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7
새로운 무기 (1)
‘신위라는 게 대단하긴 한가 보군.’
5백만을 투자해도 한두 번의 대결이 고작이라니, 그렇다면 대체 저번 현신 때는 얼마만큼의 신성이 소모되었단 말인가?
아마 학살의 업적뿐 아니라 광풍의 신성이 추가로 들어갔던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소화해 낼 정도인 광풍의 신성 보유량은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슬쩍 물어볼까 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그것을 안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의미도 없는 이야기로 신세를 지거나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아까 이야기했다시피 그놈이 아직도 거기 있을지는 확신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그놈이라면 거점을 바꾸지는 않았을 것 같군. 위치는 네가 가진 지도에 표시해 두도록 하지.”
광풍이 간단히 손짓하자 로칸의 몸에 빛이 감돌았다. 정확히는 인벤토리 내부에 있는 마법 지도에 표시가 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쉽지는 않을 거야. 꽤 고집이 센 놈이거든. 나한테도 한껏 배짱을 부렸던 놈이니 아마 만들지 않겠다고 강짜를 부릴 수도 있어.”
“흐음, 그럼 어떻게 하신 겁니까. 퀘스트라도 줍니까?”
“아니, 그냥 깽판 부렸는데.”
“…….”
“만들어 내지 않으면 작업실 박살 내겠다고 깽판 좀 부렸더니 만들어 주더라고. 죽이겠다는 협박에는 꿈쩍도 않던 놈이 그깟 시설 좀 부수겠다고 했더니 내놓는 게 좀 어이없긴 했지만 그놈다운 일이지.”
“아, 예.”
실로 광풍다운 행보였다.
하지만 로칸은 상황이 좀 다르다.
똑같이 깽판을 부린다 해서 받아 낼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마땅한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오랜 세월 동안 신성을 쌓은 그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광풍이 아직 반신으로 활동할 시기부터 있던 이라면 신성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도 로칸과 상대가 되지 않는 숙련도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신성에 대해 조금이나마 깨치면서 그 가능성을 함께 알아차린 로칸이기에 조심스러운 것은 당연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저도 조금 급해서.”
“그래. 다음에 보지. 저기 오는 귀찮은 놈들에게 휘말리기 싫으면 좀 서둘러야겠는데?”
“……!”
광풍의 마지막 말에 로칸이 긴장했다.
놈들이 벌써 여기에?
채비를 서둘렀다. 일단 천상의 룬 북부터 발동시켜 자리를 피한 뒤, 그제야 마법 지도를 펼쳐 들었다.
“여기는……?”
그곳은 로칸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가 보지는 않았지만 레드 드래곤의 레어를 파악하면서 확인했던 화산 중 한 곳이었으니까.
불을 관장하는 반신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처음 정보를 수집할 때 레드 드래곤의 레어로 유력하게 꼽히던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 있단 말이지.”
혹시 그 반신이 불과 대장장이의 능력을 모두 갖춘 인물인 것은 아닐까? 충분히 신빙성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만나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
탐욕을 나침반을 발동시킨 로칸은 방향을 잡고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일단 무기는 이전에 드래곤 레어를 털면서 획득한 레전드 등급의 무기인 투지의 도끼를 착용했지만 신성을 함부로 사용하면 어떻게 될지 몰랐기에 가능한 전투를 피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유명계 놈들이 들어오기도 쉽지 않겠고……. 괜찮겠는데.’
영체의 형태를 띤 유명계의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음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놈들이니 불에 대한 기본적인 저항감과 공포가 있지 않겠나?
실제로 맞붙었을 때 상극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기도 했고.
물론 격이 높으면 영향이 덜할 테지만 어쨌든 이곳도 다른 반신의 영역.
제아무리 유명계의 왕이라 해도 함부로 접근하기는 어려울 거라 판단했다.
때문에 얼른, 숨어들 듯 안으로 진입했다.
“흐음?”
반신의 위용을 느낀 것일까. 다행히도 딱히 덤벼드는 놈들은 없었다.
