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
화이트 드래곤 (3)
세상이 정지했다. 아니, 얼어붙었다.
대기는 물론 공간 전체와 시간마저 얼어 버린 듯 했다.
“제기라아아알!”
파츠츠츠츠츳!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로칸이 유일했다.
극에 달한 저항력과 근력, 근원조차 알 수 없는 파멸의 마나를 이용해 순간적으로 멈추어선 근육을 일깨우고 화이트 드래곤을 향해 배틀 액스를 마저 휘둘렀다.
쿠과과과과광!
빛이 점멸했다.
배틀 액스에 서린 가공할 기운이 마침내 휘둘러졌다. 적의 영혼을 불사르고 살점을 씹어 먹기 위해 이빨을 날름거렸다.
‘빗나갔다.’
그러나 로칸은 배틀 액스를 완전히 떨치기도 전에 직감할 수 있었다.
몸이 얼어붙었다 회복된 찰나의 순간, 화이트 드래곤이 역린을 감추고 얼음과 비늘을 들이밀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푸확!
드래곤의 피를 뒤집어 쓴 로칸의 표정이 악귀처럼 변했다.
기습은 실패했다.
“산개하라!”
로칸을 즉시 한 걸음 더 내디딤과 동시에 명령을 내렸다.
다리 쪽에 깊은 상처를 입고도 힘껏 날개를 움직여 날아오르는 화이트 드래곤을 따라붙으려 들었다.
“크와아아아앙!”
그 순간 터져 나오는 드래곤 피어.
모든 존재를 공포로 물들이는 그 울부짖음이 모두를 정지시켰다.
[타이틀 불굴의 의지 효과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단 한 명, 로칸만을 제외하고.
“카이!”
뀨웃!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로칸이 카이의 몸에 매달렸다.
소환수의 기본 스킬인 몸통 박치기!
카이와 한 몸이 된 로칸의 몸뚱이가 포탄처럼 날아가 처박혔다.
목표는 역린을 대신해 초극의 힘을 받아 내며 엉망으로 뭉개져 버린 다리였다.
상대의 약점을 물고늘어지는 것은 치사한 게 아니라 싸움의 기본이니까.
콰앙!
화이트 드래곤이 급히 얼려 봉합해 놓았던 다리의 상처가 벌어지며 다시금 하얀 용의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피의 살육 효과로 화이트 드래곤이 가진 힘을 일부 흡수합니다.]
그것을 뒤집어쓸 때마다 로칸은 속에서 은근한 힘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상처를 입히긴 했으나 상대가 드래곤이라면 그리 큰 타격이 아니다.
간단한 치유 마법 한 방만 제대로 들어가고 대부분 회복해 버릴 터.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끝장을 봐야만 했다.
“카이, 부탁한다!”
교감을 이용해 카이를 움직인 로칸이 상처 입은 다리에 매달려 배틀 액스를 휘둘러 댔다.
덜렁거리는 다리를 완전히 잘라 버리겠다는 듯 거칠게 배틀 액스를 휘둘렀고, 교감을 이용해 카이가 놈의 얼굴을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놈의 시선을 돌리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힘을 봉인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브레스.
드래곤에게 허락된 가공할 권능이 발동한다면 로칸이라도 단 일격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뀨웃!
“캬악!”
로칸의 뜻에 따라 카이가 필사적으로 놈을 공격했다.
부리와 깃털, 엘리멘탈의 힘으로 눈알을 쪼고 무엇이든 씹어 부술 놈의 턱을 피해 냈다.
언제 씹어 먹힐지 모를 아슬아슬한 저항이었지만 공포에 굴하지 않고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카이의 저항이 계속될수록 화이트 드래곤의 약이 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기 다지기!”
“맹수 사냥꾼의 화살!”
“복수의 일격!”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새 따위가 자신을 쪼아 대며 귀찮게 굴고, 다리에 가해지는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거기에 감히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할 하등한 종족들의 지원이 더해지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성을 잃어버렸다.
“신성 : 프로즌 킹덤!”
