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2
욕망의 나침반 (3)
“그만.”
일촉즉발의 순간, 해적들을 막은 것은 2층에서 내려온 어떤 인물이었다.
[검은구름 해적단 일등항해사 로로스][Lv 408]
검은구름 해적단의 일등항해사. 간부급답게 레벨도 400이 넘었기에 그들과 로칸의 수준 차이를 단번에 파악한 것이다.
“모두 물러나라. 너희들 상대가 아니다.”
설마하니 무법항에서 창조 스킬까지 쓰며 난동을 부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겠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는 같을 터였다.
더구나 무법항에서도 이름 높은 검은구름 해적단에게 겁을 먹지 않을 정도라면 로칸 역시 전투에 자신 있는 클래스일 테고.
그렇기에 그가 나서서 소란을 잠재운 것이다.
“선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무슨 용무이지?”
“글세, 네가 들을 자격이 있는 건가?”
하지만 로칸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랜드 마스터? 일등항해사? 그래서 뭐?
명목상으로는 같은 급이지만 전투력으로 보나 뭘로 보나 로칸은 어지간한 그랜드 마스터가 비빌 수준은 아니었기에 허리와 가슴을 펴고 당당하고 오만하게 대꾸했다.
“뭐?”
그러니 일등항해사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녀석도 소란을 키울 생각은 없는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만약 자격이 없는 놈이라면 추후에 단단히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올라와라.”
휙 몸을 돌려 다시 2층으로 올라가는 로로스.
로칸은 아무런 표정 없이 그를 뒤따라 올라갔다.
독기를 품은 검은구름 해적단 때문에 뒤통수가 따끔거렸지만 만약 덤비는 자가 있으면 따끔한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당당히 2층에 올라섰다.
선장이 있는 곳은 2층이 아니었다.
2층, 3층, 4층까지 오르고 나서야 검은구름 해적단의 간부진을 마주할 수 있었다.
[검은구름 해적단 선장, 후크톤][Lv 433]
무려 433레벨의 강자. 게다가 그 주위에 둘러앉은 열 명의 간부들도 모두 하나같이 그랜드 마스터급이었다.
끼이익.
그러나 고작 그 정도에 겁을 먹을 로칸이 아니다.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던 이들을 마주하는 것처럼, 앉으라는 소리도 듣기 전에 의자 하나를 빼어 앉더니 다리를 꼬고 선장을 마주 보았다.
“나를 보자고 했다고?”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후크톤의 면상이 왠지 한 대 후려치고 싶게 생겼지만 로칸은 마음을 넓게 가졌다.
이곳에 온 목적을 마주보았다.
‘진실의 종 사용.’
질문에 앞서 진실의 종을 사용하고서.
“네가 욕망의 나침반을 가지고 있나?”
“욕망의 나침반? 어디서 그런 허튼 소리를 듣고…….”
“있나, 없나? 결론만 말하도록.”
낮게 깔아 말하는 로칸의 음성에 광기의 기운이 깃들었다. 듣는 이들에게 절로 공포감을 느끼게 만드는 힘.
같은 그랜드 마스터급이기에 본래는 효과가 거의 없어야 하지만, 로칸에게는 주변인들의 공포 면역, 저항 효과를 삭제하는 권능이 깃들어 있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로칸이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내게 없다. 그것이 있었다면 이미 무법항을 내 손아귀에 넣었겠지.”
[진실]
진실의 종이 알려 주는 진위 여부에 로칸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잘못 짚은 걸까, 아니면 바텐더가 헛소문을 알려 준 것일까?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할 때, 후크톤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를 들었으면 네놈도 하나를 내놓아야지. 나를 찾은 이유가 그것뿐인가? 고작 그것을 묻기 위해 감히 대검은구름 해적단의 휴식을 방해한 건가?”
대답 여하에 따라 싸움을 걸 수도 있다는 듯한 뉘앙스였지만 로칸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맞다. 이제 내 차례겠지? 그럼 욕망의 나침반의 소재를 알고 있나?”
일문일답. 상대는 시비를 걸었지만 로칸은 대답으로 맞받아쳤다. 참지 못하고 덤벼든다면 싸워 주면 그만이다.
