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8화.불과 얼음 (2) (388/500)

 # 388

불과 얼음 (2)

로칸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두 신의 피를 흡수한 덕이긴 했지만 신성과 마기도 한 몸에 품었던 그였다. 그런데 고작 불과 얼음의 힘 따위에 굴복하라고?

오기로라도 그럴 수 없었다.

고통에, 두 힘의 충돌에 몸을 내맡기는 대신 스스로의 의지를 내면에 세웠다.

‘오냐, 너희 둘이 말썽을 부린다면 모조리 꿇어앉혀 주마!’

오기와 독기를 일으켜 보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격이다.

스스로 신성마저 발하는 절대 빙결과 지옥 불의 힘 앞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생겨나자마자 소멸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꺾이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짓밟힐 때마다 로칸은 더욱 끈질기게 힘을 일으켰다.

피와 살과 영혼에 깃든 모든 힘을 하나로 끌어 모았다.

절대 빙결보다 더 차갑고 지옥 불보다 더 뜨거운 영혼의 힘을 벼려내었다.

파츠츠츠츠츠츠츳!

그 순간 로칸의 몸에서 거친 기운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를 파묻은 레드 드래곤의 살점을 터트리고 비늘마저 넝마로 만들었다.

세 가지 힘의 충돌이 일으키는 충격파만으로도 지형이 변하고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크허허허허허허헝!”

로칸이 저도 모르게 광기의 외침을 터트렸다.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그가 쌓아 올린 역사가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가 죽인 영혼, 그가 뒤집어쓴 피가 광기로 뭉친 영혼의 힘을 떠받쳤다.

그 속에는 맞서 싸우는 두 힘의 원 주인인 화이트 드래곤과 레드 드래곤의 것도 있었다.

그리고 공허.

모든 것을 삼키고 소화시키는 그것이 끼어들었다.

로칸이 품은 공허의 힘이 조금만 더 컸다면 이 순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 날뛰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작았다. 정신부터 파고들어야 할 공허의 기운을 불굴의 의지가 막아섰다.

본래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작용해야 했을 공허가 그 힘과 기능만을 빼앗긴 채 한낱 무생물로 전락했다.

그것이 변화를 일으켰다.

공존할 수 없는 상극의 법칙. 그것을 공허가 갉아먹었다.

육신과 정신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보호 장치를 마비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있어서는 안 될 두 힘을 한 몸에 품을 수 있게 만들었다.

“고작 힘 따위가!”

법칙이 깨어지는 순간, 힘의 균형도 깨졌다.

고작 인간의 힘이, 의지가 드래곤이 수천 년 동안 쌓아 올린 그것을 넘어서 버렸다.

두 힘을 설득하고 조율하기를 포기하는 대신 힘으로 찍어 눌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인을 닮은 폭력적인 기운이 두 힘을 폭력으로 다스렸다.

콰앙 쾅 쾅 쾅 쾅!

덕분에 내부에서 격한 통증이 일어나고 몸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기를 반복했지만 지금 로칸에게는 불사의 권능이 깃든 상태였다.

아무리 생명력이 깎여 나간들 그를 죽음으로 인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그것을 믿는다는 듯 로칸의 기운이 두 힘을 굴복시켰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복종케 만들었다.

[법칙을 뛰어넘은 업적! 당신은 상극의 극에 이른 두 힘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타이틀 ‘불과 얼음의 노래’를 획득하셨습니다.]

[당신은 이 타이틀의 최초 획득자입니다.]

[불과 얼음의 노래][GOD]

당신은 상극의 극에 이른 두 힘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이는 세상의 법칙을 비트는 행위입니다.

당신은 이 타이틀의 최초 획득자입니다.

[보유 효과]

-모든 공격에 빙결 속성과 화염 속성 공격력 120% 추가

-피격 시, [서리]와 [지옥 불] 효과 동시 발동

-[프로즌 월드] 또는 [지옥 화염] 효과 선택 사용 가능

-수(水), 빙(氷), 화(火) 속성 공격 무효화

-신성에 대한 저항력 강화

-특수 스킬 [불과 얼음의 노래] 사용 가능

[불과 얼음의 노래]

상극의 힘을 충돌시켜 세상에 없는 힘을 발휘한다.

