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
꼼수는 있다 (3)
“천족의 대사제를 살해하고 대신전을 희롱한 죄인 로칸은 들으라! 이제 천신께서도 더 이상 너를 보살피지 않으신다!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처벌을 받아들인다면 정상참작을 해 줄 것이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로칸을 체포하기 위해 나선 천신의 대사제가 엄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정상참작? 퍽이나.”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이미 적대감이 치솟은 마당에 정상참작을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과연 한 번 죽이는 정도로 끝이 날까? 그 정도라면 받아들일 용의도 있지만 그들 역시 로칸이 방문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큰 페널티가 아니라는 사실도.
만약 자신이 천족이라면 가둬 놓고 몇 번이고 죽고, 부활하게 만들며 허송세월을 보내게 할 터였다.
레벨을 350 정도까지는 떨어뜨릴 테고, 장비도 모조리 드롭시키겠지.
만약 399레벨을 달성해 더 이상 레벨 다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몇 개월이고 가둬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 터였다.
그것을 알기에 투항 같은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그 역시 적의와 광기를 드러내며 새하얀 이빨을 내보였다.
“싸우러 온 놈이 뭐 그렇게 말이 많아? 꼬우면 덤벼!”
도발.
그를 잡으러 온 천신의 군대에는 무려 400레벨이 넘는 강자들도 열이 넘게 포진되어 있었지만 로칸은 전혀 기죽지 않고 소리쳤다.
아직도 초조하게 몸을 꼬아 대던 드록쉬 역시도 필사의 각오와 독기를 끌어 올렸다.
“건방진……! 굳이 벌주를 드는구나! 놈을 끌어내라!”
“풋.”
로칸은 그 모습이 우스웠다.
제아무리 천족이라 할지라도 중립 지역의 마을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기에 직접 공격을 가하는 대신 그들을 힘으로 끌어내려 하는 것이다.
만약 로칸이 그에 저항하며 공격을 가한다면 그 순간부터는 정당방위로 인정되니 힘을 쏟아 내겠지.
“끄응!”
그러나 고작 그들 따위에 힘으로 끌려 나갈 로칸이 아니다.
드록쉬 역시 힘이라면 자신 있는 드워프 종족인데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강자였으니 힘으로 겨루는 것은 무리다.
끙끙대며 용을 쓰는 천족들을 웃으며 바라보던 로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뜬 채로 억지로 근엄한 표정을 짓는 천신의 대사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드잡이할 배짱도 없는 새끼가 왜 까불어?”
“이익!”
분했는지 부들거리는 천신의 대사제들.
로칸은 이죽거림을 멈추지 않은 채 천상의 룬 북을 꺼냈다. 도망치기 위함이 아니라 확인을 하기 위함이었다.
“천상의 룬 북, 사용.”
[주변에 공간 결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모든 장거리 공간 이동이 제한됩니다.]
‘역시 그렇군.’
만약 로칸이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 했더니 나설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두었다.
“흥! 허세를 부리더니 도망칠 궁리나 하는 구나!”
씨익.
놈들이 그 행동을 조롱했지만 로칸은 환하게 웃었다. 공간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들 역시 도주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니까.
“그럼 시작해 볼까?”
“……!”
푸확!
마을이라는 이유로 망설이는 그들과 달리, 로칸은 거침없었다. 아직도 자신을 끌어내려 용을 쓰는 천족들에게 거침없이 배틀 액스를 휘둘러 숨을 끊어 놓았다.
만인살.
누구를 어디에서 죽여도 페널티를 받지 않게 해 주는 타이틀 효과를 이용해 마을 내에서도 망설임 없는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미, 미친!”
“마을에서 무슨 짓을!”
“경비! 경비병!”
당황한 천족들이 경비를 찾아대는 모습이 퍽이나 우스웠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감감무소식. 머더러 카운트가 올라가지 않으니 그들로서도 나타날 명분이 없는 것이다.
설령 나타난다 해도 이미 로칸의 상대는 아니었지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놈을 죽여라!”
“천신의 영광을 위하여!”