용암 골렘, 화염꽃, 파이어 에그 등 화산에 주로 출몰하는 몬스터들이 슬쩍 날아가는 로칸을 올려다보았지만 살짝 경계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적의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로칸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
이곳은 다른 이의 영역이었고 자신은 부탁을 하러 온 입장이다. 굳이 소란을 피우는 대신 존재감만을 발산하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어?”
핑그르르. 까앙 까앙 까앙 까앙.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목적지에서 로칸이 처음 발견한 것은 거대한 모루와 용광로였다.
특히나 용광로는 그 자체로 작은 동산이라 해도 좋을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대장장이에게 화력이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지만 이 정도로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였기에 살짝 질리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망치질에 열중인 타이탄의 모습이었다.
[망치와 모루의 현자 퍼거스][Lv 499]
타이탄과 대장장이. 어떻게 보면 아주 잘 맞는 조합인 것도 같았다.
뛰어난 무구를 제련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힘으로 정확한 위치를 수천, 수만 번 이상 두들겨야 하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드워프가 대장장이로서 큰 이점을 가졌다 인정을 받는 것이기도 했고, 같은 맥락에서 그보다 훨씬 상위의 힘과 지구력을 가진 타이탄은 어쩌면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대장장이에 어울리는 종족인지 모른다.
‘현자라니.’
그러나 동시에 타이탄은 대체로 지능이 높지 않고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는 종족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장장이도 모자라 현자라는 이름까지 붙었다고?
로칸은 제 눈을 의심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대장장이의 작업을 방해하는 것이 얼마나 호감을 떨어뜨리는 일인지 잘 알기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30분, 1시간, 3시간…….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퍼거스는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말을 걸기 전까지는 무한히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NPC인 것처럼 무구를 두들길 뿐이다.
‘……맞겠지?’
광풍이 이름이라도 확실히 알려 줬다면 좋았으련만, 위치만 찍어 준 탓에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로칸은 꾹 눌러 참았다.
이 정도 수준의 존재가 반복 행동 NPC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약 5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비로소 퍼거스가 몸을 일으키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정말 맡겨도 되는 거겠지?’
불안감이 확 엄습해 왔지만 대안이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퍼거스 님. 폭력의 왕 로칸이라고 합니다.”
“음, 이제 막 반신에 오른 이인가? 그럭저럭 세계는 잘 키워 가고 있는 것 같군.”
퍼거스는 로칸을 보자마자 대략의 상태를 읽어 냈다. 아마도 그가 지닌 신성의 정도를 가늠해 낸 것이리라.
당장 반신으로 승급할 때 필요한 신성의 양과 엇비슷한 수준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이제 막 반신에 올랐거나 세계를 적당히 키워 가는 중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로칸처럼 1억이나 되는 신성을 무지막지하게 세계의 배경을 만들어 내는 데 쓰는 존재는 없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기에 로칸도 딱히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그래, 나는 어떻게 찾아온 거지?”
“퍼거스 님의 위명이 어떻게 잊히겠습니까. 최고의 무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퍼거스 님을 찾아와야죠.”
짐짓 근엄한 척하는 퍼거스에게 로칸이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았다.
‘NPC 구워 삶는 거야 쉽지.’
아무리 생각해도 광풍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 깽판을 쳐서 아이템을 뜯어 간 인물의 소개로 왔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나.
뻔한 이야기였기에 그에 대한 언급을 빼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하며 입안의 혀처럼 굴었더니 퍼거스의 표정이 점점 풀어졌다.
아무리 현자니 뭐니 하지만 역시 단순한 타이탄 종족다웠다.
로칸이 워낙 고인물이기도 했지만.
“좋아. 꿈 많은 반신을 이끌어 주는 것도 나 같이 연륜 있는 반신의 역할이지. 그럼 기존에 쓰던 장비를 꺼내 보게. 쓰던 장비의 상태를 봐야 자네의 전투 방식을 알 수 있으니.”
움찔.
기분 좋게 대답하는 퍼거스의 말에 로칸이 움찔 몸을 떨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기뿐 아니라 다른 광풍의 무구들까지 다른 것으로 갈아입고 온 로칸이었다.
