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
화이트 드래곤 (4)
쩌저저적!
심장을 먹는 아귀가 드래곤 하트에서 뿜어진 한기에 노출되었다. 검신부터 손잡이까지 눈 깜짝할 새 하얀 서리로 뒤덮이며 깨어질 듯 부들거렸다.
하지만 주인의 힘을 받은 것인지 벌써 살짝 맛본 화이트 드래곤의 힘을 품을 것인지 떨림은 잦아들었고, 힘을 흡수하는 속도는 불어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고작 몇십 초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로칸은 그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상대가 다름 아닌 드래곤이었으니까.
몇십 초가 아니라 단 몇 초만 자유롭게 두더라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족속이 그들이었기에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끝났나?’
그러나 두려워하던 반격의 시도는 없었다.
드래곤씩이나 되는 존재가 이런 고통을, 심장이 깨지고 찢어지는 고통을 언제 느껴 보았겠나.
더욱이 몸 안으로 파고들다시피 한 로칸을 끄집어내기에는 놈의 팔이 너무 짧았다.
뀨우!
침묵하는 놈의 주위를 여전히 맴돌며 열심히 부리를 쪼아대는 카이의 견제도 한몫했을 터.
그렇게 놈이 완전 침묵 상태에 들어갔을 때 여러 가지 알림이 동시에 떠올랐다.
[심장을 먹는 아귀가 이름을 잃어 가던 화이트 드래곤 엘리사나의 심장을 탐식합니다.]
[대상의 심장과 영혼에 깃든 힘을 흡수합니다.]
[이름을 잃어 가던 화이트 드래곤의 피를 흡수합니다.]
[당신의 몸속에 절대 빙결의 힘이 깃듭니다.]
우선 심장을 탐식한 결과가 즉시 나타났다.
화이트 드래곤이 죽고 나서도 유지되는 빙결의 힘에 쏘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아니 오히려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절대 빙결의 힘 덕분이었다.
‘설마 고작 저항력을 올리는 것으로 끝은 아니겠지?’ 하는 의문을 떠올리는 순간, 두 번째 알림이 나타났다.
[불가능한 업적! 당신은 절대 빙결의 힘을 품었습니다.]
[타이틀 ‘서리의 힘’을 획득하셨습니다.]
[서리의 힘][레전드]
절대 빙결의 힘을 품은 당신의 모든 행동에 서리의 기운이 깃듭니다.
[보유 효과]
-모든 공격에 빙결 속성 공격력 50% 추가
-피격 시, 또는 일정 반경 내에 접근 시 [서리] 효과 발동
-서리의 힘에 노출된 대상의 이동속도, 공격 속도 30% 감소
-서리의 힘에 중첩 노출될 경우 최대 80%까지 이동속도, 공격 속도 감소
-수(水) 속성과 빙(氷) 속성 공격 무효화
-서리의 힘은 의지에 따라 on/off 가능
-특수 스킬 [프로즌 필드] 사용 가능
바로 타이틀 획득!
레전드 등급의 타이틀을 획득함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버프가 일어났다.
모든 공격에 빙결 속성이 붙는 것은 물론,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서리의 힘에 노출되는 오라가 펼쳐지는 것이다.
거기다 일시에 주변을 얼려 버리는 특수 스킬까지 얻을 수 있었다.
로칸은 그것을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차렸다.
바로 화이트 드래곤이 사용하던 신성의 열화판이었다.
마법 혹은 기적에 가까운 힘이라 로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잘만 사용하면 비장의 한 수가 될 수 있었다.
격돌 직전, 코앞에서 상대를 얼려 버린다면 적어도 빈틈을 만들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아직 신성을 쓰지 못하는 만큼 화이트 드래곤이 썼던 것에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그 한순간의 틈이면 충분했다.
광살이든 초극이든 맞기만 하면 끝장이 날 테니까.
‘근데 이름을 잃는다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로칸이 좀 전에 들려온 알림을 떠올리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이트 드래곤이 치매라도 걸렸던 것일까? 삼라만상을 꿰뚫는 눈을 사용해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던 것을 떠올리며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을 때, 세 번째 알림이 나타났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초대량의 신성을 획득하셨습니다.]
