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0화.뱀파이어 로드 (3) (420/500)

 # 420

뱀파이어 로드 (3)

열 명이나 되는 반신급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도륙한 로칸은 잠시 숨을 골랐다.

당장 뱀파이어 로드에게 쳐들어가는 대신 처음에 그러했던 것처럼 둥글게 원을 그리듯 영지를 습격하고, 챙길 것들을 바짝 챙겼다.

골드와 코인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이건 아쉽군.’

생각 같아서는 병사들까지 일으켜 분탕질을 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건 무리였다. 뱀파이어들의 영지였던 탓에 생산되는 병력 또한 뱀파이어들인 것이다.

그렇다보니 자칫하다간 뱀파이어 로드의 지배력에 모두 빼앗겨 남 좋을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단물만 쪽 빨아먹고 빠지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대가리 좀 굴리는데?”

하지만 그조차 시간이 지날수록 여의치 않아졌다.

로칸이 노리는 거점과 그 주변 거점들에서 보유금이 몽땅 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포위인가.”

이것은 전적으로 로칸이 혼자이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빼앗은 영지를 지킬 병력만 있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다시 무주공산이 된 거점들을 뱀파이어들이 은밀히 탈환하고 상태를 파악한 것이다.

로칸이 거점을 취한 뒤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그들에게 흘러들어 가고 있었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탈환된 영지에는 뱀파이어 병사들이 다시 가득 찼다.

옥수수를 깎아 내듯 로칸이 뱀파이어 로드의 거성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며 짓밟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곽부터 다시 하나둘 탈환되면서 오히려 로칸이 포위되는 형국이 만들어졌다.

이대로라면 죽여도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는 뱀파이어 대군에 둘러싸이게 될 확률이 높았다.

“뭐,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든가.”

그러나 의외로 로칸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놈들의 계략쯤은 이미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뭐?

병력을 이끌고 있다면 그 병력의 희생을 최소화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 사면초가라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오롯이 혼자였다.

당장 그렇게 빙 둘러 포위하지 않아도 매 거점을 공격할 때마다 수백, 수천의 뱀파이어에게 둘러싸이는 그인 것이다.

그게 몇 배, 몇십 배 늘어나는 것이지만 오롯이 혼자만을 생각하면 되기에 그다지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저 혼자 몸을 빼는 것도 하지 못할까.

“그때 마주치는 건 좀 다를 테지만.”

그리고 혼자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었다.

바로 기만전술.

로칸은 분신을 소환해 거점에 남기고 은밀히 이동을 시작했다.

은신 따위는 너무 느렸고 눈에 띄는 카이나 유니콘, 나이트메어를 대신해 이 시점에서 가장 은밀하게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쿠구구구구구구구.

바로 디그독이다.

전설을 타는 자의 힘까지 받은 녀석의 이동속도는 지상에서 말을 달리는 것보다도 빨랐기에 로칸은 분신이 위치한 거점이 포위당하기도 전에 땅굴을 이용해 뱀파이어 로드의 거성 인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시작됐군.”

그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분신의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한 차례 힘을 끌어올린 상태에서 사용한 분신 소환이기에 분신은 폭력의 왕과 절대자의 힘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실제 로칸이 가진 전투력의 약 80%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움직임을 토대로 전투 AI까지 형성된 상태였기에, 설령 뱀파이어의 대군과 반신들이 나서더라도 쉬이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일 터였다.

그리고 그 정도 시간이라면 로칸이 뱀파이어 로드와 마주 할 수 있겠지.

내친김에 성의 안쪽까지 파고들어 갈까 싶었지만 그건 무리였다. 뱀파이어 로드가 기거하는 장소는 도시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거대한 성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특수한 마법이 겹겹이 둘러져 있어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부딪치는 충격도 모두 알아차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정면 승부다.

지상으로 올라온 로칸은 돈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성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휘이이잉.

황량한 바람 소리뿐인 1층의 로비로 입장했다.

‘뭐지?’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함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까닭에 로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

그때, 바로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앞으로 달리며 몸을 돌려 보지만, 적은 그와 함께 움직여 다시 등 뒤를 점한 상태였다.

주륵.

‘미친, 이렇게 빠르다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자신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라니?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초신속의 움직임에 로칸이 이를 악물었다.

배틀 액스를 땅에 내리꽂으며 놈을 쫓아냈다.

“폭렬!”

콰과과과!

뱀파이어 로드의 거성 전체에 폭발의 힘이 차올랐다.

주변을 터트리고 그 안에 모든 생명체들을 터트려 죽였다.

“듣던 대로 성격 급한 놈이군.”

그러나 상대는 이미 범위를 빠져나간 상태였다.

1층의 절반가량이 한 번에 터져 나갔건만, 그보다 빠르게 몸을 빼낸 것이다.

[뱀파이어 로드 샤킬란][Lv 499]

‘499!’

놈의 레벨은 무려 499였다.

1레벨만큼의 신성만 더 얻거나 승급 퀘스트만 진행하면 신위를 거머쥘 수 있는 반신 최강급의 존재.

뱀파이어 로드에 대해 듣긴 했어도 그 수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던 로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같은 레벨이지만 얀켄이나 퍼거스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 것이 보기만 해도 느껴졌다.

승리에 대한 불안감이 전신으로 퍼져 꿈틀거렸다.

마음에서부터 굴복시키는 사악한 신성이 촛불 같은 로칸의 신성을 흔들어 놓았다.

“네놈이군.”

그러나 이대로 포기하고 굴복할 로칸이 아니다.

