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7
천상 결계의 보주 (2)
공허의 문을 열기 위한 재료는 꽤나 다양했지만 그중 물량으로 승부하는 것들은 영지의 힘, 그리고 자본력으로 커버했다.
나머지는 직접 구해야 하는 것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힘의 정수는 350레벨 이상의 심장이 지상에서 차곡차곡 쌓이고 있으니 신경 쓸 것이 없다지만, 그게 아니라도 필수적으로 구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차원 괴조의 발톱, 혼돈의 비약, 천상 결계의 보주, 욕망의 나침반이 그것들이다.
“흠, 뭐부터 구할까.”
일단 차원 괴조의 발톱을 이용해 공허로 통하는 차원력을 약하게 만들고, 힘의 정수로 유혹해 공허가 스스로 문을 열게 만든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1단계는 성공.
그전에 혼돈의 비약을 몸 구석구석에 발라 공허 침식과 전신의 부식을 막아야 하고, 만약을 대비해 공허 내부에서도 버틸 수 있도록 천상 결계의 보주를 휴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허 내부에서도 버티는 것이 2단계다.
이후 길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 3단계.
이때, 자신이 바라는 것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욕망의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아야 했는데 이 나침반이 가리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향뿐이기에 제대로 공허를 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운이 따라 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차원 괴조의 발톱을 사용해 차원 결계를 약화시킨 뒤 해당 지역으로 탈출하면 성공이다.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이 작업을 마치기 위해서는 일단 재료를 넉넉히 구하는 것이 필수였다.
특히 혼돈의 비약과 차원 괴조의 발톱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할까.
순서에 상관없이 결국 구해야 하는 것은 똑같았지만 시간과 난이도를 고려해야 할 필요는 있었다.
한창 자리를 잡고 사냥을 하고 있다가 러시아 길드들을 만나러 가면 흥도 깨지고, 다시 잡기 위해 시간도 필요하지 않겠나?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우선 대상은 둘로 좁혀졌다.
천상 결계의 보주와 욕망의 나침반.
로칸은 그중에서도 천상 결계의 보주를 골랐다.
각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 장소는 이미 모두 알고 있지만, 욕망의 나침반의 경우 해적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운이 나쁘면 시간이 제법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흠, 어디로 하지?”
하지만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상 결계의 보주는 하나가 아니고 드롭되는 아이템도 아니었으니까.
가장 쉬운 방법은 제작자를 직접 만나서 받는 것.
하지만 결계술사 리모난은 몇 곳의 거점을 수시로 돌며 위치를 바꾸는 자였기에 패스.
남은 방법은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강탈하는 것이었다.
천족, 마족, 그리고 이종족.
리모난에게 직접 천상 결계의 보주를 넘겨받았거나 다른 이들에게 강탈해 보유하고 있는 이들 중 누구를 골라야 할까.
어디 하나 쉬운 곳은 없었기에 로칸은 심사숙고했다.
“폴리모프, 천상의 룬 북 사용.”
그리고 한 곳을 점찍었다.
바로 천족의 거점 중 하나이자 대형급 도시인 카사락스.
자신이 죽였던 천족의 모습으로 위장한 채 그곳에 잠입했다.
‘흠.’
자신과 그몰탄 때문일까? 여유 넘치던 천족의 거점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보다는 날이 선 느낌이랄까.
당장 전쟁 준비라도 하듯 천족 병사들이 경계를 섰고, 내부로 들어서는 자들을 철저히 검문했다.
아예 천계로 이적하지 않은 유저나 중립 지역 NPC들의 출입은 받지는 않는 모습.
내부에 감추고 있는 것이라도 있는 듯 경계가 삼엄했다.
꾸벅.
그러나 로칸은 예외였다. 일반 천족이 아닌 순수 천족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몰탄과의 협력 관계일 당시 로칸이 폴리모프를 하고 행패를 부렸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들이었기에 여전히 순수 천족에 대한 대우는 그대로였다.