“천신이시여, 힘을 주소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천족이기 때문일까, 그들의 난동에도 경비병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차후 사자왕 등 다른 중립 지역의 강자들이 문제 삼을 것은 분명하리라.
그럼에도 천신의 대사제는 큰 결단을 내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로칸을 잡아내고 말겠다는 것.
일방적인 전투도 좋지만 이런 치열한 난전은 로칸도 바라던 바였다.
“광풍 현신! 전신 무쌍! 무혼 각성!”
로칸이 대번에 전신의 힘을 일깨웠다.
폭력의 왕이 되기 위해, 그 이름을 증명하기 위해 거신이 되어 그들을 찍어 눌렀다.
‘레이드라도 하는 것 같군.’
로칸의 힘을, 스킬을 빼놓으려는 것일까?
로칸이 마스터 스킬을 발동했음에도 정예라 할 수 있는 천신의 사제들은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도륙당하는 것은 오직 천족 진영의 타 종족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실 상관은 없었다. 퀘스트가 요구하는 것은 오직 레벨뿐, 종족이나 진영 따위는 상관없으니까.
로칸은 마구 날뛰며 천족들을 도륙해 나갔다.
‘끝이 없군.’
애초에 맞상대할 생각이 없던 것일까. 천족들은 꾸역꾸역 밀려들며 로칸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전념했다.
한 명으로 안 되면 두 명, 세 명, 다섯 명, 열 명까지도 힘을 합치며 공격을 방어하고 생존하는 것에 주력했고, 조합 스킬과 생성 스킬을 갈아엎으며 광역 스킬들을 배제한 로칸으로서도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막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졸렬하기는.”
아예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천신의 사제와 대사제들은 나서지도 않은 상태. 지속 시간이 줄어들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로칸 쪽일 수밖에 없었다.
“네놈의 약점은 이미 간파했다.”
그런 주제에 입을 털어 대는 꼴이 보기 싫었지만 로칸으로서도 섣불리 그들에게 덤벼들 수는 없었다.
그들은 어쨌든 400레벨의 강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시간을 쏟는다면 한둘쯤 잡아 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소모가 일어나는 것이다.
“시간 역행.”
이윽고, 30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대로 도망을 칠 수도 있겠지만 로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줄인다고 줄였음에도 아직도 천족 병력은 절반 이상이 남은 상태이지만 시간 역행으로 스킬 대기 시간과 후유증을 초기화시킨 뒤 다시 한번 힘을 개방했다.
“슬슬 준비하도록.”
두 번째 광풍 현신. 그것을 본 천신의 대사제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시간 끌기에 집중하겠지만 그들이 개입한다면 상황은 더 어려워지리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드록쉬가 아직 잘 버텨 주고 있고, 시간 역행을 하더라도 퀘스트의 달성까지 되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드록쉬!”
그때, 로칸이 드록쉬를 불렀다.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 둔 한수를 발동시켰다.
“으으……. 에라, 모르겠다. 무구 강화!”
바로 드록쉬의 창조 스킬.
그것은 일시적으로 대상의 모든 무구 등급을 한 단계 격상 시키는 것이었다.
우우우웅!
황금 사자 세트를 비롯한 로칸의 모든 무구가 밝게 빛났다. 장비 등급의 이름 뒤에 플러스(+) 표시가 붙으며 로칸을 강화시켰다.
“무혼 각성!”
두 번째 광풍 현신을 사용하고도 무혼 각성을 아껴 두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미 갓 등급인 천신과 마신의 안배에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황금사자 세트와 광풍의 사슬 배틀 액스가 강화된 것은 엄청난 수확이었다.
“흐흐, 2차전 시작이다!”
로칸이 공간을 격하며 놈들에게 파고들었다.
전신의 돌격에 이은 점멸!
피할 틈을 주지 않는 돌진에 천신의 대사제 중 한 놈의 가슴이 함몰되었다.
유니콘의 뿔에 찔린 심장은 그대로 꿰뚫려 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일단 한 놈!”
로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놈의 목을 떨구었다.
