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2
천신의 사도 (1)
로칸이 수도 수비대와 근위대를 대상으로 한바탕 난장을 벌이는 사이, 수도의 최심처인 황궁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2급 천족인 라푸제가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황궁을 점령한 것이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근위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해 대신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지만, 설마 1급 천족씩이나 되는 이가 저 하나를 보호하지 못할까.
누가 봐도 핑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다. 거부하는 순간 이미 황궁을 둘러싼 저들이 어떻게 변할지 뻔했으니까.
뚫고 도망가는 것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힘을 지닌 라푸제가 있으니 쉽지 않을 터였고, 도망에 성공한다 해도 곧 이상한 소문이 돌 터였다.
온갖 루머를 덧붙여 그가 라푸제를 공격하고 도주했다는 이야기만 남겠지.
그럼 목숨만 건지는 거다. 목숨만.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유일한 1급 천족인 칼라만은 자리를 지키며 근위대가 빨리 적을 처리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축하드립니다.”
“흐흐흐, 그대도 잘해 주었다.”
결국, 근위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황궁의 곳곳을 점령하고 그 안에 있는 일반 천족 하인 하나하나까지 장악한 라푸제는 1급 천족 칼라만을 끌어내리고 스스로 1급 천족의 자리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칼라만의 사소한 저항이 있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라푸제는 오랫동안 쿠테타를 준비해 온 존재. 창조 스킬마저 현 1급 천족인 칼라만을 저격하는 용으로 만들어 둔 탓에, 칼라만은 가장 강력한 신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허무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 소란을 수도 시민들이 제대로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정도였으니 라푸제와 수하들이 펼친 결계와 함정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1급 천족의 자리에 오른 라푸제에게 로칸이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는 1급 천족의 타이틀을 얻으며 신성이 강화되었고, 로칸은 레벨을 하나 올렸으니 윈윈 게임이었다.
“아 참, 그대가 해 줄 일이 하나 더 있다.”
“어떤……?”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던 중, 라푸제가 추가적인 제안을 건넸다.
“대부분의 상위 천족들은 문제가 없는데, 일부 일반 천족 중에는 칼라만을 진짜 천신의 대리자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어서 말이지…….”
칼라만을 따르는 잔당의 처리. 로칸은 단번에 그 말을 알아들었다.
사실 로칸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합법적으로, 1급 천족인 라푸제의 제안에 따라 천족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던가?
그가 이렇게 신경 써서 처리를 해야 할 정도라면 휘하 수하들의 레벨 또한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기에 잘하면 레벨 업을 하나 더 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바로 움직이죠.”
그렇기에 로칸은 흔쾌히 수락했다.
무지개 전송기만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당장이라도 못 움직일까.
재사용 대기 시간과 후유증이 끝나는 대로 바로 이동하겠다 약속하고 일단 황궁을 빠져나왔다. 근위대와의 전투 중에 만났던 천신과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이 좀 남으니까.’
이왕 몸을 회복하기 위해 대기해야 하는 것, 짬이 날 때 미리 해치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딱 맞춰 재사용 시간이 돌아온 폴리모프를 사용했다.
밀약 관계에 있는 황궁에서는 상관없지만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순수 천족의 모습을 취하고 그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천신의 대신전이었다.
수도에 있는 만큼 천신을 모시는 대신전은 지금껏 보아 온 크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황궁만큼 컸고, 황궁보다 화려했다.
대사제들의 레벨 또한 변방과 비교 할 수 없었다.
400레벨 이하가 보이지 않았고 450레벨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황궁과 대신전이 싸우기라도 하면 대신전이 이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벅저벅.
몸이 근질근질한 것을 참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천신의 대사제 중 하나가 로칸을 제지했다.
“이곳은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저쪽에 있는 참회실이나 기도실을 이용해 주십시오.”
대신전에서 차마 사제를 사칭할 수는 없어서 순수 천족으로 폴리모프를 했더니 역시 이런 귀찮은 일이 발생했다.
돌아가는 척하다가 슬쩍 은신을 해서 진입할까 고민하는 사이, 천장에서 빛이 쏟아졌다.
은은한 신성력이 가미된, 스포트라이트에 가까운 빛이었다.
“헛!”
그 빛은 로칸과 대사제를 갈라 놓았다.
로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지만 보호막처럼, 그와 함께 있던 대사제를 밀어 낸 것이다.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하지 말라는 일종의 계시와 같았다.
“아앗, 이건 천신님의……!”
과연 대사제들이라는 것일까? 그 힘의 근원을 바로 꿰뚫어보았다.
로칸이 천신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아 찾아온 이라는 것을 대번에 인정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길을 터 주었다.
오직 대사제와 대주교, 1급 천족만 입장할 수 있는 심처로 이동하는 것까지 아무 말 없이 허용했다.
파앗.
그리고 그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천신의 석상이 있는 곳에 도달했을 때, 강렬한 신성의 기운이 쏟아져 내렸다.
일부는 석상에 깃들고, 또 일부는 그들과 주변을 차단하는 결계를 이루어 냈다.
“음, 천신님?”
“빨리 찾아 주었구나, 로칸.”
예상대로 천신이 직접 힘을 쓴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광풍의 제단이 그러했듯 퀘스트를 거쳐서 강림에 필요한 에너지를 모아야 했지만, 원래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하지 않던가?
마음이 조급한 것은 천신 쪽이기에 신성을 소모해 가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내 너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
“네가 가진 나의 안배를 양도해 다오.”
로칸을 쭉 지켜 온 만큼 그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한 천신은 말을 빙 둘러 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 이야기했다.
“나의 피는 어쩔 수 없지만 별빛 건틀릿이라도…….”
“싫은데요.”
그리고 역시나, 로칸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즉답을 했다.
