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
광풍과의 만남 (1)
웅성웅성.
로칸이 야만 전사들의 안내를 따라 마을로 진입하자 자연히 소란이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역시 로칸과 광풍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제단은 저쪽인가?’
소란이 커지고 야만 전사들의 수가 불어났지만 로칸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설사 정체가 탄로 난다 한들 다 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자 커다란 제단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광풍의 제단.
광풍을 소환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저벅저벅.
야만 전사들의 안내를 받아 마을에 들어왔지만 꼭 그들을 따라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로칸이 걸음을 돌려 제단 쪽으로 향하자 그를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저 멀리서 족장으로 보이는 이가 등장했음에도 로칸을, 아니 광풍을 찬양하며 함성을 지를 뿐이었다.
[광풍의 제단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광풍의 제단에 올랐을 때, 로칸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확인시켜 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하지만 연달아 나타난 메시지가 로칸을 비웃었다.
[광풍 현신][퀘스트]
광풍이라 불렸던 학살의 신을 소환하시오.
-성공 조건 : 10시간 이내에 350레벨 이상의 존재 학살 0 / 10,000
-성공 보상 : 학살의 신 소환
-퀘스트 제한 : 공간 이동 사용 불가
-제한 시간 : 9:59:59
“이런 젠장.”
왠지 학살의 신이 저 위에서 비웃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차라리 힘의 정수를 구해 오라고 했다면 쉬웠을 텐데.
물론 하이 마스터급의 존재 1만 마리를 해치우는 것은 로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일단 귀찮았다.
그리고 제한 시간이 붙어 있었기에 다른 것보다 몬스터를 찾고, 모으는 게 무척이나 짜증 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놈이 해야지 어쩌겠나.
한숨을 푹 내쉰 로칸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족장을 바라보았다.
[물푸레나무 일족 야만 족장 오히리][Lv 400]
무려 400레벨의 강자.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유저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같은 그랜드 마스터라도 로칸과는 분명한 힘의 격차가 있었다.
“족장, 이 근처에 몬스터가 대량으로 나타나는 곳이 어디지?”
그렇기에 은근히 광기를 흘리며 강압적으로 묻는 것이 가능했다.
“몬스터라면……. 동쪽에 검은 산이 있다. 하지만 거기 몬스터는 못 먹는다.”
그 역시 로칸을 광풍으로 여기는지 인사도 없이 묻는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제대로 된 어법이 형성되지 않았는지 반말이었지만 그 정도는 이해 할 수 있었다.
“다녀오지.”
그 대답을 듣자마자 로칸은 광풍의 날개를 펼쳤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쇠뿔도 단김에 뺄 생각이었다.
‘신맵의 몬스터를 구경한다고 생각해야겠군.’
어떤 몬스터들이 주로 나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관없다. 압도적인 힘,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무의미했으니까.
전속으로 날아간 로칸은 금세 야만 족장이 말한 검은 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로 산 전체가 새까맣게 되어 있었기에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특별한 광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현무암?
사실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건 거기에 충분한 몬스터가 있는지 여부뿐이다.
“카이!”
로칸은 즉시 카이를 소환해 올라탔다. 광풍의 날개로도 비행에는 큰 지장이 없지만 학살을 위해서는 다른 소환수들보다 카이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광역 도발!”
검은 산의 허공을 맴돌며 사냥감을 물색한 로칸은 몬스터들이 뭉쳐 있는 어느 지점에 이르러 광역 도발을 시전했다.
다만, 평범한 광역 도발 스킬은 아니다. 카이의 힘을 이용해 소리가 더욱 멀리 퍼지도록 만들었다.
광역 도발은 소리가 닿는 범위까지의 존재들을 불러 모으는 기술이니까.
“전설을 타는 자, 붉은 유성!”
콰과과광!
그리고 놈들이 모여들어 로칸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순간, 유성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 한 방에 수백은 되는 놈들이 곤죽이 되었다.