레벨 업!
예상대로 한 발자국 더 마제스티 마스터에 가까워졌다.
더구나 400레벨 따위를 사냥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신성이 그의 몸속에 흡수되었다.
아직 신성을 다룰 수 없어 정확히 가늠 할 수는 없지만 드래곤쯤 되는 놈의 신성이니 그 크기가 실로 방대할 것이 분명했다.
‘레벨 하나를 통으로 올렸군.’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로 오는 동안 상대했던 모든 몬스터들의 경험치를 합친 수준으로 오른 경험치 바를 보며 로칸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443레벨. 이제 마제스티 마스터까지는 고작 7레벨이 남았을 뿐이다.
만약 이번에도 449레벨에 승급 퀘스트가 나타난다면 고작 6레벨이 남은 셈이다.
그럼 이제 어떤 놈을 잡아야 가장 빠르게 마제스티 마스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첫 번째 해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쩌억 쩌저저적.
간신히 몸을 꼼지락거리며 회생하려는 용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타이탄을 비롯한 400레벨 이상의 강력한 용병들.
그들이 죽을 경우 막대한 보상금이 지급되어야 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전멸까지도 상정하고 화이트 드래곤 사냥에 나섰던 로칸이 아닌가?
“미안하다.”
휘익. 뎅강.
얼음 조각의 목이 바닥을 뒹굴었다.
만만치 않은 신성과 경험치가 그들의 몸을 떠나 로칸에게로 스며들었다.
“이제 네 마리 남은 건가? 흠, 이 정도면 할 만한데?”
[드래곤 킬러][퀘스트]
드래곤 슬레이어의 영광된 이름을 차지한 자여. 그대의 업적이 요행이 아님을 증명하라.
-성공 조건 : 드래곤 처치 3/7
-성공 보상 : ???
절반 가까이 채운 퀘스트 성공 조건을 확인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이제 400레벨 몬스터를 잡아도 경험치는 잘 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예 드래곤만 사냥해 보는 건 어떨까?
드래곤 킬러 퀘스트를 완성할 때쯤, 마제스티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가오칸도 이런 상황이었나?’
새삼 그때 가오칸의 상황이 이해가 가는 로칸이었다. 그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겠지.
마제스티 마스터로의 승급이 코앞까지 왔는데 사냥할 만한 놈들은 전부 천족이며 마족 등 파벌에 묶여 있어 건드렸다가는 전쟁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잔챙이 같은 400레벨 몬스터를 찾아다니며 근근이 경험치를 쌓느니 이번처럼 드래곤을 찾아 죽이며 레벨을 올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로칸과 달리 그의 생명은 하나뿐이지만 애초에 가오칸이 그런 것을 두려워할 위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마제스티 마스터에 올랐지.’
그리고 결국은 마제스티 마스터의 경지를 이루어 내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딱히 교류가 많지 않았지만 아마 그라면 벌써 꽤 많은 신성을 모으지 않았을까?
기대가 되는 한편 걱정도 많아졌다.
확실히 네 마리의 드래곤을 사냥하는 데 성공한다면 마제스티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만했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애매한 감이 있었다.
당장 이번 화이트 드래곤을 잡은 것만 해도 운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았나?
믿는 것이 저항력뿐이었다면 얼음 조각이 되어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 만큼 마제스티 마스터급의 드래곤은 실로 강력했다.
다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런 상황에서 드래곤을 차례로 사냥한다? 자신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 내가 못 할 리가 없잖아?’
걱정이 되는 한편 자신감이, 오기가 솟구쳤다.
가오칸도 해낸 일이다. 그렇다면 자신이라고 못 할 것이 없지 않은가?
로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머릿속엔 빠릿하게 계산이 돌기 시작했다.
“일단 챙길 건 챙겨야지.”
그러다가 잠시 생각을 멈추고 인벤토리를 개방해 드래곤의 레어에 그득그득 쌓여 있는 아이템과 코인, 금화들을 모조리 쓸어 담기 시작했다.
