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3화.마계의 왕 (2) (423/500)

 # 423

마계의 왕 (2)

뱀파이어 로드 샤킬란이 품었던 야망과 같지만 다른 계획이었다.

어차피 로칸은 마계 영지의 절반을 가져가더라도 왕으로 군림할 생각이 별로 없을 테니 자신이 마계의 실질적인 왕이 되어 호의호식을 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499레벨을 달성하는 것은 시간문제이겠지.

그리고 아마 놈은 499레벨이 되더라도 딱히 신위를 얻을 생각이 없을 터였다.

“나쁘진 않군.”

조건만 따져 보았을 때는 로칸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언젠가 마계를 통합하여 발아래 둘 수도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테니까.

더욱이 천족들과도 정면으로 맞붙어야 하는 로칸이니 마계의 힘을 이용한다면 그 과정이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아마도 놈은 그것까지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결국 NPC들은 유저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직감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 선수를 쳐서 선두이자 최강자인 로칸과 손을 잡고 마계 영토의 절반이라도 보장을 받으려는 것일지 모르지.

‘워낙 영악한 놈들이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깨친 사고에서 비롯된 제안이라면, 정말 놈과 손을 잡는 것이 최선일까? 아니, 그 전에 놈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현재 어느 정도의 힘과 세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 뱀파이어 로드조차 어쩌지 못하던 놈이다.

그몰탄을 사냥했을 때 고작해야 450레벨대였던 놈이 이만큼 성장해 나타난 것이 놀랍긴 했지만 그거야 세계의 성장에 따라 충분히 가능한 범주라고 생각되었다.

또한 그 힘을 바탕으로 다른 마족들을 제법 잡아먹었을 수도 있겠지.

그것만 봐도 놈이 가진 잠재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었지만 과연 자신에게 비빌 만한 수준일까?

마음을 정한 로칸은 대범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가치를 증명해라. 나 역시 네가 쓸 만하다고 판단하면 그때 손을 잡도록 하지.”

“역시 재미있는 인간이군. 그래. 어떻게 증명을 하면 되겠나. 저기 몰려드는 놈들을 다 쫓아 버릴까? 아니면 심장을 꺼내 그대에게 선물할까? 뱀파이어들이 제대로 힘을 합친다면 저들을 어떻게든 막아 낼 수도 있겠지만 당장 그대는 혼자이지 않은가? 나 역시 그대의 능력을 시험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 많군. 뱀파이어 로드를 처리한 것으로도 모자라다는 뜻인가?”

“글쎄. 그 과정을 내가 보지는 못했으니 뭐라 할 말이 없군.”

그러나 세게 나오는 것은 로칸만이 아니었다. 이불라인 또한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증명을 요구했다.

그리고 로칸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네가 뱀파이어 로드를 운 좋게 잡았을진 모르나 당장의 위험조차 어찌할 수 없지 않느냐. 이곳에서 병사를 뽑는다 한들 뱀파이어 병사일 텐데, 그들에 네 말을 들을 것이며 힘을 규합해 저들을 막아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감히 어디서 누굴 시험하려 들어?’

일종의 협박이 뒤섞인 시험에 로칸도 마주 웃었다.

붉은 점이 몰려드는 지도에 슬쩍 눈길을 주고 가볍게 대꾸했다.

“좋아. 그럼 나부터 보여 주도록 하지.”

“……?”

어차피 해야 할 작업이기도 했으니 단숨에 처리를 하겠다 마음먹었다.

“점멸.”

파앗.

그 순간 시선을 돌린 로칸의 몸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으헉!”

“이, 이놈! 감히 로드를……!”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는 뱀파이어들의 한가운데였다.

그들은 느닷없이 다가온 로칸을 경계하며 전투태세를 갖추었지만 로칸은 배틀 액스를 들어 올리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그들 중 하나를 찍었다.

“너.”

“어디서 감히……!”

“맞고 올래, 그냥 올래?”

찔끔.

구석에 있던 뱀파이어 하나가 로칸의 지목에 당황했다.

