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4화.환마계 (3) (344/500)

 # 344

환마계 (3)

아찔한 의상의 여성체 모습. 

미인계를 사용하려는 것일까 싶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로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것이 놈의 진체인지조차 확실치 않으니까.

‘일단 악의는 없는 건가.’

만약 그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이라면 환상이라 할지라도 불굴의 의지가 저항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 이상 없이 환상을 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눈앞의 상대는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일단 지금은.

“아자르?”

“호호, 저를 그렇게 부르는 인간이 또 있을 줄은 몰랐군요.”

“또? 아아.”

교태를 부리는 놈을 무심히 바라보던 로칸이 곧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이전의 대상은 사자왕 가오칸이겠지. 

여전히 꿈쩍도 않는 로칸을 보며 아자르가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로칸은 자신의 경계감을 나타내듯 어느새 배틀 액스까지 손에 쥐고 그를 맞이할 뿐이다.

“이런. 정신력이 무척 강하신 분이었군요. ‘방문자’들은 다 그런가요?”

“글쎄,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 처음으로 방문하지 않았겠지.”

“자신감 넘치는 분이군요. 하지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곳 천상에는 당신의 상상 이상으로 강하고 호전적인 이들도 많거든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다소 기분 나쁠 수 있는 말들을 서슴없이 뱉어 내는 로칸이지만 아자르는 딱히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로칸의 그런 태도가 신기한 듯 방긋 미소를 지을 뿐이다.

“흠, 그럼 이런 거추장스러운 건 필요 없겠군요.”

휘익.

미모로 로칸을 홀리려던 시도를 포기한 것일까? 

녀석이 휙 손을 내젓자 주변 풍경이 또다시 바뀌었다. 꽃밭 대신 고풍스러운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방이 나타났다.

“앉지.”

더불어 녀석의 모습도 바뀌었다. 아리땁고 색기 넘치던 여성체의 모습에서 단단한 근육을 갖춘 남성체의 모습으로.

마치 마족과도 같아 보였지만 그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자인 척을 한 건가?”

“딱히 척이라고 할 수는 없지. 나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니까.”

“흐음, 그렇군.”

여성의 몸으로 교태를 부리던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를 물었지만 녀석은 당당했다. 환수는 본디 환상에서 태어난 존재. 암수의 구분 따위는 큰 의미가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물론 교미를 통해 번식하는 종들도 있기는 하지만 자웅동체나 고자, 무성체가 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로칸은 그 사실을 단박에 이해하고 표정을 풀었다. 그런 것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날 찾았다지?”

“그저 한번 보고 싶었지. 어쨌든 이 환마계를 처음 방문한 방문자가 아닌가? 한데 보낸 건 다섯인데, 돌아온 건 하나뿐이군.”

“이빨을 드러내는 놈들에게 머리 숙이는 취미가 없어서. 문제 삼고 싶은 건가?”

고작해야 갓 초월자의 경지에 든 인물과 그보다 한 단계 위의 격을 지닌 존재의 대화라고는 보기 어려웠지만 로칸은 당당했고, 의외로 아자르도 덤덤히 받아들였다.

아마 가오칸을 겪어 봤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라면 확실히 450레벨의 존재들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실력을 지녔으니까.

“아니, 예의 없는 놈들은 나도 싫어서 말이지.”

퍼억!

그 순간, 로칸이 끌고 왔던 환수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반응할 새도 없이 아자르가 일수에 부하의 머리를 날려 버린 것이다. 

꽤 쓸 만하다고 여겼으니 이런 심부름도 시킨 것일 텐데, 과감한 아자르의 행동에 로칸도 짐짓 놀랐지만 놈의 표정은 평안하기만 했다.

“무례가 있었다면 사과하지. 정말 난 널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 정도 되는 존재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에 마음이 풀어질 만했지만 로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마음을 닫고 그를 경계했다.

놈의 호칭은 환몽의 지배자. 

태생부터 음흉한 놈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등장부터 허튼 수작을 부리지 않았나? 로칸은 놈이 무슨 말을 하든 곧이곧대로 믿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 보니 어떻지?”

“네 말대로 과연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인 자답군. 일전에 만났던 가오칸이라는 녀석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어. 하하, 이거 천상이 발칵 뒤집어질 수도 있겠는데?”

“그런 시답잖은 말을 하려고 부른 건가?”

“아니, 아니. 이건 그냥 순수한 소감이야. 너무 경계하는 것 같군. 오히려 난 너에게 감사하고 있다. 덕분에 방문자들과의 연결점이 생겼더군.”

“연결점? 아, 그거.”

아마도 소환사 클래스에 대한 이야기이리라. 

방문자들과 환수들을 연결시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자르는 진심으로 그 일을 기뻐했다.

“그럼 보답이라도 하지?”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원하시는 것이 있나?”

순수하게 혹은 음흉하게 웃는 아자르의 낯을 보고 있자니 뭘 요구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템을 달라고 해 볼까? 아니면 동맹을 요구해? 

아직 환마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당장 어떤 것이 가치 있는지 파악이 어려웠다.

“원하는 것이라……. 그럼 이건 어때?”

한참을 고민하던 로칸이 마침내 대답을 내놓았다.

“오호? 그거 재미있군.”

마침 아자르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설마 이런 걸 요구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지만 간단한 세부 내용을 듣자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좋아, 수락하지.”

이곳은 아자르의 영토. 그가 수락한다 이야기한 순간 효력이 발휘되었다. 

좀 더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계약서를 작성해야겠지만 그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로칸이 익숙한 솜씨로 써 낸 계약서에 흔쾌히 사인을 했고, 정식으로 효력이 발휘되었다.

