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
초월자 (2)
푸확!
단 일격이었다.
거대한 배틀 액스가 천족 대사제의 날개를 자르고 목을 베는 순간,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다.
“로카안!”
그의 등장을 뒤늦게 파악한 천족들이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깨달았다. 로칸과 그몰탄이 애초부터 한패였음을.
명백한 오해였지만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마찬가지로 노성을 터트리는 그몰탄의 외침을 호응 정도로 치부했다.
“뭐, 인마!”
하지만 로칸은 개의치 않았다.
이름을 부르고 고함을 지른들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자신은 타이틀 효과에 의해 고레벨의 위압 효과를 받지도 않는데.
그저 무심히 배틀 액스를 휘둘러 벌어지기 시작한 힘의 균형을 완전히 깨뜨릴 뿐이다.
[4. 400레벨 이상의 존재 굴복 8 / 10]
“광살, 사자 난무!”
초극이 아니어도 좋았다.
이미 격전을 치르며 상당한 힘을 소진하고 거대 마수들을 막아 내느라 뒤쪽의 신경을 쓰지 못하는 놈들을 상대로는 굳이 초극의 공격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4. 400레벨 이상의 존재 굴복 9 / 10]
순식간에 그랜드 마스터 둘을 도륙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일이 틀어졌음을 알아차린 천족들이 재빨리 로칸을 경계하며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그들의 앞에는 거대 마수들이 있었다.
“크헉!”
“인간과 마수 따위에게……!”
방향을 잘못 잡은 천족들이 마수의 입속으로 직행했다. 거칠게 물어뜯기고 잘근잘근 씹혔다.
“쯧! 그러게 앞을 잘 봐야지.”
그 속에서 로칸은 여유가 넘쳤다. 사방에 400레벨짜리들이 넘쳐났으니까.
이 중 하나만 골라잡아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고지를 앞에 두고 골라먹는 재미를 즐겼다.
“후퇴! 후퇴하라!”
그러는 동안에도 천족들은 무참히 짓밟혔다.
충분히 저항할 만한 힘을 지녔지만, 정예들이 지리멸렬하고 사기가 떨어진 탓에 실제 전투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자 오히려 천족들을 사냥하기 어려워졌다. 얍삽하기 짝이 없는 천족 놈들이 외형 변화 주문까지 사용해 가며 자신을 숨기고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에는 훤히 다 보였지만 그 정도로 회피와 도주에 신경을 쓰고 있는 놈들을 잡아 죽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렇기에 로칸은 타깃을 바꾸었다.
자신의 적은 천족만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일부가 살아 있어야 확실히 전할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의 힘을. 그들이 이제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가를.
“점멸, 전신의 돌격.”
쿠웅!
그 순간 마구 날뛰던 거대 마수 중 하나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강력한 충격에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초극.”
그리고 베였다. 잘려 나갔다.
그 거대한 몸체가 아무런 저항 없이 두 쪽이 나 버렸다.
마치 소멸한 것처럼 깨끗하게 잘려 나간 단면만을 남기고 무너져 내렸다.
[가치 증명 : 폭력의 왕을 완료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타이틀 폭력의 왕을 획득하셨습니다.]
[기적적인 업적! 당신은 방문자 중 최초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타이틀 ‘초월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폭력의 왕][에픽]
묶인 매듭도 잘라서 풀어낼 줄 아는 지혜와 결단력을 가진 당신!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당신의 호쾌함은 능히 폭력의 왕이라 불릴 만합니다.
그 어떤 함정도, 잔꾀도 당신을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보유 효과]
-모든 능력치 300% 증가
-모든 저항력 300% 증가
-모든 스킬 효과 300% 증가
-자신보다 약한 적을 상대할 때 위압과 공포 효과
-한 종족을 1만 마리 이상 사냥 시 종족 전체에 공포 효과
[최초][초월자][에픽]
당신은 방문자 중 최초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그랜드 마스터는 종족의 한계를 초월하는 첫 단계입니다.
당신은 이 타이틀의 최초 획득자입니다.
