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7
연합군 (5)
광풍의 제단. 그곳에 도착한 로칸은 가벼운 마음으로 신성을 불어 넣었다.
그것도 무려 1천만이나 되는 만만치 않은 힘을.
더 불어 넣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투자할 곳이 만만치 않았다.
세계 : 명부마도는 몰라도 백귀야행과 악귀천하에는 ‘설정’을 건드려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낄 수 있을 때 아껴 놔야 했고, 여차하면 추가로 신성을 투입해 그의 소환 시간을 늘리면 그만이었다.
“인마, 늦었잖아!”
“이쪽 사정 봤을 거 아닙니까. 나름 최선을 다한 거예요.”
소환되자마자 타박을 늘어놓는 광풍이었지만 로칸은 씨익 웃음으로 답했다.
그러자 광풍도 궁시렁거리긴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로칸이 지상을 잃는 것은 신성 기반의 일부를 잃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콜로세움.”
[신성 공간 : 콜로세움에 입장하셨습니다.]
[이곳에서는 사망 페널티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사망 시 즉시 부활이 가능합니다.]
[사망 시 모든 스킬 대기 시간 및 후유증이 초기화됩니다.]
[탈출 조건 : 승리 또는 사망 100회.]
대신 신성을 일으켜 둘만의 콜로세움을 만들어 냈다.
지난번과 비슷한 조건.
하지만 이제 신성을 다루게 되어 이것이 얼마나 신성의 낭비가 큰일인지 아는 로칸은 짐짓 미안한 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신성을 막 쓰셔서 되는 겁니까?”
“남이사. 내 거 내가 쓰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거야? 그리고 모자라면 딴 놈들 족쳐서 좀 벌어 두지 뭐. 그럼 시작해 볼까? 조건은 어떻게 할래?”
지극히 광풍다운 대답이었다.
모자라면 벌면 그만이라는 것.
그 역시 자신의 세계에서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신성이 있겠지만 그보다 남을 쥐어 패고 얻어 낼 생각부터 하다니 그답다고나 할까.
로칸이 롤 모델로 삼아도 이상하지 않을 훌륭한 인성이었다.
“지난번과 똑같으면 재미없죠. 신성의 사용을 허용하도록 하죠. 한 판당 딱 1백만까지만. 어떻습니까?”
“1백만? 에잉, 꼴랑 그걸로 누구 코에 붙이라고……. 자, 그럼 이건 어때?”
“……?”
[학살의 신이 당신에게 신성 : 1,000,000,000을 전달했습니다.]
“헉.”
10억. 자그마치 10억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많은 양의 신성을 잔돈 건네듯 건네는 광풍의 모습에 제아무리 로칸이라도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길, 슬쩍 꿍쳐 둔 비상금이었는데 할 수 없지. 자, 그럼 이제 한판당 1천만씩 쓰는 거다? 재미가 없잖아, 재미가.”
“……알겠습니다.”
사실 로칸이 허튼 마음을 품을 수도 있는 일이다. 10억의 신성을 받아 1천만씩 사용하며 1백 판을 겨루기로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척 덜 사용한다면 수억까지도 남겨 먹을 수 있지 않겠나?
물론 그럴 경우 광풍과의 관계가 틀어질 수 있지만 그만큼 10억이라는 신성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스스로 돈벌이를 하다 보면 돈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말처럼 신성을 모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체감하고 있던 로칸인지라 부정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우!”
대결은 곧장 시작되지 않았다.
로칸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머릿속으로 신성의 활용에 대한 깨달음을 간단히 정리할 동안 광풍은 몸이 근질근질해하면서도 기다려 주었다.
그래야 더 싸움이 재미있어질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갑니다. 폭력의 왕!”
그렇게 마음과 생각의 정리가 끝났을 때, 로칸이 먼저 선공을 취했다.
신성을 배제한 전투에서는 몇 번의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제한적이나마 신성을 사용하는 지금은 다시 자신이 압도적인 약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자만하지 않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부딪쳤다.
“오, 더 좋아졌는데!”
콰앙!
광풍도 지지 않고 부딪쳤다.
로칸이 새로운 무기와 스킬을 획득하며 능력치 면에서도 크게 성장한 탓에 밀릴 만도 했지만, 그는 전혀 로칸에 뒤지지 않는 힘과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하! 그조차 맞춰 줬던 건가?’