[환마계 : 환몽의 대지에서의 상업 활동이 가능해집니다.]

로칸이 요구한 것은 다름 아닌 상권의 보장이었다. 

슬쩍 돌아본 결과 상점을 운영하는 이들은 모두 지성을 가진 환수들이었지만 로칸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그래 봤자 일단은 도시당 한 칸의 상점을 열 수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런 것쯤은 코리아 스타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층을 높이 올리면 그만이지 뭐.’

가질 수 있는 땅의 크기는 제한되어 있지만 층수 제한은 없지 않았나? 그렇다면 높게 쌓아 올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생각을 정하자 벌써 팔아먹을 물건들이 떠올랐다. 

소환수와 펫의 차이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지상 등에 업데이트되었을 소환수용 아이템은 물론, 환수들이 스스로를 정비하고 강화할 수 있는 아이템과 미용에 관련된 것들까지.

환수들이 취급하는 품목들이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어쩌면 생각보다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본론이라? 난 네게 바라는 것이 없는데?”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 이제는 진짜 거래를 할 차례였다.

단도직입적인 말에 아자르는 의뭉을 떨었지만 로칸의 생각은 달랐다. 무지개 전송기를 통해 각 도시를 돌아보면서 약간의 정보를 획득했던 것이다.

환마계를 지배하는 다섯 왕이 서로 친하거나 협력하는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의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하는 관계였고 경우에 따라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고 했다. 그 경우란 대부분 영토를 뺏기 위함이었고.

그러니 로칸이 개입할 여지가 있지 않겠나?

“원하는 지역을 정하면 그 쪽을 정리해 주지.”

“정리해 주겠다라…….”

“노리는 지역의 환수가 줄어들면 간접적인 이득이 발생하지 않겠나?”

“호오.”

다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하자 아자르도 관심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 상대하기에는 정신 계열 스킬을 많이 쓰는 아자르의 지역 환수들이 가장 만만했지만 경험치가 짰다. 그러니 굳이 이곳에서 죽치고 사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령들이 원하는 것도 어쨌든 ‘환수’를 사냥하는 것이지 않나? 그렇기에 로칸은 아자르에게 딜을 건 것이다.

“뭐, 원하지 않으면 다른 놈에게 가고.”

하지만 그 제안은 아자르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로칸에게 환수란 사냥감에 불과했고, 그 대상이 어디에 있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감히 내게 협박을 하는 것인가?”

그 제안이 불쾌했는지 아자르가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와 함께 주변의 풍경이 지옥불이 들끓는 모처로 바뀌었다.

“한번 해보자고?”

그러나 로칸도 지지 않았다. 아자르의 기운에는 한참이나 못 미쳤지만 여차하면 달려들 듯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지금 싸우면 무조건 진다. 피의 각성을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니까.

무혼 각성을 사용한다면 어떻게든 몸을 빼낼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놈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로칸에게는 ‘다음’이 있었다. 죽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방문자라는 존재이니까.

까짓 거 한번 죽어 주고 그다음에 확실한 복수를 하면 그만이었다.

만약 로칸이 날뛰기 시작한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누구일까?

그 사실을 알기에 지지 않고 광기를 뿜어 댈 수 있었다.

그럴 경우 기껏 얻은 상점 개설권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다른 환수의 왕에게 같은 조건을 걸어도 되고, 그까짓 상점 몇 개 만들지 않아도 로칸은 충분히 부자였다.

파치치칙!

둘의 기운이 부딪히며 공간이 비명을 질렀다. 

그럼에도 멈출 기색이 없는 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먼저 기운을 거둔 것은 아자르 쪽이었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군. 뭔가 숨겨 둔 수도 있겠지? 좋아, 내가 졌다. 그렇게 하지.”

얻을 것 없는 기 싸움에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로칸의 손을 잡았다.

“그럼 협상을 시작해 볼까?”

씨익.

뜻을 관철시킨 로칸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환마계의 왕들 중 하나이니 뜯어낼 것도 많을 것이다.

둘은 한동안 계약 조항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이어 갔다.

그리고 그 대화가 끝이 났을 때, 로칸의 앞으로 하나의 퀘스트가 배달되었다. 

[비밀 동맹][퀘스트]

당신은 환몽의 왕 아자르와 비밀 계약을 맺었습니다. 아자르가 세력을 넓힐 수 있도록 보조하고 보상을 획득하십시오.

-완료 조건 : 지정 지역의 400레벨 이상 환수 사냥

-완료 보상 : 

1. 조건을 만족하는 환수를 사냥한 수에 따라 차등 보상

2. 병사 또는 간부급의 환수 사냥 시 추가 보상

3. 세력전 참여 시 공헌도에 따른 추가 보상

4. 퀘스트 진행 중 획득 경험치 10% 증가

5. 퀘스트 완료 시 대량의 경험치

무려 다섯 가지 종류의 보상이 걸린 퀘스트. 

로칸이 하는 만큼 보상이 돌아오는 방식이기에 대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정령계 수호 퀘스트가 중첩된다면 어떨까?

일단 획득 경험치부터가 대박이었고 한 가지 행위로 두 가지 퀘스트의 완료 조건을 모두 채울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좋아. 어디를 정리해 주길 바라지?”

“흐흥, 그건 바로 여기다.”

“여기? 여기라고?”

아자르가 지목한 곳은 무척이나 의외의 장소였다. 로칸이 놀라 되물을 정도.

‘이 미친놈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나 이미 퀘스트 창은 갱신되었다. 재지정을 할 의사가 없다는 듯 단호한 미소를 띤 아자르의 모습에서 로칸은 저도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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