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
마도의 대지 vs 무혼의 대지 (4)
“그 힘은?”
갑작스러운 로칸의 변화에 칼튼의 표정을 달리했다.
로칸에게서 느껴지는 상이한 힘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의 어떤 것까지.
하지만 팔자 좋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일시적일 것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로칸의 힘이 자신에 필적할 만큼 강대해진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당한다. 그런 불안감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전신의 돌격! 점멸!”
“혈마 강림.”
콰앙!
로칸은 공간을 격하고 순식간에 놈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애초의 목적대로 놈의 가슴을 뭉개고 심장을 터트릴 수는 없었다. 어떤 강력한 보호 능력에 의해 돌진이 가로막힌 것이다.
“……!”
실로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돌진을 회피한 것도 아니고 정면으로 막아 내다니.
실패를 깨닫자마자 빠르게 물러서 자세를 잡은 로칸의 눈에 칼튼의 주위를 맴도는 붉은 막이 보였다.
“크큭, 처음 보나 보지? 이것이 바로 혈마강기다!”
퍼엉!
이내 놈을 감싸고 있던 붉은 기운이 폭발해 조각조각 쪼개진 채로 로칸에게 날아들었다.
“제기랄. 오라 폭격!”
비행 궤도가 자유로운 것이, 어쩌면 추적 기능 따위가 있는지도 모른다.
로칸은 어쩔 수 없이 회피 대신 맞상대하기를 택했다.
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부딪혀보고 싶기도 했고.
퍼엉 펑 펑 펑 펑.
수십 개의 응집된 마나 덩어리가 허공에서 부딪혀 터져 나갔다.
붉은 강기가 피처럼 비산하며 세상에 내려앉았다.
다행히 위력 면에서는 호각.
그것을 확인하자 로칸은 이를 악물고 놈에게 재차 달려들었다.
요상한 기술을 쓰기 시작한 놈을 깨부수기 위해 배틀 액스에 힘을 더했다.
[혈마강기에 노출되셨습니다.]
[피의 살육 효과로 당신의 전투력이 증가합니다.]
“……?”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상쇄된 혈마강기의 잔해를 스쳐 달려가자 피의 살육에 의해 혈마강기가 로칸에게로 흡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본디 혈마강기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사람을 죽여 그 피로 연성하는 능력. 그러니 정점에 달한 버서커인 로칸의 힘과도 닮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아주 조금 로칸 쪽이 우위에 있었다.
[피의 살육 효과로 당신의 전투력이 증가합니다.]
[피의 살육 효과로 당신의 전투력이 증가합니다.]
파앙! 파앙! 파앙!
손을 섞을수록, 더욱 강하게 부딪칠수록 흡수되는 힘은 증가했다.
칼튼이 사용하는 혈마강기라는 것에 로칸이 천적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놈……!”
그것을 칼튼도 이제야 알아챘는지 처음에는 여유롭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신과 부딪칠수록 로칸이 강해지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슬슬 손목이 시큰거리고 아랫배가 아려 오기 시작했다.
“갈!”
퍼엉!
입술을 질끈 깨문 칼튼은 한순간 힘을 폭발시키며 로칸을 떨쳐냈다. 뿜어내던 붉은 기운을 거둬들이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떼었다.
“……응?”
그러자 기도가 바뀌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분위기뿐 아니라 느껴지는 기운까지도 180도 달라졌다.
묘하게 신성한 느낌까지 난다고나 할까.
“신승 강림.”
감았던 눈을 반개하는 그에게서 거북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혈마강기가 타고난 살육자인 로칸의 그것과 비슷했다면 이건 마치 사제들의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무슨 개수작이냐!”
하지만 겁을 먹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 아니니까.
배틀 액스를 꼬나 쥐고 달려드는 로칸을 향해 칼튼이 가만히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헉!”
크게 내지르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로칸은 그 순간 어마어마한 압력을 느꼈다.
육체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 혹은 그가 가진 업보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돌진이 주춤거렸다.
빠득!
“어디서 개수작이냐!”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주마등처럼 지금까지 그가 잡은 사냥감들의 면면이 눈앞으로 스쳐 갔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딴 것에 마음이 흔들렸다면 애초에 수만, 수십만의 몬스터를 죽이지도 못했을 터였다.