그러나 성질을 부리는 척은 해도 대놓고 달려들 수는 없었다. 이미 로칸의 무력은 분신을 통해 눈과 몸으로 겪어 본 바 있는 그들이었으니까.

더구나 상대는 그 전율스러운 공포를 자랑하던 로드마저 처죽인 존재.

마음에서는 저항감이 일었지만 몸은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쭈뼛거리면서도 마지못한다는 듯 로칸의 곁까지 다가갔다.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서.

“나와 주종 계약을 맺자. 대신 이걸 주지.”

“그, 그건……!”

파격적인 제안과 함께 로칸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뱀파이어 로드의 혈석이었다.

뱀파이어가 취한다면 천상의 모든 뱀파이어들에게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혈주(血主), 즉 로드가 될 수 있는 힘과 능력의 집합체.

주변 뱀파이어들의 눈빛에 탐욕이 일렁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내, 내가 하겠다. 아니, 하겠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그걸 제게 주신다면……!”

“제발 저에게……!”

동시에 놈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이미 주종 관계를 맺은 것처럼 저자세를 취하고 나선 것이다.

정작 지목당한 당사자는 너무 놀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는데 말이다.

그것만 얻으면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뱀파이어 로드가 죽으면서 일부 상실한 힘과 신성을 까마득이 초월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그동안 당했던 억압과 설움을 갚아 줄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까.

고작 인간 하나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치고는 너무도 어마어마한 보상이 아닐 수 없었다.

“어, 어어어…….”

“할래, 말래? 대신 계약서를 쓰고 피의 맹세는 해야겠지.”

“하겠습니다! 꼭 하게 해 주십시오!”

그제야 놈도 정신을 차렸다. 혹여나 기회가 달아날까 넙죽 절을 하며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태세를 취했다.

“좋아. 사인해.”

그런 놈에게 로칸은 즉시 계약서를 내밀었다.

주종 관계에 대한 계약서는 이미 작성해 둔 상태였다.

절대 주인을 공격하거나 위협이 되는 행위를 할 수 없고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한다는 조건이 기본으로 깔린, 일방적으로 한쪽에게만 유리한 독소 조항 덩어리였지만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주종 관계를 맺든가, 다시 다른 뱀파이어의 하인이 되든가, 그도 아니면 로칸에게 맞아 죽든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니까.

선택지들을 놓고 볼 때 첫 번째 조건은 아주 은혜로운 조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진조 뱀파이어 후르프와 주종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어 뱀파이어들의 절대 선언인 피의 계약까지 이중으로 맺었다.

이것을 어기는 순간, 놈은 한 줌 핏물로 돌아가고 놈이 가진 신성과 혈정은 로칸에게 넘어오게 될 터였다.

“으흐흐흐흐흐, 이제 내가 로드다!”

그 자리에서 뱀파이어 로드의 혈정을 섭취한 녀석은 광소를 터트렸다.

기존 뱀파이어 로드의 피를 전승받기는 했지만 그 피가 워낙 옅어 반푼이 취급을 당하던 녀석이 로드의 힘을 계승한 것이다.

“로드를 뵙습니다.”

그와 함께 주변에 도열해 있던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부복하며 새로운 왕을 받아들였다. 그 위에 선 황제의 존재까지도.

“시끄러, 인마.”

“헙, 죄송합니다!”

힘에 취해 광기를 내뿜는 놈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긴 로칸은 순식간에 공손해진 뱀파이어 로드에게 첫 번째 지시를 내렸다.

“지금 뱀파이어들의 영지를 노리고 접근하는 마족 놈들이 있다. 저들을 이끌고 가서 놈들을 몽땅 쫓아내.”

“명을 받들겠습니다, 주인님. 자, 가자!”

푸드드드드득.

그 즉시 뱀파이어들이 혈광을 흘리며 흩어졌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를 한다고, 로칸에게 받은 굴욕과 분노를 풀겠다는 듯 거침없이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로칸에게 형편없이 두들겨 맞긴 했어도 그 분신조차 쓰러뜨린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마냥 약할 리는 없었다.

