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
타이탄 마을 (3)
콰앙!
아까와 같은 힘과 힘의 격돌. 하지만 그 여파는 천지 차이였다.
허공에서 얽힌 무기들의 울림이 대기를 흔들었다.
약한 자들이 곁에 있었다면 고막이 터지고 충격파에 속이 진탕되어 생명력이 팍팍 깎여 나갔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그렇게 나약한 자는 없었다.
타이탄들이 병풍처럼 둘러서니 충격파가 밖으로 새어 나갈 일도 별로 없었고, 지형지물들 역시 수 세월 동안 타이탄들의 대결을 겪어 온 탓에 그럭저럭 버텨 낼 수 있었다.
“고기 다지기!”
쾅, 쾅, 쾅, 쾅.
“튕기기, 튕기기, 튕기기, 튕기기.”
우스운 스킬명이지만 파괴력이 남달랐다.
어지간한 그랜드 마스터라도 다진 고기가 될 정도로 강력한 내려찍기가 로칸을 두들겼고, 로칸은 침착하게 방어하며 기회를 노렸다.
“뒤잡기!”
연격이 끝난 직후의 약 0.5초. 그 틈을 노리고 놈의 등 뒤로 반원을 그리며 돌아갔다.
“빙글 돌기!”
후우우웅!
그러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마치 휠 윈드를 보는 것 같은 회전으로 놈이 등 뒤를 커버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물러섰지만 포기한 것은 아니다.
회전이 멈추는 순간, 그 찰나를 노리고 쏘아져 들어갔다.
“전신의 돌격, 점멸!”
콰앙!
포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두 몸뚱이가 부딪쳤다.
주르륵.
그러나 다른 놈들처럼 몸이 뭉개지고 심장이 터지는 일은 없었다. 그저 조금 밀려날 뿐, 힘과 방어력으로 버티고 선 것이다.
쿠웅, 쿠웅, 쿠웅.
오히려 두 팔을 들어 로칸의 등을 내리찍었다.
메이스를 휘두르기에는 어려웠기에 주먹을 쓴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로칸의 몸이 출렁거렸다.
“흐아아압!”
그러자 로칸 역시 지지 않고 놈의 허리를 껴안았다.
통나무 같은 허리를 꽉 끌어안고 바짝 힘을 주었다.
우둑 우두둑!
뼈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타이탄의 힘도 어마어마했지만 힘이라면 로칸도 지지 않으니까. 아니, 그들을 능가하고 있으니까.
뼈가 어긋나고 신경이 짓눌렸다.
쉬롬벨의 얼굴색이 변하고, 로칸의 등을 가격하던 주먹에 힘이 빠졌다. 마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아앗!”
힘이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지자 녀석도 본능적으로 힘을 발휘했다.
호전적인 타이탄의 특성상, 따로 탈출기를 구비하지 않았기에 아예 힘으로 돌파하려 든 것이다.
신성.
파괴적인 기운을 머금은 신성이 쉬롬벨의 몸에 깃들었다.
“크허허허허헝!”
로칸의 것과 비슷한 광기의 외침이 쉬롬벨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저건?’
아쉽다는 듯 허리를 놓고 황급히 물러선 로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혹시 환상을 보는 건가? 눈을 비벼 봤지만 놈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허, 이거 참…….”
광풍. 놈의 몸 위에 광풍의 모습이 덧입혀지고 있었다.
놈이 처음 사용했던 마스터 스킬도 선조의 힘이 아니었나? 당연히 창조 스킬은 가장 강력했던 타이탄, 타모스에 가까운 것일 거라 생각하며 긴장했건만 엉뚱하게도 튀어나온 것은 광풍의 형상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광풍의 무구들이 놈의 몸에 입혀지고 광풍의 신성이 내부에 깃들었다.
[학살의 신이 자신의 사도는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진짜 광풍은 아니다. 놈이 만들어 낸 광풍이라고나 할까?
놈은, 자신의 ‘세계’를 통해 광풍과 흡사한 타이탄 영웅을 키워 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힘이 쉬롬벨의 몸을 통해 현신하고 있었다.