[타이틀 만인살의 효과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게다가 타이틀 만인살의 효과가 보조했다.
직접적인 정신 공격은 아니었는지 불굴의 의지 대신 만인살이 움직인 것이다.
어설픈 놈들이라면 마음이 흔들렸을지 모르지만 로칸은 다르다.
전쟁 영웅이자 황제요, 지상의 절대자였다.
천상에서도 감히 누구도 함부로 덤빌 수 없을 만큼의 업적을 이룩한 상태였고.
단숨에 놈의 수작을 깨부수고 자세를 다잡았다.
“백보신권(百步神拳)!”
파바바방!
돌진하는 로칸의 몸 위로 연이어 강력한 일격 일격이 꽂혀 들었지만 무시했다. 생명력의 하락은 그의 입장에서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타이틀 불굴의 의지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한순간 능력이 증폭되며 어마어마한 기세로 놈에게 날아들었다.
차곡차곡 쌓인 대미지가 충격량으로 전환되었다.
“큭, 여래신장(如來神掌)!”
칼튼이 쏟아 내는 장법, 권법은 실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날카롭지 못했다. 일격에 로칸의 머리를 터트리거나 심장을 파괴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로칸은 무시할 수 있었다. 버텨 낼 수 있었다.
불사의 권능을 믿고 놈에게 파고들어 강력한 일격으로 되돌려 주었다.
“제압.”
챠르르륵.
로칸이 다가서기 전, 배틀 액스에서 풀려나온 사슬이 먼저 놈에게 다가갔다.
그 ‘타락’조차 봉인했던 사슬의 힘이 놈을 묶고 무력화시키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
타다닷.
놈의 발이 쭉쭉 밀려나더니 잔상을 만들어 낼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그제야 로칸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무협광이네.’
놈이 이른바 무공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혈마이니 신승이니 하는 것은 결국 무림의 어떤 인물을 불러낸 것이고, 그들의 무공을 이용해 자신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빙의라고나 할까?
‘아니,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빙의를 한다면 영혼 자체가 바뀌어야 했지만 이 경우 칼튼은 제 이성을 유지한 채로 그들의 힘만을 펼쳐 내고 있었다.
다행히 불러내는 자들의 무공들이 하나같이 자신과 상성이 괜찮은 놈들이었지만 무공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의 능력인지라 까다롭기는 무척 까다로웠다.
지금도 사슬이 놈을 뱀처럼 쫓지만 닿지는 못하고 있지 않은가?
로칸이 눈을 빛내며 한 팔 거들었다.
어지럽게 날뛰는 칼튼을 향해 강대한 힘을 쏘아 냈다.
“광살!”
생각 같아서는 초극으로 단번에 끝장을 내고 싶지만 저 같은 기동력을 보이는 상대에게 잘못 썼다가는 이쪽만 무방비 상태가 된다. 아무리 강력한 기술이라도 피해 버리면 소용이 없으니까.
더구나 초극은 사용 후 시전자의 모든 스킬이 봉인되는 뒤가 없는 스킬이 아니던가?
때문에 초극 다음으로 강력한 필살기로 놈을 난자했다.
이것으로 놈을 묶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인간 주제에 대단하군. 내가 이것까지 쓰게 만들다니……. 천마 강림!”
콰과과과과과광!
칼튼의 기도가 또 한 번 바뀌었다. 이번에는 천마라는 존재를 끄집어낸 것이다.
보통의 무협에서 단신으로 천하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존재로 꼽히는 절대자의 힘.
이른바 천마신공이라 불리는 그것이 발휘되자 튕겨 나가는 것은 오히려 로칸 쪽이 되었다.
“크윽, 이 컨셉충 새끼가!”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로칸은 버럭 성질을 내며 재차 달려들었다. 천마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시간이 별로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장을 봐야만 했다.
“천마지체.”
그러는 사이 놈은 끊임없이 스킬과 무공을 섞어 사용했다.
자신의 신체를 천마신공에 가장 적합한 육체로 바꾸고, 신승을 강림시켰을 때와는 정반대의 기운인 마기를 주변에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형언할 수 없는 강대한 기운, 악의가 놈에게로 몰려들었다.
