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
욕망의 나침반 (4)
[원한의 땅에 진입하셨습니다.]
“응?”
원한의 땅에 진입했다는 알림.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봐도 여전히 바다인지 땅인지는 파악이 불가능했다.
“내려가……. 이크!”
홰액.
카이가 기꺼이 날개를 꺾자 순식간에 땅이 가까워졌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하마터면 땅에 처박힐 뻔한 상황. 그만큼 원한의 안개로 인한 가시거리 저하는 무시무시했다.
“카이, 돌아가.”
뀨우!
[원한의 안개에 노출되셨습니다.]
[타이틀 불굴의 의지 효과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카이가 역소환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로칸을 덮치는 원한의 안개. 정신 공격의 효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타이틀 불굴의 의지가 발동해 가로막았다.
‘욕망에 눈이 먼 자들에게 정신 공격이라니, 잘 먹힐 만하군.’
하지만 안개마저 꿰뚫어 볼 수 있는 로칸에게는 큰 장애가 아니다.
그 역시도 가시거리가 좁아지기는 했지만 뭔가가 등장한다면 제법 멀리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배와 같이 덩치가 커다란 것들은.
“어?”
[블랙펄호]
그때, 로칸의 눈에 찾던 것이 들어왔다. 블랙펄 해적단의 함선인 블랙펄호. 그것이 이미 원한의 땅에 정박되어 있는 것이다.
“벌써 도착했나 보군.”
서둘러 달려가 봤지만 이미 대부분의 해적단원들은 땅을 밟은 모양이었다. 남은 것은 배를 지키는 소수의 인원뿐.
“웬 놈이냐!”
로칸이 다가가자 그들도 로칸을 발견했지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들은 고작해야 390레벨대에 불과했으니까.
“광풍 현신!”
그 정도는 광풍 현신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피의 각성을 쓸 것도 없이 로칸은 광풍 현신만으로 그들을 쳐 죽였다.
재미있는 것은, 거신의 모습으로 변한 로칸을 보자마자 그들이 배에서 모두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어차피 배 위라고 해 봤자 바다 위가 아닌 이상 딱히 지형 효과 따위를 받기도 어려웠고, 그 상태로 싸워 봤자 배만 상할 것이기에 내린 선택이었지만 그것은 결국 로칸에게 배를 온전히 빼앗기는 결과만을 낳았다.
[해적선 블랙펄호를 나포하셨습니다.]
[블랙펄호의 처분을 결정해 주십시오. 유지 / 선박 창 이동]
[현재 보유할 수 있는 선박 수 : 1 / 2]
“선박 창 이동.”
그렇게 대기하던 해적들을 모두 죽이고 블랙펄호의 키를 잡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나포한 배를 유지할지, 선박 창으로 이동시킬지를 결정하라는 것이다.
선택은 당연히 선박 창 이동이다.
유지를 선택하면 이대로 선박이 남아 있지만 당장 로칸은 혼자였기에 이것을 움직일 여력이 되지 않는다. 일단 선택을 마친 이후에는 마음대로 선박 창에 넣을 수도 없고.
반면 선박 창으로 이동시키면 배가 사라져서 아이템처럼 남게 되는데, 본래는 전투에서 파괴되어 그대로 두면 수장될 배를 빼앗고 수리해서 쓸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지만 로칸에게는 온전한 상태의 공짜 배를 얻을 수 있게 해 준 셈이 되었다.
“좋았어.”
최상급의 해적선을 얻은 것도 좋지만 로칸은 블랙펄 해적단의 퇴로를 막았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었다.
로칸처럼 바다 왕자의 망토를 가진 것도 아니니 그들이 배 없이 이 섬을 탈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까.
게다가 오는 동안 슬쩍 보니 원한의 바다에는 거대 해양 몬스터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제 아무리 로칸이라 해도 바다 왕자의 망토가 아니라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추적.”
그렇게 블랙펄호를 손에 넣은 로칸은 즉시 도적 계열의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뒤 골라 익힌 몇 안 되는 타 직업 스킬 중 하나다.