[보유 효과]
-신성의 그릇 획득
-창조 스킬 슬롯 + 1
-마스터 스킬 슬롯 + 1
-전문, 특수 스킬을 제외한 모든 직업 스킬 획득 가능
‘와우!’
짧은 순간이지만 로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타이틀 ‘초월자’는 예상했지만 ‘폭력의 왕’을 별개의 타이틀로 얻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어려운 퀘스트를 통과했기 때문인지 그 옵션 또한 어마어마했다. 당장 이거라면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여! 죽여라!”
그러나 벅찬 희열도 잠시, 로칸은 그몰탄의 악에 받친 고함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찢어발길 듯 내리치는 채찍을 피하고, 제대로, 정식으로 힘을 발휘했다.
“피의 각성.”
두근두근.
스킬의 발동과 함께 심장이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과는 다르다.
제대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초월자가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건 아예 힘의 수준부터가 달랐다.
‘아!’
전신을 타고 뻗어 나가는 힘의 줄기들을 확인하며 로칸은 떠올렸다.
천신의 피와 마신의 피. 그것들이 혈액 안에 남아 알알이 힘을 깨우는 것이다.
“저, 저건……!”
“이럴 수가!”
“천신이시여……!”
그렇게 되자 놀라고 당황하는 것은 로칸만이 아니었다. 그몰탄과 마수들도, 천족들도 로칸에게 느껴지는 그 힘에 기겁을 했다.
어찌 천신의 힘과 마신의 힘이 한 몸에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놀랍게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천족도 마족도 아니면서 그 둘의 힘 모두를 사용하다니.
새로운 종이라 해도 믿을 만큼 비현실적인 상황에 모두가 넋을 놓았다.
“사특한 방법으로 그분의 힘을 취했구나!”
“그래 봤자 힘의 일부일 뿐. 네놈의 시신을 짜내 그 피를 마시고 말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놈들을 제각기 전의를 불태웠다. 두 가지 신성이 동시에 느껴지긴 하지만 힘의 수준은 아직 그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 봤자 400레벨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크허허허헝!”
로칸이 뿜어낸 광기의 외침이 모두의 뇌를 점령했다.
일시적으로 그몰탄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뇌 기능이 정지했다. 같은 초월자의 격을 갖춘 400레벨의 대사제와 성기사들까지도.
그 거대한 틈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 정적 속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는 로칸의 움직임은 눈으로 좇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후웅!
배틀 액스가 내리그어지면 반드시 한 명이 죽는다. 마스터급이든, 하이 마스터급이든, 심지어 그랜드 마스터급이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반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참히 도륙당한 동료들이 추락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지, 진형을 갖춰라!”
“뭉쳐서 놈을 상대해!”
같은 그랜드 마스터이건만, 도저히 단신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을 깨닫자 천족들은 단단히 뭉치기 시작했다.
휘익.
그 순간 로칸이 반대 방향으로 날았다. 거대 마수와 그몰탄의 애완 마수들. 이전에는 그렇게 강해 보이던 놈들이 이제는 발밑으로 보였다.
실제 덩치는 로칸보다 거대한 놈들도 몇이나 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그의 배틀 액스 아래에 모든 존재가 평등했으니까.
퍼억!
일격에 머리가 터져 나가고 타격 부위가 잘리고 뭉개져 떨어져 나갔다.
그몰탄의 채찍질을 받아 강해진 거대 마수들 역시 다를 것은 없었다.
이미 극한까지 끌어 올려진 로칸의 공격력은 고작 초월자의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신성의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400레벨의 존재들이 죽어 나갈 때마다 로칸에게는 알 수 없는 알림이 나타났다.
‘뭔가 있군.’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 정체를 파악하긴 무리였다. 400레벨부터는, 400레벨을 사냥할 때는 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지금은 눈앞의 전투에 집중할 때였다.
“죽여라! 무슨 수를 써서든 놈을 죽여!”
덕분에 수백, 수천의 마수가 순식간에 갈려 나갔고, 그몰탄의 고함은 커져만 갔다.
지이이잉.