감히 뱀파이어들의 영토를 침범한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 제각기 뭉치고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자, 됐나?”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로칸은 뒤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네 차례라는 듯. 이불리안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로칸에게 다가왔다.

“정말 놀랍군. 저들을 저렇게 조련할 수 있다니. 역시 인간의 잔머리란…….”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네 차례다. 뭘로 증명해 보이겠나?”

“저들을 물리는 것…… 따위로는 안 되겠군. 좋아, 내게 일주일만 다오. 470레벨 이상의 경지를 이룬 반신 다섯의 심장을 꺼내 오지.”

“닷새 주지. 480레벨 이상이어야 하고, 당연히 네 파벌에 속한 놈들은 안 된다.”

“좋다.”

이제는 로칸이 그를 시험할 차례였다.

그는 스스로 470레벨 이상 반신 다섯의 심장을 제시했고 로칸은 몇 가지 조건을 덧붙여 수락했다.

확실히 그 정도 능력이라면 파트너로 삼아도 발목 잡을 일은 없을 터였다.

480레벨쯤 된 이라면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니까.

로칸 자신이라 해도 당장 할 수 있다 장담하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는 수준이었지만 놈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럼 엿새 후를 기대하지.”

그렇게 임시 협정이 체결되었다.

만약 녀석이 진짜로 그 일을 해낸다면 파트너로서 손을 잡을 만한 가치는 충분한 거겠지.

더구나 놈에게는 이미 세력이 있으니 손쉽게 마계를 집어먹을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로칸이 경험해 본 결과, 지상과 천상에서의 영토는 적잖은 신성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활동 영역의 의미가 강한 것이다.

즉, 마계의 절반이 아니라 전체를 먹는다 해도 그것만으로 499레벨을 달성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마계를 넘어 천계, 환마계, 정령계, 유명계 그리고 중립 지역까지 모조리 장악한다면 또 모를까.

그리고 세계만 잘 성장시킨다면 그 전에 이미 신위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에 큰 욕심을 부릴 생각이 없었다.

로칸은 땅따먹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더 강한 상대와 싸우고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싶은 것뿐이니까.

“그럼 이쪽도 수습을 좀 해 보실까?”

이불리안이 떠나고, 로칸은 다시 뱀파이어 로드의 고성에 틀어박혔다.

탈환을 당한 탓에 직접 취한 것은 이곳을 비롯해 몇 개의 도시뿐이지만, 뱀파이어 영지들을 관리하고 병력을 충원시켰으며 새롭게 뱀파이어 로드가 된 후르프를 필두로 영지 방어를 마치고 돌아온 뱀파이어 반신들을 하나씩 불러 그들의 세계를 구경했다.

종족 특성 탓인지 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세계 구성은 다 비슷했지만 약간의 개성이라 할 만한 요소들은 분명히 있어서 그것을 참고삼아 자신의 세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종족 전쟁 중인 놈들에게 새로운 권능을 부여하고, 영웅과 무구를 내렸다.

세계 : 명부마도에는 아예 퍼거스가 접합시켜 준 광풍의 배틀 액스까지 내려 주며 더욱 강하게 이끌었다.

‘슬슬 정리가 되어 가는군.’

그렇게 닷새간 세계의 관리와 성장에만 몰두하자 그가 가진 세 개의 세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로칸이 신성의 소모를 감수하며 그들을 성장시킨 것이다.

이제 세계 : 명부마도의 지상은 얼추 정리와 통합이 되어갔고, 백귀야행과 악귀천하 쪽도 인간과 이종족의 국가가 제대로 자리 잡았다.

유령들이 그들을 키워 먹으려 잠시 방치한 사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수준까지 커 버린 것이다.

물론 지금도 찍어 누르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유령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할 테고, 이기적인 유령들은 그 소멸되는 개체에 자신이 포함되기를 원치 않았기에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로칸은 지속적인 신성 수급까지 원활한 진정한 중상급 반신의 위치에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닷새가 지났다.

0