로칸이 승리했던 대결.
그때 광풍은 신성을 제한했을 뿐 아니라 능력치조차도 로칸에게 맞춰 주었던 것이다.
딱 초월자 수준으로.
그리고 지금은 반신인 로칸에게 맞추고 있는 것이리라.
아마도 그때의 자신이 그 기준인 것은 아닐까?
“흐아압!”
그러나 로칸은 자괴감에 빠지거나 하지 않았다.
설령 반신일 때의 광풍이라 해도 현재 우위를 가져가고 있는 것은 자신이니까.
더구나 타이탄의 힘을 일깨우긴 했어도 아직 창조 스킬끼리의 격돌은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제대로 갑니다.”
오히려 즐거운 듯 씨익 미소를 지으며 모든 힘을 끌어내었다.
“불과 얼음의 노래.”
극한의 빙염이 그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선보이는 창조 스킬.
폭력의 왕은 광풍 현신과 피의 각성을 하나로 묶은 피와 영혼의 각성이었기에 창조 스킬조차 여유가 생긴 것이다.
“절대자의 힘.”
그 순간 피와 영혼뿐 아니라 로칸을 이루었던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
업적과 타이틀, 그의 세계 속에 사는 주민들. 그리고 지상과 천상에서 그를 지탱하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힘을 전달했다.
만화에 나오는 기술로 따지자면 원기옥이랄까.
그를 알고 관계가 있는 이들이 강제로 힘을 빼앗겼다.
믿음과 권위에서 나오는 힘마저 더해지며 극한의 강화를 이루어 냈다.
“흐흐흐흐, 좋구나!”
광풍에게는 없는 힘이다. 그는 그저 학살을 자행할 따름이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광풍의 힘은 자신이 죽이고 짓밟은 이들의 피와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사용하는 것만으로 미치거나 타락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힘이건만 로칸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굳건한 의지가 있었다.
그 모든 원망과 원한을 감당하며 제 힘으로 만들었다.
콰과과과과광!
상반된 두 가지 힘이 어울려 폭발하기 시작했다.
상극이라면 상극이라 할 만한 힘의 격돌.
그 속에서 둘은 마주 웃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전력으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 오직 그것에 기뻐하며 서로의 몸을 베고 목을 자르기 위해 배틀 액스를 마주 휘둘렀다.
“신성의 기본은 재빠른 공수의 전환이지!”
이윽고 신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미량의 신성이 전신에 깃드는가 싶더니 무기로 몰렸다가, 전신으로 퍼지고, 방어 부위에 깃드는 일이 빠르게 전환되었다.
전신에 신성을 머금듯 품은 뒤 빠르게 이동시키는 것이 신성 활용의 기본.
광풍은 그 가르침을 로칸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마치 지도 대련을 하듯,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로칸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래야만 더 즐거울 테니까.
누군가 자신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그리하여 자리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걱정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 기꺼이 로칸을 성장시키고, 상대해 나갔다.
너무나 즐거워서 끝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치열하고 처절한 전투가 1백 번이나 거듭되었다.
“후아, 재미있었다!”
그렇게 1백 번의 전투가 끝이 난 후, 광풍은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로칸에게 준 만큼의 신성을 그 역시 소모하고 화신체이긴 하지만 몇 번이고 죽음까지 맞이했건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신성이 소실되었건만, 오히려 마음껏 기뻐하며 로칸의 성장을 축하했다.
드디어 싸울 만한 상대를 찾았으니까.
“감사합니다.”
덕분에 신성의 활용에 대해 제대로 깨우치게 된 로칸은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지만 광풍은 쿨하게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감사하면 얼른 신위를 얻어서 올라오라고. 그때 다시 한번 제대로 붙어 보자. 여기는 싸울 만한 놈이 없어 영 심심하거든. 아 참,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제단은 남겨 놔. 제단이든 뭐든 연결점이 있어야 이렇게라도 신계를 잠시 내려올 수 있거든.”
“그렇군요.”
일상의 이야기인 듯싶지만 로칸은 그 안에서 상당한 정보를 얻었다.