가진 신성을 최대한도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쩌저저저저적!
“추, 추우……어……!”
그 순간 다시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극한의 냉기가 레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얼려 버렸다.
냉기 저항? 겨우 그 따위 것으로 신성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순간에 타이탄을 비롯한 모든 용병들이 산 채로 얼음 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어쭙잖은 힘을 믿고 감히 내게 덤비다니, 네놈들이 속한 도시까지 모조리 얼음이 되어 버릴 것이다!”
얼어 버린 것은 로칸도 마찬가지였다.
100% 이상까지 속성 저항력을 올린 로칸이지만 신성으로 강화된 한계치 이상의 한기에는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그 전에, 나랑 먼저 대화를 끝내야 하지 않겠어?”
후두두둑!
그러나 로칸은 몸에 묻은 얼음을 털어 내었다.
본디 화이트 드래곤의 신성은 그로서도 버텨 낼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지만, 역설적으로 화이트 드래곤이 그를 버틸 수 있게 만들었다.
바로 피의 살육의 효과.
화이트 드래곤의 피를 뒤집어쓰며 흡수한 힘이 한계 이상의 냉기를 버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감히……! 어디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마!”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화이트 드래곤을 무력화시킬 수 없었다.
놈은 로칸의 생존에 놀라워하면서도 노기를 토하며 다음 스텝을 밟았다.
“스노우?”
바로 스노우맨들. 그가 인세에 강림시킨 얼음 왕국에 얼음 인간들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덩치는 아이스 골렘들에 비해 어린 아이같은 수준이지만 그들이 가진 빙결의 기운은 결코 놈들에 못지않았다.
더구나 그 수는 수십에서 수백, 수천까지 불어나고 있는 상황.
이대로면 폭발 대미지만으로도 능히 그랜드 마스터를 얼려 죽일 수 있을 수준이지만 로칸은 웃었다.
이미 제가 흡수한 능력에 대해 파악을 마친 것이다.
“잔챙이는 꺼져라!”
퍼버버벅!
로칸이 휘두르는 배틀 액스에 아이스맨들이 하얀 눈뭉치로 변하며 빙결 속성의 폭발 대미지를 로칸에게 남겼다.
“흥, 땀날 일은 없겠는데?”
하지만 로칸에게는 전혀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화이트 드래곤의 피를 흡수하며 수(水)와 빙(氷) 속성 저항력이 최대치까지 끌어올려진 것이다.
신성을 품은 냉기마저 저항한 마당에 고작 아이스맨 따위의 자폭에 당할 쏘냐.
로칸은 입가에 미소를 만연히 띠고 아이스맨 사냥에 매진했다.
‘쏠쏠하군.’
기대하지 않았건만, 아이스맨들이 주는 경험치가 상당한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맨들이 사라지면 상대적으로 화이트 드래곤의 신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세계를 끌어오는 방식의 신성은 그런 것이니까.
물론 구현 방식을 보자면 거의 무한히 증식하는 종류인 것 같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반길 만하다. 무한히 경험치를 공급한다는 것이 아닌가?
화이트 드래곤이 방치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
“젠장. 어디까지 하나 지켜본다며?”
하지만 로칸의 이러한 꿀 빨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아이스맨들에게 신경이 팔린 사이, 화이트 드래곤이 진짜를 준비한 것이다.
아이스 브레스.
드래곤 고유의 권능이자 화이트 드래곤의 특성이 담긴 그것이 로칸을 향해 뿜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화이트 드래곤의 피를 일부 흡수했다지만 과연 이것도 버텨 낼 수 있을까?
쿠화아아아아아아!
두고 보자는 듯 화이트 드래곤이 격렬하게 숨을 내뿜었다.
영혼마저 얼려 버리는 극한의 냉기가 모든 것을 얼려 버렸다. 심지어 아이스맨들까지.
얼음마저 얼려 버리는 무자비한 한기의 폭풍이 레어 전체를 휩쓸었다.
“……파묻혔나?”