사제, 또는 대사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모두 주문 계열인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생명력과 방어력이 낮은 놈들을 골라 기습을 가하기 시작했다.
“분신 소환!”
거기에 분신까지.
성격까지 빼닮은 탓에 생명력을 소진시켜 소멸시키기까지 로칸과 구분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괴수가 세상에 풀려나왔다.
“450레벨짜리를 데려왔어야지!”
400레벨의 강자들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로칸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미 경험해 본 바였다. 그것도 그몰탄이라는 무지막지한 놈을 곁에 두고도 해냈던 일이 아닌가?
전류 제어까지 사용해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고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된 로칸은 맹수처럼 그들의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모든 힘을 개방하라! 천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천신의 분노!”
“천신의 가호!”
“천신의……!”
순식간에 둘이나 되는 동료가 죽어 나가자 놈들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아껴 두었던 창조 스킬을 마구 발동하며 로칸을 제약하고, 자신들의 힘을 증폭시켰다.
[천신의 별빛 건틀릿이 신성한 힘을 받아들입니다.]
[사용자의 능력이 강화됩니다.]
‘이것 봐라?’
그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사용하는 창조 스킬들이 오히려 로칸을 강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천신을 모시는 자들답게 그들의 힘은 천신에게서 빌려온 것인 만큼 그의 힘이 담긴 천신의 별빛 건틀릿이 반응했다.
“흐흐흐, 더 해 봐라!”
일격에 죽지 않는 한 그들이 힘을 발휘할수록, 걸음을 내디딜수록 로칸의 힘이 강해졌다.
일정 범위 내의 적들을 말살하기 전까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위력이 증가하는 스킬이 바로 전신 무쌍이니까.
두 번째 광풍 현신을 사용했을 때 계속해서 기다리지 않은 것이 그들의 패착이었다.
어차피 그랬어도 로칸이 먼저 달려들긴 했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이런 힘을……!”
“천신이시여……!”
[타이틀 불굴의 의지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게다가 일부러 치명적인 공격을 제외하고는 몸으로 받아 내 주었기에 불굴의 의지 효과까지 발동한 상태였다.
놈들의 레벨은 400이나 되었지만 능력치 면에서는 오히려 로칸이 압도하는 상태!
거기다가 그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다.
바로 경험.
태생부터 강력했던 탓에 제대로 싸워 볼 경험이 없는 천족 따위가 수라의 길을 걸어온 로칸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페이크와 진짜 공격을 섞어 대자 금방 손발이 어지러워졌고, 창조 스킬로 강화하여 로칸과 엇비슷한 힘을 발휘하던 일부 대사제들마저 속수무책으로 배틀 액스 앞에 유린당했다.
“후퇴, 후퇴하라!”
그러기를 10여 분, 후속 지원부대가 달려오고 있을 테지만 이 상태라면 전멸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었다.
아니, 어떻게든 로칸을 죽이거나 제압한다 해도 이후까지 어찌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눌러 참으며 도주를 지시했고, 로칸은 끝까지 그들을 물고 늘어졌다.
퀘스트 완료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
대사제들 대신 천족 병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끄, 끝난 건가?”
“생각보다 멍청한 놈들이라 다행이군.”
모든 천족들이 물러나자 온몸에 피 칠갑을 한 로칸이 그제야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만큼이나 격렬하게 움직이는 건 로칸으로서도 부담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마냥 여유롭게 버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혹여 지원군이라도 당도한다면, 광풍 현신의 쿨 타임과 후유증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버텨 낼 재간이 없으니까.
쓰러지듯 유니콘의 등에 기댄 채 파괴된 경계의 마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덕분에…….’
그래도 마음은 뿌듯하다. 한참이 걸릴 것이라 생각한 퀘스트 조건이 상당히 차올랐으니까.
‘이대로 몇 번만 더 하면 금방 달성하겠군.’
하지만 매번 이렇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 로칸의 능력을 알았으니 다음에는 더 많이 준비해서 찾아올 테니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끝낼 수도 있겠어.’
그러나 그 순간에도 로칸의 머릿속에서는 다음 계획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