짓뭉개지고 시체마저 불타올랐다.
하지만 상관없다. 로칸의 목적은 아이템도, 몬스터도 부산물도 아닌 순수한 학살 그 자체뿐이니까.
“카이, 흩어지자!”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참상을 감상할 시간조차 없었다. 카이를 따로 보내 킬 수를 올리도록 만들고 저 자신도 몬스터 떼 속으로 파고들었다.
자비 없는 도끼질을 시작했다.
크워어엉!
신맵 중에서도 외곽으로 나와서일까? 몬스터의 수준은 제법 대단했다. 평균 레벨 370쯤은 되는 것 같았으니까.
따라서 저마다 마스터 스킬을 발동시키며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로칸의 도끼질을 받아 낼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심지어 버서크나 광풍 현신을 사용하지 않아도 압살을 당할 정도였다.
몬스터가 약한 것이 아니라 로칸이 강한 것이다.
그가 아니면 그 누가 이만한 몬스터들을 도륙할 수 있으랴.
카이 역시도 어느덧 하이 마스터 끝자락에 도달했기에 홀로 사냥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정령계에 잠시 머물면서 엘리멘탈의 힘이 더욱 강해지기도 했고.
그렇게 로칸과 카이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냥 좀 죽어라!”
검은 산.
이 산을 통째로 벗겨 먹으면서도 로칸은 조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보다 산의 크기 자체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혹여나 이 산을 이 잡듯 뒤져도 1만 마리를 채우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도끼질은 더욱 투박하고 거칠어졌다.
군더더기 없는 무아지경의 일격.
로칸은 저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익혀 나가고 있었다.
[불길한 검은 돌 1,000개를 수집하셨습니다.]
[돌발 퀘스트! 검은 돌의 저주가 시작됩니다.]
“이건 또 뭐야?”
한참을 무아지경으로 학살해 나가고 있을 때, 돌발 퀘스트가 발동했다.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자동 습득된 아이템 중 불길한 검은 돌이라는 것이 있던 모양이다.
가뜩이나 시간 없어 죽겠는데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재빨리 퀘스트 창을 열었다.
[검은 돌의 저주][돌발 퀘스트]
소유자의 원념과 광기를 흡수하는 불길한 검은 돌이 모여 강력한 저주의 힘을 품었습니다.
서둘러 저주를 해제하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저주의 힘은 강력해질 것입니다.
-성공 조건 : 검은 돌의 저주 해제
-성공 보상 : 저주 해제
-실패 보상 : 저주의 중첩
“이런 씨부럴!”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검은 돌의 저주는 또 뭐란 말인가?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중첩되는 저주라고? 귀찮기 짝이 없는 형태였다.
“하필 걸려도 이런…….”
[검은 돌의 저주 : 지능 수치가 1만큼 하락했습니다.]
저주의 영향으로 벌써 능력치가 하락하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했지만 이런 중첩형 저주의 경우 가만 놔두면 나중에 걷잡을 수 없게 변한다는 것을 알기에 로칸은 서둘러 인벤토리를 열었다.
고이 모셔 두었던 값비싼 성수를 한 병 꺼내 검은 돌에 부었다.
버리는 것은 안 되지만 인벤토리에서 꺼내는 것 정도는 가능했으니까.
[상급 성수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검은 돌의 저주라는 것이 생각보다 강력한지 상급 성수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로칸은 망설임 없이 한 단계 윗 등급인 최상급 성수를 꺼내 부었다.
[최상급 성수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제기랄.”
치이이익.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저주인 주제에 성수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로칸이 아예 최상급 성수 열 병을 꺼내 한 번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저주가 아니라 저주 할애비라도 해제할 수 있겠지.
[최상급 성수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최상급 성수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최상급 성수가 아무런 효과를…….]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아까운 돈만 버리고 효과는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대신전이라도 가야 하나?
