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
유명계 (4)
유명계의 왕들이 모여든 자리는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 이하는 그들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오한이 들고, 환각에 사로잡히며 정신이 쪼개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로칸은 씨익 웃었다.
백염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이건 따지고 보면 실패 페널티를 부여하지 않은 그의 잘못이 아니던가? 이 바닥에서는 당한 놈이 잘못이니까.
그들이 풍기는 기운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불굴의 의지를 비롯한 수많은 타이틀이 그를 보호했고, 광기가 침범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경매 방식은 비공개 입찰로 하죠. 자신이 내걸 조건을 적어 저에게 따로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 단, 모두의 조건이 터무니없다고 생각될 경우 제 판단에 의해 낙찰자를 정하지 않고 경매를 유찰시킬 수도 있습니다.”
순 날강도 같은 심보였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낙찰자를 선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니?
물건 가진 놈 마음이라지만, 동급도 아니고 고작해야 초월자가 제멋대로 구는 것에 불만을 가진 이도 있었다. 하지만 힘으로 무언가를 해 보려는 시도는 없었다.
만약 그런 모습을 보이는 순간, 다른 유명계의 왕들이 나서서 그를 보호하고 그 대가로 영혼의 구슬을 홀랑 가져가 버리면 어쩌겠나? 탐탁지 않아도 저 인간에게 응징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어 둘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곳이 유명계의 경계인 만큼 낙찰자의 비호를 약간만 받는다면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흐음.”
그렇게 비공개 입찰이 시작되자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칸이 이곳 유명계에서 쳐죽인 유령의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저것을 확보하는 것만으로 다른 왕들보다 한발 앞서갈 수 있었다.
물론 조금의 우위를 얻었다고 침공 따위를 계획하다간 또 다른 왕에게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농후하긴 했지만 은근한 대치 상태나 경계 지역에서는 적지 않은 추가 이득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놓칠 수 없는 건이었다.
저 인간이 원하는 게 무엇일까, 무엇을 주어야 눈이 돌아갈까.
각자가 고심하며 조건을 적어냈다.
종이나 펜 같은 게 있느냐? 아니다. 퀘스트를 발동시켜 보상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고작 인간 황제인 로칸이 그러했듯 그들은 얼마든지 퀘스트를 만들어 낼 능력이 있었다.
‘다들 애가 닳긴 한 모양이군.’
그 화려한 보상이 담긴 퀘스트 창들을 보던 로칸이 내심 만족했다.
혹시나 담합 따위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유찰이라는 강수까지 던졌는데, 이 뱀 같은 마음을 가진 놈들에게 그런 걸 기대한 게 우스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코인으로 할지, 아이템으로 할지, 그도 아닌 다른 것으로 할지도 통일이 되지 않았는지 보상란에 채워진 내용이 아주 제각각이다.
‘괜찮네.’
하지만 그 구성은 제법 알찼다. 영혼의 구슬이 그들에게 그 정도의 가치였나 싶을 만큼 상당한 보상을 내건 것이다.
자신의 휘하에 있던 유령들을 회복하고 다른 유명계의 왕들보다 힘의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로칸이 해치운 놈들 중에는 어느 왕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영혼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보상 목록을 면밀히 살피던 로칸은 한참이 지나서야 답을 내렸다. 이번 경매의 승자를 발표했다.
“이 경매의 낙찰자는…… 없습니다.”
“뭣?”
“우릴 놀리는 것이냐!”
유찰. 그 발표에 녀석들이 단체로 반발했다.
이만큼이나 보상을 제시했는데 유찰이라고? 애초에 낙찰자를 정할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닌가?
버럭 성질을 내거나 은근히 힘을 끌어올려 압박을 가하려는 놈도 있었지만 로칸은 평온함을 유지했다.
여차하면 초극 한 방 내지르고 튀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파장이 된 것은 아니기에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크흠, 물론 모든 분이 제시해 주신 보상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크게 매력적이지도 않더군요. 코인이나 아이템? 저도 넘쳐납니다. 솔직히 여기 계신 분들이 제시한 금액을 모두 합쳐 봤자 제가 가진 재산에는 한참 못 미치죠. 그냥 많은 액수가 아니라, 단 하나라도 제가 혹할 만한 물건을 내놓으십시오. 그러면 낙찰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다음 경매는 보름 뒤에 이 자리에서 진행되는 걸로 하죠.”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로칸의 영혼의 편린을 잠시 엿본 결과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영혼에서는 코를 움켜쥘 만큼 진한 돈의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보름. 보름이라…….
로칸과 다른 왕들을 흘겨본 뒤 제각기 원래의 위치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왕국에 돌아와 지시를 내렸다.
인간이 좋아할 만한 것을 찾아라. 로칸이 싹싹 빌며 제발 거래를 해 달라고 애원할 만한 것을 찾아내라!
바득바득 이를 갈며 아이템 수집에 열을 올렸다.
“다음번에도 유찰시키면 난리가 나겠지?”
그들이 모두 돌아가고, 로칸은 슬쩍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섯이나 되는 마제스티 마스터가 일시에 쏘아 내는 살기는 그라도 쉽게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니까.
그들 모두를 불렀기에 망정이지 백염왕이나 누구 한둘만 불렀다면 작당을 하고 로칸과 영혼의 구슬을 집어삼키려 들었겠지.
하지만 결국 결과는 괜찮게 나왔다.
솔직히 살짝 구미가 당기는 제안도 있었지만 그래 봤자 자신의 부를 이용해 대부분 얻거나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약아빠진 놈들답게 낚시성 보상이나 이름만 번지르르 한 것들을 섞어 놓기도 했고.
“뭐, 알게 뭐냐. 신세 알아서 하겠지.”