-모든 능력치 2.5배

-[서리]와 [지옥 불] 효과 2.5배

-모든 스킬 대미지 2.5배

-화염 또는 빙결 스킬 대미지 4배

-생명력 감소 초당 500

“……미쳤네.”

고통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로칸이 질린 목소리를 내었다.

타이틀은 레전드가 최고 등급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난데없이 신급의 타이틀이 튀어나왔다.

그 효과도 명불허전.

레전드 등급이던 서리의 힘이 지옥 불의 힘과 합쳐진 것은 물론 한층 강화되었다.

피격시 발동되던 서리와 새로운 힘인 지옥 불이 동시에 일어나고 특수 스킬로 분류되던 프로즌 필드가 프로즌 월드로 강화된 것은 물론, 발동 스킬이 아닌 오라 효과로 변화되었다.

무엇보다 미쳤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건, 불과 얼음의 노래라는 사기 스킬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능력치와 대미지가 2.5배로 증폭되다니? 이미 마제스티 마스터도 식겁할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로칸이 아니던가? 이건 가히 행성 파괴급의 공격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생명력 감소 따위는 의미 없고.’

페널티 격으로 초당 500의 생명력 감소가 붙어 있긴 하지만 로칸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초당 500이면 세계수급의 생명력을 가진 로칸으로서도 얼마 버티지 못할 어마어마한 수치였지만 그에게는 생명력이 0이 되어도 마음대로 날뛸 수 있는 버서크 기반의 스킬들이 있었으니까.

오히려 광풍 현신이나 버서크 상태에서 저것을 사용할 경우, 일부러 얻어맞지 않아도 생명력이 급감하며 불굴의 의지 효과를 발동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다시 능력치가 2배가 된다.

거기다 여러 타이틀 효과들까지 생각할 때 몇 배, 아니 몇 십 배나 전투력이 뻥튀기되는지 세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흐흐흐흐흐흐흐흐!”

용암지대 위에 온돌방처럼 누워 레드 드래곤의 시체를 이불처럼 덮고 있던 로칸의 입에서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가 한동안 그치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건 마치 혼자 다 해 먹으라는 시스템의 가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남은 레벨은 고작 네 개.

마제스티 마스터의 경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

“끄응.”

힘을 수습하자마자 남은 드래곤들을 작살 내고 드래곤 킬러 퀘스트를 완수할 것이라 희희낙락하던 로칸의 입에서 죽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힘을 수습하긴 했는데,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육체 안정화 : 187시간 38분]

무려 187시간. 근 여드레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유명계의 왕들과 약속한 경매까지 고작 12일이 남은 상황에서 골치 아픈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몸이 근질거리고 애가 닳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자칫 함부로 힘을 썼다가는 다시 힘이 폭주해 버릴 것이라는 시스템의 경고가 있던 것이다.

아무리 로칸이라도 이번만큼은 시스템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여러 타이틀 효과 등으로 뻥튀기된 능력이 있으니 적당한 몬스터라도 잡으며 소소한 경험치 벌이를 할 법도 했지만 도저히 그조차 되지 않을 만큼 상태가 엉망이었으니까.

“쩝, 돈이나 벌어야 하나.”

어쩔 수 없이 로칸은 그동안 소흘히했던 돈벌이에 잠시 관심을 돌렸다.

지상과 천상, 각 세계의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물건을 채워 넣었고, 겸사겸사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모았다.

“결국 난리가 났군.”

듣자하니 환마계는 완전히 전란에 휩싸였다고 한다. 마치 도미노 현상과 같다고나 할까.