이 무법항에 어떤 암묵적 규율 같은 것이 있는지는 몰라도 로칸 자신이 지킬 필요는 없으니까. 여차하면 몽땅 죽이고 파괴한 뒤 달아나 버리면 그만이었다.
“크하하하! 당돌한 녀석이군. 좋다, 대답해 주지. 알고 있다.”
때문에 슬쩍 싸움에 임할 준비를 한 로칸이지만 후크톤의 반응은 생각보다 호탕했다. 크게 웃으며 로칸의 담대함을 인정하더니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진실의 종을 이미 써 버려 진짜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나중에 걸러 듣더라도 일단 들어 둘 필요가 있었다.
“좋군.”
“그럼 내 차례인가? 너는 어떤 해적단 소속이지?”
“아무 곳도. 바다에서만 노는 것은 별로 취미가 없어서.”
“소속이 없다? 그럼 혹시 누구의…….”
“질문은 한 가지만. 이번엔 내 차례지? 그럼 욕망의 나침반은 누가 가지고 있지?”
“이런, 실수했군. 좋아, 답하지. 내가 알기로는 빌어먹을 블랙펄 해적단 놈들이 가지고 있다. 신출귀몰한 놈들이라 나도 찾는 데 애를 먹고 있지. 아, 이 정보는 서비스다.”
“선장님!”
수하들이 화들짝 놀라 말리려드는 것을 보면 거짓은 아닌 듯싶었다. 짜고 치기에는 시간도 없었고, 연기력도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로칸은 후크톤이 단순한 호의로 이런 대답을 한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로칸을 이용해 블랙펄 해적단을 잡거나, 그들에게서 탈취한 욕망의 나침반을 재탈취하려는 생각이겠지.
이번에는 후크톤의 질문 차례.
씨익 웃으며 수하들을 만류한 후크톤은 의외의 발언을 내놓았다.
“네놈,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나? 수락한다면 간부의 자리를 주지.”
“당연히, 없지.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건 어때? 선장 자리는 유지해 주지.”
“이런 시건방진!”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감히 누가 누굴 부린단 말인가?
로칸의 대답에 수하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로칸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놈들이 덤벼든다한들 오히려 역습까지 가할 자신이 있으니까.
반면 후크톤은 기분 나쁘게 웃어 댈 뿐이었다.
“크흐흐흐, 역시 배포가 큰 놈이군. 고작 해적단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거지? 좋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지켜보도록 하마. 더 물을 건 없나?”
“욕망의 나침반을 찾고 있다고 했는데, 그걸로 뭘 찾을 셈이지?”
과연 선장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겁을 먹은 것인지 모르지만 후크톤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받았다.
“당연히 힘이지 무엇이겠나. 보물? 대량의 코인? 결국 힘만 있으면 저절로 굴러들어 올 것들이지 않은가?”
“이왕이면 블랙펄 해적단에 대해서도 알려 주면 좋겠군.”
“어렵지 않지.”
백번 옳은 소리. 조금은 신뢰감을 더해 주는 이야기였지만 결국은 해적, 로칸은 지금까지 그가 했던 말들 중 절반만 믿기로 했다.
후크톤이 로칸에게 전달한 블랙펄 해적단의 정보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의 구성, 활동 범위, 추정되는 현재 위치까지.
뭔가 속이거나 감춘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면 놈들을 추적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듯싶었다.
“흠, 이왕 온 김에 나도 하나 만들어 둘까?”
하지만 로칸은 곧장 무법항을 빠져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본 결과, 해적단을 하나 창설해 두어서 나쁠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일단 해적으로 등록을 하면 악명이 증가하지만 반대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제법 되었으니까.
예를 들어 다른 해적이나 상선을 습격할 경우, 배를 나포하거나 그들의 보물을 추가로 얻을 수 있는 식이다.
명성의 하락? 이미 높아질 만큼 높아진 로칸에게는 그 정도야 아무런 영향도 없다. 무법항의 지배자쯤 되지 않는다면.
그렇기에 로칸은 즉시 무법항의 해적 등록소로 향했다.
[더 로드 해적단이 창설되었습니다.]