그 냉기의 숨결이 힘을 다한 뒤, 로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냉기의 숨결에 날아가 버린 것일까, 눈과 얼음 속에 파묻힌 것일까.
로칸이 죽여도 죽지 않는 방문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화이트 드래곤은 이대로 얼어붙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존재로 만들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때문에 다시 신성을 일으켜 자신이 만들어 낸 참상의 잔해를 뒤지기 시작했다.
“너 뭐 하냐?”
“아닛!”
그때, 로칸이 화이트 드래곤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정확히는 목울대쯤에 해당하는 위치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로칸이 시간 역행의 시간을 조정해 둔 것이다.
좀 전에 자신이 놈의 발에 달라붙어 있던 그 위치로 되돌아간 로칸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놈의 턱밑까지 몰래 치고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는 위치에 도달했을 때, 자신의 또 다른 필살기를 발현했다.
“광살!”
퍼버버버버버벅!
로칸의 배틀 액스가 화이트 드래곤의 목 부근을 난도질했다.
정확히는 드래곤 하트. 드래곤의 모든 마나가 모인 구슬이자 심장과도 같은 그곳이 순식간에 뭉개지며 근원을 드러내었다.
본래는 단단하기로 미스릴에 버금가는 드래곤 스케일에 의해 보호를 받아야 할 장소이지만 로칸에게는 수많은 증폭 효과와 드래곤 슬레이어 타이틀이 있었다.
드래곤 한정, 몇십 배로 증가한 대미지가 드래곤의 비늘 따위 장난처럼 짓뭉개 버렸다.
“캬아아악!”
급소를 타격당한 화이트 드래곤이 고통으로 몸부림을 쳤다.
신성을 마구 난사하며 적중당하는 곳을 모조리 얼음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마구잡이 공격에 당해 준다면 로칸이 아니다.
광풍의 날개를 펼쳐 가뿐하게 난사를 피해 낸 로칸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놈에게 짓쳐 들었다.
“전신의 돌격, 점멸!”
콰앙!
다시 한번 로칸의 몸이 놈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금이 가 있는 드래곤 하트에 강력한 충격을 가하며 더욱 큰 균열을 일으켰다.
푸쉬쉬쉭!
깨어진 드래곤 하트에서 강력한 빙결의 마나가 흘러나왔다.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근육이 굳고 몸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언다.’
닿은 지 1초도 안 돼서 몸이 굳어 가는 느낌은 실로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여기서 도망치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적의 몸속을 파고든 상황에 딱 맞는 스킬이 마침 로칸에게 있었다.
“진광풍참!”
퍼버버버버버버버벅!
배틀 액스에서 일어난 광풍이 한기를 조종했다.
한기가 바람을 타고 오히려 주인인 화이트 드래곤의 속살을 얼렸다.
얼어붙은 살점을 떨어 내는 것은 크고 예리한 배틀 액스의 날.
화이트 드래곤은 산 채로 드래곤 하트가 떼어지는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가만?’
그때, 로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드래곤의 심장이자 단전이라 불리는 드래곤 하트. 그것은 진짜 심장일까? 심장을 먹는 아귀가, 그것을 취할 수 있을까?
가만히 있어도 드래곤 하트가 깨어진 화이트 드래곤은 혼자 폭주하다 자멸할 것이 분명했다.
그 어떤 치유 마법으로도 깨어진 그릇을 붙일 수는 없으니까.
그 과정에서 폭주한 화이트 드래곤에게 피해를 입는 도시 따위가 있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로칸의 탓도 아니고 신경 쓸 바도 아니었다.
‘이판사판이다.’
하지만 흡수할 수 있는 힘이 줄어드는 것은 확실한 손해였다. 좌시할 수 없는 큰일이었다.
감히 드래곤을 상대로, 그것도 마제스티 마스터급의 존재를 상대로 오만한 생각이라 할지 모르지만 만약 로칸이 이처럼 대담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도 없었을 터였다.
각오를 마친 로칸이 얼른 무기를 교체했다.
화이트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에 심장을 먹는 아귀를 쑤셔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