 훨씬 더 빠르겠지만 그럴 경우 몬스터들의 습격이 우려되는 까닭이다.

신수인 유니콘을 탄다면 그런 걱정은 없다. 신성의 기운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는 놈들은 알아서 길을 열 것이고 유니콘의 속도 또한 느리지 않으니까.

한 가지 문제라면 천족들이 유니콘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지만, 일부러 그들이 잘 다니지 않은 험로를 골라 이동했기에 그럴 가능성도 적었다.

그렇게 전설을 타는 자까지 적당히 섞어 가며 속도를 높이자 로칸은 꼬박 사흘 만에 원하던 심판의 땅에 당도할 수 있었다.

“여기에 있단 말이지.”

천상의 룬 북에 위치를 저장한 로칸은 후드를 좀 더 깊게 눌러썼다.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심판의 땅에서 멀찍이 떨어진 마을을 벗어나 벼락 지대에 진입했다.

번쩍! 쿠르르릉!

심판의 땅에는 24시간 벼락의 비가 내리쳤다.

빗방울처럼 무수히 많은 벼락 줄기들이 땅을 때리고, 그 위에 선 모든 존재들을 까맣게 태워 버렸다.

그렇기에 천족들조차 두려워하며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방어 주문을 사용한다 해도 고작 몇 초를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유배지, 사실상의 사형 공간으로 쓰기도 한다고 했지.’

그런 이유로 큰 죄를 지은 이들을 가두고, 죽이기 위해 밀어 넣는 공간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말로는 유배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상 죽으러 들어가라는 소리다.

아무리 저항력이 높다한들 이곳에서 하루, 아니 반나절 이상 버틸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없으니까.

파지지지지직!

그렇게 위험한 심판의 번개가 새로운 방문객을 때렸다.

[심판의 번개에 적중당했습니다.]

[천년 벼락의 로브가 전격의 힘을 방어합니다.]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벼락을 감당하기 전, 여차하면 광풍 현신을 쓸 생각으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로칸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드록쉬가 제대로 물건을 만든 것이다.

벼락이 갖는 물리력은 남았지만 그조차 로칸의 방어력에 별 힘을 쓰지 못했다. 통통 어깨를 두드리는 안마를 받는 것 같달까.

장비의 효과를 확인한 로칸의 걸음이 가벼워졌다.

저 벼락의 끝 어딘가에 있을 전격의 타이탄을 찾아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심장을 먹는 아귀의 마지막 슬롯 하나를 채우기 위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