[현재 선원 수 : 10]
해적 등록 방법은 간단하다. 한 척의 배와 최소 인원을 구한 뒤, 일정 코인을 내고 등록만 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최소 인원인데, 그 또한 문제되지는 않았다. 배야 조선소에서 구매하면 그만이고 꼭 선원이 유저여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코인을 지불하고 최하급인 D급의 선원을 아홉 명 고용하자 선원 문제는 깔끔히 해결되었고, 배는 소형 갤리선 한 척만 구입했다.
돈이야 차고 넘쳤지만 어차피 제대로 항해를 할 것도 아닌데 좋은 배가 필요할 이유가 뭔가? 게다가 ‘나포’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는데.
그렇게 해적단 설립과 등록을 마친 로칸은 선원들을 무법항에 풀어 두고 홀로 바다로 나섰다.
“저쪽이랬지?”
후크톤이 알려 준 정보가 있으니 방향을 잡는 것도 어렵지 않다.
블랙펄 해적단의 활동 영역이 넓고 워낙 신출귀몰하게 움직인다지만 정보가 최신인 까닭에 대략의 방향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목표 또한 어림이 가능했다.
원한의 땅.
대해적이라 불리던 어떤 인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남겼다고 전해진 섬이자 해적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의 힘과 보물을 얻기 위해 무수히 많은 해적들이 찾았으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뼈로 돌아갔다고 전해진 금지(禁地).
블랙펄 해적단이 찾는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출항한지 시간이 좀 지났다고 했으니 이쪽도 속도를 높여야겠군. 카이! 전설을 타는 자!”
끼윳!
로칸은 대붕으로 변한 카이의 등에 올랐다.
바다에 펼쳐진 불안정한 마나와 칼바람 때문에 어지간한 비행 몬스터들조차 균형을 잃고 추락하는 곳이지만 대붕으로 변한 상태라면 충분히 비행이 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로칸은 카이가 대붕의 모습을 유지하는 동안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날아 바다를 가로질렀다.
지속 시간이 끝나면 다시 바다로 들어가 잠영으로 속도를 내다가,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면 다시 카이를 타고 속도를 올렸다.
그러기를 무려 닷새.
드디어 블랙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전투의 흔적이군.”
정확히는 박살이 난 배의 흔적이었다. 열 척은 됨직한 숫자의 배들이 철저히 파괴된 흔적에서 로칸은 블랙펄의 소행임을 알아차렸다.
함대와 함대가 부딪친 것이 아닌, 빠른 배 한 척이 만들어 낸 모습임을 파악한 것이다.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 같은데? 카이, 가자!”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며 다시 전속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원한의 바다에 진입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참 후, 자신의 판단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시스템이 그가 원한의 바다라는 필드에 진입했음을 알려 준 것이다.
원한의 땅, 그리고 원한의 바다.
누가 봐도 연관 있어 보이는 이름이었기에 더욱 속도를 높여 섬이라 부를 만한 것을 찾았다.
‘보인다.’
원한의 바다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그 속에서 여러 척의 배가 감지되었지만 로칸은 무시했다.
[원한의 유령선]
그것들은 다름 아닌 유령선이었으니까.
해골바가지 또는 유령이 되어 계속해서 원한의 바다를 떠도는 해적들의 배.
보통의 경우 원한의 안개에 가려 유령선인지, 일반 해적선인지 파악하기 어렵겠지만 로칸에게는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이 있었다.
원한의 안개도 보통 수준이 아닌지 흐릿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유령선과 일반 해적선을 분간해 내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뀨웃!
그리고 카이 또한 마찬가지.
가만히 있으면 대상을 침식하려 드는 원한의 안개가 부담스러운지 부산하게 날개를 움직이며 안개를 쫓아 버리고 있었지만 속성력을 가득 머금은 특성 때문인지 어떻게든 버텨 내는 것이 가능했다.
“조금만 더 힘내!”
후웅!
이 고통을 빨리 끝내겠다는 듯 카이의 커다란 날개가 돌개바람을 만들며 휘저어졌다. 그와 함께 주변 환경이 쭉쭉 밀려났다.
그러기를 10여 분, 로칸은 드디어 목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