“아수라멸천장(阿修羅滅天掌)!”
“초극!”
천마의 힘을 믿는 것일까? 놈이 좋지 않은 선택을 했다.
로칸과 정면으로 부딪쳐 온 것이다.
칼튼의 손에서 아수라의 형상을 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기운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약한 자들은 질식할 만큼 강대하고 사악한 기운이 세상을 뒤덮었다.
같은 마기이지만 마족들의 것과는 또 다른 느낌.
하지만 로칸은 제 스스로의 힘을 믿었다.
신성력과 마기, 그 어떤 것도 아닌 파괴의 힘을 가득 끌어올려 놈에게 내질렀다.
쿠과과과과과과과과.
“큭!”
힘과 힘의 격돌.
그 순간 자신 있게 기운을 내지르던 칼튼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고작해야 450레벨도 달성하지 못한 초월자가 아니던가. 이것이 신성도 얻지 못한 자의 힘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그의 표정처럼 격돌한 두 힘 중 승기를 가져가는 것은 다름 아닌 로칸의 초극이었다.
칼튼의 몸이 점점 밀려났다.
도망치려는 속셈일까?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조금이라도 힘을 푸는 순간 초극에게 잡아먹히고 말 테니까.
그러나 로칸 역시도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모든 것을 쏟아 낸 일격. 여기서 조금이라도 힘을 풀어 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
단숨에 놈을 밀어붙여 끝장을 보기 위해 힘을 쥐어짜 냈다.
“……무림(武林).”
점점 밀려나던 칼튼이 마침내 자신의 마지막 힘을 끌어내었다.
신성. 마제스티 마스터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권능.
뭐라 정의할 수 없지만, 반대로 무엇이든 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힘이 개방되었다.
무림.
무인들로 이루어진 세상이 열리고 그 안에서 강대한 존재들이 환수처럼 튀어나왔다. 개중에는 익숙한 힘을 쓰는 존재들도 포함되었다.
혈마, 소림신승, 천마.
그리고 그 밖에 무수히 많은 강자들.
그들이 칼튼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젠장, 이게 드래곤볼이냐……!”
쿠와아아아아아아.
그들이 각자 가진 내공을 쏟아 내었다.
서로 상반된 기운을 가진 자들도 있었지만 ‘세계의 수호’라는 기준 아래 합치된 힘이 일어났다.
로칸으로서도 처음 맛보는 진정한 신성의 힘.
초극이 아무리 초월적인 파괴력을 가졌다 한들 한 세계를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밀어붙이던 힘이 약해지고, 순식간에 힘의 우위가 역전되었다.
초극을 뚫고 나온 힘이 로칸의 몸을 강타했다.
[사망하셨습니다.]
“제기랄!”
결과는 사망이었다.
로칸은 결국 칼튼의 마지막 힘을 넘어서지 못했다.
마제스티 마스터든 무엇이든 제대로 붙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다고 믿었던 초극이 패배했다.
그저 힘 대 힘의 대결이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마지막에 등장한 무림인들의 협공에 당했다는 것에 분통이 터졌다.
마제스티 마스터인 주제에 그만한 인원과 같이 협공을 하다니!
물론 그들을 불러내는 것 자체가 그의 스킬이겠지만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전생의 사건이 떠올라서인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두 번 패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칸은 빠득빠득 이를 갈며 전투를 곱씹어 보았다.
“450레벨의 권능……. 그 정체를 알아야 해.”
그리고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450레벨을 달성하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권능. 일명 신성이라고 불리는 그 힘의 정체를 알기 전에는 이겼다 하더라도 온전한 승리가 아닐 것 같았다.
가장 좋은 것은 스스로 마제스티 마스터에 올라 그 힘을 체험해 보는 것이지만 당장은 무리였다. 아직도 450레벨까지는 한참이나 남았으니까.
그렇다고 남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어떤 금제 같은 것이 걸려 있는지 자신의 신성에 대해서는 가오칸조차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알아내야 해.’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힘의 정체를 밝혀내겠다고 다짐하며 스산한 눈빛을 빛내는 로칸의 앞으로 알 수 없는 어떤 시스템 알림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