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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화.공허 (1) (340/500)

 # 340

공허 (1)

두 존재의 격돌은 실로 무시무시했지만 사실 비주얼상으로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한 놈은 귀여운 동물인 쿼카를 닮았고, 다른 한 놈도 팬더를 닮은 것이다. 

평소라면 그 위력과 상관없이 두 놈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귀엽게 지켜보았겠지만 지금 로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뚫고 갈 것인가, 피해 갈 것인가.

슬쩍 전투의 여파를 살피니 돌아가도 한참일 것 같았다. 더욱이 어디까지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지 않은가?

혼돈의 비약도 아직 몇 병이나 남았고, 공허에 버틸 수 있는 천상 결계의 보주도 챙겨 두었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돌파한다.’

결국 로칸은 결단을 내렸다. 전투 중인 둘의 사이를 지나가겠다는 것이다. 

그 여파만으도 어설픈 자들은 죽어 나갈 법 했지만 로칸은 상황이 좀 달랐다.

여차하면 불사의 효과를 이용해 강행 돌파를 시도해 보아도 좋았고.

이를 악물고 놈들의 발치로 떨어진 로칸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전력질주!”

아껴 둔 마나를 쏟아붓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각 직업의 이동기들이 줄줄이 펼쳐지고, 로칸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이동했다.

“윽!”

쾅! 쾅!

놈들을 발을 구를 때마다 일어나는 충격파가 다시 몸을 밀어 냈지만 이를 악물고 돌진을 거듭했다.

“제기랄!”

그렇게 발밑을 지나 전투 지역을 벗어나려 했을 때, 팬더의 주먹질에 가격당한 쿼카가 넘어졌다.

가히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방향이 로칸의 도망 지점과 일치했다.

쿠웅!

몸을 날려 가까스로 쓰러지는 쿼카에 깔리지는 않았지만 대미지가 상당했다. 

공허의 존재들이라서인지 이놈들의 특징인지, 그가 겪은 다른 450레벨의 강자들보다도 공격력과 그에 파생되는 충격파의 대미지가 오히려 더 강한 것처럼 느껴졌다.

“은시…….”

하지만 로칸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혼돈의 비약 덕분에 아직 자신의 존재는 들키지 않은 상황. 굳이 표를 내기보다 은신을 사용하고 그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 들었다.

저 빌어먹을 팬더 놈이 어디선가 생겨난 대나무를 휘두르지 않았다면.

“버서크!”

탄성 좋은 대나무가 쿼카의 몸을 가격하고 낭창하게 휘어져 로칸이 있는 곳을 때린 것이다.

재빨리 버서크를 사용해서 막아 냈지만 피해가 막심했다. 생명력이 듬뿍 깎여 나가고, 그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가드를 올린 로칸의 몸이 못처럼 땅에 박혔다.

“으윽!”

버서크를 써 버린 것은 아까웠지만 로칸은 평소처럼 난동을 부릴 수 없었다. 광풍 현신을 사용한다면 혼돈의 비약을 바른 효과가 급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의 순간, 버서크를 사용한 것도 바로 그 때문.

덕분에 온전히 버텨 내지 못하고 짓눌리고 말았지만 감히 반격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해서는 안 되었다. 곧 버서크의 지속 시간이 끝나면 후유증이 찾아오고 말 테니까.

걸음이 더뎌지면 목적지에 닿는 시간이 길어지고 장애물을 피하는 데도 어려움이 생길 터였다.

때문에 주변의 흙을 깨부수듯 헤치고 나와 다시 전투 범위를 벗어나려 들었다.

“니아스!”

폴짝!

그때, 대형 쿼카가 몸을 뒤집으며 점프했다. 하늘을 꿰뚫을 듯 도약하더니, 팬더를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쿠과과과과광!

그와 함께 발생된 엄청난 충격파!

높이 뛰어오른 만큼 거대한 충격이 대지를, 팬더와 로칸을 휩쓸었다.

하필이면 방향도 로칸이 가려던 쪽이라 오히려 숨어들기 이전보다 더 먼 곳까지 튕겨 나온 로칸.