“무혼 각성!”
그 모습을 본 로칸이 씨익 웃으며 무혼 각성을 통해 광풍의 무구들을 일깨웠다.
광풍 대 광풍.
남들이 보기에는 그러했지만 로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저쪽은 진짜 광풍이 아니고, 이쪽은 진짜 광풍을 꺾어 보았으니까.
게다가 그때는 광풍의 무구가 완전한 세트 효과를 지니기 전이었다.
이제 관건은 쉬롬벨이 만들어 낸 광풍이 신성을 쓰지 않는 진짜 광풍보다 강하느냐일 뿐이다.
“크워어엉!”
쉬롬벨이 통하지 않는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신성을 모두 힘으로 바꾼 듯, 무기에 담아 두는 것만으로 살 떨리는 파괴력이 느껴지는 메이스를 정면으로 휘둘러 왔다.
‘끝났군.’
그 일격을 보며 로칸이 속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 한 수로 모든 것이 결정 났다.
이것은 광풍을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자의 상상.
압도적인 힘을 지닌 만큼 어지간한 적들은 이것만으로도 박살을 낼 수 있겠지만 이렇게 힘에 휘둘려서는 진짜 광풍이 가진 능력의 반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컹?”
놈의 눈앞에서 로칸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진짜 광풍이 보여 주었던 바람 같은 움직임을 흉내 낸 것이다.
베었다 생각하면 지나쳐 있고 닿았다 생각하면 흩어져 버리는 귀신같은 움직임에 쉬롬벨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푸확!
그리고 그가 사라질 때마다 쉬롬벨의 몸에는 크고 깊은 상처가 생겨났다.
이 또한 광풍을 상대하며 익힌 움직임이다.
변칙적이고 변화무쌍한 상대를 확실하게 상처 입히는 방법.
그것은 바로 기본기였다.
다른 변화나 눈속임은 일체 배제한 기본기. 목표에 정확히, 최단 거리도 도달하는 일체의 군더더기를 뺀 공격.
대신 더 빠르고, 더 강력하다는 것이 달랐다.
“닿을 수가 없…….”
털썩.
결국 쉬롬벨은 사지가 잘린 채 허망하게 로칸을 바라보았다.
초극까지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컨트롤 승부. 광풍과 그러했듯 그것만으로 승부를 가른 로칸은 놈이 신성을 사용해 몸을 재생하기 전, 냅다 놈의 몸 위로 올라탔다.
배틀 액스로 얕게 그어 두툼한 가죽과 근육을 잘라 내었다.
그러고는 단검을 꺼내 냅다 찔렀다.
푸욱!
[심장을 먹는 아귀가 타이탄 일족의 리더 쉬롬벨의 심장을 탐식합니다.]
[대상의 심장과 영혼에 깃든 힘을 흡수합니다.]
[진하게 이어진 타이탄의 피를 흡수합니다.]
[당신의 몸속에 타이탄의 힘이 깃듭니다.]
심장을 먹는 아귀에 부여된 얼마 남지 않은 슬롯 하나를 더 채웠다.
“오?”
이미 타이탄의 심장이라면 모아 본 적 있는 로칸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기존에는 그들이 가진 속성력 따위를 흡수했지만 이번에는 가장 진하게 이어진 타이탄의 DNA를 완전히 흡수한 것이다.
선조의 힘을 끌어낼 만큼 진하게 이어진 피였기에 타이탄 본연의 힘이 어느 때보다 세차게 몸 안에서 맥동했다.
“후우!”
그 고양감에 부르르 몸을 떨던 로칸이 곧 모든 것을 체화해 내었다.
기본 능력치도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무엇보다 광풍 현신과 피의 각성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스킬마저 한 단계 도약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워어어어어!”
‘못 말릴 놈들이로군.’
그런 그를 둘러싸고 있던 타이탄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자신들의 리더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승자의 탄생을 축하하고 환호했다.
“다음은 나다!”
“아니다, 나다!”
오히려 로칸의 다음 상대로 지목되기 위해 저마다 힘을 뿜으며 매력 어필의 시간을 가졌다.