배틀 액스를 꼬나 쥐고 엉덩이와 발가락 끝에 단단히 힘을 주며 긴장을 떨쳐 버렸다.

가볍게 떨려 오던 몸의 떨림을 진정시켰다.

“그래. 내가 네 주인이다.”

“박쥐 새끼가 왜 개소리를 하고 있어?”

음험한 눈빛으로 한 발자국씩 그에게 다가오는 샤킬란을 향해 로칸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상대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다가올 뿐이다.

‘뱀파이어가 스피드 타입인 건 알았지만 이건 좀 심한데…….’

스스로를 너무 과신했던가? 로칸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짧은 격돌을 통해 놈의 강점을 파악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이 거리에서 싸움을 거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등 뒤에 있을 때조차 잡아내지 못했던 속도이니까.

그렇기에 가까이, 더 가까이 오도록 가만 내버려 두었다.

“어린 친구가 입이 험하군. 인간들은 나이를 꽤나 중요하게 여길 텐데 말이야. 이래 봬도 그대의 수백 배 이상 많은 세월을 살았다네.”

‘기회는 한 번.’

놈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얻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렸다.

폭력의 왕과 절대자의 힘은 그에게 폭발적인 능력의 상승을 가져다주니까.

설령 그에게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 움직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뱀파이어 로드라 해도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할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파괴의 신성을 담은 일격만 제대로 적중시킬 수 있다면, 놈의 기동력은 현저히 저하될 테고 그다음은 해볼 만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내가 왜 자네를 노렸는지가 궁금하겠지? 앞으로 내 수족이 되어 움직일 테니 그 정도는 알려 주지.”

‘열 걸음, 다섯 걸음, 세 걸음, 두 걸음……. 바로 지금!’

그리고 놈이 마음속으로 그어 둔 선을 넘는 순간, 폭발적으로 힘을 일으켰다.

“폭력의 와……!”

“피의 지배.”

부르르르.

폭력의 왕을 사용하려던 로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마나와 신성이 순간적으로 동결되며 모든 행동을 정지시켰다.

“크……아아아!”

로칸이 고함을 지르고 안간힘을 써 보지만 멈춰 버린 몸은 움직여 주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만 같은 묘하게 이질적인 감각만이 그를 냉담하게 대할 뿐이다.

“내 혈족들을 참 많이도 죽였더군. 그래봤자 껍데기뿐인 놈들이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피를 이은 이들이니 약간의 복수는 해 줘야겠지?”

샤킬란이 핏빛 눈을 번뜩일 때마다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피의 지배가 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의 지배는 뱀파이어가 자신의 피를 이은 혈족을 지배할 때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던가?

그러나 로칸은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통할 이유가 하등 없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저 피를 가진 생명체이기만 해도 된다는 것일까? 그것이 놈의 권능이나 신성의 속성이기라도 한 걸까?

‘설마.’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버서커의 스킬 중 하나인 피의 살육. 상대의 피를 뒤집어쓰고, 그 피를 흡수하여 전투력을 높이는 스킬.

실제 로칸도 그것을 이용해 뱀파이어들의 피를 흡수하고 혈정마저 취하지 않았던가?

혹시 그것이 화가 된 것은 아닐까? 당장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한때는 버서커의 스킬이 뱀파이어에게 천적이자 상위 호환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했건만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더 강한 힘을 지닌 이가 더 강한 지배력을 발휘할 뿐.

빠득!

그 사실을 깨달은 로칸이 이가 부서져라 힘을 주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당할 줄이야.

“방어구 장비를 해제해라.”

철컥철컥.

놈의 명령에 로칸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광풍의 무구들이 하나둘 해제되고 장비 옵션으로 상승했던 능력치가 하락했다.

근육질의 맨몸이 드러났다.

주르륵.

샤킬란이 날카로운 손톱을 들어 로칸의 가슴을 긁자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아주 살살 긁는 것 같았지만 499레벨의 뱀파이어 로드가 가진 힘은 두꺼운 피부도 가볍게 벗겨 낼 수 있었다.

“비……르……먹……을……!”

하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물론 말하는 것조차 놈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로칸은 억지로, 악과 깡으로 비명대신 욕지거리를 마구 내뱉었다.

“흘흘흘, 거참 시끄러운 녀석이군. 이제 그 입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할 테니 마지막으로 마음껏 떠들어 봐. 곧 그 입으로 모든 지상에 나의 신도들을 만들게 될 테니까 말이야.”

“……!”

그제야 로칸은 놈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

굳이 샤로크를 배신하게 만들고 별다른 연결점도 없는 자신을 노린 이유를.

그것은 바로 유저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신을 지배해 지상과 천상에서 신성을 획득하려 함이었다.

로칸이 로칸교를 세워 지상에서 상당한 신성을 수급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제 힘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네까짓 게 그런다고 신위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나 이상한 점은 여전히 있었다.

로칸교를 제 것으로 만든다 한들, 그가 신위를 획득할 만한 수준의 신성을 수급할 수 있을까?

혹시 승급 퀘스트와 관련 된 것일까?

의문을 가지면서도 로칸은 놈을 도발하기 위해 악다구니를 썼다.

차라리 죽인다면. 다시 부활을 하더라도 지금 이 제약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놈을 상대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흐흐흐, 아둔하구나, 아둔해.”

그러나 놈은 넘어오지 않았다.

로칸의 피부를 얇게 저미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심하다는 눈으로 로칸을 바라보았다.

“신위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말이냐. 어차피 지상과 천상에는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그따위 자리를 탐낼 이유가 없지. 나는 지상과 천상을 지배하는 절대 유일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자신의 시꺼먼 속내를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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