제단 같은 것이 있어야 신위를 획득한 신이 지상과 천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아마 저번에 파괴한 강철의 신 역시 비슷한 터였다.
제단을 세우고, 신전을 세우면서 지상과 천상에 연결점이 생긴 것이었겠지.
물론 그랜드 마스터와 사도쯤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신성의 소모가 있어야만 강림도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덕분에 어째서 로칸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신들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 사도라는 허접한 것들을 이용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제단이라는 것이 개방되기 전까지는 심지어 사도라는 시스템조차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까지도 말이다.
‘그럼 진짜 별거 없잖아?’
지난 강철의 신의 강림을 통해 혹시나 신들이 적극적 개입을 시작한 건 아닐까 내심 불안해하던 로칸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 그들의 신전과 제단을 파괴해 버린다면, 신들의 개입은 물론이고 사도의 힘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혼자 그것들을 모두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그들의 개입을 약화시키고 자신이 신위를 획득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일쯤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이 새끼들, 두고 보자.’
그리고 마침내 신위를 획득했을 때, 감히 자신을 적대하고 훼방 놓으려 했던 신들에게 제대로 된 응징을 해 줄 것을 다짐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래. 종종 어울리자고 하고 싶지만 당분간은 나도 소모한 신성을 다시 벌어 둬야 할 것 같으니 쉽진 않겠군. 신계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광풍은 처음 왔던 것과 같이 쿨하게 현신을 해제했다.
남은 것은 로칸뿐.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타이탄들이 대결을 청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로칸은 얼른 천상의 룬 북을 사용해 어디론가 이동해 버렸다.
타이탄들이 광풍의 신도라는 것을 안 이상, 굳이 그들을 죽여 광풍의 신성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냥감이라면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홀가분해진 로칸이 처음으로 눈을 돌린 것은 다름 아닌 서로 인접한 세 개의 세계였다.
환마계, 정령계, 유명계.
그에게 가장 호의적인 정령계에 잠시 방문해 정보를 모아 보니 상황은 꽤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 환마계의 내란은 일단락되고 있는 중이었다.
모습을 감춘 무혼의 왕 칼튼은 아직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마도의 왕 마툴다는 그의 영역을 차지하려고 애를 썼으나 소모된 전력이 너무 커 적당한 수준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사이 생존의 왕과 야성의 왕이 남은 땅을 갈라 먹으며 대립했고, 이 일을 획책한 아자르는 그들의 뒤통수를 치며 역으로 그들의 영토 일부를 빼앗았다.
그러나 전면적으로 가기에는 서로 부담이 너무 컸기에, 그쯤에서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유명계의 상황도…… 나쁘지 않군.”
반면 왕을 둘이나 잃은 유명계는 나머지 세 왕이 주인을 잃은 땅을 사이좋게 갈라 먹었다.
혹여나 욕심을 부리다 환마계와 같은 꼴이 날까 봐 서로 조심했고, 폭주하는 영혼들을 수습해 자신의 휘하에 집어넣은 것이다.
하지만 그 꼴을 정령계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평화주의에 가깝기는 해도 순리를 거스르는 유명계의 존재 자체를 탐탁지 않아 하던 그들이다.
게다가 정령계는 관리자들 사이의 반목도 없었으니 대대적으로 병력을 일으켜 주인 없는 땅의 절반가량을 흡수하고 정화해 버린 것이다.
즉, 유명계의 남은 세 왕이 가질 수 있었던 건 고작해야 한 명의 왕이 가지고 있던 땅과 영혼뿐이었다.
‘아쉽네.’
지상에서의 소란만 아니었다면 끼어들어 유명계의 힘을 더욱 낮춰 놓았을 텐데, 영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꼭 신성의 수급 문제가 아니라도 이제 완전 적대 상태로 돌아간 유명계의 힘이 약해질수록 로칸 자신에게는 이득이 될 텐데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령계가 언제든 침공해 올 수 있다는 불안감을 그들이 가졌고, 그 결과 저번처럼 함부로 로칸을 사냥하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키우며 성장을 도모하겠지만 그 외에는 유명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로칸의 방문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뜻이다.
그리고 로칸에게는 신성을 수급하고 복수를 감행할 대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뱀파이어 로드와 1급 천족 라푸제.
그들의 존재를 떠올린 로칸의 눈빛이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