생명력이 반 이상 깎여 나간 것을 보며 로칸이 이를 악물었다.

눈이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광풍 현신, 전신 무쌍, 피의 각성!”

더는 참지 못하고 힘을 폭발시켰다.

갸웃?

그러자 팬더와 쿼카가 동시에 로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완전히 인식한 것은 아니다. 로칸은 아직 혼돈의 비약의 가호를 받고 있었으니까.

유령을 감지하듯 뭔가 있다는 것을 알 되, 로칸의 모습을 완전히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로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무혼 각성!”

마신의 이빨 허리띠에 담긴 무혼을 각성시키며 놈들을 향해 뛰었다.

[공허의 영향으로 마신의 이빨 허리띠를 깨울 수 없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무리하게 신성을 일으킬 경우, 공허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제길.”

공허 때문인지 무혼 각성이 자동 캔슬되었다. 

이어 알 수 없는 경고가 떠올랐지만 그것을 살펴볼 겨를은 없다.

아쉬운 대로 광풍의 배틀 액스의 무혼을 일깨우며 팬더의 정수리를 찍었다.

“광살!”

푸확!

발군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두툼한 가죽에 뒤덮인 팬더였지만 한순간에 십여 번의 베기를 뿜어내는 로칸의 공격을 온전히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쿼카와의 전투로도 좀처럼 흠집이 나지 않던 팬더의 머리에 상처가 생겨났고, 로칸은 집요하게 같은 부위를 난자했다.

“크리티컬 운즈, 출혈의 일격!”

상처를 벌어지게 만들고 출혈 효과를 일으키는 스킬의 힘이 상처를 파고들었다. 

새하얀 팬더의 머리가 피로 물들고 상처가 쩍 벌어져 하얀 두개골이 드러났다.

“디그독, 전설을 타는 자!”

이대로 끝장을 냈으면 좋겠지만 스킬이 꼬였다. 

한순간 쏟아 낼 수 있는 스킬을 모조리 뿜어낸 탓에 마무리를 지을 수 없자, 로칸은 한 가지 꾀를 내었다.

바로 디그독의 소환!

전설을 타는 자의 힘으로 진화한 디그독이 팬더의 두개골을 파고들었다. 

어떠한 광석조차 무르고 만드는 디그독의 침이 드러난 두개골을 적시고, 두꺼운 집게발이 형태를 무너뜨렸다.

“끄엉!”

팬더가 몸부림을 치며 떨어뜨리려 하지만 무리. 이미 머릿속을 파고든 디그독은 끈질기게 놈을 파고들었고, 놈은 스스로 땅에 머리를 박으며 자해를 시작했다.

뀨?

이렇게 되자 쿼카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는 팬더가 저 혼자 발광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 머뭇거림이 화를 불렀다.

팬더의 처리를 디그독에게 맡긴 로칸이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초극.”

놈의 순발력과 점프력이면 가뿐히 피해 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무방비 상태의 쿼카를 향해 로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

쿠오오오오오오.

응축된 힘이 폭발했다. 천신의 것도, 마신의 것도, 인간의 것도 아닌 힘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마나는 물론 공허까지도.

탐욕스러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그 힘에 닿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소멸.

하지만 힘이 부족했던 탓일까?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쿼카의 몸뚱이를 모두 삼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절반. 딱 절반을 집어삼키고 초극의 힘이 사라졌다.

“헉.”

귀여운 외형의 쿼카였지만 몸의 반쪽이 사라진 채 꿈틀거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그로테스크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놈이 로칸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길.”

시스템의 알림이 없어도 그것으로 로칸은 확신했다. 혼돈의 비약이 효과를 다했다는 것을.

거인의 형상으로 변신하는 광풍 현신이다 보니 피부에 바른 혼돈의 비약이 급격히 얇아진 것이다.

그것을 직감한 로칸은 서둘러 놈에게 달려들었다.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심장을 먹는 아귀가 공허의 쿼카의 심장을 탐식합니다.]

[대상의 심장과 영혼에 깃든 힘을 흡수합니다.]