유니크, 에픽,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들이 수도 없이 로칸의 인벤토리에 들어가거나 마신의 이빨 허리띠의 먹이가 되었다.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마신의 이빨 허리띠가 포식 성장의 효과로 한 단계 성장합니다.]
그 덕에 마신의 이빨 허리띠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 능력치의 증가 수치가 커지고 이번에는 마기에 대한 저항력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악령 지배]가 [영혼 지배]로 변형되었다. 꼭 유령의 형태가 아니라도, 격이 낮은 상대의 영혼을 지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 봤자 400레벨 이상의 존재에게는 100% 통하는 것이 아닌 애매한 능력이었지만 그런대로 만족했다. 어쨌든 범위가 확장되고 능력이 증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 외에도 각종 특이한 아이템들이 많았지만 흥미로운 것들은 일단 전부 인벤토리행이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그렇게 또 한 번 드래곤 슬레이어의 타이틀을 강화한 로칸은 귀환 스크롤을 발동해 마을로 돌아왔다.
딱히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만년설이 녹기 시작하면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을 늘 공포에 떨게 만들던 화이트 드래곤이 사라졌음을.
도시로 돌아온 로칸은 용병 길드에 자신이 고용한 용병들에 대한 배상금과 몸값을 지불하고 빠져나왔다.
그들의 레벨이 대단했던 만큼, 배상금 또한 천문학적이었지만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에 잠들어 있던 보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그렇게 도시를 빠져나온 로칸은 묵묵히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다.
‘레드, 블루, 옐로우, 골드인가?’
남은 드래곤들의 속성을 파악하며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다.
어떤 놈을 노리는 것이 좋을까?
자신과 상대를 냉정히 분석하며 결론을 내렸다.
“카이, 가자!”
자유도시의 무지개 전송기를 이용해 다음 목적지 인근으로 이동한 로칸은 카이를 소환해 거친 날갯짓을 시작했다.
***
로칸과 카이가 도착한 곳은 용암이 호수를 이루고, 바닥은 지열로 들끓어 사우나 같은 공기가 흐르는 용암지대였다.
자유 시민으로 등록한 뒤 사용할 수 있게 된 자유도시 간의 무지개 전송기로 이동한 도시에서도 꽤 먼 거리였지만, 대붕으로 변한 카이에 오르자 반나절 만에 도착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도 마을은 존재했다.
지형이 지형이다 보니 도시 수준까지는 무리였고 중소형의 마을에 여러 화염 내성을 지닌 종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로칸은 처음처럼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할까 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었으니까.
로칸의 목표는 다음 경매 전까지 449레벨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흘에 한 마리쯤 드래곤을 사냥해야 하는데, 놈들을 모집하는 데만 하루는 족히 필요했다.
인원이 많은 만큼 그만한 장비와 조건을 맞춰 줘야 했고, 타이탄과 같은 몇몇의 종족들은 특수 조건을 맞춰야만 나서기도 하기 때문에 우르르 이끌고 곧장 사냥에 나설 수 없는 것이다.
“가자, 카이.”
때문에 로칸은 용병들을 모으기를 포기했다.
카이와 단둘이서 레드 드래곤이 산다는 두모우 화산을 향해 돌진했다.
[광풍의 날개 효과로 부정적인 지형 효과를 받지 않습니다.]
용암지대의 페널티 따위는 없다. 그에게는 지형 효과를 무시하는 장비가 있으니까.
게다가 카이의 저항력 역시 만만치 않아서 페널티가 없는 상태였으니 오히려 이동에는 둘인 편이 훨씬 나았다.
“단번에 놈에게 가는 것도 좋겠지만…….”
그럼 이대로 날아 레드 드래곤의 거처로 들어가 버리면 어떨까? 장벽처럼 헤어 주변을 둘러친 몬스터들과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로칸은 그러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드래곤 킬러라는 퀘스트가 아니라 레벨 업 그 자체였으니까.
“닥사 시작이다.”
오로지 레벨 업을 위한 로칸과 카이의 사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