그런데 광풍의 배틀 액스를 꺼내라고?
잠시 다른 것을 꺼내 속여 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퍼거스가 괜히 이런 소리를 하지는 않을 터, 애먼 장비를 꺼냈다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무기가 제작된다면 그것처럼 바보 같은 일도 없을 터였다.
“여기…… 있습니다.”
“……이건?”
로칸은 어쩔 수 없이 두 동강이 난 광풍의 배틀 액스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슬쩍 눈치를 보았다.
과연 퍼거스가 광풍과의 인연을 눈치챌까?
그래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조마조마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 서슬 퍼런 일갈이 그의 내부를 진탕시켰다.
“무기를 이따위로 다루다니, 네놈은 무기를 들 자격이 없다!”
“큭.”
상당한 물리력까지 느껴지는 일갈이었다.
한데 조금 이상했다. 광풍에 대한 언급은 없고 무기의 상태에 대한 원망과 분노뿐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돌이킬 수 없어 보이긴 했지만 로칸은 얼른 그를 달래기 위한 사탕발림을 늘어놓았다.
“꺼져라. 죄 없는 장비를 이렇게 막 굴리다니. 네놈은 내가 만든 무기를 들 자격이 없다.”
노기와 함께 은근히 신성까지 끌어올리는 퍼거스.
그 힘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젠장.’
‘지금 상태에서 맞붙으면 이길 수 있을까? 나도 광풍처럼 그냥 깽판을 한번 부려 봐?’
로칸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교차되었다.
어떻게 해야 무기를 뜯어낼 수 있을까. 꼭 퍼거스를 힘으로 굴복시켜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골똘히 생각하던 로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후우, 깽판도 쉽지는 않겠군.’
퍼거스의 이명은 망치와 모루의 현자. 그 어디에서도 ‘불’에 대한 단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광풍이 언급했던 ‘그들’이라는 표현.
그것은 불을 관장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하지…….’
로칸은 일단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심지어 두 쪽이 난 광풍의 배틀 액스마저 회수해 가버렸음에도 돌려 달라 떼를 쓰는 대신 묵묵히 기다렸다.
그걸로 그의 화가 가라앉을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상황을 두고 보겠다는 것이다.
하루, 이틀.
유명계의 추격대가 다가온다는 것을, 여기저기 로칸이 있을 법한 곳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래도 퍼거스가 그를 이곳에서 내쫓지는 않았으니까.
하다못해 이곳이 전장이 된다면 적당히 뭐라도 던져 주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기대와 함께 그의 환심을 살 수 있을 법한 물품들을 오프라인 등을 통해 확인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닷새째가 되었을 때, 변고가 일어났다.
“제길, 이게 아니야!”
쨍강.
이전에도 몇 번이나 만들어 낸 무기를 부러뜨리는 것을 보고 또 들었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거친 노성을 터트리며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부러진 혼멸의 칼날][GOD][파괴]
장인에 의해 부러져 칼날만 남은 혼멸의 조각.
알 수 없는 힘이 깃든 이 칼날에 베인 자는 영혼과 존재마저 흐릿해진다.
‘헉.’
퍼거스에게 거절당한 이후, 그의 수발을 들 듯 작업실 정리와 청소를 하며 눈치를 살피던 로칸이 슬쩍 부러진 칼날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나타나는 정보는 그야말로 기겁을 할 정도였다.
부러진 무기이기에 공격력이나 옵션 따위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데미갓이면 무려 반신급의 장비.
‘이걸 깨뜨렸다고?’
로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객관적으로 생각하더라도 그렇다.
장인 정신 따위를 따져보아도 반신급의 장비를 마구 부수다니. 오래 살더니 치매라도 걸린 것일까?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로칸은 잠자코 그것을 치웠다.
그리고 귀를 열어 그가 홀린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내 장비에 ……따위가 깃들다니. ……가 ……한 것인가?”
워낙 조그맣고 뭉개지는 소리라 정확히 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변고가 생겼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 낸다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으리라.
로칸은 얼른 파괴된 조각들을 치우고 그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