그들의 자존심상 감히 순수 천족의 모습으로 로칸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겠지.
‘어디에 있으려나.’
덕분에 도시 내부로 편하게 들어온 로칸은 도시를 면밀히 살폈다.
천상 결계의 보주가 있을 만한 곳은 어디일까.
크게 두 곳으로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도시의 중추인 영주성과 가장 방어를 탄탄히 해야 할 성벽과 첨탑이 그곳이다.
천상 결계의 보주는 공허를 방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력한 물리, 마법 방어력을 지닌 대결계를 생성해 낼 수 있는 보물이었으니 가장 쓰임이 좋은 곳에 배치해 두었을 확률이 높았다.
‘일단은 성벽부터 훑어야겠군.’
그렇기에 먼저 성벽으로 올랐다.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너에게 보고를 해야 하나?”
성벽에 오르자 천족 진영을 선택한 조인족 하나가 말을 걸어왔지만 로칸은 표독스럽게 대꾸했다.
순수 천족이란 놈들이 원래 이런 성격이니까, 같은 순수 천족이 아닌 이상 무시와 멸시를 해도, 아니 그래야만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을 터였다.
“아, 아닙니다.”
그 때문인지 서슬 퍼런 대꾸에 조인족이 그냥 넘어갔다. 머리를 가볍게 숙이고 로칸에게 길을 내주었다.
순찰하듯 성벽 위를 걷는 중에도 마찬가지. 천족 병사들은 순수 천족의 모습을 한 로칸을 피해 숨거나 눈을 마주치려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감시하고 꼬투리를 잡으러 왔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여기는 없군.’
그렇게 천천히 뒷짐을 진 채 성벽과 각 첨탑을 확인한 로칸은 이곳에 천상 결계의 보주가 없음을 결론 내렸다.
도시를 방어하는 것도 좋지만 순수 천족들이 모여 있는 내성을 방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그것을 확인하자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혹시나 자신의 손에 죽은 고위 순수 천족으로 변신할 경우, 누군가 알아보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이 마스터급의 어중간한 놈으로 변신을 한 까닭이다.
그렇다는 것은 내성에 자신보다 상위 계급의 천족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고,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지도 몰랐다. 그러니 조심 또 조심.
언제든 폴리모프를 풀고 제 힘을 쓸 수 있도록 전신을 긴장시키며 내성으로 들어섰다.
힐끗.
이번에도 입구는 패스다.
내성 입구를 멀리서 지켜보다가 다른 순수 천족들이 하는 것처럼 고개를 까딱여 묵례를 하자 의심하지 않고 내부로의 진입을 허용했다.
‘어디 보자, 있을 만한 곳이라면……. 역시 거기인가?’
천상 결계의 보주가 있을 만한 위치는 역시 하나다. 바로 영주의 집무실.
천상에서도 보물로 취급받는 물건이라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두지 않았겠나.
생각 같아서는 엔트맨 작전으로 카이와 함께 몸집을 줄여 잠입할까도 싶었지만 천족의 마나 감응력이라면 다른 곳에서 시선을 끌지 않는 이상 발각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로칸은 일단 내부 구조를 눈에 익히며 최대한 영주 집무실 가까이까지 접근했다.
“정지. 여기는 웬일이지?”
“소속을 밝혀라.”
그렇게 영주성의 절반쯤을 올랐을까. 더 이상은 평범한 순수 천족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인지 로칸을 막아 세우는 이들이 있었다.
[카사락스 정예 경비병 돌모탄][Lv 388]
[카사락스 정예 경비병 이가르][Lv 389]
바로 순수 천족이면서도 경비병의 직책을 맡은 이들.
뭐라 핑계를 댈까 잠시 고민하던 로칸은 나지막이 목소리를 꺼냈다.
“저는 천신의 사제 일리반츠입니다. 영주님께 긴히 전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천신의 사제?”
“네가?”