무혼의 왕 칼튼이 실각하며 힘의 회복을 위해 잠적해 버리자 마도의 왕과 야성의 왕이 그 자리를 노렸고, 그들이 잠시 시선을 돌린 틈을 타 생존의 왕과 환몽의 왕이 그들의 영토를 노린 것이다.

모두 환몽의 왕 아자르가 계획했던 대로의 진행이었다.

그로 인해 정작 아자르가 새로 획득한 영토의 크기는 대단치 않았지만 경쟁자들을 약화시키고 조금이라도 영토를, 신성을 키운 것에 만족하는지 아직은 웅크리고 있다고.

하지만 언젠가 모아 둔 힘을 폭발시키려 유일무이한 왕이 되려 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때가 되어 로칸과 아군이 되어 만날지 적군이 되어 만날지는 알 수 없는 일이겠지.

“유명계는 별로 볼 것 없고.”

반면 유명계는 오매불망 로칸을 기다리며 서로 눈치만 보는 형국이었다.

그의 선택에 의해, 낙찰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힘의 우열이 가려질 것이기에 은근히 뒷단으로 서로 동맹이나 협약을 맺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긴 했지만 그건 패를 까봐야 알 일이다.

“알짜는 얘들인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제대로 실속을 차린 것은 다름 아닌 정령계였다.

로칸에게 의뢰해 세계수를 퍼트린 덕분에 따로 정령계의 영토를 확장하지는 않았어도 힘의 질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전반적으로 정령들의 레벨이 올랐고, 대정령에게서 느껴지는 신성의 격 또한 높아졌다.

아직 신성을 다루지는 못해도 감지하는 정도는 가능해진 로칸이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천족 놈들은…… 여전히 잔대가리를 쓰는 중이고.”

그리고 천족.

로칸을 축출하고 모함한 덕분에 라푸제는 무리 없이 1급 천족의 위에 스스로 오른 상태였다.

그를 중심으로 고위 천족들이 공고히 뭉쳤고, 로칸이 퍼트렸던 천족의 진실에 대한 소문은 루머로 치부되며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언제고 타오를 수 있는 도화선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로칸은 이를 바득 갈며 그들에 대한 정보 수집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자신을 노리고 움직일 경우 언제든 대응할 수 있기 위해서.

마족? 그놈들은 별 소식이 없다.

그나마 눈여겨본 것이 뱀파이어 로드의 행보였지만, 애초에 정보 자체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데다 샤로크를 움직인 이후로 로칸에게 딱히 시비를 걸어오는 모습도 아니었기에 일단은 가만 지켜보기로 했다.

당장 그들과 전면전을 치른다 하더라도 자신이 압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잔고가 엄청나긴 하네.”

그렇게 며칠이나 투자해서 상점을 정비하자 어마어마한 돈이 인벤토리에 쌓였다. 이 정도면 성이 아니라 국가를 건설해도 될 만한 수준이 아닐까 싶을 정도.

이미 상당 금액이 재투자 비용으로 쓰였음에도 그랬다.

이렇게 되니 돈을 쓸 곳이 없어서 못 쓰기도 하지만 쓰는 속도보다 버는 속도가 더 빨라 소진이 안 될 정도였다.

누구나 꿈꾸는 재벌의 삶.

하지만 로칸은 만족하지 못했다. 만족하고 안주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으니까.

후발주자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음을 경계하며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았다.

“전군 돌격!”

바로 용병과 병사의 고용. 그리고 그들을 이용한 대리 사냥.

직접 사냥에 나서는 것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의 경험치를 얻을 뿐이지만 공짜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이득이었다.

병사들의 질에 비해 투입되는 비용은 막대했지만 이미 비용 따위는 안중에 없는 로칸이었다.

코인을 갈아 넣어 경험치를 만들어 내듯 병사와 용병들을 한계까지 찍어 내고 사냥터로 내돌렸다.

그렇게 사흘의 시간을 나름 알차게 보냈을 때,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

“……이걸 한다고?”

전체 공지로 나타난 이벤트 소식 알림.

그것은 더 로드에서 듣도 보도 못한 월드 이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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