블랙펄호가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나 있는 몇 개의 발자국에 그것을 사용하자 점멸하는 발자국이 땅 위에 생겨났다.
이것을 따라가면 블랙펄 해적단을 만날 수 있겠지.
“나이트메어.”
놈들을 쫓을 방법을 마련하자 로칸은 이번엔 나이트메어를 소환했다.
원한의 기운이 가득한 이곳에서 유니콘을 소환한다는 것은 나 여기 있소 하고 소리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트메어라면 발자국도 남지 않으니 누구보다 빠르게 은밀하게 놈들을 추적할 수 있었다.
“전력 질주, 기마 돌진…….”
이어 사용되는 이동 스킬들.
몇몇은 중첩이 되고 몇 개는 따로 사용해야했지만 여러 직업들의 이동기를 동시에 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메리트는 있었다.
작은 문제점이 있다면 다양한 스킬을 사용하는 만큼, 또 본직 스킬이 아닌 만큼 마나 소모가 크다는 것인데 그 또한 마나 통이 커진 로칸에게는 큰 부담이 아니었다.
광풍 현신의 후유증과 재사용 시간에 맞춰 블랙펄 해적단과의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문제일 뿐.
하지만 그 역시도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면서 시간이 대폭 단축되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기존 스킬의 효과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로칸이 광풍 현신을 재조합한 것이다.
쿨 타임 감소와 후유증 감소, 추가 강화가 가능한 스킬들을 섞어서.
덕분에 기존 하이 마스터급 스킬뿐 아니라 그랜드 마스터급 스킬들이 섞이면서 스킬의 위력은 강화되고 페널티는 대폭 하락한 상태였다.
이쯤 되면 거의 무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르기도 하군.”
나이트메어에 올라타 한참을 쫓았지만 블랙펄 해적단의 모습은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웠다.
배에서 떠난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도 않은데 탐욕에 이끌린 것인지 무척이나 빠르게 이동을 감행한 것이다.
‘초행이 아닐 수도 있지.’
아니면 이미 길을 알고 있거나.
놈들이 욕망의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그렇기에 로칸은 그에 대한 가정도 빼놓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놈들이 추격을 눈치채고 매복을 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점멸.”
“헉!”
퍼억
원한의 안개가 유난히 짙어지는 해변이 끝나는 지점. 놈들은 몸을 잘 숨겼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쪽에는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이 있었다.
매복자들의 위치는 물론 레벨까지 모조리 파악한 상태였으니 이쯤 되면 누가 누구를 매복하고 기습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매복한 자들을 로칸이 기습했으니까.
“진광풍참!”
일진광풍이 휘몰아쳤다. 그것도 칼바람이.
실제로 살을 에고, 뼈를 깎아 내리는 난폭한 힘이 모두를 휩쓸었다. 매복하던 블랙펄 해적단은 물론 원한의 안개까지도.
‘흠, 마나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가?’
그렇게 매복을 쓸어버리면서도 로칸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까 배를 탈취할 때도 느낀 것이지만 원한의 안개가 마나 운용을 방해하는 느낌이었다.
위력이 약화되고 물속에서 무기를 뻗는 것처럼 공격이 둔화된 느낌이랄까.
물론 그것은 상대들도 마찬가지인지 놈들을 쳐 죽이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말이다.
“추적.”
그렇게 매복 셋을 쳐 죽인 뒤 다시 추적을 사용했다.
“흠.”
다만 이번에는 흔적이 두 개였다. 이곳에서 놈들이 두 갈래로 갈라진 것이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어쩌면 둘 다 진짜일수도, 아니면 양쪽 다 헤매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의 나침반을 가지고 있을 선장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자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욕망의 나침반을 갖고도 굳이 두 패로 나눈 이유는 무엇일까.
잠시 고민에 빠진 로칸은 자신이 바보 같았음을 깨달았다.
“진실의 종, 사용.”
진실의 종을 꺼낸 뒤, 스스로 하나의 명제를 정했다.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블랙펄 해적단의 선장을 만난 수 있다.”