“시간 없으니까 한꺼번에 덤벼!”
그런 놈들을 향해 로칸이 자비 없는 일갈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스킬 지속 시간이 끝났을 때.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덤벼들었던 타이탄들은 모조리 땅에 눕혔고 타이탄 마을에는 축제가 열렸다.
동족들이 그토록 무참히 학살되는 것을 보고도 축제를 여는 놈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로칸을 광풍의 화신쯤으로 여기는 놈들이니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고, 타고난 전사들인 만큼 전력을 다해 싸우다 죽으면 광풍의 보살핌을 받아 그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믿는 놈들이니까.
“혹시, 타락의 제단에 대해 알고 있나?”
그 축제의 틈바구니에 껴서 적당히 눈치를 살피던 로칸이 조심스레 타락의 제단에 대해 이름을 올렸다.
흠칫.
그 한마디에 모두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마치 겁에 질린 듯한 표정.
그것으로 로칸은 놈들이 무언가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으으으, 무섭다. 그 이름 말하면 안 된다.”
“우린 모른다. 알면 안 된다. 우리 다 죽을 거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 그들은 진심으로 타락의 힘을, 타모스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거군.’
아무래도 타모스에 대한 전설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고대의 위대하고 강력했던 타이탄의 이름이 아니라, 타이탄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반응들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타락의 힘에 빠진 이들도 있지 않았냐고? 그들은 아마도 타모스가 사라진 후 도망치다 궁지에 몰린 이들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살아남기 위해 그의 힘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신위를 획득한 타모스가 후대의 타이탄을 이용해 세상을 파멸시키기 위해 유혹한 것이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여기에는 없나 보군.’
로칸은 타이탄과 타락의 힘이 생각보다 밀접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대체 타락의 제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들의 제단 특성상 한 곳에만 있지 않을 텐데 말이다.
“……가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로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갔다.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핵심 소재인 타락의 힘.
그렇다면 놈들은 어떻게 처음에 타락의 힘을 얻은 것일까?
“설마 지상에 있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타락의 제단에서 타락의 힘을 얻었으나, 그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어 서리의 타이탄을 깨우는 것으로 세상의 파멸이 완성되는 것이라 여겼다면?
핑그르르르.
가설을 세우자마자 로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욕망의 나침반을 사용해 타락의 제단 방향을 쫓았다.
“응?”
하지만 나침반의 바늘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회전했다.
카이를 타고 멀찍이 이동을 해 봐도 여전했다.
이 말인 즉, 이곳 천상에 타락의 제단이 없다는 뜻이다.
“로칸, 또 와라! 기다린다!”
타이탄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난 로칸은 즉시 지상으로 이동했다.
핑그르르.
“……?”
그러나 지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욕망의 나침반은 어느 곳도 가리키지 않았다.
“젠장.”
이런 경우 이유는 두 가지다. 지상과 천상, 어느 곳에도 타락의 제단이 없거나 욕망의 나침반으로 탐색할 수 없는 지역에 있거나.
퀘스트에서는 이미 타락의 제단을 파괴하라는 조건을 내걸고 있으니 후자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당연한 건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세상으로부터 배척받는 타락의 힘, 그리고 타락의 신.
그런 자의 제단이 찾기 쉬운 곳에 있다면 가만히 놔둘 리가 있겠나? 누구든 찾아가 파괴하고 말겠지.
그런 만큼 신성을 사용해 꽁꽁 숨겨 두었을 확률이 높았다.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찾을 수 있는 식일 것이 분명했다.
퀘스트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난감하군.”
바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역시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는 만만치 않다고나 할까.
[마계 영지 그로모토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로칸을 놀라게 만드는 시스템 알림이 나타났다.
마계 영지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대체 누가? 설마 다른 상급 마족이 전쟁을 걸어온 것일까?
황당했지만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었다.
황급히 채비를 하고 다시 천상으로 이동했다.
공격 받고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
“이 새끼들이……!”
그리고 NPC들을 격살하며 밀려드는 적들의 정체를 확인하고 두 눈으로 불을 뿜었다.
공성전을 걸어온 침략자는 다름 아닌 유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