이 빌어먹게도 불친절한 퀘스트는 성공 조건으로 저주의 해제라고만 적어 놓았을 뿐 그 방법까지는 알려 주지 않았기에, 로칸으로서도 답을 찾기 어려웠다.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로칸은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저주라고? 새로운 저주가 중첩되는 속도가 얼마나 빠를지는 모르지만 네가 빠른지 내가 빠른지 해보자!
저주를 무시하고 더욱 빠르게, 더욱 파괴적으로 배틀 액스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지긴 하겠지만 아직 그에게는 버서크도, 광풍 현신도 남아 있었다. 하다못해 피의 각성과 무혼 각성을 분리해서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로칸이 하려는 것은 감당키 어려운 강대한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킬을 쓰지 않아도 도륙 할 수 있는 몬스터들을 학살하는 것뿐이니까.
[검은 돌의 저주 : 힘 수치가 1만큼 하락했습니다.]
[검은 돌의 저주 : 민첩 수치가 1만큼 하락했습니다.]
[검은 돌의 저주 : 정신력 수치가 1만큼 하락했습니다.]
“후우, 후우.”
사냥을 할수록 불길한 검은 돌의 숫자도 늘어서일까? 아니면 원래 이런 저주인 것일까?
시간이 갈수록, 사냥하는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다음 저주가 빨리 찾아오는 느낌이었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1만 마리 정도는 이 산 하나만으로 해결이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더구나 민둥산에 가까웠기에 몬스터를 발견하기도 쉬웠고, 저주에 의해 깎여 나가고 있다 해도 로칸의 능력치는 비정상적으로 높았으며 카이는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만약 시간이 초과되어 더 이상 사냥이 어려운 지경이 되더라도 카이나 유니콘, 나이트메어 등을 이용해 퀘스트 요구 조건을 채우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돌아가시겠군.”
남은 몬스터의 숫자는 약 5천. 반이나 잡긴 했지만 저주가 중첩되는 속도에도 탄력이 붙었다.
아직은 버틸 만하지만 점차 사냥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남은 몬스터 숫자 4천. 슬슬 공격을 막아 내는 놈들이 등장했다.
남은 몬스터 숫자 3천. 전력을 다한 공격으로도 놈들의 가드를 깨부술 수 없다.
남은 몬스터 숫자 2천. 이제 본신의 능력치만으로 다수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최대한 컨트롤을 살려 버텨 보고 있지만 사냥 속도가 바닥을 기었다.
남은 몬스터 숫자 1천. 고지가 코앞이었다.
버서크와 광풍 현신, 무혼 각성, 피의 각성을 돌아가면서 사용했다. 애초에 초극을 사용해 산을 뭉텅이로 날려 버리고 시작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남은 몬스터 숫자 5백. 이제는 정신력의 싸움이었다.
막고, 맞고, 때린다.
맞지 않고 죽인다는 생각 따위는 진작에 버렸다.
틈틈이 포션을 써서 회복하지 않는다면 생명력이 바닥나 죽어 버릴 만큼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오직 악과 깡뿐이었다.
남은 몬스터 숫자 1백.
‘일단 몸을 피해야 할까? 아직 퀘스트 제한 시간까지는 몇 시간 남았으니 소환수들만 잘 부려도 시간 내에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건 가능할 텐데.’
정신을 갉아먹는 유혹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렇게 싸워본 적이 언제였던가. 팔을 들어 올리는 것,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작전상 후퇴라는 말을 내뱉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졌다.
“뒈져, 이 새끼들아!”
하지만 광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신에 힘이 빠졌지만 독기만큼은 생생했다.
그것이 유형화되어 움직이지 않는 순간에도 적을 괴롭혔다.
남은 몬스터 숫자 0.
그리고 마침내 목표를 달성했을 때, 로칸에게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불길한 검은 돌 10,000개를 수집하셨습니다.]
[불길한 검은 돌이 광기의 정수로 변화합니다.]
[검은 돌의 저주가 해제되었습니다.]
기연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