이제 다음번 경매 때는 어떤 보상을 제시할까? 적어도 이번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어차피 로칸의 입장에서는 필요 없는 것을 팔아 공짜로 득템을 하는 것이기에 사실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중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다면 좋지 않겠나.
그렇게 천상의 룬 북에 위치를 저장하고 몸을 돌려 유명계를 빠져나오던 중,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랜드 마스터급들이 힘의 정수를 먹어서 힘을 키우지 않나?”
그렇다면 유저는 그게 불가능할까? 그리고 힘의 정수가 아니라 영혼의 구슬은? 이건 먹지 못하나?
쏘옥.
슬쩍 영혼의 구슬 하나를 꺼낸 로칸이 일단 사탕처럼 입안에 넣어 굴리기 시작했다.
[영혼의 구슬을 흡수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아쉽게도 영혼의 구슬은 탈락이다. 눈 딱 감고 꿀꺽 삼켜 볼까도 했지만 그게 특별한 조건은 아닐 테니 포기했다.
대신 백염왕에게 놀림받기 싫어 열어 보지 않았던 랜덤 상자를 별 기대 없이 개봉했다.
[스킬 북 ‘영혼 포식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영혼 포식자][스킬 북]
대상의 정수에 담긴 영혼의 힘을 포식하여 자신의 영혼의 격을 상승시킨다.
-영혼의 구슬, 힘의 정수 흡수 가능
“어?”
이걸 스킬 상자가?
포기하기 무섭게 딱 맞는 스킬이 떠 버렸다.
영혼의 구슬은 물론 힘의 정수를 흡수할 수 있는 영혼 포식자 스킬을 획득한 것이다.
영혼의 격을 상승시킨다는 다소 모호한 표현이 적혀 있지만 로칸은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경험치의 상승.
이 영혼의 구슬들이 작은 경험치 구슬이 된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스킬을 습득하고 얼른 하나를 다시 입안에 넣었다. 이번에는 스르르 녹아 입안에서 사라진다.
동시에 경험치 바가 찔끔 상승했다.
영혼의 구슬 하나로 엄청난 상승까지는 기대할 수 없지만 유령을 사냥했을 때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의 경험치가 추가로 들어온 것이다.
“이 정도면 훌륭하군.”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동안 그가 모은 영혼의 구슬만 몽땅 입에 털어 넣어도 레벨 업을 한두 번쯤 할 수 있을 테니까.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이걸 저들에게 경매로 파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유찰까지 시킨 마당에 이제 와서 다 먹어 버렸다고 하면 대번에 유명계의 공적이 되어 버릴 테지만, 사실 상관은 없었다.
유명계와 척을 지고 있는 정령계와 더 친한 데다,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들이 우르르 로칸을 쫓아 나올 리도 없고 나와도 정령계의 침공을 의식해 한둘에 불과할 테니 그때는 들이받아 버리면 그만이다.
마제스티 마스터의 위력은 이제 실감하지만 거의 모든 정신계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타이틀을 가진 그에게 유명계의 존재는 글쎄…….
그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을까?
아니면 적당히 피해만 다니더라도 마제스티 마스터를 달성하고 그들과 자웅을 겨뤄 볼 자신이 있었다.
“일단은 보류해야겠군.”
하지만 곧장 영혼의 구슬을 흡수하는 일은 없었다. 이걸 다 먹어 치워 봤자 1~2레벨이나 오를 텐데 굳이 미리부터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일단은 기다려 보고, 가능하면 다음 경매도 유찰을 시킨 뒤 마제스티 마스터가 되기 직전에 홀랑 까먹고 파워 업을 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만한 경험치를 포기해서라도 얻고 싶은 무언가를 그들이 제시할 수 있다면 교환을 하는 것도 좋겠지.
그런 가능성들을 미리 날려 버릴 필요는 없다.
게다가 지금도 지상에서는 몬스터의 심장이 천상제 무구들과 교환되고 있지 않던가?
그것들을 추출하여 힘의 정수를 만든다면 시간과 노력은 들겠지만 영혼의 구슬을 대체할 수단이 만들어진다.
때문에 가뿐한 마음으로 다음 지역에 들어섰다.
[천족의 사냥터에 입장하셨습니다.]
“응?”
유명계를 벗어나자 로칸을 맞이한 것은 천족의 영역이었다.
한데 천족의 사냥터라니, 대체 무엇을 사냥한다는 것일까?
[신성한 뿔 사슴][Lv 439]
“헉.”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칸의 눈앞으로 휙 하니 지나간 것은 뿔 사슴이었다.
신성한 뿔 사슴이라는 이름처럼 은은한 신성력마저 풍기는.
평범한 동물은 아니었다.
신수라 불러 마땅한 그것이 로칸을 슬쩍 돌아보더니 달아나 버렸다. 그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살기와 광기를 읽은 것이다.
호전적인 녀석은 아니었기에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로칸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그가 천상의 전부로만 알고 있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로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피워 올렸다.
역시 유명계에만 머물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만한 놈들이 즐비한 곳이라면 금방 450레벨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카이!”
카이를 소환해 낸 로칸이 천천히 천족의 사냥터를 돌아보았다.
몬스터라 불릴 만한 놈들은 없고 마치 왕족의 사냥터처럼 동물, 신수들만 드문드문 보였다.
따로 인위적인 관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순수 천족들조차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이보다 완벽한 사냥터가 또 있을까?
이런 곳을 그냥 지나치는 건 낭비요, 죄악이었다.
“광풍 현신, 전신 무쌍!”
로칸이 힘을 개방하며 본격적인 사냥에 돌입했다.
순수 천족들마저 신성하게 여기는 신수들에게 재앙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