마무리는 심장을 먹는 아귀다. 그대로 둬도 죽을 테니 굳이 마무리 일격을 가할 필요는 없지만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며 늘어난 심장 흡수 슬롯을 이대로 놔두는 것은 아까운 일이 아닌가?

한데, 놈이 흡수한 힘은 쿼카의 것이 아니었다.

“어?”

[공허의 힘을 흡수합니다.]

[당신의 몸속에 공허의 기운이 깃듭니다.]

공허. 심장을 먹는 아귀가 삼킨 것은 다름 아닌 공허의 기운이었다.

놈의 점프력을 얻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던 로칸의 얼굴에 당혹의 기운이 서렸다.

느닷없이 공허의 힘을 얻다니. 그 정체를 알 수 없기에 은근한 두려움까지 생겨났다.

[공허의 기운이 당신을 피 속에 녹아듭니다.]

[경고! 공허의 기운이 당신의 정신과 육체를 탐합니다.]

[타이틀 불굴의 의지 효과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깃든 신성이 공허에 저항합니다.]

[천신의 힘이 공허에 저항합니다.]

[마신의 힘이 공허에 저항합니다.]

이윽고, 몸속에서 격통이 일어났다. 

정신과 육체를 빼앗으려드는 공허의 힘에 안간힘을 쓰며 저항해야만 했다.

옆에서 발버둥을 치는 팬더? 그런 것은 이제 안중에도 없다. 자칫 공허에 잡아먹힐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미 생명력은 빠르게 줄어 0을 가리키고 있었고, 무한의 마나가 생명력을 대신해 공허에게 뜯어 먹혔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한다. 

로칸은 광풍 현신의 지속 시간이 끝나는 순간, 자신의 존재 자체가 공허에 먹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혼돈, 혼돈의 비약……!”

그렇게 바닥을 구르던 로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혼돈의 비약.

공허의 침식을 막아 준다는 그것을 사용하면 이 고통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공허를 통제하고 몸속에서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기댈 곳이 없었다. 외부에서부터 흘러들어 오기 시작한 공허를 막기 시작한 천상 결계의 보주는 내부의 공격까지 막아 줄 힘이 없었다. 

꿀꺽꿀꺽.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해 보아야 했다.

그렇기에 로칸은 남은 혼돈의 비약을 모조리 들이켰다.

본래의 용도는 몸에 바르는 것이지만 고작 그걸로는 몸속에서 날뛰는 공허를 쫓아낼 수 없을 터였다.

[혼돈의 비약을 섭취하셨습니다.]

“커헉!”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격통이 더 심해졌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신성과 천신의 힘, 마신의 힘이 공허와 싸우는 중이었다면 혼돈의 힘이 그 둘을 동시에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그 힘은 미약했지만 놀랍게도 양쪽의 공격을 모조리 흡수해 버렸다. 

공격을 받을수록 힘이 불어나는가 싶더니 종국에는 그들 모두를 집어삼켰다.

혼돈. 그 미지의 힘이 친숙하게 느껴진 것은 왜일까.

고통 속에서도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던 로칸은 그 이유를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 힘은 마치 초극으로 인해 발생하던 미증유의 기운과 닮아 있던 것이다.

천신과 마신의 힘을 융합하고도 불완전하게만 느껴졌던 그 힘이 로칸의 안에서 완전한 것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었다.

‘소멸되는 건가?’

그렇기에 덜컥 겁이 났다.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냐마는 이대로 육신이 소멸해 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모든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의 힘을 획득하셨습니다.]

시스템 알림은 짧았다. 그리고 그마저도 아주 빠르게 밀려났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기적적인 업적! 당신은 최초로 공허의 마수를 쓰러뜨렸습니다.]

[타이틀 ‘공허 사냥꾼’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은 이 타이틀의 최초 획득자입니다.]

[불가능한 업적! 당신은 최초로 공허의 힘을 몸 안에 품었습니다.]

[타이틀 ‘공허를 품은 자’를 획득했습니다.]

[당신은 이 타이틀의 최초 획득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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