그러나 놈도 소리만 질러 대는 것은 아니었다.
놈이 악을 쓸 때마다 붉은 기운이 마수들의 몸에 덧입혀졌다. 마수 조련사 특유의 강화 효과가 그들을 더욱 강하고 단단하게 만든 것이다.
그 때문인지 슬슬 배틀 액스를 내리그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반발력이 강해졌다.
“혈류 가속.”
그때, 로칸이 새로운 스킬을 발현했다.
따로 만들거나 익힌 적이 없는 스킬이지만 가오칸의 전투를 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는 것이다.
창조 스킬은 그에 따라 파생되는 스킬들을 함께 만들어 낼 수 있다.
단지 피를 각성해 낼 뿐 아니라 그 피를 이용한 다른 스킬들을 함께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강력한 스킬을 사용할수록 창조 스킬의 지속 시간이 빠르게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지만, 피 속에 녹아 있는 힘을 각성시키는 그의 창조 스킬에는 꽤 많은 지속 시간이 부여된 터였다.
순간, 로칸의 몸놀림이 배에 가깝게 빨라졌다.
“미친!”
그 모습이 마치 신과 같다.
폭력의 왕이 아니라 폭력의 신이란 게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폭력의 기운이 로칸의 몸을 통해 발현되고 있었다.
콰앙!
단단히 뭉쳐 있던 천족들에게 벼락이 쳤다. 로칸이 제 몸을 포탄처럼 날려 진형을 파괴한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들의 스킬이 중첩되어 이루고 있던 방어벽이 종잇장처럼 찢겨지고 그 안에 있던 놈들이 볼링 핀처럼 날아갔다.
로칸이 그중 하나를 따라붙은 것은 당연한 일.
가볍게 한 놈의 목을 따내는 순간, 다른 방향으로 검은 줄기가 뻗어 나갔다.
“복종하라!”
“……!”
바로 그몰탄의 채찍이었다.
놈이 맞지 않는 로칸을 노리는 대신 천족 성기사의 몸을 휘감더니 복종의 힘을 주입했다.
“크허허헉!”
고통 때문인지 잠시 몸을 떨던 천족의 눈빛이 변했다. 아니, 순백의 빛을 뿜던 날개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세뇌? 그렇군.’
자신의 뒤를 찔러오는 타락 천족의 모습에 로칸이 확신했다. 그몰탄의 창조 스킬은 바로 저 채찍인 것이다.
창조 스킬로 아이템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니, 가히 충격적인 스킬 활용이었지만 로칸은 침착하게 놈의 검을 받아 냈다.
그저 휘감는 것만으로 무려 400레벨의 천족을 세뇌시킬 수 있다는 것, 또 상대를 약화시키고 아군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였지만 그에 따른 제약도 분명히 존재한다.
로칸의 창조스킬처럼 사용자 본인을 강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거인의 힘.”
콰앙!
한 손으로 배틀 액스를 휘둘러 검을 쳐 낸 로칸의 왼 주먹이 타락한 성기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거인의 힘.
타이탄의 피 속에 깃든 놈의 괴력을 왼팔에 이끌어 낸 것이다.
그 한 방에 심장은 물론 가슴 전체가 터져 나간 타락한 성기사가 추락하고, 천족들은 더욱 공포로 물들었다.
“사, 산개하라!”
덕분에 놈들은 제법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불구대천지원수인 로칸을 두고 달아나는 것은 굴욕적이지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적을 상대로 전멸을 각오하는 것은 바보짓이니까.
게다가 그몰탄이라는 좋은 핑곗거리까지 있으니 산개 후퇴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사제, 대사제, 성기사. 그 밖에 온갖 천족들까지.
후퇴하면서 퀘스트를 내렸는지 천족의 편에 선 유저들은 쭈뼛거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지만 그들 따위는 로칸의 눈에 차지 않았다.
도망치는 고레벨 천족들만 골라 죽인 뒤, 어느 순간 몸을 반전시켜 그몰탄에게로 달려들었다.
이제, 창조 스킬의 지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