당연히 의심한다. 로칸의 행색은 사제의 그것과 조금 달랐으니까.
하지만 곧 그가 지난 전투에서 획득한 천신 사제의 거울을 꺼내자 눈빛이 살짝 누그러들었다.
“예. 아직 견습이라…….”
“흐음, 무슨 말이지? 영주님은 바쁘시다.”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지라…….”
그 말에 경비병의 눈빛이 다시 가늘어졌다.
오직 영주에게만 전해야 하는 말이라니, 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러나 함부로 대할 수도 없다. 같은 천족이고 힘의 우열이 있다 하더라도 천신의 사제는 평범한 천족이 마냥 막 대할 수 없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대사제였다면 말부터 높였겠지.
“……알겠다. 잠시 기다리도록.”
고민하던 경비병은 각자의 역할을 정했다.
한 명은 영주에게 보고를 하러 갔고, 다른 한 명은 천신의 사제로 변한 로칸을 데리고 대기실로 이동한 것이다.
어차피 영주의 집무실과는 가까운 위치였기에 답변이 어떻게 나오든 로칸으로서는 땡큐였다.
‘슬슬 준비를 해 볼까?’
잠자코 따라나서면서도 로칸은 언제든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준비를 했다.
집무실에 가까워질수록 경비병들의 수준도 높아져서, 벌써 400레벨 이상의 존재만 해도 셋이나 보았지만 묘하게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그 역시 400레벨, 그랜드 마스터였으니까.
규격 외의 힘으로 지금까지 동급의 존재에게는 져 본 적이 없는 로칸이었기에 은근한 기대마저 서리고 있었다.
영주는 몇 레벨일까. 자신이 이길 수 있을까?
두근거리는 사이, 떠났던 경비병이 영주의 답변을 가지고 왔다.
“만나겠다고 하신다. 예를 갖추도록.”
영주가 만남을 허락한 것이다.
허락이 떨어지자 로칸은 형식상으로 들고 있던 천신 사제의 지팡이를 그들에게 건네고 집무실로 향했다.
어차피 천신의 사제 따위가 영주를 해하지는 못할 테지만 예를 갖추는 차원에서 빼앗은 것인데, 그것은 로칸이 유저, 즉 방문자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벤토리가 있는 이상 무기를 맡기는 것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끼이이익.
드디어 영주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로칸의 눈알이 빠르게 굴러갔다.
[천상 결계의 보주][에픽]
영주의 옥좌에 박혀 있는 영롱한 보석 구슬의 존재를 확인했다. 역시나 영주가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부숴야겠군.’
뭔가 빼낼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로칸은 천상 결계의 보주를 얻어 낼 계획을 세우고, 일단은 머리를 조아렸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들라.”
자못 근엄하게 로칸을 내려다보는 천족 영주.
슬쩍 그의 레벨을 확인한 로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카사락스의 영주 카신][Lv 453]
그랜드 마스터를 초월한 존재. 450레벨을 돌파하고도 3레벨을 더 올린 것을 보자 살짝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고작 3레벨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레벨이 오를수록 1레벨을 올리기가 극악하게 어려워지지 않던가?
당장 로칸 자신도 고작 400레벨을 넘겼지만 상당히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다. 특히나 450레벨 쯤 된다면 경험치를 얻을 만한 상대 자체가 별로 없을 테고.
그러니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만큼.
‘재밌어지는군.’
하지만 그렇기에 로칸은 고개를 숙인 채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강자와의 싸움은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기꺼웠으니까.
450레벨. 마제스티 마스터라 불리는 그 경지와 처음으로 제대로 붙어 볼 기회였다.
“그래. 천신의 사제가 나에게는 무슨 일…….”
“폴리모프 해제.”
파아앗.
거만하게 묻는 영주를 향해 몸을 일으키며 폴리모프를 해제했다.
“광풍 현신, 전신 무쌍, 피의 각성.”
자신의 모든 힘을 개방시키며 시작부터 전력으로 들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