[거짓]
이후에 또 수작을 부려 놓았을 수 있지만 이렇게 하면 그만이 아닌가? 두 흔적 중 진짜를 파악한 로칸은 다시 속도를 높였다. 해안가를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섰다.
“이번엔 숲인가.”
안으로 들어서니 소나무처럼 생긴 나무가 빽빽한 숲이 나타났다.
다만 특이한 것은 생김새와 달리 나무껍질의 색깔이 검보라 빛으로 요사스럽다는 것인데, 한눈에 봐도 평범한 나무는 아닌 듯싶었다.
“……?”
일단은 가로지르는 로칸. 그러나 우려와 달리 숲속에 들어서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끼아아악!”
“……!”
그러다 어느 순간 들려온 귀곡성에 홱 하고 고개를 돌리자 끔찍한 광경이 나타났다. 블랙펄 해적단의 일원인지 뭔지 모를 해적이 나무줄기가 팔과 다리가 묶인 채로 씹어 먹히고 있는 것이다.
“헉.”
그리고 그 결과라고 이야기하듯, 검보라 빛깔의 나무를 자세히 보니 사람의 얼굴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런 거로군.”
로칸은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역시 처음의 예상처럼 범상한 숲이 아닌 것이다.
이곳은 아마도 식인 식물들이 가득한 원한의 숲.
그렇다면 자신은 왜 멀쩡한 것일까? 슥 아래를 내려다보니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이트메어는 땅을 딛지 않는 것이다. 녀석들은 아마도 땅의 압력이나 진동 따위를 이용해 적을 파악하는 것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로칸은 나이트메어라는 프리패스 티켓을 가진 것이었고, 비명이 난무하는 숲을 멀쩡히 가로지를 수 있었다.
“젠장, 멀리도 갔군.”
그렇게 숲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높게 솟은 거대한 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산으로 이어지는 동굴이 그를 맞이했다.
발자국 역시 그리로 향하고 있었고.
“거의 다 따라잡은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놈들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지만 로칸은 안심했다. 발자국의 색이 점점 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놈들의 위치가 가까워졌다는 뜻이었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450레벨은 아니겠지.’
그들을 노리던 또 다른 무리인 검은구름 해적단처럼 그랜드 마스터급의 간부들은 제법 있겠지만 크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천신의 무구와 마신의 무구를 동시에 일으키기에는 아직 재사용 대기 시간이 남았지만 어느 한쪽만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450레벨이 아닌 이상 누구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기를 또 한참. 드디어 로칸은 고대하던 블랙펄 해적단과 조우할 수 있었다.
“흠, 딱히 인사를 나눌 상황은 아닌 것 같지?”
그들은 이미 한창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다른 해적단과? 맞지만 틀리다. 해적단은 해적단인데, 이미 죽은 자들, 즉 언데드들인 것이다.
[원한의 해적][Lv 399]
언데드가 되면서 레벨이 하락하고 격이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위험했다.
개미굴에 들어온 듯 몰려나오는 어마어마한 물량과 더불어 부숴도 부숴도 원한의 힘으로 되살아나는 까닭에 힘의 우위에 있으면서도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빠각!
“이 질긴 놈들!”
“선장! 무슨 수가 없는 겁니까?”
“제길,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냐, 어?”
어떻게든 앞서는 무위를 이용해 막아 내고 있지만 점점 버거움을 느끼던 블랙펄 해적단. 그들 중 선장으로 보이는 자와 로칸의 눈이 마주쳤다.
“이봐! 여기 좀 도와……!”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했던가. 놈은 로칸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손을 흔들었다.
로칸 역시도 살기 위해서는 그들을 도와 이들을 무찌르거나, 퇴로를 뚫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주위에서 격전이 펼쳐지고 있지 않았다면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라고 오해할 지경이지만 로칸은 그를 향해 냉정하게 웃었다.
도움 대신 그들에게 악몽을 선사했다.
“나이트메어, 악몽 현신.”
상대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존재들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