사실 천신의 별빛 건틀릿은 이제 좀 쓰기가 애매하다.
마신의 이빨 허리띠와 함께 무혼을 각성시키면 신성도 마기도 아닌 불완전하지만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광풍의 무구 세트와는 동시에 깨울 수 없는 까닭에 상황에 따른 선택이 필요해진 차였다.
‘쓰지는 않지만 내가 왜, 굳이?’
게다가 건틀릿이라는 부분에서 세트 효과까지 지닌 광풍의 건틀릿을 차는 쪽이 더 이득이기에 무혼 각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굳이 꺼낼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양도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명색이 신급의 아이템이 아니던가?
팔아먹어도 엄청난 돈을 받을 수 있을 테고 여차하면 마신의 이빨 허리띠를 성장시켜 먹여 보아도 좋을 터였다.
아직은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지만 다른 아이템들을 먹여 충분히 성장시킨 뒤라면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봉인이 끝까지 해제될지도 모른다.
“크흠, 물론 거저 달라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을 다른 이에게 양도한다면 합당한 보상을 주도록 하지.”
애가 닳아 있는 천신을 바라보는 로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굳이 보상까지 제시하는 이유가 뭘까? 자신의 안배가 이대로 사장되고, 창고에서 썩는 것이 안타까워서?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일단 제가 왜 양도를 해야 하고 어떤 이에게 양도를 하라는 것인지부터 말씀해 주시죠.”
“흐음, 그건…….”
그걸 알아야 제대로 된 가치를 매길 것이 아닌가? 로칸의 의도를 알기에 천신도 잠시 망설였지만 곧 결정을 내렸다.
말장난을 해 봤자 로칸을 속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본래 그것은 방문자들이 나를 믿고 따르게 하려는 의도에서 제작되었다. 신성력을 가진 이가 그것을 통해 활약하면서 자연스레 나를 믿는 자들이 증가하기를 바란 것이지. 하지만……. 그대에게 그것을 바라기는 무리이지 않은가? 하여 신성력을 제대로 활용 할 수 있는 이에게 전해 주라는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그대의 뜻에 맡기도록 하겠다. 그대의 선택이 옳았다고 한다면 나중에 추가로 후한 보상을 하도록 하지.”
역시나 신성과 관련된 일이다. 하지만 선뜻 내키지는 않는다. 천신의 신성이 강화된다는 것은 곧 천족의 힘이 강해진다는 의미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천족과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는 자신에게는 그다지 이득이 된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나마 자신에게 양도 대상을 정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천신의 입장에서도 많이 숙이고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이 우호의 표시인지, 기만전술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번 퀘스트를 통해 알게 된 것처럼 천신 또한 마신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는 저 낯짝 뒤에 어떤 얼굴을 숨기고 있을지는 까 봐야 아는 것이다.
“잠시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한데, 신성을 높이기 위함이라면 이번 쿠테타를 막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위 천족들이 많이 죽어 나갈수록 당신의 신성도 약해질 텐데요.”
천신의 별빛 건틀릿을 양도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사태와, 누구에게 주어야 적합할지에 대한 고민에 잠시 빠질 시간을 벌며 묻자 천신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놈들은 이미 나를 믿는 게 아니다. 자신의 욕심을 신봉할 뿐이지. 그런 놈들 좀 죽는다고 신성에는 큰 타격이 없어. 그리고 결국 위 대가리들은 똑같은 놈들이라 큰 소용도 없을 거다. 제 한 몸 챙기기 위해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겠지.”
하긴, 그러니 라푸제가 다른 순수 천족이 아닌 일반 천족을 진압하라 요청한 것이겠지.
그 말을 들으며 잠시 더 고민하던 로칸은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다.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만약 이걸 적합한 자에게 양도한다면, 제가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뭡니까? 무려 ‘신’급 아이템인데 말이죠.”
사실상 더 로드 내 최고 등급의 아이템인데 과연 이것을 어떻게 보상할 생각인 걸까?
설마 다른 아이템을 주려는 걸까? 그럴 거면 그냥 그걸 다른 이에게 전해 주면 될 텐데.
의문 섞인 질문을 던지자 곧 퀘스트로 답변이 돌아왔다.
[천신의 사도 임명][퀘스트]
천신의 사도가 될 만한 재목을 찾아 그의 안배를 전달하자.
-성공 조건 : 천신의 별빛 건틀릿 양도
-성공 보상 : 극대량의 경험치, 대량의 신성
-추가 보상 : 양도 대상이 적합자로 판단 될 시 신성 추가 지급
“신성?”
놀랍게도 천신이 내건 것은 ‘신성’이었다. 그것도 대량의.
물론 대량이니 극대량이니 하는 것은 퀘스트를 받는 대상의 현재 상태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에 가벼운 눈속임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현재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대량’쯤 되면 만만한 수준은 아닐 터였다.
당장 로칸이 신성을 다룰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어도 수많은 400레벨, 450레벨 몬스터를 때려잡으며 그들의 신성을 미리 흡수해 놓지 않았던가?
광풍이 말하길, 이미 그것만으로도 초짜 반신의 수준은 넘어섰다고 했으니 이 정도면 천신에게도 적지 않은 출혈일 터였다.
‘더 많이 회수할 자신이 있는 거겠지만.’
물론 공짜가 아닌, 더 큰 신성 회수를 위한 투자이겠지만 말이다.
“수락.”
곰곰이 고민하던 로칸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려 신급의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잉여 자원이기도 했고, 대량의 신성을 받아 둔다면 차후 마제스티 마스터에 올랐을 때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양도는 바로 진행하도록 하죠. 마침 적합한 녀석이 있습니다.”
어떤 인물을 떠올린 로칸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이왕 양도하는 것,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